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⑳ 북학파, 박제가의 서화 이야기

도1 명문징명우여춘수축明文徵明雨餘春樹軸, 1507년, 94.3×33.3㎝, 자유중국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 봄비가 내린 후의 초목과 ê·¸ 사이를 문인들이 유유히 한가로이 걷거나 이야기하며 샘물을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은 문징명이 1507년에 친구들의 향수를 풀어 주기 위해 고향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와 실용을 중시하다Ⅱ

지난 시간에 이어 박제가의 서화 이야기를 전한다. 실학의 대표자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뛰어난 실력으로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때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유득공(柳得恭, 1748~1807) 등과 함께 검서관檢書官으로 발탁되었고, 1778년부터 180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생애 한 번도 가기 어려운 청나라 연경燕京을 네 번이나 다녀왔다.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하여 펴낸 《북학의北學議》는 경제적 논리와 현실 직시를 강조한 실학의 대표적 저술이었다. 박제가는 당시 지식인으로서 시·그림·글씨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도2 하창묵죽도축夏昶墨竹圖軸, 지본紙本,
116×52.3㎝, 중국 고궁박물원 소장

– 그림 중간 오른쪽에 ‘영풍迎風’이라는 화제가 있고, 줄을
바꾸어 ‘동호하창필東昊夏昶筆’이라며 작자를 밝혔다.

박제가의 서화관

박제가는 서화가 선비들에게 필요하며, 그림을 볼 때는 ‘화의畫意’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글씨와 그림은 진실로 기예 중에서도 작은 것이다. 그렇다고 선비가 이것을 버려두고 말하지 않는 것 또한 잘못이다. 지금 사람 중에는 옆모습을 그린 인물화를 보면서 나머지 한쪽의 귀를 찾는 자가 있다.
-《정유각집》 하권, 문집2, 〈제문형산화첩후발題文衡山畫帖後跋〉

서화가 작은 기예지만 이것을 알지 못하면 인물화를 보고 나머지 한쪽 귀를 찾는 수준에 머문다고 여겼다. 그러나 박제가는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화첩에 있는 〈산간정춘수도山澗亭春水圖〉와 거기에 붙은 제발을 보며 가슴속으로 언덕과 골짜기, 그곳의 풍경을 상상하며 그림 속의 주인공을 만나고파 했다(도1).

하창의 묵죽도

명대의 문인이자 묵죽의 대가였던 하창(夏昶, 1388~1470)의 〈묵죽도墨竹圖〉를 보고 읊은 시에는 박제가의 높은 감식안이 잘 드러나 있다(도2).

그림 속 대나무를 보지 않고야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어이 알리오.
여울물 왼편에서 튀어 오르니
쟁글쟁글 물소리 고요치 않네.
(중략)
한 줄기는 그림자로 담박함을 겨루고
한 줄기는 웃는 듯이 그 줄기 여리구나.
담근 오얏 띄운 참외 목마름 못 이기나
이 그림 바라보며 찌는 더위 식힌다네.

(후략)

-《정유각집》 중권, 시집3, 〈하태상묵죽가夏太常墨竹歌〉

〈묵죽도〉의 정경이 눈에 보이듯 잘 묘사되어 있다. 박제가는 하창의 〈묵죽도〉 명성이 호주湖州, 즉 북송의 묵죽화가로 이름난 문동(文同, 1018~1079)에 뒤지지 않는다고 평하였다. 청나라 서심(徐沁, 1626~1683)이 지은 명나라 870여 명의 화가 열전에 의하면, 하창은 이름을 태상太常이라고도 하고, 자는 중소仲昭, 호는 자재거사自在居士, 강소江蘇 곤산인昆山人이라 하였다. 해서楷書에 능했고, 대나무 그림은 당시 제일로 칭송되며 그의 한 줄기 대나무는 금 열 덩이 값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명화록明畵錄》 권7, 묵죽墨竹, 〈하창夏昶〉
나아가 석양공자石陽公子(이정李霆, 1554~1626)와 수운峀雲(유덕장柳德章, 1675~1756)에게 하창의 묵죽도를 그리게 하면, 붓 벼루를 불태우고 손가락을 꺾을 것이라 했다. 박제가는 조선의 3대 묵죽화가로 일컬어지는 이정과 유덕장도 하창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여긴 것이다.

도3 이인문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보물, 견본絹本,43.9×85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5개의 비단을 잇댄 바탕 위에 끝없이 펼쳐진 강과 산,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높은 곳에서 멀리 내려다보는 듯한 시점으로 산수의 변화무쌍함을 장대하게 재구성하였다.
화면 앞뒤에 ‘추사秋史’와 ‘추사진장秋史珍藏’이라는 도장이 있어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소장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인문의 그림

박제가는 주변에 있는 서화 작품에 대해서도 품평을 남겼다. 도화서 화원이었던 이인문(李寅文, 1745~1824 이후)은 다양한 분야의 회화에 능했고, 특히 산수화에 탁월했다(도3). 같은 화원인 김홍도(金弘道, 1745~1806?)와 절친한 사이이고 화격畵格도 대등하게 평가받았을 정도였다. 비슷한 연배였던 박제가도 검서관으로 활동하며 서로 알고 지냈다.

산에는 자줏빛 무리 가로 어렸고 탑의 흰 모서리 드러났으니,
분명히 석양 무렵의 광경이렷다.

먹물을 살짝 묻혀 산을 그렸고 먹물을 듬뿍 묻혀 나무를 점 찍었으니,
명암과 향배의 묘체를 얻었도다.

(중략)

고송유수도인이 사는 집이니, 문설주에 열 길 노을 가로 서렸네.
황혼을 그리려도 그릴 데 없어, 새 한 마리 마른 등걸 먼저 앉혔네.
물총새의 눈길은 물속에 있고 연꽃에 있지 않다네. 쯧쯧!
이 땅에는 감식안이 없는 것인가? 나는 그를 만나고 싶네.

(후략)

-《정유각집》 하권, 문집 5, 〈고송유수도인잡화제평古松流水道人襍花題評〉

위 글은 박제가가 이인문의 여러 그림, 혹은 일종의 화첩을 보고 지었을 것이다. 제목의 ‘고송유수도인’은 이인문의 자호이고, ‘잡화’는 ‘잡화雜花’이다. 이인문이 여러 꽃 그림을 보고 쓴 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이인문 작 〈연화도蓮花圖〉 (23.6×28㎝)에 ‘어응지안魚鷹之眼 재수저在水底 부재하화不在荷花 돌돌咄咄’(물총새의 눈길은 물속에 있고 연꽃에 있지 않다네. 쯧쯧)’이란 문장이 보인다. ‘이 땅에는 감식안이 없는 것인가? 나는 그를 만나고 싶네’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보고 작자를 만나려는 희망의 글이다. 이런 점에서 잡화 평에는 박제가의 제발 뿐 아니라, 이인문 스스로 작성한 글도 포함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4 복헌 김응환 필 강안청적도復軒 金應煥 筆 江岸聽笛圖, 지본紙本, 담채淡彩,
20.6×67. 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제는 소나무 아래에서 쉬는 선비가 강 저편 갈대 사이 ë°° 위에서 한 사람이 부는 피리를 듣는
정경을 표현하고 있다. 화면은 오른쪽에 늙은 소나무의 힘찬 굴곡과 부벽준斧劈皴으로 처리한
바위가 강하게 자리잡고, 왼편은 갈대와 돛단배로 여백의 깊이를 확산해 가는 구도를 보이고 있다.

김응환의 그림

박제가는 도화서의 화원인 김응환(金應煥, 1742~1789)의 그림에도 화기畵記를 남겼다.

먼 산엔 사람 없고 물에 물결 없으니
이 바로 가을날 해 저물려 하는 때라.
안개 서리 지척이라 돌아가지 못한 채
온 시내 붉은 잎이 수레바퀴 막아서네.
-《정유각집》 상권, 시집 2, 〈김응환화金應煥畫 2수二首〉

김응환의 그림 중 내용으로 미루어 산수화에 대한 감상평인 듯하다. 김응환은 1759년 이전부터 화원이 되어 사망할 때까지 활동하였고, 박제가는 1779년에 검서관이 되었으니 말년 10여 년간은 서로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유재건(劉在建, 1793~1880)이 중인中人 출신 인재들의 행적을 정리하여 1862년에 편찬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김응환이 등장한다. 1788년 정조의 명을 받고 단원 김홍도와 여행한 금강산을 그림으로 그려 바쳤고, 1789년에도 영남嶺南 지방의 이름난 산을 두루 다니며 만든 화첩이 대궐에 비치되어 있었다. 김응환의 산수화는 단원보다 낫다고 할 정도였다고 평하고 있다(도4). 《이향견문록》 권8, 〈김복헌응환金復軒應煥〉

도5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견본, 113.6×49.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박제가 등이 시로 묘사한 〈성시전도〉를 연상시키는 작자 미상의 작품이다.
성으로 둘러 싸인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는 대형 8폭 병풍이다.
그림에는 약 2,1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집 안에서 생활하거나 행렬이나 무리를
지어 구경하기도 하고 상업을 비롯한 수공업, 건설, 농경, 군사 등 각종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런
형식은 북송北宋 장택단(張擇端, 1085~1145)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성시전도

1792년 4월 24일, 정조는 초계문신과 검서관의 시험 성적이 실망스러워 이들을 대상으로 다시 “성시전도城市全圖”를 제목으로 한 시를 다시 짓도록 했다. 여기서 6명을 뽑고, 4월 29일에 이들 6명에게 〈금강일만이천봉金剛一萬二千峯〉 제목의 시, 윤 4월 1일에는 3차로 〈유하정행流霞亭行〉 제목의 칠언 고시로 시험하였다.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제3권, 〈제진고시배율製進古詩排律〉 박제가는 유득공, 이덕무 등의 동료 검서관과 함께 6명의 한 명으로 뽑혀 금강산과 유하정에 대한 시 짓기에도 참가하였다.

그대 보지 못했나
한양의 궁궐이 하늘에서 솟아나
층층 성에 둘리어 40리나 뻗은 것을.

(중략)

동쪽은 홍화문에 남쪽은 돈화문
그림 읽기 우선 먼저 궁궐에서 시작하네.
창덕궁과 창경궁이 나누어 열리더니
건양문 하나가 중간에 솟았구나.

(중략)

한 폭 위에 대도회의 모습이 펼쳐지니
세태와 인정까지 여기 모두 담겼구나.
태평한 문물이 중화와 맞겨루니
백성 길러 4백년간 제사를 이어 왔네.

(하략)
-《정유각집》 중권, 시집 3, 〈성시전도응령城市全圖應令〉

1792년 4월 24일, 정조는 초계문신과 검서관의 시험 성적이 실망스러워 이들을 대상으로 다시 “성시전도城市全圖”를 제목으로 한 시를 다시 짓도록 했다. 여기서 6명을 뽑고, 4월 29일에 이들 6명에게 〈금강일만이천봉金剛一 萬二千峯〉 제목의 시, 윤 4월 1일에는 3차로 〈유하정행流霞亭行〉 제목의 칠언 고시로 시험하였다.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제3권, 〈제진고시배율製進古詩排律〉 박제가는 유득공, 이덕무 등의 동료 검서관과 함께 6명의 한 명으로 뽑혀 금강산과 유하정에 대한 시 짓기에도 참가하였다.

[참고문헌]
박제가 지음, 정민·이승수·박수밀 외 옮김, 《정유각집貞蕤閣集》 상·중·하, 돌베개, 2010.
정유각집貞㽔閣集 (한국문집총간)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규장각)
임하필기林下筆記 (고전번역서)
이명지, 〈楚亭 朴齊家의 繪畵觀과 創作活動〉, 홍익대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9.
林明男, <楚亭 朴齊家 藝術論 硏究>,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예술철학 전공 박사학위논문, 2022.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 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 재단 명예연구위원, 대구대학교 연구교수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 분쟁》 등이 있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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