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⑯ 《해동역사》 저자, 한치윤

도5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법첩, 자유중국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 해서楷書에 능한 구양순이 정관 6년(632)에 쓴 것이 〈구성궁예천명〉이다. 현재 〈구성궁예천명〉 비석은 중국 섬서성 인유현麟游縣에 남아 있다. 위 탁본은 박물관 설명에 의하면, ì²­ 순치 13년(1656)의 번각본翻刻本이라고 한다.


중국 도서의 우리나라 서화 기록을 정리하다 Ⅰ

조선 후기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은 오랫동안 힘과 정열을 바쳐 우리나라 역사기록을 정리한 《해동역사海東繹史》를 편찬했다. 그 시기까지 우리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 근거가 없어 신빙성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중국과 일본의 서적까지도 참조하여 우리 역사를 체계적이고 실증적으로 정리했다. 우리나라 서화와 관련 있는 기록도 찾아 수록하며, 자신의 견해를 소개했다.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치윤과 《해동역사》

도1 《해동역사》 필사본, 22.8×14.8㎝,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한치윤의 자는 대연大淵이고 호는 옥유당玉蕤堂이며, 본관은 청주淸州다. 한성부 남부 나동(羅洞, 오늘날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 인근)에서 출생하였다.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남인南人 계열의 신분으로서 벼슬길이 힘들어 과거 공부를 중단하였다. 35세 되던 해인 정조 23년(1799)에 족형族兄 한치응(韓致應, 1760~1824)이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갈 때 동행하여 2개월가량 머물다 돌아왔다.
한치윤은 법도가 있는 사람이나 학문을 하는 선비가 아니면 교제하지 않았고, 책 모으기를 매우 좋아하여 집에는 중국와 우리나라의 책 수천 종이 있었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한치윤이 죽은 뒤 작성한 만장輓章에서 한치윤의 학문이 정확하고 해박함이 청나라 고증학의 대가인 고염무(顧炎武, 1613~1682)와 같다고 높게 평했다. 한치윤의 고증적 학술 성과로 대표되는 것이 바로 그의 필생의 저서인 《해동역사》이다(도1).
《해동역사》는 한치윤이 중국과 일본의 각종 전적典籍 540여 책에 나오는 우리나라 관계의 기사를 뽑아 세기世紀와 지志로 구성한 원편原篇 70권, 한치윤이 죽은 뒤 조카인 한진서(韓鎭書, 1777~?)가 뒤를 이어 순조 23년(1823) 편찬한 속편續篇인 지리고地理考 15권, 도합 85권으로 이루어진 기전체 양식의 한국통사이다. 한치윤이 《해동역사》에서 강조한 것은 ‘증거’, 즉 ‘근거’였다.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큰 폐해는 ‘무징無徵’, 즉 증거가 없는 것이라 여겼다.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해동역사》 서문에서 “내가 생각은 있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던 것을 하루아침에 얻으니 그 역시 시원스러운 일이 아닌가?”라 하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해동역사》 서문 뒤에 제시한 인용 목록 <인용서목引用書目>


《해동역사》가 인용한 서화 관련 도서와 기록

《해동역사》는 본문에서 인용한 책의 목록인 <인용서목引用書目>을 서문 뒤에 제시하고 있다. 인용한 자료 545종 중에서 중국서가 521종이고, 뒤에 일본서 24종이 추가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서화와 관련된 내용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도서만을 정리해도 대략 29종에 이른다. 시기적으로 당나라 4종, 송나라 9종, 원나라 1종, 명나라 9종, 그리고 청나라 도서가 6종이다.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된 중국,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의 사료를 정리하며, 서화와 직접 관련된 기록은 《해동역사》 제46권, 예문지藝文志5에 아래와 같이 서술되어 있다.
<서법>은 우리나라에 전해진 글씨와 관련한 기록이고, <비각>은 <평백제탑비명> 등 4편의 비명을 소개하고, <화>에서는 일본에 건너간 백제의 화가에 대한 기록을 비롯하여 고려 사람의 그림, 그리고 중국의 화가들에 관한 내용을 싣고 있다. 이 밖에 예문지의 <중국서목>에는 당나라 장경長慶 연간에 원적源寂이 신라국에 사신으로 가 그 나라 사람들이 풍정(馮定, 785~846)이 지은 <흑수비黑水碑>와 <화학기畫鶴記>를 베껴 외우는 것을 보았다는 《구당서》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해동역사》제44권, 예문지3, 경적經籍3, 중국서목, <풍정흑수비·화학기>


《해동역사》 제46권, 예문지藝文志5에 서술된 서화 관련 기록


고려의 왕희지 <십칠첩> 각본

명나라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의 《용대집》에 있는 왕희지(王羲之, 303~361)의 초서 명작인 〈십칠첩十七帖〉에 대한 고려시대의 각본을 소개하고 있다(도2).


도2 진당정서晉唐正書 3책 중의 〈진왕희지십칠첩晉王羲之十七帖〉, 접장摺裝, 자유중국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 〈십칠첩〉은 27첩 중 첫 번째 첩이 ‘十七’로 시작되어 이름지어진 것이다. 현재 각본刻本 만이 일부 전하는데, 당나라 장언원(張彦遠, 815~907)의 《법서요록法書要錄》에 의하면, 〈십칠첩〉은 길이 1장長 2척尺이고,107행, 943자였다고 한다.



〈십칠첩〉 가운데 ‘평화스럽고 풍년이 들었는데 또다시 사신으로 나가니 풍일향이 있으므로 스스로 이름하였다[淸晏歲豐又所使 有豐一鄕故自名]’라고 한 곳이 있었는데, 내가 ‘풍일향’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러던 차에 고려의 각본刻本을 보니 ‘생산되는 것에는 특이한 산물이 있다[所出有異産]’고 하였는바, 이것을 보고는 확연하게 깨달았으며, 인하여 왕저(王著, 약 928~969)가 단지 글자를 모사하여 돌에 새겨 넣은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진옥辰玉[왕형(王衡1562~1609)의 자]을 생각해 보건대, 몽음공蒙陰公에게서 이 첩을 얻고서는 나에게 빨리 와서 감상하라고 하면서 마치 큰 보배를 얻은 듯이 하였다. 진옥의 서법은 여기에서 일변하였다. 《용대집》
-《해동역사》 제46권, 예문지5, 〈모각왕우군십칠첩摸刻王右軍十七帖〉

한치윤은 동기창이 왕희지의 <십칠첩> 제발 중에 ‘풍일향’이 무슨 말인지 모르다가, 고려의 <십칠첩> 각본을 보고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용대집》에서 인용하였다. 같은 내용을 인용한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십칠첩>을 우리나라의 누가 새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동기창이 감탄할 정도였으니, 좋은 각본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표시했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55권, 앙엽기盎葉記2, 녹포첩鹿脯帖》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문집에도 보인다. 《연경재전집외집硏經齋全集外集》 권61, 필기류筆記類, 난실담총蘭室譚叢, 녹포첩鹿脯帖 이를 통하여 한치윤, 이덕무, 성해응의 취향과 학적 교류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한치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송나라 증굉보[曾宏父]의 《난정도지蘭亭圖識》가 인용한 왕대순王大淳의 시에 “돌은 지금 어찌하여 동이 땅에 떨어졌나[석금언왕락동이石今焉往落東夷]”라는 말이 있으므로, 왕희지의 〈난정첩蘭亭帖〉도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도3 이옹이 쓴 〈송탁당록산사비宋拓唐麓山寺碑〉, 비의 높이 270㎝폭 135㎝, 행서, 28행, 56자, 중국 고궁박물원 소장
– 이 탁본은 송대 탁본이며, 이옹이 53세 때 쓰고, 당 개원 18년(730)에 세운 것이다. 이 비는 중국 호남성 형산衡山 악록사岳麓寺에 있어 〈악록사비〉라고도 한다. 독특하고 변화 많은 이옹의 행서의 예술적 특색이 잘 드러나, 칭송을 받아 왔다고 한다.


이옹의 <행서첩>

이덕무는 〈십칠첩〉과 같은 중국의 귀중한 법서法書가 우리나라에 왔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간 것은 우리나라에 혜안慧眼을 지닌 자가 없었기 때문이라 아쉬워했다. 이런 이유로 이옹(李邕, 674~746)의 글씨도 중국으로 들어갔다고 했다(도3).

금릉金陵의 유중모兪仲茅(중모는 유언兪彦의 자) 선생이 이옹태화李邕泰和의 행서行書로 된 대조선사大照禪師 – 원문 빠짐 – 의 2천여 자를 소장하고 있는데, 경황지硬黃紙에 쓰여진 필법이 가지런하고 아름다워 구양순歐陽詢ㆍ우세남虞世南의 풍도가 있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 서첩은 당唐 이래 곧장 고려高麗에 소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화宣和ㆍ정화政和 등의 옥새도 군옥群玉ㆍ추학秋壑의 인장도 찍히지 않고, 소식蘇軾ㆍ미불米芾 등의 발문跋文도 전혀 붙지 않았다. 신종神宗 말년에 한 무변武弁[상고하건대, 왜병倭兵을 징벌할 때의 장사將士이다.] 이 평양平壤에서 얻어 ê·¸ 막부幕府에 바치고 출세를 도모하려 하였다. 그래서 내가 요동遼東의 일이 반드시 패할 것을 짐작하고, 급히 서두르지 말라 하였는데, 이윽고 내 말대로 되어 이 서첩이 나에게 유치되었다.’고 했다. 《육연재이필》
-《해동역사》 제46권, 예문지5, 〈이옹행서첩李邕行書帖〉

한치윤은 단지 앞에서 언급한 이일화李日華가 지은 《육연재이필》에서 인용할 뿐, 자신의 의견을 달지 않았다.

백제에서 유행한 소자운의 글씨

《해동역사》는 6세기 전반 백제에 양나라의 서법이 유행하였다는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남제南齊 소자운蕭子雲은 자가 경교景喬이며, 초서와 예서를 잘 써서 당시 서법의 모범이 되었다. 당시에 백제국 사신이 건업建業에 이르러서 소자운의 글씨를 구하였는데, 소자운이 마침 동양태수東陽太守로 나가게 되어 배가 출발하려고 하였다. 사신이 물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30여 보쯤 떨어진 곳에서 배를 바라보고는 절을 하면서 앞으로 나왔다. 소자운이 사람을 보내서 물으니 답하기를, “시중侍中의 척독尺牘의 아름다움은 멀리 해외에까지 알려져, 오늘 구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명적名蹟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자운이 배를 3일 동안 머물러 두고 30장을 써서 주고는 금화金貨 수백만을 얻었다. 《남사南史》
-《해동역사》 제46권, 예문지5, 〈소자운서蕭子雲書〉

한치윤은 《남사》에서 소자운과 백제와의 일화를 인용하고 있다. 소자운(487~549)은 남조 제나라 고제(高帝, 재위 479~482)의 후손이며, 역사, 문학, 예술에 뛰어나 《진서晉書》 110권, 《동궁신기東宮新記》 20권을 저술했다 《남사》권42, 열전 제32, 자운子雲 소자운의 글씨는 백제에도 소문이 나, 건업에 도착한 백제 사신도 이를 금화 수백만을 주고 구했다는 내용이다. 《남사》에서 이 사건 이후 소자운이 태청 원년(547) 시중侍中과 국자제주國子祭酒가 되는 것으로 미루어, 소자운이 백제 사신과 만난 때는 양나라 무제(武帝, 재위 502~549) 후반의 어느 시기로 짐작된다. 소자운의 글씨는 현재 자유중국 국립고궁박물원 홈페이지에서 《순화조첩》의 역대명신법첩歷代名臣法帖 제4의 하나인 〈양소자운서梁蕭子雲書〉라는 제발에서 볼 수 있고(https://digitalarchive.npm.gov.tw), 청나라 왕주(王澍, 1668~1743)의 《적서암첩積書巖帖》에도 그 임모본이 있다.


도4 《순화조첩淳化祖帖》 4책 중 〈양소자운서순문첩梁蕭子雲書舜問帖〉, 법첩法帖, 해서楷書, 1폭, 자유중국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 순舜과 승丞이란 인물이 도道를 얻어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문답한 내용이다.


고구려인이 애호한 구양순의 글씨

백제가 소자운의 글씨를 찾았다면 고구려는 구양순(歐陽詢, 557~641)의 글씨를 애호했다(도5).

구양순은 처음에 왕희지의 글씨를 배우다가 점차 그 서체가 변하여 필력이 험하고 굳세어 한때의 절필絶筆이 되었다. 고려[고구려]에서 일찍이 사신을 보내 그의 글씨를 구하니, 고조(高祖, 재위 618~626)가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구양순 글씨의 명성이 먼 오랑캐까지 퍼졌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저들이 그의 필적을 보고 참으로 그의 형모形貌가 크고 웅혼하다고 여기지 않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구양순의 형체가 요마幺麽[자그마함]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위씨서설韋氏書說》

한치윤은 당나라 서법가 위속韋續이 편찬한 《서설書說》에서 구양순의 글씨를 구하는 고구려 사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당 고조는 구양순이 글씨가 굳세어 외모도 그러할 것으로 여길 터이지만, 사실은 형체가 조그마하고 보잘 것 없기 때문에, 고구려 사신들이 실망할 것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구양순의 글씨의 명성이 고구려까지 전해질 줄 예상하지 못한 데서 고구려의 서법 수준이 당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기는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재위 618~642) 때이다. 《해동역사》 예문지 <서법>에는 명나라 서관(徐觀, 1430~?)의 글씨를 조선 사람들이 찾는다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송강지》·형동(邢侗, 1551~1612) 《대필산방집》·주지번(朱之蕃, 1575~1624 《열조시집》 부록에서는 당나라 태종(太宗, 재위 627~649)의 〈폐유감천첩廢遊甘泉帖〉, 승려 몽귀夢龜의 〈기신라검첩寄新羅劍帖〉의 존재도 소개하고 있다. 《황산곡집》, 《선화서보》

[참고문헌]
《해동역사海東繹史》 (한국고전종합DB)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한국고전종합DB)
黃元九, 〈韓致奫의 史學思想 – 海東繹史를 中心으로-〉, 《人文科學》7,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1962.
金麗華, 《『海東繹史』 藝文志 의 문헌학적 연구》, 서울大學校 大學院 國語國文學科 國文學專攻 박사학위논문, 2018.8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대구대학교 연구교수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 분쟁》 등이 있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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