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⑭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李瀷

도4 청풍계첩靑風契帖, 지본채색, 50.5×37.6㎝, 두께 3.5㎝, 성호박물관 소장
– 1620년 청풍계에서의 봄놀이를 기념한 시화 축軸을 이익이 1736년에 첩帖으로 개장한 것이다. 표지 2장, 본문 17장.



17~18세기 조선 시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으로서 치세에 실효가 있는 실학實學을 높이 평가했다. 《성호사설星湖僿說》, 《동국악부東國樂府》, 문집文集과 그 속록續錄 등의 방대한 저술은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을 거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사람은 사람이고 기예는 기예이다 Ⅱ

그림을 잘 보는 법

이익은 고금의 화보畫譜를 많이 보았다. 그런데 많은 그림들이 산천의 절경이나 화조花鳥와 죽석竹石을 기이하게 묘사하고 더구나 장정조차 비단이나 자수로 화려하게 꾸몄으니 완물翫物에 불과했다. 완물은 물건의 외형적 요소에 탐닉하여 즐기는 행위인데, 이것이 지나치면 소중한 자기의 의지를 잃는다(상지喪志)며, 조선의 선비들이 가장 경계하는 바였다. 그림을 잘 보는 사람은 정신과 눈을 집중하여 마음이 고요해진 삼매경三昧境에 들어가고, 그러면 흥취가 일어나 맑고 한가로움에 도움 되는 바가 적지 않다. 이것이 어찌 잘 속이며 끊임없이 채색만을 받드는 화가의 기쁨에 비하겠는가. 《성호전집》 제56권, 제발題跋, 〈발해동화첩跋海東畫帖〉그림을 잘 보는 사람이 괴이함으로 이목을 속이려는 화가보다 얻는 바가 많다는 것이다. 이익은 물건·마음·일에는 정해진 바가 없고,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며, 그림을 잘 보는 방법은 보는 사람이 어떤 태도인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도1 성호선생전집星湖先生全集, 1922, 목판본, 68권 36책, 30.7×20㎝, 성호박물관 소장
– 《성호선생전집》은 27책본 《성호선생문집》을 보충하여 36책으로 새긴 증보판이다.


회화 중 최고는 초상화

이익은 회화를 효용성의 측면에서 자리매김했다.

그림 중에 인물의 초상화를 가장 높이 평가한다. 그 사람의 정신과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사모하는 마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조수鳥獸, 충어蟲魚, 초목草木, 옥석玉石을 그린 그림이다. 의원들이 그 그림을 보고 약재를 채취함으로써 질병과 죽음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또 그 다음은 관복官服과 기물器物들을 그린 그림이다.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다 표준으로 삼게 하기 때문이다.
– 《성호전집》 제56권, 제발, 〈발해동화첩〉

도2 이상의 영정, 지본채색, 58×36.5㎝, 족자 전체 길이 135㎝, 성호박물관 소장
– 이상의(李尙毅, 1560~1624)는 이익의 증조부이며, 좌부승지·병조참의·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로 《소릉집少陵集》이 있다. 간략한 묘사와 종이 재질로 보건데 본래 공신상의 초본草本이었을 것으로 ë³´ê³  있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초상화를 통하여 주인공과 정신적으로 교감할 수 있었다. 이익은 기억이 없는 부형父兄이나 집안 어른도 초상화를 보며 존숭의 마음을 가졌다(도2). 그리고 새, 짐승, 벌레, 고기, 나무, 풀, 옥, 돌을 있는 그대로 그린 그림은 의원들이 질병과 죽음을 막게 하는 약재를 채취하는 데 도움이 되고, 관복과 기물 그림은 후세 사람에게 표준이 된다고 생각했다. 회화를 판단하는 기준이 미술적 가치보다는 그림이 주는 효용성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익은 가식 없는 본래 모습의 사실적 묘사를 회화에서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12 성현 화상첩

선비들은 성현의 초상화를 벽에 걸어 두고 존경의 마음을 갖고자 했다. 이익의 집에도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12명의 성현을 그린 화상첩이 있었다(도3). 이익의 둘째 형 이잠(李潛, 1660~1706)이 자신의 벗이었던 윤두서에게 네 폭 비단에 12 성현을 그려 줄 것을 청하여 받은 그림이었다. 이잠은 윤두서에게 그림의 구상을 이야기했다. 한 폭은 주공周公이 있고, 한 폭은 공자孔子와 안연顔淵, 자유子游, 증자曾子가 함께 있는 모습이고, 한 폭은 소옹邵雍과 정호程顥, 정이程頤 세 명이 맹자孟子의 초상 앞에 손을 마주 잡고 서서 우러러보는 모습이고, 마지막 한 폭에는 주자朱子가 기대어 있는 가운데 황간(黃榦, 1152~1221)과 채원정(蔡元定, 1135~1198)이 곁에서 모시고 있는 구상이니, 모두 12명의 성현이 등장했다. 윤두서가 정성을 다해 그림을 완성하고 찾아갔으나 아쉽게도 이잠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성호전집》 제48권, 찬贊, 〈십이화상첩찬 병서十二聖賢畫像帖贊 幷序〉

청풍계첩

이익은 1735년 집안 사당의 물건을 정리하다 청풍계靑楓溪 시화축詩畫軸을 발견하였다. 1620년 3월, 이익의 증조부 이상의(1560~1624)가 이경전(李慶全, 1567~1644)·민형남(閔馨男, 1564~1659)·이덕형(李德泂, 1566~1645)·이필영(李必榮, 1573~ ?)·김신국(金藎國, 1572~1657), 그리고 최희남(崔喜男, 1562~ ?)과 함께 대궐에서 물러 나와 청풍계에 있는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태고정太古亭에서 봄놀이를 했다.
청풍계는 오늘날 서울 종로구 인왕산 동쪽 기슭의 골짜기이고, 태고정은 김상용이 지은 정자였다. 다음 해인 1621년, 청풍계의 즐거운 기억을 시와 그림으로 작성해 만든 두루마리를 이상의가 보관했다. 오랜 세월로 헤어진 것을 이익이 장정은 첩帖으로 바꾸고, 글씨를 모사하고 그림도 고쳐서 새롭게 만들었다. 현재 경기도 안산시 성호박물관에 보관 중인 첩은 총 21절이며, 외지, 내지, 그림, 서문, 시詩가 실려 있다(도4).
화첩을 보니 시내와 산은 그대로인데 수목과 정자는 어떤 것은 있는데 어떤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림 속의 인물을 이야기하고, 아무개는 아무 분의 증손, 현손이고 아무개는 아무 분의 자손이라 했다. 서로 만나기라도 하면 옛일을 이야기하며 기뻐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시화첩을 만든 의도라고 생각했다. 《성호전집》제56권, 제발, 〈경서청품계첩후敬書靑楓溪帖後〉


도3 전윤두서필 십이성현화상첩傳尹斗緖筆十二聖賢畵像帖의 일부, 견본채색, 43×31.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네 폭의 〈십이성현화상첩〉 중 자리에 앉아 있는 공자 곁에 안연과 자유가 서 있고 증자가 앞에서 간책簡冊을 잡고 강론하는 모습이다.


김명국의 연담화첩

임진, 병자 양란의 피해를 벗어난 18세기 조선은 각 분야의 변화와 함께 문화에서도 새로운 기운이 나타났다. 이익은 당대의 조선이 글씨와 그림 같은 잡기雜技 조차 모두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자부하고, 그 예로써 김명국(金明國, 1600~ ?)의 그림을 들었다(도6).

근래 김명국이 그린 〈노선도老仙圖〉는 짙고 원숙한 화풍이 흡사 석봉石峯(한호韓濩, 1543~1605)과 필적할 만하고, 각종 기이한 새와 짐승에 표현된 화풍은 고산孤山(황기로黃耆老, 1521~1567)의 풍격을 새로운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 《성호전집》제56권, 제발, 〈발연담화첩跋蓮潭畫帖〉

김명국의 화첩인 〈연담화첩〉에 대한 제발의 일부이다. 김명국의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이며, 도화서 화원으로 산수인물화에 능하였다. 《월간민화》 2022-8월호,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이야기⑦ 정조의 스승 남유용〉 위의 김명국에 대한 평가는 이익이 아닌 〈연담화첩〉을 소유한 중빈仲賓 이관휴(李觀休, 1692~ ?)가 한 말이지만, 그 제발을 쓴 이익의 생각이기도 했다.


도6 김명국필 달마도金明國筆達磨圖, 지본수묵, 83×5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김명국이 통신사행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갔을 때(1636·1637년 혹은 1643년) 제작한 그림으로 보인다. 선종의 개조인 달마를 단숨에 그린 듯 대담하고 힘찬 필치로 표현한 우리나라 대표적 선종화이다. 화면의 왼편 가장자리에 김명국의 호 蓮潭(연담)이 쓰여 있고, ‘金氏明國(김씨명국)’이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도 찍혀 있다.


서양화

이익이 살던 18세기 조선에는 서양 문물이 유행하고 있었다. 청나라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 온 자는 대부분 서양화를 구해와 집안 마루 위에 걸어 놓는 풍조가 있을 정도였다. 서양화에는 전각의 구조, 인물과 기물, 모서리의 방원方圓 처리 등이 완전히 실제 모습과 똑같이 그려져 있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는 화공畵工의 묘법이다. 원근·장단의 치수가 분명한 까닭에 한쪽 눈만으로 시력을 집중시켜야만 이와 같은 현실이 제대로 나타나게 된다”하는데, 대개 중국에도 일찍이 없던 것이었다. 이익은 서양화를 볼 때는 한쪽 눈은 감고 한쪽 눈으로 오래 주시해야만 전각殿角과 궁원宮垣이 모두 진형眞形 그대로 우뚝하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고 기술했다. 《성호사설》 제4권, 만물문萬物門, 〈화상요돌畫像坳突〉

서양인 리씨利氏가 그림에 대하여 논하기를 “작은 물체를 그릴 때는 우리 눈이 큰 물체와 비교할 수 있게 그리고, 가까운 물체를 그릴 때는 멀리 있는 물체와 비교할 수 있게 그리며, 둥근 물체를 그릴 때는 둥근 공과 비교할 수 있게 그려야 한다. 초상화를 그릴 때는 돌출된 곳과 파인 곳을 구분하여 묘사하고, 집을 그릴 때는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구분하여 묘사한다”라고 하였다.
– 《성호전집》 제56권, 제발, 〈발허주화〉

리씨는 리마두利瑪竇, 즉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이다. 위 글은 마테오 리치가 1607년에 쓴 《기하원본幾何原本》 서문에 있는 내용이었다. 이익은 자신의 친구이며 대나무 그림에도 능한 유덕장(柳德章, 1675~1756)으로부터 “원근(멀고 가깝고)과 곡직曲直(굽고 바르고), 세대細大(가늘고 크고)와 은현隱現(숨었다가 나타났다)한 분수分數가 분명하기 때문”에 서양화가 살아있듯 생생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도7 이징필소상팔경도李澄筆瀟湘八景圖, 견본채색, 37.6×40.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익은 도화서 화원인 이허주李虛舟, 즉 이징(李澄, 1581~ ?)의 〈팔경도八景圖〉가 동정호洞庭湖와 소상강瀟湘江의 경치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으나, 원근법과 입체법은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하였다. <발허주화>


[참고문헌]
《성호사설星湖僿說》·《성호전집星湖全集》
고연희, 〈星湖李瀷의 繪畵觀〉, 《溫知論叢》36, 온지학회, 2013
박종훈, 〈성호기념관 소장 《靑楓禊帖》一考〉, 《韓國古詩歌文化硏究》제36집, 2015
안산시, 《성호기념관 소장유물 명품선》, 2013
이정은, 〈金明國의 丙子·癸未通信使行 활동작품 분석 –<達磨圖>·<蘆葉達磨圖> 중심으로〉, 《인문학논총》제27집, 경성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한우근, 〈《성호사설(星湖僿說)》 해제(解題)〉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대구대학교 연구교수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 분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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