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⑬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李瀷

도7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 중 ‘황주죽루黃州竹樓’, 삼베, 25.9×3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소장품 번호 덕수 1033)
–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 4종 중,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는 8폭 <천고최성첩>의 일부이다. 화제는 북송의 시인이며산 문가인 왕우칭(王禹偁, 954〜1001)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 에서 연유한다.


사람은 사람이고 기예는 기예이다 Ⅰ

17-18세기 조선 시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은 수기치인修己治人 의학으로서 치세에 실효가 있는 실학實學을 높이 평가했다. 《성호사설星湖僿說》, 《동국악부東國樂府》, 문집文集과 그 속록續錄 등의 방대한 저술은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을 거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익에게 서화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이익(李瀷, 1681~1763)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가 성호星湖이다(도1).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부친 이하진(李夏鎭, 1628~1682)이 유배 중이던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이듬해 부친이 유배지에서 사망하고, 선영이 있는 경기도 안산 첨성리瞻星里(오늘날, 경기도 안산시 성포동)에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도1 성호 이익의 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 555번지 소재)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81세 나이의 이익을 만났는데, 그의 눈빛이 형형하여 쏘는 듯하고 성긴 수염이 허리띠까지 드리워 있었다. 사후 18년(1780)경, 이익을 보았던 사람이 영정을 그렸으나 아쉽게도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성호전집星湖全集》 부록 제2권, <화상찬畫像贊> 이익은 유학자이면서도 학문적으로 경세실용의 측면이 강하였다. 경전 및 정주程朱(정자와 주자)와 퇴계 이황李滉의 글을 읽고 사색하며, 체득한 뒤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행할 수 있다고 했다. 당대 사회의 가장 큰 모순은 과거科擧라고 지목했다. 학문은 문식文飾을 제거하고 실제에 힘썼으며, 경세제민은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는 것이었다. 《성호전집星湖全集》 부록 제1권, <묘갈명병서墓碣銘幷序>(채제공) 그의 사상을 담은 다수의 저술은 집에 있던 수천 권의 서적이 밑바탕이 되었다(도2).


도2 《성호사설》 중의 인사문人事門, 종이, 29.4×20.2㎝, 성호박물관 소장
– 이익은 독서하는 틈틈이 볼만한 내용을 기록하여, 제목도 ‘자질구례한 이야기’라는 뜻의 ‘사설’이라 했다고 했으나 이는 겸양의 표현이다. 전체 30책 30권에 <천지문天地門>, <만물문萬物門>, 〈인사문人事門〉, 〈경사문經史門〉, 〈시문문詩文門〉의 5가지 분류 아래 총 3천여 항목이 실려있다.


고증적인 서예 감식

이익은 조선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서체나 필법에 관심이 많았다. 이익의 실증적·고증적 태도는 서화 감평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가령, 진晉나라와 송宋나라 사이의 옛 서첩의 글이 모두 몇 줄에 불과한 이유를 사람들은 국가가 금지하였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런데 이익은 개인의 행위를 국가가 금하기 어렵다며, 그 원인을 당시의 습속에서 찾았다. 그 시기 간찰이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필요한 내용만 적으면서 글이 줄어들었을 것이라 설명하였다. 《성호사설》 제13권, 인사문, <고서첩古書帖>

세상에서 전하는 우군右軍의 해서楷書는 안작贋作(가짜 작품)이 많다. 장초章草는 비록 탑본搨本으로 전해져서 진형은 잃었다 하더라도 현존한 〈이왕첩二王帖〉 따위는 오히려 믿을 만하고, 행서行書 또한 〈난정첩蘭亭帖〉이 있으나, 오직 해서만은 진짜라 하기 어렵다.
-《성호사설》 제4권, 만물문, <희지서羲之書>

부친 이하진이 일찍이 청나라 연경에 다녀오며 구해온 책 중에 다수의 법첩이 있었다. “말은 마음의 소리요, 글씨는 마음의 그림[言心聲也 書心畫也]”이라고 생각하는 이익은 왕희지의 해서는 가짜가 많아 진짜가 드물다고 여겼다. 예서 필서체筆書體인 장초로 쓴 탑본 형태의 ‘이왕(왕희지와 그 아들 왕헌지(王獻之, 344〜386))’의 첩은 믿을 만하지만, 해서는 안작이 많다고 여겼다. 이같이 왕희지의 글씨를 서체에 따라 안작과 작품으로 판단할 수준에 달한 이익의 감식안은 부친 이하진이 명필이었던 내력과도 어느 정도 맥이 닿는다(도3).

도3 이하진李夏鎭 필적筆蹟 천금물전千金勿傳, 종이, 보물 제1673호, 10첩, 1첩 44.3×27×0.3㎝, 성호박물관 소장
– 이익의 부친 이하진이 1680년, 자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글씨를 쓰고 이를 모아 첩의 형태로 만든 서첩이다. 글씨는 여러 크기의 해서·행서·초서로 쓰여 있는데, ê·¸ 중 해서는 왕희지王羲之의 소해小楷를 기본으로 했다고 한다.

난정서

왕희지 행서의 대표작이자 상징이 <난정서蘭亭序>이다(도4). ‘난정’은 오늘날 중국 절강성 소흥현紹興縣에 있던 정자이며, 진晋나라 영화永和 9년(353년) 3월 3일에 왕희지를 비롯한 42명의 문인들이 이곳에서 연회를 여니, 이것을 ‘난정수계蘭亭修禊’라 했다. 이때 26명이 지은 시를 묶은 것이 <난정집蘭亭集>이고, 왕희지가 여기에 쓴 서문이 바로 <난정서>이다. <난정서>는 그 후 신라에도 전해지며 중국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서법의 모범이 되었다. 조선 시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난정기蘭亭記>라 실려있고, 첩으로 된 경우에는 <난정첩>이라고도 하였다. 朴徹庠, <王羲之 蘭亭修禊의 수용 양상과 詩社에 끼친 영향>
이익은 양梁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 501〜531)가 《문선文選》을 편집하면서, <난정서>를 채록하지 않은 것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성호사설》 제29권, 시문문, <난정서蘭亭序>

도4 왕희지王羲之 행서行書 난정서권蘭亭序卷, 종이, 24×88.5㎝, 중국 고궁박물원 소장
– 당나라 서법가 저수량褚遂良(596~658)의 왕희지 <난정서> 모사본이다. 왕희지의 서법을 좋아한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이 <난정서> 진적眞迹을 당시의 저명한 서법가 저수량과 구양순(歐陽詢, 557〜641)에게 여러 본 모사토록 하고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진적은 태종의 무덤인 소릉昭陵에 묻었다고 한다.

난정도

난정에서의 시회인 난정수계는 그림, 즉 <난정도蘭亭圖>로 형상화되었다(도5). 친구인 홍규한洪奎漢이 소장하고 있던 <난정도> 축을 보고, 이익은 글을 남겼다.

(전략) 이를 그린 그대 그림 또한 정밀하구려
눈앞의 그 광경들 정말 감상할 만해라
여섯 폭의 병풍에 끝없이 펼쳐 놓았네
굽이굽이 잔 보내며 곳곳에 앉았나니
얼굴 스치는 춘풍에 향기가 불어온다. (후략)
-《성호전집》 제4권, 시詩, <난정도가蘭亭圖歌>

이익이 본 <난정도>는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연간에 화가로 이름난 최북(崔北, 1712~1786?)이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여섯 폭 병풍에 <난정서>의 내용을 묘사하였는데, 굽이치는 물가에 문사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익은 <난정기>로 인하여 왕희지의 훌륭한 인품과 문장을 알게 되었다. 또 <난정기>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그 글씨로 인해 해당 인물까지 좋아하게 되었고, 그 인물로 인해 당시 노닐었던 장소까지 좋아하게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성호전집》 제56권, 제발, <서난정도書蘭亭圖>


도5 문징명난정수계도권文徵明蘭亭修禊圖卷, 1542년, 지본채색, 24.2×60.1㎝, 중국 고궁박물원 소장
– 73세의 문징명(1470~1559)이 왕희지의 <난정서>의 내용을 청록산수 기법으로 화폭에 묘사한 것이다. 물가에 있는 정자에 왕희지 등의 3인이 시문 짓기를 마치고 마주 ë³´ê³  앉아 있다.


주지번의 시첩

이익의 종조부인 이지완(李志完, 1575~1617)의 유품 가운데 명나라 주지번(朱之蕃, 1558〜1624)의 부채가 있었다. 주지번은 48세에 명나라 신종神宗(재위 1572~1620)의 손자 탄생을 알리기 위한 칙사로 선발되어 1606년 3월 23일부터 5월 2일까지 조선을 방문하고, 《봉사조선고奉使朝鮮稿》를 남긴 인물이다. 조선은 주지번 등 사신 영접을 위하여 원접사로 대제학 유근(柳根, 1549~1627), 종사관에 이지완을 비롯하여 허균(許筠, 1569~1618), 조희일(趙希逸, 1575~1638)을 임명하였다. 주지번은 학문뿐 아니라 서화에도 조예가 깊어, 한양에 머물던 중 “한묵翰墨(문장과 글씨)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공의 재기가 민첩하였으므로 그 즉시 휘호하여 건네주었음에도 사람들이 모두 흡족”(주지번 묘지명 <난우주공묘지명蘭嵎朱公墓志銘>)하게 여겼다. 이지완은 주지번이 명나라로 귀국하기 위해 의주義州에 머무를 때 작별의 선물로 글을 쓴 부채를 받았다. 그 부채는 집안의 보물로 간직되어 이익에게까지도 전해졌다.

난죽첩

도6 주지번의 난죽도(蘭竹圖, 艺术品, 2017-6 게재)

이익이 본 <난죽첩蘭竹帖>도 주지번의 그림이 바탕이었다(도6). 이 첩은 원래 주지번과 상대하던 허균이 만든 것이다. 허균이 주지번으로부터 서리 맞은 대나무와 향기 그윽한 난초[霜竹幽蘭] 그림을 선물 받고, 여기에 당시 종실宗室 출신의 화가인 이정(李霆, 1554~1626)에게서 비 맞은 대나무와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雨竹風竹] 두 그루 그림을 받았다. 허균은 이어서 당시 명사들로부터 받은 시를 더하여 총 17장으로 이루어진 시화첩을 만들었다. 허균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난죽첩>을 이익이 보게 된 것이다.

혹 진서眞書와 행서行書와 장초章草로 정교하게 새겨 놓았다. 이슬이 맺히고 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진실로 기이한 광경이라. 나는 보는데 빠져들어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성호전집》 제56권, 제발, <난죽첩발蘭竹帖跋>

이익은 글씨와 그림의 정묘함에 흠뻑 취하였다. 그런데 허균이 역모로 처형된 이후, <난죽첩>을 만든 사람을 알 수 없도록 표지와 서명이 지워져 있었다. 이익은 ‘사람은 사람이고 기예는 기예[人自人 技自技]’이니, 한쪽이 잘못되었다고 다른 쪽을 가리는 것은 매우 잘못된 처사라고 생각했다.

와유첩-천고최성첩

주지번은 명나라 문인화 계통의 화풍을 전했다는 점에서 회화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국내에 전하는 작품 중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은 주지번이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에게 바치고, 그 부본副本을 원접사였던 유근에게 선물했다(도7). 허균에 의하면, 주지번이 오망천吳輞川이란 화가의 솜씨를 빌려 중국 고대 명문 속의 경치 20폭과 시문詩文을 싣고, 그 밑에 주지번 자신의 글을 써 놓은 형태였다. 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13권, 제발題跋, <제천고최성후題千古最盛後> <천고최성첩>은 조선의 문인들에게 인기가 있어, 주지번이 그랬듯이 대부분의 경우 그림은 화공이 그리고 글씨는 당세의 이름난 서예가들이 썼다. 유미나, <朝鮮 中期 吳派畵風의 전래 - 《千古最盛》 첩을 중심으로-> 다만, 화첩의 명칭은 일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허목(許穆, 1595〜1682)이 본 것은 <십이화첩도十二畫貼圖> 였고, 《기언記言》제29권 하편, <모주태사십이화첩도서模朱太史十二畫貼圖序> 이익은 <와유첩臥遊帖>을 감상했다.

이 〈와유첩〉은 먼저 그 경치를 그리고 다음에 글을 써 놓았는데, 글에 표현된 사실과 그려진 사물이 서로 일치하고 마음속에 가져온 느낌과 눈으로 본 경치가 서로 부합하여 더 이상 부족한 감이 없다. 이에 방 안에 누워 있으면서도 그 마음은 가 보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성호전집》 제56권, 제발, <와유첩발臥遊帖跋>

유근이 받은 그림은 후손에게 전해지다, 이익 당시에 당대의 그림 잘 그리는 사람과 글씨 잘 쓰는 사람에 의해 다시 배껴 장정되었다. 명필로 소문났던 이익의 부친 이하진도 그 중 이백(李白, 701〜762)의 〈촉도난蜀道難〉과 두보(杜甫, 712〜770)의 〈동정호洞庭湖〉 두 편을 썼다. 이익은 이 첩을 몸은 누워 있지만 정신은 노닌다는 의미로서 <와유첩>이라 불렀다.

[참고문헌]
《성호사설星湖僿說》·《성호전집星湖全集》 (한국고전종합DB)
김정숙 역, <주지번 묘지명>, 《문헌과 해석》77, 태학사, 2016
고연희, <星湖李瀷의 繪畵觀>, 《溫知論叢》36, 온지학회, 2013
김홍대, <朱之蕃의 丙午使行(1606)과 그의 서화 연구>, 《溫知論叢》11, 온지학회, 2004
朴徹庠, <王羲之 蘭亭修禊의 수용 양상과 詩社에 끼친 영향>, 《漢文學報》26, 우리한문학회, 2012
신영주, <朱之蕃의 조선 사행과 문예교류에 관한 일고>, 《漢文學報》16, 우리한문학회, 2007
안산시, 《성호기념관 소장유물 명품선》, 2013
유미나, <朝鮮 中期 吳派畵風의 전래 - 《千古最盛》 첩을 중심으로->, 《미술사학연구》245, 한국미술사학회, 2005
한우근, <《성호사설星湖僿說》 해제解題>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대구대학교 연구교수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 분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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