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⑪ 《서화잡지書畫雜識》의 저자, 성해응 Ⅰ

도2 조영석, 말징박기도, 지본채색, 36.7×25.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조영석의 자는 종포宗圃, 호는 관아재觀我齋 혹은 석계산인石溪散人이다. 네 다리가 나무에 묶인 갈색 말을 꼼짝 못하도록 한 다음 앞발에 징을 박는 광경을 실감 나게 그린 풍속화이다. 그림 오른쪽에 “물체를 잘 그리려면 남이 그린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살아 있는 것을 그려야 한다”라 적혀 있다.



18세기 문예 부흥의 시기, 서화는 조선의 선비들에게 필요한 교양이었고, 서화 제발題跋만으로 이루어진 단독 권卷이 출현할 정도였다. 경화세족이며 고위 관료인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서화발미書畵跋尾》를 남겼다면, 같은 시기 하급 관리이며 검서관으로서 성해응(成海應, 1760~1839)에게는 《서화잡지書畵雜誌》가 있다. 조선을 비롯하여 중국, 일본의 서화 작품의 특징과 품평을 한 성해응의 서화 이야기를 살펴본다.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성해응은 누구인가

성해응의 자는 용여龍汝, 본관은 창녕昌寧이다(도1). 1783년 진사가 되고, 1788년에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이 되어 당시 교서관校書館에 있던 부친 성대중(成大中, 1732∼1809)과 함께 정조의 후의를 입어 서적 편찬의 일을 하니 당시 사람들이 영예로 여겼다. 모친상을 마치고 1796년 다시 규장각에 들어갔으나 1800년 정조의 죽음 후 낙담하였다. 1801년 금정찰방金井察訪, 1803년 음성현감陰城縣監이 되어 옥사獄事를 잘 처리하여 신망을 얻었으며, 1815년 귀향하였다. 성해응은 “경經은 도道이니 사람이 도를 버려두고 행할 수 없다”며 경서經書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의 이러한 바람은 연경재硏經齋라 호를 삼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조카인 성우증(成祐曾, 1783~1864)이 쓴 행장에 의하면, 당시의 재상 조인영(趙寅永, 1782~1850)은 “백년 앞은 내가 모르지만, 이후에는 이런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연경재부군행장〉 188권 102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문집인 《연경재전집》이 있다.
성해응의 삶은 부친인 성대중과 일정하게 맥을 같이 한다. 성대중은 규장각에 근무하며 정도의 총애를 받아 문체반정文體反正 때는 ‘순정醇正’한 문장을 인정받아 종3품 북청도호부사에 제수되었다. 패관 문체를 인용한 남공철이 곤장 70대의 벌로 낸 속전이 바로 그의 부임 잔치 비용이었다. 《월간민화》 2002년 10월호, 〈서화발미書畫跋尾〉의 저자, 남공철Ⅱ 성대중은 박지원朴趾源을 비롯하여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원중거元重擧 등과 교류했고, 성해응도 자연스럽게 이들과 어울리며 문예 취미를 익혔다.


도1 성해응의 묘(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45 소재)


성해응의 서화관

성해응은 화가 혹은 그림에 대한 예비지식과 에피소드, 열람 경위, 보존 상태 등 객관적 사실을 짧은 글로 표현했다. 규장각에 있을 때 <옥당보완첩玉堂寶玩帖> 24폭을 보았다.


그림은 작은 재주이다. 산림의 한적한 사람이 일이 없을 때 이에 선염揎染하고 흩뿌려 고담枯淡하고 소산蕭散한 아취를 드러낸다. 부귀한 사람 같으면 도리어 마음 쓸 데가 많아 서화書畵로 즐거움을 삼을 겨를이 없으니, 하물며 제왕과 같은 존귀한 자에게 있어서랴.
– 《연경재전집》 권9, 기記, 〈기옥당보완첩記玉堂寶玩帖〉



즉, 서화는 한가한 사람의 취미이고 마음 쓸 데가 많은 사람은 서화로 즐거움을 삼지 않는다고 했다. 나아가 서화는 공교로워질수록 이름은 천해지며, 선비가 서화로 그 이름을 전하려는 자는 진실로 말末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의 <풍속화> 병풍에 부친 제발에서는 충효와 같은 유교적 자취를 주제로 한 작품은 마음에 감동을 주어 사람들을 선해지도록 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인정했다. 《연경재전집》, 속집續集11책, 〈제관아재화병후題觀我齋畵屛後〉
성해응은 서화의 솜씨보다는 ‘신일神逸’ 혹은 ‘일취逸趣’를 강조했다. 그래서 경지에 이른 시화詩畫는 “무릇 멀어서 쫓아갈 수 없고, 가깝되 잡을 수 없으며, 농밀하되 부섬富贍한 데는 이르지 않고, 건장하되 거친 데까지는 이르지 않으며, 심원하되 궁벽한 것에는 이르지 않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연경재전집》권13, 문文, 〈동시화보서東詩畫譜序〉

서화잡지書畵雜識

《연경재전집》에는 1백 편이 넘는 서화 제발이 포함된 <서화잡지>가 있다(도3). <서화잡지>에 실린 제발은 서예 85편, 회화 25편이고, 국적별로는 조선 70, 중국 36, 일본 4편이다. 서예가 회화보다 많은 것은 당시 문인들이 그림보다 글씨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이 있던 분위기를 반영한다. 회화 제발에 등장하는 화가는 조선 19명, 중국 5명, 일본 1명 등 총 25명이다. 화가별 작품 수량은 대개 한두 점에 그치지만, 김홍도(金弘度, 1745~미상)가 12폭, 조영석과 정철조(鄭喆祚, 1730~1781)가 8폭, 정선(鄭敾, 1676~1759)이 4폭, 이인상(李麟祥, 1710~1760)과 최북(崔北, 1720~미상)이 3폭이다. 대부분 성해응 본인뿐 아니라 그 선대의 사람들과 알고 지내는 인물이며, 정선과 김홍도도 여기에 속하였다. 남공철의 <서화발미>의 제발 대상이 중국 중심인 것에 비해 <서화잡지>는 조선 위주이고, 중국 이외에 일본 작품에 대한 감평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서화잡지>는 작품 품평보다는 서화 감상에 대한 교양적인 지식을 정리하며, 서화가와 그 작품의 특징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본의 문인들

<서화잡지>에는 일본의 서화작품에 대한 제발로서 <제일본독후題日本牘後>, <제구십주화후題仇十洲畫後>, <제겸가당아집도題蒹葭堂雅集圖>, <제다호비후題多胡碑後>가 있다. 이들은 성해응의 부친 성대중의 1763년 일본 방문과 연관이 있다. 성대중은 통신사의 서기書記로 일본을 방문하여 현지의 문인들과 필담을 나누었다. 목홍공(木弘恭, 1741~1802)·정잠井潛·근등독近藤篤·합리合離·주규周奎·정왕凈王이 뛰어났으나 모두 축상(笁常, 1719~1801)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성해응이 보기에 일본 문사의 글들은 당송의 고문古文 체재는 아니지만, 과거 공부에 매달린 적이 없는 사람들의 글이라 진부한 내용이 없어 때때로 활달하고 자유로워 읽을 만하였다. 〈제일본독후題日本牘後〉 성해응의 제발은 이전에 비해 한층 높아진 일본의 학문과 사상의 일단을 드러내며, 조선과 일본 서화교류의 증거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도4 겸가당아집도蒹葭堂雅集圖, 일본, 1764년, 견본채색, 44.5×32.5㎝, 전체 길이 411.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 갑신(1764)에 유학자 용연 성 선생의 요청에 응하여 겸가당 주인 목홍공木弘恭, 즉 목촌겸가당木村蒹葭堂이 썼다는 글이 보이고, 가운데 책이 가득한 서재가 겸가당이다.


겸가당아집도蒹葭堂雅集圖

목촌겸가당(木村蒹葭堂, 1736~1802)의 〈겸가당아집도〉는 성대중의 요청에 의해 겸가당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그의 문인들이 서문序文을 적어 축으로 꾸며 선물한 것이다(도4).


겸가당은 일본 낭화강(浪華江, 오사카 근처 나니와 강) 근처에 있는 목홍공의 거처이다. 목홍공은 책 모으는 것을 좋아하였고 승려 축상 등과 어울려 겸가당에서 고상한 모임을 가졌다. 당시 사신의 임무를 맡아 일본에 가신 선친께 목홍공이 <겸가당아집도>를 주었으니, 다른 나라까지 고상한 모임을 넓히고자 한 것이다. 겸가당은 맑고 깨끗하여 꽃나무로 화사한 집이다. 갈대 사이로 돛단배가 지나가는 것이 보이니 한적하여 바라볼 만하다. 크게는 황대치黃大癡(황공망黃公望, 1269~1354)의 은일隱逸의 뜻이 담겨 있는 듯하다. 축상이 후서後序를 썼는데 이 또한 고상하여 읽을 만하다.
– 〈제겸가당아집도題蒹葭堂雅集圖〉



오사카[大阪]에 머물던 중 성대중이 그곳 문인들의 구심점이었던 목홍공, 즉 목촌겸가당을 만나 모임을 갖게 되었다. 겸가당은 문인 화가이며 에도시대 후기 출판 및 서화 수장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그의 서재는 일본 전역의 문사들이 찾아와 시문을 쓰고, 서화를 감상하는 일종의 문화 살롱과 같은 장소였다. 조선에 돌아온 성대중은 이날의 만남과 <겸가당아집도>를 주변 문인들에게 전했고, 성해응도 집안에 전승되는 그림을 본 것이다.


도5 김유성필 사계산수도金有聲筆四季山水圖 일부
– 〈서지첩〉을 그린 김유성의 그림, 지본채색, 42.1×29.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지첩栖志帖

〈겸가당아집도〉를 선물한 목촌겸가당도 조선의 문사들로부터 서화를 받았다. 제술관 남옥(南玉, 1722~1770), 서기관 원중거(元重擧, 1719~1790), 성대중, 김인겸(金仁謙, 1707~1772)과 교류하고, 그 가운데 성대중이 글을 쓰고, 김유성(金有聲, 1725~미상)이 그린 〈서지첩栖志帖〉을 받아 소장하게 되었다. 성대중이 〈겸가당아집도〉를 받고, 그 답례로 〈서지첩〉에 글을 써준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문사들의 그림 교류가 일방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호 대등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일본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서지첩栖志帖〉은 견본채색, 그림 부분 24.3×21.0㎝, 글씨 부분 24.4×20.9㎝의 크기이다. 김영남, <기무라켄카도(木村蒹葭堂, 1736-1802)의 繪畵 硏究>


도6 다호비, 일본 군마켄[群馬県] 다카사키시[高崎市] 요시이마치이케[吉井町池] 소재
– 비신碑身의 높이 129㎝, 폭 69㎝, 두께 62㎝이고, 6행 80자가 쓰여 있다.


다호비多胡碑

현재 일본의 서예가들이 애호하는 서예 탁본에 〈다호비〉가 있다(도6).


다호비는 일본에서 들여온 것으로, 자세한 내용이 선친의 문집에 실려 있다. 자획이 괴이하여 대전大篆도 아니고 해서도 아닌 것이 아마 무언가를 모방한 것이 있는 듯하다. 화동 4년(712)은 당나라 예종睿宗 경운 4년이니, 그렇다면 일본에 인문이 열린 지도 오래되었는데 왜 이렇게 뒤엉켜 분명하지 못한 글씨를 써놓았을까. 게다가 필획도 가볍고 약하니, 질박하게 쓰고 싶었는데 그렇게 쓰지 못한 것이리라.
– 〈제다호비후題多胡碑後〉



다호비는 일본 나라奈良 시대 초기인 711년, 다호군多胡郡이 탄생하는 배경을 기록한 기념비이다. 성대중이 이 탁본을 구하게 된 연유는 금석도장金石圖章에 능한 평린平鱗이란 자가 들에 놓여있던 다호비가 진귀하다 여겨 널리 알리고 싶어서였다. 성대중이 보기에 자획이 매우 괴이하여 탁본을 상자에 넣어 두고 보여 주지 않았는데, 후에 성대중의 지기이고 성해응을 가르치기도 했던 송재도(宋載道, 1727~1793)가 비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청성집靑城集》 권8, 제발題跋, 〈서다호비書多胡碑〉


도7 공개龔開의 〈종진사이거도권鍾進士移居圖卷〉,
자유중국, 11.1×332.6cm,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 공개는 강소江蘇 회음인이고, 자가 성여聖與(혹 聖予), 호가 취암翠巖이며, 남송이 망하고 은거했다. 즐겨 그린 수묵화의 도깨비와 귀신의 일종인 종규鍾馗의 모습이 괴기하여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을 들었다. 그림 속의 많은 소재는 길상吉祥의 의미를 우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구영仇英의 그림

성해응은 직업 화가로 인물화에 능한 명나라 구영(仇英, 1494~1592)이 사녀화士女畵와 같은 풍속화를 그리고, 거기에 글을 써준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을 이상하게 여겼다. 구영이 음악과 여색 사이에서 방탕하게 노닐고, 문징명이 명분과 절개로 자신을 잘 지켰으면서 음란하고 요염한 것에 마음을 두어 《서상기西廂記》를 쓴 것에 의아해했다.


구실보仇實父(구영)는 송나라 유민遺民으로 그림을 팔아서 먹고 살았다. 나는 구실보가 《수호지水湖志》에 나오는 영웅들을 그려놓은 공성여龔聖予(공개龔開, 1222~1307)의 그림을 본떠 그린 것을 감상한 적이 있다. 인물들이 모두 살아 움직이는 듯 매우 훌륭한 작품이었다. 공성여의 그림은 장생張生과 최녀崔女가 장정長亭에서 송별하면서 손을 잡고 술잔을 기울이며 말없이 은근한 정을 나누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또 문형산文衡山(문징명)이 그 뒤에 글을 썼으니 이것이 바로 《서상기》이다.
– 〈제구십주화후題仇十洲畫後〉



채색과 세밀한 묘사가 특색인 구영의 미인풍속화는 청나라까지 영향을 미쳤고, 판화로 된 모사본은 일본 에도시대 우키요에[浮世繪]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성해응은 때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산속에 오래 거처하면서 사계절에 초목이 꽃을 흐드러지게 피는 것을 보고 화의畵意가 솟아났으나, 붓이 서툴러 풍광 속의 정취를 다 표현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동시화보서〉 성해응은 서화를 애호하고 높은 감식안을 가진 문인 사대부의 한 사람이었다.

[참고문헌]
성해응,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김영남, 〈기무라켄카도(木村蒹葭堂, 1736-1802)의 繪畵硏究〉, 《美術史學》제21호,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07
孫惠莉, 〈18-19세기 초반 문인들의 서화감상과 비평에 관한 연구 – 成海應의 「書畵雜誌」와 南公轍의 「書畵跋尾」를 중심으로 -〉, 《漢文學報》제19집, 우리한문학회, 2008
朴晶愛, 〈硏經齋成海應의 書畵趣味와 書畵觀연구 – 「書畵雜識」를 중심으로 -〉, 《震檀學報》제115호, 진단학회, 2012
박정애, 〈「書畵雜識」를 통해 본 成海應의 繪畵鑑評 양상과 의의〉, 《溫知論叢》 제33집, 온지학회, 2013
성해응 지음, 손혜리 옮김, 《낮은 자리 높은 마음》, 태학사, 2015
성해응 지음, 손혜리·지금완 옮김, 《서화잡지》, 휴머니스트, 2016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대구대학교 연구교수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 분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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