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⑩ 《서화발미書畫跋尾》의 저자, 남공철 Ⅲ

나는 어려서부터 서화벽書畫癖이 있었다 Ⅲ

지난 호에 이어 정조(1752~1800)의 후의를 입었고 순조(1790~1834) 때에는 영의정에까지 오른 경화세족이며 주류 노론의 일원이었던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의 이야기를 이어가보고자 한다. 어려서부터 서화벽이 있다고 스스로 밝힌 그의 삶 속에서 중국 관련 서화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도1 명심주화산수권明沈周畫山水卷, 두루마리, 자유중국, 59.4×1521.8㎝,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 심주沈周(1427~1509)의 자는 계남啟南, 호는 석전石田, 강소성 소주蘇州 출신이다. 남공철은 심주의 산수화가 먹색은 비가 내리듯 윤택하고 채색은 선명하게 드러나고, 공교함이 빼어난 경지라고 평하기도 했다. (《금릉집》권23, 서화발미,〈석전화권초본石田畵卷綃本〉)


한족와 만주족

남공철이 연경을 방문하였을 때는 순조 7년(1807년)이었다. 사절단의 정사正使였던 남공철은 숙소를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통해 천하의 어질고 호쾌한 선비를 찾았다. 1830년 간행된 남공철의 문집인 《영웅재속고潁翁再續藁》에 의하면 남공철이 부채에 글과 그림을 받은 인물은 한족 출신의 저유인褚裕仁과 오사권吳思權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과거를 보기 위해 연경에 머물던 자들이다. 서로 필담을 나누었다. 평암平菴(오사권)이 부채에 송국화松菊畫를 그리고, 설산雪山(저유인)이 거기에 7언 절구 글을 지었다. 시와 그림이 놀랄 정도로 뛰어나니, 예찬倪瓒과 심주沈周의 필의도意가 있었다(도1).
– 《영옹재속고》권2, 서序, 〈연경필담서燕京筆談序〉



남공철이 보기에 저유인과 오사권이 시와 그림은 원말 명초의 화가이며 시인인 예찬(倪瓒, 1301~1374)과 명나라의 저명 화가 심주(沈周, 1427~1509)의 풍격이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또한 조강曹江(자 옥수玉水, 1781~?), 이임송(李林松, 1770~1827) 등은 만나지는 못하고 자신의 문집을 보내어 그 서문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한족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남공철은 명나라가 망한 지 오래지만 여전히 명의를 숭상하고 있는 한족을 높이 평가했다. 당시 조선에서 청나라 치하의 한족을 만주족과 같이 오랑캐로 비웃는 것을 비판하고 그들이 마지 못해 청나라 조정에서 일하는 것이라 변호한다. 한족의 행위는 조선이 예물을 가져가 청나라 조정에 절하지만 그 마음이 원통함과 서러움을 참고 마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금릉집》, 금릉집서金陵集序, <자지自識> 남공철의 인식은 당시 조선의 주류 집단이 청나라 조정에 벼슬하는 한족을 일괄적으로 멸시하던 풍조와는 결을 달리한다. 자신의 문집 서문을 한족 인사들에게서 받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좌) 도2 사사표査士標 작, 방예법산수도仿倪法山水圖, 예찬을 본받아 그린 산수도, 지본, 219.4× 60.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그림은 오른쪽 위의 글을 통하여 청나라 사사표(査士標, 1615~1698)가 예찬의 화법을 따라 그린 산수화임을 알 수 있다.
(우) 도7 오대남당서희옥당부귀도축五代南唐徐熙玉堂富貴圖軸, 축軸, 자유중국, 112.5×38.3㎝,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 목련, 해당화, 모란, 석죽 등을 그렸다. 그림 왼쪽 아래에 있는 ‘금릉서희金陵徐熙’ 낙관은 가짜로 의심되고 있다


연경에서의 서화 감상

연경에서 남공철은 예찬倪瓚의 산수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남공철은 예찬이 그림을 그릴 때는 세수를 하고, 산을 그리고는 의관을 바꾸는 등 깨끗한 성품이라 평했다. 예찬은 산수와 묵죽에 능하였다. 황공망(黄公望, 1269~1354), 왕몽(王蒙, 1308~1385), 오진(吳鎭, 1280~1354)과 함께 ‘원사가元四家’로 불린다. 남공철은 요동 벌 천여 리를 오도록 물가와 산을 보지 못하고 끝없는 사막만 보며 연경의 숙소인 남관南舘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찬의 그림을 보고 산수山水 생각이 난 것이다(도2). 《금릉집》권4, 시詩, 〈연관관예우산수권燕館觀倪迂山水卷〉


나는 청계의 우사영정에 오관吳寬의 유거시幽居詩를 써 붙이고, 또한 벽에는 예촌의 그림을 본받아 그리려고 했으니, 대개 옛사람이 그 마음이 점점 다가오면 그 말이 점점 많아진다는 뜻이다.
– 《금릉집》권24, 서화발미, 〈예우산촌유거첩초본倪迂山村幽居帖綃本〉



남공철은 청계산 기슭의 둔촌에 있는 우사영정又思潁亭에 오관(1435~1504)의 시를 써 붙이고, 예촌의 〈산촌유거초본〉을 그리려고 했을 정도로 예찬의 산수화를 좋아했다.

서화발미

《금릉집》권23~24는 남공철의 서화 품평 모음인 <서화발미書畫跋尾>가 수록되어 있다. 그림과 글씨 116제 154편의 주인공과 작가 소개, 작품 진위眞僞, 소장 경위 등이 제발題跋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서화발미>는 남공철이 알고 있는 이름난 서화들에 대한 품평과 감상의 글이며, 그중에서는 남공철이 직접 보지 못한 서화도 있고 다른 사람의 품평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서화발미>는 남공철 자신뿐 아니라 이를 읽는 사람들의 서화 감상을 위한 안내서 혹은 지침서의 성격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도3).
<서화발미>의 내용 중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畫譜》 등의 내용을 전재하고 있는 점이 비판을 받기도 한다. 《패문재서화보》는 청나라 왕원기(王原祁, 1642~1715) 등이 1708년 모두 100권으로 편집한 청대 서화류 서적이다. 그러나 남공철이 누구보다 글쓰기에서 모방을 미워하고 숙성을 통한 체득을 강조한 점에서 《금릉집》권10, 척독집, <여이원리현수與李元履顯綏>, <서화발미>가 서화에 대한 정보를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두는 비망록적 기록이라는 설명이 실상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좌) 도3 남금릉서화발미南金陵書畵跋尾 1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금릉집》 권23의 첫 부분이다.
(우) 도4 당회소자서첩唐懷素自敘帖, 자유중국, 두루마리, 紙本, 28.3×755㎝,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 사진은 회소가 777년 자신의 초서 경력과 경험, 그리고 당시 사대부들의 품평 등을 초서로 쓴 698자로 된 〈자서첩〉의 일부분이다. (…遂擔笈杖錫 西遊上國 謁見當代名公 錯綜其事 遺編絶簡 往⺀遇之 豁然心胷 略無疑滞 魚牋絹素多所塵點 士大夫不以爲⺖在焉…) 〈당회소자서첩〉은 회소의 자서에 이어 안진경 등의 서법가, 시인 및 유명 인사들의 시문과 회소 초서에 대한 찬송의 글을 엮은 것이다. 청나라 시기 조선 출신의 수장가인 안기安岐의 소장품이기도 했다.


회소懷素의 초서

남공철은 당나라 시기 석회소釋懷素의 초서는 송나라 궁정에 1백 1종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조선에 전래한 서첩은 수십 종에 불과하며 <서회소회안족하이첩묵각釋懷素廻鴈足下二帖墨刻>은 그중에서도 희귀하여 구하기 어렵다고 평했다. 《금릉집》권24, 서화발미 승려였던 회소는 호남성 장사長沙 출신으로 속성이 전錢, 자가 장진藏真이었다. 옻칠 판을 종이 대신 사용하며 몇 번이나 글을 쓰자 판이 모두 뚫리고 닳은 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로 노력했다.
회소의 대표적 초서 작품인 <회소자서첩懷素自敍帖>은 세필細筆에 강한 붓을 사용해 필세筆勢가 이어지며, 기이한 변화는 실로 초서 예술의 극치를 표현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원본은 자유중국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고 국내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회소자서첩> 탑본첩搨本帖이 보관되어 있다(도4).


도5 공부자성적도孔夫子聖蹟圖, 2첩, 목판본, 37.8×27.6㎝,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중의 공자 초상
1592년에 공묘孔廟 성도전聖圖殿에 돌로 새겨진 〈성적도聖蹟圖〉를 바탕으로 1628년에 여조상呂兆祥이 108면의 책 형태로 만들었다. 이것을 조선에서 1904년 다시 판각하여 간행한 것이다. 제1도부터 제54도까지가 건책乾冊이고, 제55도부터 제105도가 곤책坤冊에 수록되어 있다.


공자의 초상화

남공철은 인물의 사후에 작성하는 비갈碑碣은 머리털 하나라도 차이가 나면 곧 그 사람이 아니므로 가까이에서 그 행동을 보는 듯해야 한다고 여겼다. 《금릉집》권10, 서書, 〈상오대학사재순걸선대부갈명서上吳大學士 載純 乞先大夫碣銘書〉 남공철이 생각하는 초상화도 비갈과 같았다. 공자의 초상화에 대한 글에서 당나라 시기 유명한 화가인 오도자(吳道子, 약 680~759)가 꿈속에서 만난 모습을 그렸다는 공자의 초상화는 생전의 공자 모습이 아니라고 보았다. 사람을 사모하면 그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공자의 인간됨을 보려면 공자의 예악과 문장이 실려 있는 육경六經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덧붙여 “그 시를 암송하고 그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을 알지 못하겠는가”라는 맹자孟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금릉집》권12, 기記, 〈부자화상기夫子畫像記〉

왕희지의 진적, 조아비曹娥碑

남공철은 왕희지(王羲之, 303~361)의 득의의 글씨인 <조아비曹娥碑> 진적을 본 기쁨을 기술했다. <조아비>는 동한東漢 연간 조아의 효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명한 석비다(도6). 비의 높이는 2.1m, 폭 1m, 윗면의 글자는 행해체行楷體라고 한다. 세상에 전해지는 <조아비>는 모두 묵각이 닳아서 흐리며 남공철 자신이 본 서너 개의 본은 모두 완선完善하지 않았다.


지금 진적眞蹟을 보니 필세筆勢가 맑고 원만하며 수려하고 힘차서 모든 아름다움이 갖추어졌다. 지금 천여 년에 이르도록 신채神采가 살아 움직여 비단 바탕 밖으로 새어 나온다. 비로소 중국에 아직 진적이 흘러 전하는 것을 알았다.
– 《금릉집》권24, 서화발미, 〈왕우군조아비묵각王右軍曹娥碑墨刻〉



그런데 1794년 가을에 본 왕희지의 진적은 필세가 생동하고 천여 년이 흘렀으나 여전히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남공철의 <조아비> 글씨에 대한 높은 감식안과 함께 《패문재서화보》에서 강희제(재위, 1661∼1722)가 직접 발문을 지었다는 고증적 태도도 엿볼 수 있다.


도6 조아비曹娥碑, 1책, 명탁본明拓本, 32.8×34.4㎝, 중국 고궁박물원故宫博物院 소장


서희의 가짜 몰골화

18~19세기 조선 사대부들은 이름난 혹은 새로운 서화를 만나면 혼자보다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모여 감상했다. 남공철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환덕柳煥德과 성명 미상 작자의 화조첩을 보았는데 서희徐熙(886~975)의 작법이 보였다. 남공철은 중국 오대 시기의 저명 화가인 서희를 화조화 분야의 신神이라 평했다. 《금릉집》권23, 서화발미, 〈화조첩초본花鳥帖綃本〉


서희는 오대 때 사람이다. 그림이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이 그림은 가짜가 분명하다. 이치李廌
의 화품畫品에서 “잎에는 앞면과 뒷면이 있고 꽃은 높낮이가 있어야 기운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윤택함이 드러나고 꽃 색이 빼어나고 밝게 빛나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한다”고 하였다. 서희가 그린 꽃은 보통의 솜씨와 다르다. 그림은 생의生意가 있어야 지극하고, 생의生意는 자연스러운 것이니, 진眞과 다르지 않을 자가 이렇게 할 수 있다.
– 《금릉집》권23, 서화발미, 〈서희몰골화권초본徐煕沒骨花卷綃本〉



북송 시대 이치(李廌, 1059~1109)의 회화 품평 감상서인 《화품》을 인용하며 남공철은 자신이 보고 있는 서희의 그림이 가짜라 단정했다. 《화품》은 《덕우재화품德隅齋畫品》인 듯하지만 현존 자료에는 위의 인용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서희의 꽃 그림이 생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한 부분은 서희의 〈학죽도鶴竹圖〉에 대한 이치의 품평의 글이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의 조선은 정조의 융성기를 지나 서양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접근해 오는 등 국내외적으로 위기이면서 변화의 시기였다. 남공철은 이 시기 경화세족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이면서도 현실에 일정한 거리를 두며 산수 자연 속에 묻혀 성현의 도를 실천하려는 삶을 살고자 했다. 글과 그림을 감상하면서도 은사隱士로서의 삶을 찾았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소중화라는 허상에 사로잡힌 채 청에게 당한 굴욕을 잊고 안빈낙도의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남공철, 《금릉집金陵集》
문덕희, 〈南公轍(1760-1840)의 書畵觀〉, 《동방학》1,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1996
金光燮, 《金陵 南公轍 散文 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辛泳周, 〈金陵 南公轍의 書畫에 대한 관심과 書畵跋尾〉, 《동방한문학》47, 2011
안순태, 《남공철 산문 연구》, 월인, 2016
陳리바, 《조선후기 문인의 서화인식과 비평의식 연구-서유구, 성해응, 남공철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5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대구대학교 연구교수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 분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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