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⑨ 《서화발미書畫跋尾》의 저자, 남공철Ⅱ

도4 张士保, <운대이십팔장도云台二十八将图>, 풍이와 등우, 1846년, 25.4×17.4㎝


후한 명제 영평(永平, 58-75년) 때,광무제의 건국에 공을 세운 28명의 장수의 초상화를 남궁운대南宮雲臺에서 그렸는데 (《후한서後漢書》권22, 마무馬武 열전), 이를 ‘운대이십팔장도’라 한다. 《후한서》 권17, 풍이溤異 열전에 의하면, 기원후 24년 광무가 전쟁 중 달아나 남궁현南宮縣에서 큰 비바람을 만나 빈 집에 들어갔는데 풍이가 땔감을 가져오니 등우鄧禹가 불을 붙였다. 이에 광무제가 부엌에서 옷을 말렸다는 데서 ‘광무요의光武燎衣’라는 말이 유래했다.



지난 호에 이어 정조(1752~1800)의 후의를 입었고 순조(1790~1834) 때에는 영의정에까지 오른 경화세족이며 주류 노론의 일원이었던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의 이야기를 전한다. 어려서부터 서화벽이 있다고 스스로 밝힌 남공철의 삶 속에서 서화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다른 집의 선본들

남공철은 다른 집에 선본善本이 있는 것을 들으면 번번이 가서 보고, 품제品題를 남겼다. 《금릉집》권23, 서화발미, 〈홍씨보장재화축〉 홍대용(洪大容, 1731~ 1783)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던 청나라 문인 반정균(潘庭筠, 1742~ ?)의 서화를 빌려 보았다. 홍대용이 연경에 갔을 때 반정균을 만나 사귀었고 귀국 후에도 교환한 서찰 수십여 본이 소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공철이 보기에 필묵筆墨이 물결치고, 풍채가 우아하고 아름다워 더욱 반정균의 사람됨이 생각났다. 또 후에 유득공으로부터 반정균의 시집 1권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남공철은 반정균이 한족으로서 청나라에 벼슬하고 있지만 그 마음이 늘 비분강개함이 시에 드러난다고 여겼다. 《금릉집》권23, 서화발미, 〈반엄이명사시독지본潘嚴二名士詩牘紙本〉
남공철은 명나라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의 글씨를 좋아했다. 일찍이 열람한 수십여 본은 대부분 각탑(刻搨, 새기거나 모사)이고, 진적眞蹟은 오직 권선權襈(개명 권상신權常愼, 1759∼1824) 집안 소장의 <취옹정기병풍>이 가장 득의의 서書였다(도1). 《금릉집》 권23, 서화발미, 〈태사성도권묵각太史成道卷墨刻〉
또한 오재소(吳載紹, 1729~1811) 집에서 본 소동파蘇東坡(소식蘇軾, 1037~1101)의 <동파삼십첩묵각東坡三十帖墨刻>은 서권기書卷氣가 있어 송대 최고라고 품평했다. 《금릉집》 권24, 서화발미, 〈동파삼십첩묵각〉 남공철이 서書에서 중시하는 서권기는 문인들 서화의 특징적 요소로서 자신의 정감을 정화시켜 속俗을 피하고 아雅를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문덕희, <남공철의 서화관>


도1 소동파 취옹정기[蘇東坡醉翁亭記], 종이, 17×34.5㎝,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서화書畫’ 인용 수난

남공철의 삶은 관료가 되기 전과 그 후로 크게 차이가 난다. 교류한 인물도 20대 중후반에는 당시 신문물과 지식에 정통한 박지원 등의 연암그룹이었다면, 30대 전후부터는 대부분 관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정조 16년(1792)은 남공철이 젊은 시절의 자유분방한 교유에서 벗어나 보수적이고 엄정한 주류 집단의 일원으로 본격 진입한 해였다. 왕의 동정과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수록한 《일성록日省錄》에 의하면, 그해 10월 16일 정조가 남공철을 비롯한 초계문신抄啓文臣에게 요구한 책문의 제목이 ‘시詩’였고(10월 16일), 남공철은 당시의 패관 문체를 비판하며 골동[古董], 서화書畫 등의 단어를 인용하는 내용의 책문의 답(대책對策)을 작성했다. 정조는 체재와 내용이 경박하고 허약한 패관 소품을 인용하였다며 책망하고(10월 19일), 더구나 같은 해 7월의 남공철의 친시親試의 시권試券에서도 제멋대로 헛소리를 하고 종이 끝부분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11월 12일). 정조는 남공철에게 두 가지 처분을 내렸다. 첫 번째는 곤장 70대의 벌이었다. 곤장을 맞지 않으려면 속전贖錢을 내도록 하고, 그 속전으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문체가 올바른 북청 부사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의 부임 술자리 비용으로 쓰도록 했다(12월 24일). 두 번째 처분은 12월 28일 성대중의 환송연 자리에서 내린 안의 현감 박지원(朴趾源, 1737~1805)에 대한 처리였다.

《열하일기》는 내가 이미 읽어보았다. 다시 아정雅正한 글을 짓되 편질이 《열하일기》와 비슷하고 《열하일기》 처럼 회자될 수 있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벌을 내릴 것이다.
– 유득공, 《고운당필기》 제3권, 〈열하일기熱河日記〉

정조는 비속하고 잘못된 패관 문체가 유행하는 것이 박지원의 죄라 간주하고, 신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을 지어 급히 올려보냄으로써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라는 처분을 남공철로 하여금 박지원에게 전하도록 명하였다(도2). 《연암집》 제4권, 〈답남직각공철서答南直閣公轍書〉


도2 박지원이 남공철에게 보낸 글 [답남직각공철서答南直閣公轍書], 《연암집燕巖集》, 필사본, 21책(책10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남공철이 1792년 12월 28일 보낸 글을 1793 정월 16일, 현감으로 있던 안의현에서 박지원이 받고 쓴 답장이다. 정조는 남공철의 글에서, 요즈음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박 아무개의 죄이며,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結者解之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명대사의 공적

조선시대 불교는 숭유억불로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을 조직하여 왜군 격퇴에 힘을 보탰다. 남공철은 강원도관찰사 시절인 정조 23년(1799년) 금강산을 방문하고, 이때 왜란의 전후 처리를 위해 일본을 다녀온 사명대사(유정惟政, 1544~1610)의 공적을 기리는 글을 남겼다.
1592년 왜구가 침략하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서산대사(휴정休淨, 1520~1604)와 건봉사乾鳳寺의 사명대사가 승려를 모아 명나라 군과 함께 평양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으니, 이때 목을 베인 자만도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과의 화친 협상에서 조선의 대표로 활약한 인물이 사명대사이다. 불교를 신봉하는 일본에 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를 설득하고, 죄없이 붙잡혀 간 우리 동포 3,000여명을 함께 데리고 왔다.
남공철은 불교를 배척만 하고 인의仁義를 높이 말하면서 행실이 독실하지 못한 사람과 사명대사는 비교할 수 없다고 보았다. 서산대사는 돌아갔지만 그가 남긴 오롯한 덕업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요, 사명대사와 같이 훌륭한 업적을 힘껏 찬양함이 마땅하다며 “서산은 구름 같고, 사명은 물 같으니, 물이 흐르면 자취가 있고, 구름은 흘러가도 멈추지 않는다(서산여운西山如雲 사명여수泗溟如水, 수류유적水流有迹 운거무지雲去無止)”라 평했다. 《금릉집》 권16, 비명碑銘, 〈건봉선원사명대사기적비명乾鳳禪院泗溟大師紀績碑銘〉


도3 대구 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 보물, 122.9×78.8㎝, 대구 동화사 소장


등받이가 높다란 의자에 우향하여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의좌상椅坐像이다. 왼쪽 상단에 ‘사명당대장四溟堂大將’이라 쓰여 있고, 그 아래쪽 묵서명에 ‘가경원년병진嘉慶元年丙辰’이란 연호가 있어 1610년 입적한 이후 늦어도 1796년에는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전 10여 점의 사명당 진영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는 평이다.


김홍도의 미완성 그림, <광무요의도光武燎衣圖>

정조 시기 최고의 화사 김홍도(金弘道, 1745~?)는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림 주문이 쇄도하여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 《금릉집》 권1에 있는 시詩 <단원화檀園畫〉는 단원 김홍도가 주인을 위해 은거隱居하는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다. 남공철은 그림의 발묵潑墨이 북송의 서화가 미불(米芾, 1051~1107)의 득의의 초기 수준 같고 송단松壇 숲속의 가을 비 소리가 솔솔 들리는 듯하다고 노래했다. 단원이 그려준 그림의 주인공은 분명하지 않지만, 송단이 고금의 서화 3천 본을 소장했던 남공철의 절친 박남수(朴南壽, 1758~1787)의 거처 《금릉집》 권1, 시詩, 〈산여만삼수山如輓三首〉일 가능성, 그리고 시의 작자 남공철을 염두에 둔다면 박남수와 남공철 두 사람 중의 하나일 듯하다. 그런데 김홍도가 남공철의 그림 요구를 실제 들어주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남공철이 명말청초의 산문 3대가의 한 명인 위희(魏禧, 1624~1681)가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光武帝(기원전 5~기원후 57)가 전쟁 중에 고초를 겪던 일화를 서술한 글 ‘《위숙자문집魏叔子文集》 권16, 〈요의도기燎衣圖記〉’을 잃고, 김홍도에게 <광무요의도>를 그려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김홍도는 위희의 글을 읽고도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였다. 당나라 오도자(吳道子, 약 680~759)가 그린 <광무요의도>가 매우 신리神理하다며, 위희는 그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사람 여덟 명, 말 한 필, 나귀 한 필, 소 두 마리, 개 한 마리가 그
려져 있다. 대궐 같이 큰 돌이 두 개 서있고, 짚으로 이은 정자 1개에는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엉켜 정자 위로 나온 나무 두 그루가 있다. 정자 안에 세 명이 있고, 부엌과 부뚜막에는 그릇이 어수선하다. 정자 밖에는 다섯 명이 있고, 큰 나무 한 그루가 정자 앞 오른쪽 돌 쪽에 기울어 있고, 한 그루는 정자 뒤쪽으로 기울어 있다. 앞에 있는 나무 아래에 두 마리 소가 엇갈려 누워있고, 돌 뒤에 서있는 나귀는 목과 머리가 보인다. 반쯤 보이는 검은 개는 왼쪽에 서있는 사람을 향해 멍멍 짖고 있다. 정자 밖 다섯 사람은 왼쪽에 두 자루 칼과 활, 화살을 차고 말을 끌며 돌 아래에 서있고 비단을 두 개의 깃발로 감싸고, 오른쪽 세 면의 투구가 돌 뒤로 나와 있고, 또한 칼날과 화살대가 보인다. 정자 안에 세 사람이 있는데, 짧은 목에 매부리 코, 허리에 활을 감추고 왼쪽 무릎을 땅에 꿇어앉아 손으로 땔감에 불을 붙이는 자가 등우(鄧禹, 기원후 2~58)이고, 두 손으로 보리밥을 받들어 가마솥 쪽으로 오는 아래턱이 풍만한 자가 풍이(馮異, ?~기원후 34)이고(도4), 또 한 사람 광무제光武帝가 호상胡床을 등지고 몸을 굽혀 옷을 불에 말리며 자세히 보고 있다. 정자 안의 또 다른 두 사람은 벽체 기둥 사이로 엿보는데 각각 얼굴 반쪽이 보인다. 광무제는 풍만한 아랫턱에 우뚝한 코, 큰 귀와 이마, 자잘한 턱수염에 검은 털, 이마 양미간 사이의 눈빛이 맑고 고요하여 그 무위武威를 드러내지 않으니, 복파장군伏波將軍(마원馬援, 기원전 14~ 기원 후 49)이 ‘제왕은 본래부터 분명하다[帝王自有眞]’고 한 바를 믿을 만하다. 왼쪽 벽에 다시 시작하는 일력日曆이 있고 벽 아래에 진흙이 떨어져 대나무를 엮은 것이 보이고, 초가 정자의 온돌이 용마루에서 튀어나와 있다. 북풍이 비스듬히 불어 연기가 나뭇가지 위를 덮으니, 때가 매우 추운 것으로 보인다. 전체 폭은 주척周尺으로 세로 5척 남짓이고, 가로는 2척 5촌이며, 그림 속의 사람은 키가 1척 3촌 내지 4촌, 소와 말은 적당하고, 나무의 큰 줄기 지름은 2촌 8푼, 정자 기둥의 지름은 1촌 3푼이다.
– 《금릉집》 권23, 서화발미, 〈한광무요의도견본漢光武燎衣圖絹本〉

위희는 <광무요의도>의 크기, 구도, 인물, 동물, 수목, 가옥 등의 형상을 눈앞에 보이듯이 세밀히 기술했다. 심지어 인물과 수목의 크기와 지름까지도 묘사했다. 그럼에도 김홍도가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남공철이 화사 김홍도로 하여금 위희의 기록을 살펴보고 그림한 본을 묘사하도록 하였으나, 김홍도가 괴롭게도 겨를이 없어 완성하지 못하였던 것이다[金苦無暇不得成].
남공철이 일찍이 진적眞蹟 서화를 열람하지 못한데도, 단지 기보記譜에 근거하여 발跋을 지어 고증하고 박식하고자 하는 자를 많이 돕는 것 또한 이러한 뜻이었다. 즉, 진품을 보지 못하였더라도 그림의 형상이나 내용을 기록한 글을 보고 발문을 작성하는 이유가 그림을 다시 모사하거나, 고증하고 이해하려는 자를 돕는 데 있었다. 신영주,〈금릉 남공철의 서화에 대한 관심과 서화발미〉 남공철의 발문을 읽고, 김홍도가 이루지 못한 〈광무요의도〉를 완성할 수는 없을까.

[참고문헌]
남공철, 《금릉집金陵集》 (한국문집총간 htps://db.itkc.or.kr)
문덕희, 〈南公轍(1760-1840)의 書畵觀〉, 《동방학》1,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1996
金光燮, 《金陵 南公轍 散文 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논문, 2009
辛泳周, 〈金陵 南公轍의 書畫에 대한 관심과 書畵跋尾〉, 《동방한문학》47, 2011
안순태, 《남공철 산문 연구》, 월인, 2016.
유득공, 《고운당필기》
고성문화원, 《국역 乾鳳寺의 역사적 발자취》, 2008
유홍준, 〈단원 김홍도〉,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 분쟁》 등이 있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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