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⑧ 《서화발미書畫跋尾》의 저자, 남공철

도3 명나라 동기창, 산수권[明董其昌山水卷], 28×117.5㎝, 자유중국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나는 어려서부터 서화벽 書畫癖이 있었다 Ⅰ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의 자는 원평元平, 호는 금릉金陵, 사영思潁, 의양자宜陽子 등이다.
정조의 세자 시절 스승인 남유용(南有容, 1698~1773)이 63세에 낳은 늦둥이 아들이었다. 남유용에 대하여 각별한 기억을 가진 정조正祖(재위 1776~1800)의 후의를 입고, 다음의 순조純祖(재위 1800~1834) 때에는 영의정에까지 오른 경화세족이며 주류 노론의 일원이었다. 저술로는 《금릉집金陵集》 24권, 《영옹속고潁翁續藁》 5권, 《영옹재속고潁翁再續藁》 3권, 《귀은당집歸恩堂集》 10권의 시문집과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12권 등이 있다. 특히 중국의 서화에 대한 제발을 모은 《서화발미書畫跋尾》를 남겼다. 남공철의 일생에서 서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본다.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명품과 선본

도1 《금릉집》 (24권 12책, 33.4×21.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남공철은 아버지 남유용의 서화 애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남유용이 만년에 한거할 때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이 가져온 <홍씨보장재화축洪氏寶藏齋畵軸>을 좌우에 벌려 놓고 수개월 동안이나 감상했다. 선조의 부마인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의 후손에게 전해진 그림첩인데, 어린 남공철도 보고 목록을 만들어 상자에 보관했다.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감상뿐 아니라 기록하는 방법도 익힌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서화벽書畫癖이 있었다. 명품名品을 파는 자가 있으면 옷을 벗어서라도 그것과 바꾸었다. 다른 집에 선본善本이 있는 것을 들으면 번번이 가서 보고, 모두 품제品題를 남겼다. 혹 고금의 기보記譜에 있으나 보지 못한 것의 발미跋尾로 적은 약간 편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옛 사람이 이름나고 복스러운 장소를 가기 전에 제영題詠을 지어 그리워한 것도 또한 이러한 뜻이리라.
– 《금릉집》권23, 서화발미, 〈홍씨보장재화축〉

남공철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서화에 깊은 애호의 습관이 있었다고 술회한다. 홍씨 집안의 화첩을 어렸을 때 감상했으나 그 격식과 의취가 대부분 기억나지 않았다. 남공철은 1792년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어 규장각 직각直閣이 된 이후 관료 생활 중에도 늘 서화와 가까이 하고자 하였다. 자신을 당나라 화가인 장언원(張彦遠, 815~879)이 말하는 감상할 수 있지만 표구는 못하는 자로 분류했다. 《금릉집》 권23, 서화발미, 〈고화진적견본古畵眞蹟絹本〉

서법 실험

남공철은 서화에 관심을 가지고 간혹 흥미로운 작법은 직접 모사해 보기도 했다. 가령, 중국인들이 즐겨 하는 서법 중에 경각비頃刻碑 방법으로 글을 써 보았다. 사슴뿔로 아교를 만들어 종이에 글을 쓰는데, 이때 종이는 발묵潑墨으로 검게 칠하였다. 그러니 글자는 희고 종이는 검어서 석각石刻을 인쇄한 것과 같다. 이것을 세상에서 경각비라 하고 중국인이 보통 즐겨 했다. 남공철이 경각비법을 배워 안진경(顔眞卿, 709~784)의 예학명瘞鶴銘과 중흥비中興碑를 모사하여 사람들에게 보였으나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학명은 현재 중국 강소성 진강시 초산비림焦山碑林에 있는 마애 석각이며, 중흥비는 현재 중국 호남성 기양현 상강대교 남쪽의 마애 석각인 대당중흥송大唐中興頌이다(도2).
남공철은 경각비가 옛적에 군대에서 편지를 전할 때 사용하게 된 이유도 설명한다. 아마도 편지가 왕래하는 중에 적이 엿볼 수 있기 때문에 글씨를 희게 쓰고,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 먹을 칠하면 글자가 뚜렷해졌을 것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옛날 명장의 지혜로운 방법을 볼 수 있었다. 《금릉집》권13, 제발題跋, 〈서경각비후이書頃刻碑後二〉


도2 예학명(瘞鶴銘, 24×13.4㎝, 16매, 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 소장)
– 서홍순(徐弘淳, 1798∼1876)이 마애 석각 예학명의 서체를 본떠 쓴 글씨


서화의 진위

남공철은 서화의 진위 판별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동현재董玄宰(동기창董其昌, 1555~1636)가 쓴 촉도편蜀道篇을 세상에서 진적眞蹟이라 하지만 필법筆法이 부드러우면서 굳센데 고려지高麗紙에 썼으니 어찌 중국이 고려지를 숭상했을까. 서문장徐文長(서위徐渭, 1521~1593), 전겸익錢謙益(1582~1664) 등이 일찍이 우리나라 자문지咨文紙를 천하의 절품絶品이라 칭찬했으나, 화본畵本은 모두 금은전金銀牋, 백로모면白鷺摹面 등의 종이를 사용하는데 이 어찌 우리나라 종이만을 쓰는가. 어찌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가짜가 아니겠는가. 그 문장도 전당시全唐詩와 품휘品彙 등의 책과 검토하면 오류와 착오가 많다.
– 《금릉집》 권23, 서화발미, 〈현재서이태백촉도편진적지본玄宰書李太白蜀道篇眞蹟紙本〉

남공철은 동기창이 쓴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太白, 701~762)의 촉도편 그림의 종이와 문장의 검토를 통하여 진위를 판별하고 있다. 오늘날의 서화 감정에서도 여전히 통용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서화의 가치

남공철이 생각하는 좋은 서화와 흠이 있는 서화는 이러하다.

비록 천하의 명첩名帖과 법축法軸이 낙관이 없으면 취趣가 하나 부족하고, 품평이 없으면 일[事]이 하나 남았으나 이 그림은 훌륭하다. 단, 소인묵객騷人墨客(시인, 작가와 같은 풍류객)의 좋은 시詩나 신묘한 필筆이 없다면 이것은 흠이 된다.
– 《금릉집》 권23, 서화발미, 〈청명인산수권초본淸名人山水卷綃本〉

서화의 가치는 제발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고 있다. 남공철은 공무에서 벗어나 한가하게 앉아 좋은 서화를 보면서 답답한 마음을 풀어내는 것을 아취雅趣 있는 삶이라 여겼다.


도4 광주전도廣州全圖, 필사본, 1장, 35.8×25.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고종 9년(1872) 경기도 광주군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채색지도이다. 지도 서북 쪽 과천계果川界(과천 경계) 아래 청계산淸溪山 기슭에 둔촌이 있었다. 이곳에 남공철의 묘가 있고, 그곳으로부터 남서쪽 돌마면突馬面에 부친 남유용의 묘가 있다.


자연 속에서의 서화 생활

정조는 남공철이 깨끗하여 진흙 속에서도 더러워지지 않는다며 칭찬했다. 남공철은 어려서부터 은둔의 뜻이 있어 그림 속에서 앞선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계곡과 산을 보게 되면 손에서 놓지 않고 감상했다. (《금릉집》 권24, 서화발미, 〈심주호산권초본沈周湖山卷綃本〉) 남공철이 귀 거래한 둔촌遁村은 바로 이러한 곳이었다(도4). 현재의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의 청계산 자락인 옥경산玉磬山 아래이다. 성남시 분당구 율동에 있는 부친 남유용의 묘에 두 명의 부인에 이어 남공철의 친모인 안동 김씨까지 4명이 합장하는 것이 사대부의 예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1801년 둔촌에 정자를 구입하고, 3년 뒤 이곳에 모친의 묘를 조성하였다.

용산龍山과 광주 금릉金陵의 정자에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고 틈틈이 복건에 평상복을 입고 가서 한가로이 노닐었다. 손님이 오면 향을 사르고 정좌하여 경전과 역사를 토론하였다. 곁에는 고금의 법서法書 명화名畫 골동품을 늘어놓고 품평하고 감상했다.
– 《영옹속고潁翁續藁》권5, 〈자갈명自碣銘〉

광주부치(남한산성 내 위치)로부터 서쪽 30리에 100여가의 금릉金陵 마을이 있고, 이곳에서 산으로 접어들어 계곡으로 둘러싸인 곳이 바로 둔촌이었다. 고려 때의 학자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387)의 옛 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 후 주인이 바뀌고 남공철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둔촌이란 이름이 이집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릉집》 권12, 記, 〈둔촌제승기 遁村諸勝記〉

롤 모델(role model) 구양수

남공철이 일생 흠모한 사람은 북송의 정치가이며 문학가인 구양수歐陽修(1007~1072)와 소식蘇軾(東坡, 1037~1101)이었다. 구양수는 풍류가 온아溫雅하고(도5) 소식은 기절氣節이 매우 뛰어나다고 평하고, 무명씨가 그린 두 사람의 초상화를 매번 펼쳐 놓고 손에서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금릉집》 권24, 서화발미, 〈구소화상첩지본歐蘇畵像帖紙本〉)
남공철은 청계산 기슭 옥경산 아래 둔촌의 정자를 ‘우사영정又思潁亭’이라 했다. 사영思潁은 구양수가 자신이 한 때 관직 생활을 한 영주潁州를 생각하며 지은 시인 ‘사영시思潁詩’에 보이는 말이며, 실제 벼슬에서 물러난 뒤 이곳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남공철이 구양수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벼슬을 한 이래 하루도 귀거래를 잊은 적이 없어 정자를 매입하여 사영思潁으로 이름한 것이다. 남공철은 집에 고서가 3천 권, 금석유문이 수십 종이 있고, 술을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지만 늘 술 한 병, 타지 않는 거문고 하나, 두지 않는 바둑판 하나를 벌려 놓았다. 이것이 구양수만큼 풍족하지 않지만 즐기기에 족하여 늙음을 잊는다고 했다. 《금릉집》 권12, 기, 〈우사영정기又思潁亭記〉


(좌) 도5 구양수 초상(《구양문충공문집歐陽文忠公文集》 내)
(우) 도6 최북 필 괴석도怪石圖, 지본, 28.5×33.6㎝,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


기이한 화가 최북

남공철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특이한 이력의 인물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보다 40여세 많은 최북(崔北, 1720~미상)과 막역하게 교류하고 그의 전기도 남겼다. 남공철과 산방山房에서 만난 최북은 담묵淡墨으로 대나무 여러 폭을 그리기도 했다. 최북의 집안과 출신은 알려진 바가 없고 자인 칠칠七七은 이름 ‘北’자를 파자한 것이다.

서경(평양)부와 동래부에 그림을 팔러 떠나니 두 지방의 사람이 비단을 가지고 줄을 이었다. 어떤 사람이 산수화를 구했는데, 산을 그리고는 물을 그리지 않았다.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힐난하니 칠칠은 붓을 던지며 일어나 말하기를 “허허, 종이 밖이 모두 물이오”라 했다.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데 돈이 적으면 칠칠이 즉시 화내며 그림을 찢어 버렸다. 혹은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값이 많으면 껄껄 웃으며 그 사람에게 주먹질을 해 보였다. 그림을 가지고 문을 나서는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비웃기를 “저 풋내기가 그림 값을 모르는군”이라 하였다.
– 《금릉집》 권13, 잡저雜著, 〈최칠칠전崔七七傳〉

산수화를 잘 그려 ‘최산수崔山水’라고 하지만, 남공철은 최북이 화훼, 영모, 괴석(도6), 고목과 광초서에 능하다고 평했다.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 분쟁》 등이 있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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