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⑦ 정조의 스승 남유용

그림 좋기가 왕휘지의 대나무 같다 Ⅱ

지난 호에 이어 영조 시대 문신이며, 정조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뇌연 남유용(南有容, 1698~1773)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림 좋기가 왕휘지의 대나무 같다고 한 남유용의 삶 속에서 서화의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북송의 휘종

남유용은 그림 중에서도 인물화는 날마다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며 특히 좋아했다.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이 초상화가 사람의 정신을 전하고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사모의 마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림 중에서 으뜸이라 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성호전집星湖全集》 제56권, 제발題跋, <발해동화첩跋海東畫帖>)
남유용은 휘종(徽宗, 1082~1135)이 그린 <도원도桃源圖>를 보고 감상평을 남겼다. 1127년, 거란족이 세운 금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인 동경東京(오늘날의 開封)이 함락되며 한족의 송나라(북송)가 멸망하고, 휘종과 아들인 흠종(欽宗, 1100~1161)을 비롯해 황족, 후궁, 관리 등 3천여 명이 포로가 되어 금나라로 끌려갔다. 남쪽 양자강 유역의 임안臨安(오늘날의 杭州)으로 달아난 일파에 의해 재건된 것이 남송南宋이다. 남유용의 <도원도> 그림에 대한 설명은 어부 1명과 무릉도원에 있는 27명의 모습이 서로 다른 것이 마치 조물주가 묘사한 것 같다고 짧게 언급하는 데 그친다. 정작 휘종에 대한 인물평이 길게 이어진다.


(좌) 도1-1 송휘종좌상축宋徽宗坐像軸, 자유중국, 견본채색, 188.2×106.7㎝,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우) 도1-2 송휘종후좌상축宋徽宗后坐像軸, 자유중국, 견본채색, 186.3×105.2㎝,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금의 오국성으로 끌려간 휘종은 1135년에, 정황후鄭皇后는 5년 전인 1130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송사宋史》권243, 휘종정황후 열전) 송 휘종과 황후의 초상화는 타이베이로 옮겨지기 전에는 북경 자금성 내의 남훈전南薰殿에 있었다. 남훈전에는 중국 역대 황제 초상 63폭, 황후 초상 12폭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림이 진실로 정교해도 어떻게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리오. 이 때문에 포로로 잡힌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가 오국성에 살게 된 것은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그림 때문이라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황제가 오국성에서 욕을 당하며 근심스럽고 우울하여 그림에 빌어 스스로 즐거워한 것이 슬퍼할 일이지 탓할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더욱 잘못이다. 황제가 오국성에서 욕을 당하면서 이미 그 사직社稷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림을 잊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했으니, 남조南朝의 군신君臣들이 그것을 듣고 누가 흩어지지 않겠는가. 오호라, 만약 황제가 임금 노릇에 부지런하기를 그림같이 하고, 천하 다스리기에 정교하기를 그림 같았다면 어찌 아득히 먼 곳에 갇히는 욕을 당하겠는가. 후세의 인군人君은 이것을 거울로 삼기를 바란다.
– 《뇌연집》권13, 기記, <송휘종화기宋徽宗畫記>)



<도원도>를 보고 송 휘종이 나라를 잃고 금나라의 오국성五國城에서 굴욕을 당한 원인이 그림 때문이라 단정한다. 그림 좋아하듯이 임금 노릇과 천하 다스리기에 힘썼다면 나라가 망하지 않고, 오랑캐 땅에서 굴욕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평이다. 그림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그림을 탐닉하는 데서 생기는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아들인 남공철(南公轍, 1760~1840)도 휘종이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간언을 받아들이기를 그림 좋아하듯이 했다면 오국성에서의 치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금릉집金陵集》권23, <송휘종영모횡축초본宋徽宗翎毛橫軸綃本>)


도2 이제현의 초상화, 국보 제110호, 견본채색, 177.3×9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제현의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 이외에 가산서원(전라남도 장성), 수락영당(충청북도 청주), 구곡사(전라남도 강진)에도 남아 있다.


이제현의 초상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고려의 학자이며, 문신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도2). 의자에 앉아 있는 이제현 오른편에 몇 권의 책이 있고, 위쪽에 제문題文과 자찬自贊이 있다. 인물의 얼굴은 선염渲染 효과 없이 묘선으로 부드럽게 처리되고, 채색 역시 가라앉은 색조를 보여 준다. 제문에 의하면, 이제현이 33세 때인 1319년(충숙왕 6), 충선왕(1275~1325)을 따라 남쪽 절강江浙에 갔다. 충선왕이 화가인 진감여陳鑑如에게 이제현의 얼굴을 그리게 하고, 문장가인 탕병룡(湯炳龍, 1241〜1323)에게 찬문을 짓도록 하였다. 이제현은 다른 사람이 빌려간 자신의 초상화를 돌려받지 못하고 고려로 귀국했다. 그런데 21년 뒤 다시 간 원나라에서 극적으로 자신의 초상화와 재회했다.


내 예전 남긴 모습에 양쪽 귀밑머리는 파란 봄이었네
떠돌아 다니길 얼마 세월에 우연히 다시 만나니 정신은 여전하다
초상화 속의 인물은 다른 인물이 아니고 예전의 내 몸이 바로 지금의 내 몸이라네
아이 손자들은 완전히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냐고 서로 묻네



이제현은 젊을 때의 초상화 속의 자신과 시간이 흐른 현재의 모습이 다르지만 정신은 변함이 없다고 술회했다. 초상화를 그린 사람을 진감여라 한 것과 달리 《익재난고益齋亂藁》(제4권, 시詩)와 《동문선東文選》(제9권, 오언율시五言律詩) 등에는 오수산吳壽山이라 하고 ‘다른 책에 진감여라 한 것은 잘못이다’고 한다.
남유용도 초상화를 그린 사람을 오수산으로 보았다. 초상화 속의 이제현이 수염과 구레나룻이 풍성하고 영예로운 군자라고 여겼다. 이제현이 고려 시기 일곱 명의 임금을 모시며 세 번의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끝까지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았다며 많은 사례를 들었다. 그러나 신돈(辛旽, ?~1371)에 대한 처신에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제현이 나라의 원로로서 신돈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또한 신돈의 등용을 막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뇌연집》권14, 기記, <익재이문충공화상기益齋李文忠公畫像記>)


도3 유척기 초상, 《선현영정첩先賢影幀帖》2책 중 1책, 지본채색, 책 크기 39.2×29.5㎝, 규장각 소장


19세기 초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화첩 형식의 초상화집인 《선현영정첩》 2책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책에 유척기를 비롯한 14명, 2책에 허목許穆 외에 9명의 영정이 수록되어 있다.


유척기의 영정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유척기(兪拓基, 1691∼1767)의 초상화를 보고 칭찬의 글을 남겼다. 유척기는 남유용이 조정에 있을 때 진퇴와 같은 중요한 일을 상의한 인물이었다(도3). 반신상 초상화 오른쪽 위에 유척기의 성·관직명·이름[유영상척기兪領相拓基]이 적혀 있다. 얼굴 표현으로 미루어 장년 혹은 만년의 모습으로 보인다. 유척기가 영의정이 된 것은 그의 나이 68세인 영조 34년(1758) 8월이었다.


위엄과 중후함이 참으로 재상의 자태이고, 근심하고 즐거워함[우락憂樂]은 바로 범공范公에 뜻을 두고 임금 섬김[사군事君]은 자신을 바치는 것을 법으로 삼아 산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 《뇌연집》권27, 잡저雜著, 유문익공화상찬兪文翼公畫像贊)



유척기의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시호가 문익文翼이다. 남유용은 유척기의 영정을 보고 재상의 풍모가 있으며, 근심하고 즐거워함이 범공의 뜻 같다고 높이 평했다. 범공은 북송의 정치가 범중앙(范仲淹, 989~1052)이다. 그는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근심은 천하에 앞서 근심하고, 즐거움은 천하가 즐거운 뒤에 즐거워했다(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며 고금의 관리들이 가져야 할 선공후사적 마음가짐을 피력했다. 이 말은 자신의 뜻을 고전의 명구를 빌어 표현하기 좋아하는 오늘날의 중국인, 특히 최고 지도자 시진핑[習近平]도 자주 애용하는 어구 중 하나다(<시진핑이 최고로 많이 인용한 경전고사 10개[習近平引用率最高的十大典故]> www.people.com.cn). 남유용은 유척기의 삶이 바로 이러한 범중앙의 뜻과 같다고 칭송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임금 섬김은 자신을 바치는 것’이라는 표현에서 남유용의 냉철한 인물평이 드러난다. 이 구절은 《순자荀子》 <대략大略>의 “하등 신하는 임금을 재물로써 섬기고, 중등 신하는 자신(목숨)으로써 섬기고, 상등 신하는 인재를 추천함으로 섬긴다[下臣事君以貨,中臣事君以身,上臣事君以人]”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남유용은 유척기가 자신의 몸을 바쳐 임금을 섬기는 중등 신하에 머물고, 어진 신하를 천거하여 나라에 보탬이 되는 상등 신하로서의 역할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평하고 있다.


도4 김명국필金明國筆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지본채색, 119.7×56.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이한 화가 김명국

17세기 조선에서 수많은 기행으로 유명한 인물 중에 김명국金鳴國(혹은 金明國)이 있다. 도화서 화원으로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 조선통신사 수행 화원으로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다. 남유용은 김명국에 대한 전기를 남겼다.


김명국은 화가이다. 그 그림은 옛 것을 따르지 않고 마음으로 깨침에 전념한 것이다[其畫不師古而專於心得]. 인조 때 노란 비단 빗접에 명국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명하였다. 열흘이 지나 올렸는데 정말 그리지 않았다. 인조가 화가 나서 벌을 주려고 하니, 명국이 “신은 틀림없이 그렸습니다. 다른 날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라 답했다. 다른 날 공주가 새벽에 빗질하니 머리빗 가장자리에 이가 두 마리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손톱으로 눌러도 죽지 않아 자세히 보았더니 그림이었다. 이에 명국의 그림이 사방에 소문이 났다.
– 《뇌연집》권27, 잡저, <김명국전金鳴國傳>



인조(재위 1623~1649)의 명에 따라 김명국이 빗, 빗솔, 빗치개 등을 담을 상자인 빗접에 그림을 그려 올렸다. 그러나 인조의 눈에는 빗접의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며칠 뒤 공주가 머리 빗질을 하고 보니, 빗에 이 두 마리가 붙어 있었다. 죽이려 하니 이가 아니라 그림이었다. 공주의 치장 도구인 빗접에 아름다운 꽃이나 나비가 아닌 꺼림칙한 이를 그렸다는 것에서도 김명국의 괴팍한 심성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나이든 인조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젊은 공주에게 살아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이 묘사가 매우 정밀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김명국의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이다. ‘술 취한 늙은이’라는 뜻의 ‘취옹’을 호로 사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명국은 한 번에 몇 말의 술을 마셨다. 그에게 그림을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많은 술을 준비해야 했다. 김명국은 술에 취한 뒤에야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남유용은 김명국의 그림에 기이한 기운이 많은 이유가 술에 취해 그렸기 때문이라 여겼다. 다른 사람 집에서 김명국의 그림을 보고 “김명국은 죽지 않았으니, 그 그림에 명국이 있다
[鳴國不死 卽其畫而鳴國在焉]”고 생각했다. 그림에서 술 취한 김명국의 번득이는 기운을 느낀 듯하다. 남유용은 그림을 통하여 화가인 김명국과 교감하고 있었다(도4).
남유용은 초상화를 품평할 때 그림 묘사는 간단히 하고, 인물의 행적을 자세히 서술했다. 초상화 찬은 바로 주인공에 대한 남유용의 인물평이다. 초상화 속의 주인공을 마주 대하고, 그 사람으로부터 감계의 의미를 끌어내었다. 남유용의 서화 애호는 그 아들 남공철에게로 이어진다.


남유용의 묘와 묘갈墓碣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57 소재)


아들인 남공철은 ‘묘비墓碑’라 하지 않고 ‘묘갈’이라 칭한 것은 ‘평소에 겸손하라’는 부친의 유훈을 따른 것이라 했다.
묘갈 원문은 《금릉집》권16에 실려 있다.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 분쟁》 등이 있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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