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⑥ 정조의 스승 남유용

도2 남유용 초상화, 견본채색, 97.3×6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우측 상단에 ‘대학사치사 뇌연남문청공 오십일세진 大學士致仕 雷淵南文淸公 五十一歲眞’이라고 씌어 있어 남유용이 51세 때인 1748년의 초상화이며, ê·¸ 아래 “임술개장壬戌改粧”이라는 글로 미루어 1802년 또는 1862년에 다시 표구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의 스승 남유용

남유용(南有容, 1698~1773)은 영조 시대 문신이며 정조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다. 명나라가 망한 지 백여 년이 지나 조선이 명의 계승자라며 명의 역사를 편찬하기도 했다. 서화를 즐겨 감상해 혼자서도 몇 달 동안이나 한 작품에 빠지기도 했다. 18세기 조선 지식인을 대표하는 그에게 서화는 수양과 감계의 대상이었다. 남유용의 삶 속에서 서화가 어떻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 알아보자.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남유용과 정조
-나를 가르친 자는 경이고, 경을 아는 자는 나

남유용의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덕재德哉, 호는 뇌연雷淵 혹은 소화小華이다. 증조가 대제학 남용익南龍翼, 할아버지는 대사헌 남정중南正重,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남한기南漢紀이고, 아들이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다. 남유용은 정조(1752~1800)의 세손 시절 보양관과 사부였다. 정조는 세 살 때부터 남유용의 무릎에서 글을 배운 것을 잊지 않았고, 남유용의 문집 《뇌연집雷淵集》에 써준 서문에서 이렇게 평했다(도1).

공公은 조용히 자신을 단속하고 지킬 줄 알아 명리名利를 쫓으려 하지 않았다. 퇴청하면 바로 문을 닫아 걸고 책을 보거나 더러 거나하게 술을 마셨는데, 취흥이 일면 시 읊조리는 것으로 즐거워했으며 영화와 복록을 마음에 연연해 하지 않았다.
– 《뇌연집》, <어제서뇌연자고御製叙䨓淵子稿>

남유용은 서울 북부에 살면서 높은 벼슬을 하던 집권층 집안을 일컫는 경화세족京華世族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상당한 재력을 기반으로 많은 장서와 고동 서화를 수집하고 감상하는 문회文會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군자君子가 귀히 여기는 것은 마음

남유용은 초상화에는 그 사람의 모습[形]과 함께 마음[心]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진자寫眞者(초상화)가 말하길 마음은 없어져도 모습은 불멸이라 하지만, 마음이 멸하고 모습이 불멸한 것이 과연 그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며, 세상에 무슨 보탬이 되겠냐고 여겼다.

군자가 귀히 여기는 것은 마음이지 모습에 있지 않다. 그 마음이 이미 후세에 전해졌다면 그 모습은 전해질 수 있고, 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마음이 후세에 전해질 수 없는데, 그 모습만 홀로 전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사진寫眞의 도는 오직 사진자만이 그것에 힘쓸 것이지, 군자는 좇지 않는다.
– 《뇌연집》 권12, 서序, <증사진자박선행서贈寫眞者朴善行序>

큰 성취를 이룬 사람은 기록을 통해서 후세에 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요순堯舜이 성인이고, 걸桀과 척跖이 악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말과 일을 기록하는 학문이 있었기 때문이니 말과 일이 전해지면 그 마음이 전해지고, 모습은 거기에 붙어서 전해진다고 보았다.


도1 《뇌연집雷淵集》, 30권 15책: 사주단변 반곽 20.9×14㎝, 10행 20자, 상엽화문어미: 31×19.8㎝,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1782년(정조 6) 정조의 명으로 교서관에서 편집·간행하였다. 맨 앞에 정조가 1782년에 지은 어제서御製序가 심념조沈念祖의 글씨로 실려 있다.


초상화

남유용은 이렇게 초상화 제작에 조심스러웠지만, 그 후 인생의 성취가 있어 초상화를 남기게 된다(도2).

세상에 간략하여 정靜으로 체體를 삼고 사람들에게 담담하여 졸拙로 용用을 삼았네. 푸른 바다의 밝은 구슬은 무심하였기에 얻었고 석실石室의 비밀스러운 글은 인연이 있는 자가 안다. 도道는 무미無味한 데서 맛을 아는 데 두었고 몸은 재주와 재주 없는 사이에서 노닐었다. 장강長康(고개지顧愷之, 348~409)의 훌륭한 솜씨를 만나면 반드시 그대를 은일 거사로 만들어 주리라.
– 《뇌연집》 권27, 잡저雜著, <자제화상찬自題畫像贊>

자신의 초상화에 붙인 찬讚에서 자신의 삶의 태도를 간략히 진술하고 있다. 세상일에 담담하여 내세우지 않았으나 문장에서 성과가 있어 후세에 인연이 있는 자는 자신의 글을 알아줄 것이라 기대하였다. 다만, 초상화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고개지와 같은 뛰어난 화가를 만나면 마음속의 무위적인 뜻도 잘 묘사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도3 필자 미상, 어부도漁父圖, 견본채색, 35.2×149.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자와 시기를 알 수 없는 어부도다.


어부도

남유용은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726년 그의 나이 29세에 <어부도漁父圖>를 그렸다. 형인 남유상(南有常, 1696∼1728)의 감상평에 그림의 정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물결은 파도치고, 높은 하늘에 구름이 뭉실뭉실하고, 나무 우거진 쓸쓸한 산이 어슴푸레 저무는데 한 사람의 어부가 있다. 배 위에서 낚싯대 드리우고, 죽순으로 머리를 덮은 채 긴 도롱이는 정강이를 덮었다. 어부는 고요히 구부려 자는 듯하고 물고기는 물속 깊이 헤엄치고 있다.
– 《뇌연집》 권13, 제발題跋, <제백씨어부도소사후題伯氏漁父圖小詞後>

산과 구름을 배경으로 물결치는 바다 위에서 고요히 낚시하는 어부의 모습은 다름 아닌 남유용 자신일 것이다. 남유상은 그림을 묘사하고 마지막에 묻는다.

“그대 무엇을 그리워하는가(피재하모彼哉何慕).”

여기서 ‘하모何慕’는 당나라 장구령(張九齡, 673~740)의 <감우십이수感遇十二首> (《전당시全唐詩》)에 보이는 ‘익자하모弋者何慕’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새 사냥꾼 익자는 높이 나는 새를 사냥할 방법이 없다는 것에서 어진 이가 은거 생활하는 것을 비유한다. 남유상은 동생의 그림을 통하여 남유용의 지향을 이해한 것이다.


도4 왕휘지의 쾌설시청첩책[冊晉王羲之 快雪時晴帖冊], 자유중국, 23×14.8㎝,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무위자연의 삶

남유상의 <어부도> 감상평에 대하여 남유용은 답했다. 어부는 태화자太華子(남유상)의 글이 세상에 전해지면 세상 사람들이 서암 아래 고목 물가에서 자신의 뒤를 밟을 것을 염려하며 화가 났다. 이때 만난 남유용은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어부를 책망하며 이야기한다.

네 일찍이 태화자를 알지 못했고 태화자 또한 일찍이 너를 특별히 어부라 부르지 않았다. 어부라 칭하는 것이 천하에 너뿐인가. 태화자가 본 것이 우연히 너였다. 사람들이 너를 찾아도 또한 태화자가 본 어부일 뿐이니, 이전의 네가 아니다. 그러나 네가 정말로 너라는 것은 영지인永之人(어리석은 사람의 비유)이 미워하는 것이 반드시 뱀이 아닌 것과 같다. 너 어떻게 벗어나려는가. 너 어찌 너의 배를 팔아 소를 사고, 너의 낚싯대를 주물러 채찍으로 만들지 않는가.
– 《뇌연집》 권13, 제발, <제백씨어부도소사후>

남유상이 찬에서 어부의 마음을 들여 보자, 그림 속의 어부인 남유용은 자신의 내면을 들킨 기분이었다. 남유용은 어부에게 세상 사람이 찾는 것이 싫다면 나무꾼이 될 것을 권한다. 이름은 껍질이고 중요한 것은 어부 자신임도 일깨워주었다. 다름 아닌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무위자연의 도가적 삶을 지향하는 남유용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왕휘지의 대나무

남유용은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서화에 깊은 식견이 있었다. 남유용의 서화에 대한 생각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림을 좋아하는 것이 왕휘지(王徽之, 338~386)에게 대나무와 같았다. 다른 집에 좋은 그림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가서 보았다. 이웃에 창강滄江의 후손인 조군趙君이 살았는데, 창강은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옛 그림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일찍이 안견安堅, 이정(李楨, 1578~1607)의 그림을 보았는데, 인물화는 더욱 좋아하여 날마다 가서 보려고 했다. 주인이 혹 싫어해도 나는 더욱 물리지 않았다.
– 《뇌연집》 권13, 제발, <제백씨어부도소사후>

남유용은 자신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이 왕휘지의 대나무와 같다고 했다. 왕휘지는 대나무를 매우 좋아했다. 빈집에 임시로 거처할 때도 바로 대나무를 심으며 “어떻게 하루라도 이 군자가 없을 수 있으리오(하가일일무차군야何可一日無此君邪)”라고 할 정도였다(《진서晉書》 권80, 왕휘지 열전). 남유용은 좋은 그림이 있는 다른 집에 반드시 가 보았는데, 많은 그림이 있는 창강 조속(趙涑, 1595~1668)의 후손이 싫어해도 날마다 가서 보았다. 이렇게 남유용에게 그림은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였다.


도5 송휘종문회도축宋徽宗文會圖軸, 자유중국, 견본채색, 184.4×123.9㎝,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 우측 상단에 휘종의 제시題詩가 있고, 반대편 위에 총신 채경(蔡京, 1047~1126)의 화시和詩가 있다. 조정에 인재가 많고 문치가 당나라보다 번성했다는 내용이다. 이 그림은 휘종의 지도하에 화원畫院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그림 보는 방법

남유용은 모르는 그림도 그림의 대상을 보고 이해하였다. 색상과 색상의 밖과 의장의 사이에서 화가의 마음을 찾는 것이 남유용이 그림을 보는 방법이었다.

내가 유자兪子의 방에서 그림을 보는데 검은 원숭이가 있었다. 유자가 말하기를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그림을 보는 방법이 있는데 색상色相 밖과 의장意匠 사이에서 찾으면 화가의 마음을 열에 여덟, 아홉은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대 시험 삼아 이것은 누구의 그림이라 보는가?” 라고 물었다. 나는 “이것은 도군황제道君皇帝(휘종徽宗, 1082~1135)의 그림이다”라 말하였다. 유자가 말하기를 “그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하자 내가 말하기를 “그 뜻[意]으로 알 뿐이다. 원숭이가 새끼를 젖 먹이는 것을 보니 어미는 돌아서서 주고 새끼는 올려다보며 받는 것이 구구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저 도군은 오국五國에 사로잡혀 아비와 자식이 서로 기르지 못하고 한 사람은 북에서 한 사람은 남으로 떨어져 비록 한 그릇의 밥은 먹을 수 있지만 그 심사心思는 강왕(康王, 1107~1187)과 함께 하였으니 이 그림을 빌어 스스로의 처지를 드러낸 것이다. 아비와 자식이 저 원숭이가 서로 즐거워하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유자가 “옳다”고 하였다.
– 《뇌연집》 권13, 기記, <모장군화기毛將軍畫記>

휘종은 북송의 황제로서 시문과 서화, 특히 그림은 전문가의 경지에 달하였다. 금나라와 요나라에 빼앗긴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수복하려고 꾀하였으나, 오히려 금나라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망하였다. 오늘날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시 의란현의 오국성五國城에 끌려와 1135년 이 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강왕은 휘종의 아들로서 북송이 망하자 남쪽으로 달아나 1127년 즉위하니 남송의 고종高宗이다. 서법에 정통해 남송의 서풍을 이끌었다(도5).
남유용은 시험 삼아 건네받은 검은 원숭이 그림이 휘종의 것이라 판단했다. 검은 원숭이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며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남과 북으로 떨어져 있는 휘종과 그 아들 강왕의 처지를 유추해 낸 것이다. 남유용의 서화 지식이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을 새삼 알 수 있다.
정조는 남유용에 대해 “나를 가르친 것은 경이고, 경을 아는 자는 나[敎予者卿 知卿者予]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 24권, 제문祭文, <문청공남유용치제문文淸公南有容致祭文>) 라고 생각했다. 조선의 르네상스 군주 정조의 성취 뒤에 바로 남유용이 있었다. 17세기 대내외적 환경 속에서 조선 지식인의 지향과 서화 생활을 알 수 있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참고문헌]
남유용, 《뇌연집雷淵集》
남공철, 《금릉집金陵集》
정조, 《홍재전서弘齋全書》
吳周學, <雷淵 南有容의 문예활동과 '趣'의 구현 양상>, 《東方漢文學》54, 동방한문학회, 2013
吳周學, 《雷淵 南有容 散文 硏究》, 成均館大學校 韓國漢文學專攻 박사학위논문, 2016
문덕희, <南公轍(1760-1840)의 書畵觀>, 《동방학》1,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1996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분쟁》 등이 있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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