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⑤ 남인의 영수 허목

도2 이명기, <허목초상許穆肖像>, 1794, 견본채색, 72.1×56.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1509호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단군 조선을 우리의 역사에 편입하고 우암 송시열과 조선의 정치, 사회의 향방을 두고 치열한 다툼을 벌인 인물이다. 허목은 그림이 육예六藝에 들지 못하지만 서書의 다음이라고 보았다. 그림을 알면 그것을 사랑할 수 있다고 했다. 허목의 삶 속에서 서화가 어떻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 알아보자.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허목은 누구인가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은 병자·정묘호란을 겪고 효종, 현종, 숙종의 치세에 활동하였다. 좌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현감 허교許喬, 어머니는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의 딸이고, 부인은 오리대감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손녀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배울 적에 백 번을 읽지 않고선 외우지를 못했는데 겨우 책 한 권을 다 배우자 그 뒤로는 글 뜻에 막히는 것이 없었다.
56세 되던 효종 원년(1650)에 비로소 관직에 들어선 허목은 남인을 대표하며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정치적 논쟁을 벌였다. 숙종의 신뢰를 받아 81세가 되던 해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주자학 일변에서 벗어나 원시 유학을 중시했다. 그림·글씨·문장에 모두 능했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篆書에 뛰어났다. 문집으로 《기언記言》 67권과 《기언별집記言別集》 26권이 있으며, 그 대부분을 《미수기언》이라는 이름으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하여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문집에는 허목의 서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도1).


도1 《기언記言》 중 4책, 30.4×21.5㎝, 두께 3.0㎝, 목판본, 성호박물관 소장. 1667년 《경설經說》과 《동사東事》를 완성하고, 이해 11월 《기언》 서문이 완성되었다.


나는 이런 사람, 허목의 자평

허목은 행동거지에 신중하였다. 나이 87세(1681년)에 지은 자신에 대한 평에서 자신은 평생 부족함을 보충하려 책을 읽었고, 글은 당시 유행하던 것이 아니고 중국 하夏·은殷·주周 시기의 고문을 즐겨 읽었으나 소득은 없다고 겸손해하였다. 우리나라 고대의 역사를 기록한 《동사東事》(1667년)에서 단군 조선에 주목하고, 글씨도 전체篆體를 즐겨 쓴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모습도 기록에 남겼다. <사영자찬寫影自贊>과 <우자찬又自贊>은 허목 자신의 초상화에 대한 글이다.

수척하면서도 헌걸차고
우묵한 이마에 긴 눈썹
손에 문文 자를 쥐고 발로 정井 자를 밟고
담담하면서도 화락하다.
– 《기언》 제9권 원집 상편, 도상圖像, 우자찬

허목은 자신이 야위었지만 기개가 있고, 우묵하고 긴 눈썹을 가졌으며, 태어날 때부터 문자 손금과 정자 발금이 있고, 전체적으로 담담하면서도 화락하다며 만족해하였다.

허목의 초상화

다행히 허목이 말한 그의 모습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초상화가 있어 확인할 수 있다(도2). <허목초상>은 화폭 상부에 있는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쓴 제발문에 제작 과정이 기재되어 있다. 1794년 정조가 허목에 크게 감동하여 그의 모습을 보고자 하자, 영의정 채제공 주도로 당대 최고의 화가인 이명기(李命基, 1756~1813)가 그린 것이다. 채제공은 제발문에서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정조 18년(1794)에 임금께서 문정공 미수 허목을 오래도록 흠모하시어 초상화를 구해 보고자하여 신 채제공에게 명을 내렸다. 신은 사람과 의논하여 이에 가을 7월 26일에 경기도 연천 은거당恩居堂에서 선생의 82세 초상화를 받들어 서울로 가지고 와 당시의 뛰어난 화가인 이명기에게 모사하여 올리게 하였다. 임금께서 그것을 보시고는 따로 비단을 준비하여 명기에게 이모移模하여 첩帖을 만들어 궁궐에 두게 하시고 들여온 그림은 그 후손에게 돌려보내라고 하셨다.”

반신상 초상화에서 허목은 오사모에 담홍색 관복을 입고 무소뿔 허리띠를 두르고 있다.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허목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미수를 평하기를, 여윈 얼굴 긴 눈썹에다 늘씬하고 출중하여
바라보기에 신선 같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아 강직하며 시원스러운 운치가 있다고 했다. (《기언》, 부록附錄, 신도비명)


도3 문징명, 《산수도책山水圖冊》, 지본묵필紙本墨筆, 28.5×15.8㎝, 고궁박물원故宫博物院 소장
《산수도책》의 일부이다. 문징명이 그린 그림들 옆에 제자인 주천구(周天球, 1514~1595), 육사도(陸師道, 1510~1573), 왕치등(王穉登, 1535~1612)이 붙인 제시題詩로 이루어져 있다


마음에 맞는 서화를 보는 건 운이 좋은 일

허목은 명나라 궁정화가인 고병顧炳이 1603년 발간한 《고씨화보顧氏畵譜》를 소장하고 있었고, 거기에 수록된 명나라 형산衡山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시서화詩書畫가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고씨화보》는 중국 육조六朝부터 명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의 대표적 화가들의 작품 106점이 실린 화보였다. 발간 직후인 1606년에서 1614년 사이에 조선에 전래되자 사대부들이 모여 화보의 그림을 즐겨 감상했다.
그런데 《고씨화보》를 난리 통에 잃어버린 지 수십 년 후인 1657년 여름, 최후량(崔後亮, 1616~1693)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 중에서 문징명의 그림을 다시 보게 되었다. 허목은 운이 좋다고 여겼다. 허목은 문징명의 시서화가 모두 ‘기절하여 볼 만하다[奇絶可玩]’고 평했다(도3). (《기언》 별집 제10권, 발跋, 형산삼절첩발衡山三絶貼跋)

그림[畵]은 글씨[書] 다음

허목은 1667년에 작성한 〈낭선공자화첩서朗善公子畫貼序〉에서 “그림은 육예六藝에 들어가지 않지만 글씨[書]의 다음이다[畫雖不列於六藝 亦書之次也]”고 했다. 육예란 중국 고대 유가에서 선비들에게 요구한 여섯 가지 기본 재능이며 교육의 총칭이었다. 《주례周禮》에서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육예라 하였다. 이어지는 글에서 허목은 우리나라의 뛰어난 그림으로 해인사 벽화, 고려 때 경천사 석탑의 부도도浮屠圖와 성거산 화장사華藏寺의 공민왕 조경자사도照鏡自寫圖를 꼽았고, 조선의 고인顧仁과 안견安堅을 뛰어난 화가로 분류했다.
허목은 예술의 오묘함은 마음과 힘을 모아 전념해야 터득할 수가 있다고 보았다[凡技藝之妙 不專則不得]. 어몽룡(魚夢龍, 1566~1617)의 매화, 황집중(黃執中, 1533~1593 이후)의 포도, 이정(李霆, 1554~1626)의 대나무 그림을 그러한 예로 들었다.


도4 전傳 이상좌,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 견본채색, 190×81.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알면 사랑할 이상좌의 그림

<이상좌불화묵초발李上左佛畫墨草跋>은 천인 출신의 화가 이상좌李上佐의 불화를 보고 쓴 발이다. 이상좌의 먹으로 그린 불화는 거의 천고의 절화絶畫로서, 귀신의 묘경妙境에 들어갔다고 감탄했다. 백 세 뒤라도 반드시 이 그림을 아는 자가 그것을 사랑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 글에서 산수와 인물화를 잘 그린 사람을 평하였다. 고인과 안견이 산수山水를 잘 그렸고, 이상좌의 인물화는 신묘하다고 했다(도4). (《기언》 별집 제10권, 이상좌불화묵초발)
병자호란 이후 허목은 영남 산청에서 이상좌의 손자인 이정李楨이 그린 8폭 산수도를 보았다. 멀리 보이는 모래사장과 안개 싸인 숲이 아름답다고 품평했다. (《기언》 별집 제9권, 이정산수도기李楨山水圖記) 이정은 산수와 인물도 능하고 글씨도 잘 썼으며, 장안사 벽화壁畫 그림이 유명했다.

이산해의 포도 그림

주변 사람 중 서화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허목에게 찾아와 품평과 함께 글을 청했다.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묵포도墨葡萄 그림에 대한 품평도 이런 연유로 작성되었다. 이산해가 죽기 전에 자신의 그림은 허목만이 알아주고, 글은 반드시 후세에 전해질 것이라며 허목의 글을 받아 보관하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감격하여 적은 것이다. 이산해의 그림이 “뻗어가는 넝쿨, 피어나는 잎새, 드리워진 열매가 옛사람의 오묘한 경치를 그대로 잘 살려 아주 신비스러운 데가 있다”고 평했다. (《기언》 제29권 원집 하편, 서화書畫, 포도첩기葡萄貼記)


도5 <척주동해비> 탁본, 비신 재료 오석烏石, 비석 높이 170㎝, 너비 76㎝,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전서로 이름난 미수의 글씨, 척주동해비

미수 허목의 글씨로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삼척부사 시절 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일 것이다(도5). 척주는 삼척의 다른 이름이다. 아래는 <척주동해비>의 내용인 <동해송東海訟>의 일부이다.

바다 밖 갖가지 종족과 산물들은
무리도 풍속도 서로 전혀 다르지만
한 누리에서 함께 보살핌 받고 있네
옛 성인의 덕 멀리 미쳐
여러 번 통역 거쳐야하는 온갖 오랑캐들마저
아무리 멀어도 찾아와 복종하지 않는 이 없었네
거룩하도다 찬란하도다
위대한 그 다스림 널리 미쳤으니
유풍이 오래도록 전해지리라
– 《기언》 제28권 하편, 산천山川 하下, 동해송

1661년 허목 나이 67세에 <동해송>을 지어 옛 전서篆書로 바닷가 돌에 새겼다. 바다의 광대함과 바다에 있는 괴물 및 이민족에 대한 서술을 통해 옛 성인의 유풍을 찬양했다. 물난리를 겪는 삼척 지역민을 위로하기 위해, 사나운 바다를 위무하는 차원에서 당시 도호부사였던 허목이 손수 글을 짓고 비문도 썼다. 이 비석이 동해의 파도를 물리치는 효험이 있는 ‘퇴조비退潮碑’라 불리게 된 것은 비석의 글씨 때문이었다. <척주동해비>는 허목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구불구불한 전서체 글씨로 쓰여 그 기이함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허목은 예술의 오묘함은 마음과 힘을 모아 전념해야 터득할 수가 있고, 그림을 알아야 그림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이’, ‘절묘’, ‘천고의 절화’, ‘귀신의 묘경’, ‘신묘’. ‘신비’ 등의 말로 그림을 평했다.

[참고문헌]
허목, 《기언記言》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정옥자, <허목>,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상, 창작과비평사, 1994
송혜경, <顧氏畵譜와 조선후기 회화>, 《미술사연구》 19, 2005
신정혜, <朝鮮 初期 畵院畵家의 畵風 硏究>,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9
윤성훈, 《미수(眉叟) 허목(許穆) 고문(古文) 서예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9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 분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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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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