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④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 박지원Ⅱ

도2 <유덕장필묵죽도柳德章筆墨竹圖>, 지본채색, 178×77.4㎝, 축 길이 83.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덕장의 자는 자고子固 혹은 성유聖攸, 호는 수운岫雲이다. 조선 중기 이정(李霆, 1554~1626), 후기의 신위(申緯, 1769~1847)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대나무 화가로 불린다.



지난 호에 이어 조선 최고의 문장가이며 실학자인 박지원의 이야기를 전한다.
글[文]을 알려면 그림[畵]을 알아야 한다고 한 박지원의 삶 속에서 서화의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연행 길에서 만난 서화들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문학적 명성을 드높인 것은 《열하일기》이다(도1). 그는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조선 특별 사행의 일원으로 연행燕行을 다녀오며 느낀 감상을 여러 편으로 나누어 적었다. 7월 24일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8월 4일 연경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관내정사關內程史> 편에는 연암 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호질虎叱>이 있고, 서화에 대한 견문도 보인다.
1780년 7월 25일 박지원은 무녕현撫寧縣을 지나 영평부永平府에서 숙박했다. 무녕과 영평부는 만리장성의 관문인 산해관을 통과한 후 이틀 정도 지나 숙박하던 곳이었다. 이곳에는 은나라 고죽국孤竹國의 충신인 백이와 숙제를 기리는 이제묘夷齊廟가 있어 연경으로 향하는 조선의 사절단이 반드시 들르는 지방이었다. 연암 일행이 무녕현을 지날 때 방문한 진사進士 서학년徐鶴年의 집은 청의 대신이나 조선의 사신들도 들렀다. 서학년이 1723년경 이곳을 지나던 조선 연행사인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0)에게 자신의 서화를 보여주었고, 그로부터 서학년의 이름이 조선에 알려져 사신들도 즐겨 찾았다. 집안에는 청의 유명 인사들이 쓴 시문의 글씨와 더불어 침실 문설주 위에 윤순의 칠언 절구, 참판 조명채(曺命采, 1700~1764)가 차운次韻한 글도 있었다. 이것을 보고 박지원은 종이와 붓이 어떤 것이 좋고 나쁜지를 품평하기도 했다.
7월 25일 저녁, 영평부의 호응권胡應權이란 사람의 집에서 화첩畵帖 하나를 보았다. 호응권은 그날 초저녁 때 점포에서 조선의 김金 상공相公으로부터 은 3냥 5푼으로 샀는데, 표지를 고치면 7냥 정도의 값어치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김 상공은 호응권과 안면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수차 이곳을 왕래한 조선 출신 역관일 듯싶다. 호응권은 마치 세상에 다시 없는 보배인 듯 사뭇 조심조심하여 화첩을 받들고 꿇어앉아서 펼치고 닫는 데도 깍듯했다.
호응권은 붉은 주사 한 홀笏을 패물로 주며 화첩에 있는 그림의 작자를 연암에게 알려주기를 청하였다. 연암이 보건대, 조선의 서화첩 중에는 연호年號도 없고 이름을 적기도 꺼리며, 시축詩軸의 끝에 흔히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하였을 뿐 어느 때 어느 곳 누구의 솜씨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연암의 말을 통하여 당시 조선에 작자와 시기를 알 수 없는 서화첩이 유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러한 그림은 그 성격상 민화에 해당될 것이다.


도1 《열하일기》 필사본, 10책, 1783년(정조 7), 23×15.5㎝, 규장각 소장
《열하일기》 서문은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열상화보

연암은 호생권의 서첩에 있는 그림과 별호別號 등을 참고하여 화제와 작자 이력을 적어 주었다. 《열하일기》의 <열상화보冽上畫譜>가 바로 이것이다. 열상은 한강의 이칭인 열수冽水에서 온 말로 우리나라, 조선을 뜻한다. <열상화보>에 게재된 작가는 충암冲菴 김정(金淨, 1486~1521), 김식(金埴, 1579~1662), 이경윤(李慶胤, 1545~1611),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 허주재虛舟齋 이징李澄, 연담蓮潭 김명국金鳴國,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1775),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 1685~1766), 수운峀雲 유덕장(柳德章, 1675~1756)(도2),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1710~1760),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연객烟客 허필(許佖, 1709~1768)이다.
연암은 16명의 작자 이력과 화제를 기록했다. 윤덕희가 6건, 정선이 4건, 이정·심사정·유덕장·강세황·이인상이 각각 2건이고, 나머지는 각 1건의 그림이 있었다. 작자들은 조선 중종 때의 김정으로부터 연암 당시에 이르는 당대 이름난 서화가가 망라되어 있다. 연암은 그림의 주제와 작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연암의 폭넓고 깊은 서화 지식이 드러난다. 다만, 화첩에는 작자를 알 수 있는 30건의 그림 47면 이외에 연암이 작자와 시대를 알 수 없는 다수의 민화류 그림도 실려 있었다.
<열상화보>는 호응권이 김 상공으로부터 은 3냥 5푼으로 샀지만, 연암이 보기에 먹이 비늘 같이 쌓이고 해져서 한 푼어치도 안 되어 보였다. 아마도 조선의 유명 서화를 서툴게 모사한 화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조선의 서화가 청나라에서 거래되며 유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도3 이당, <장하강사도長夏江寺圖>, 견본채색, 44×249㎝, 북경고궁박물원 소장
연암은 <장하강사도>의 첫머리에 고종이 “이당은 당 나라 이사훈李思訓에 견줄 만하다”는 제사題辭를 썼다고 했다. 이 그림은 장강(양자강) 유역의 늘어선 봉우리와 사당, 그리고 반짝이는 강물에 드나드는 배들이 장엄하게 묘사되어 있다.


연경에서 본 서양화

연경을 방문하는 조선 사절 일행은 책과 그림을 파는 가게가 즐비한 유리창琉璃廠을 방문하고, 또한 서양 문물을 탐색하기 위해 천주당天主堂을 찾는 것이 다반사였다. 연암도 열하로부터 북경에 들어간 즉시 선무문宣武門 안에 있는 천주당을 찾아 그곳의 그림을 보고 느낀 바를 기술했다.
연암은 천주당에 들어가 벽과 천장 그림 속 인물에 압도당하였다. 마음이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고, 언어·문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연암이 눈으로 보려고 하니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먼저 연암의 눈을 뽑고, 가슴속을 꿰뚫고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필묵筆墨은 거칠고 성글지만 귀·눈·코·입, 터럭·수염·살결·힘줄 등이 희미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어둡고 밝은 부분이 절로 드러나며 숨을 쉬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부인의 무릎에 5~6세 남자아이가 앉혀 있다. 어린애가 핏기 없는 흰 눈으로 바라보니, 부인은 고개를 돌려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옆에는 시종 5~6명이 병든 아이를 내려보며 참담해서 머리를 돌리고 있는 자도 있다. 새 날개를 단 귀신 수레는 박쥐가 땅에 떨어지는 듯 슬그머니 돌고, 한 신장神將이 발로 새의 배를 밟고, 손에는 무쇠 방망이를 쳐들고 새 머리를 찧고 있다. 사람 머리와 몸뚱이에 새 날개가 있어 나는 자도 있으며, 백 가지가 기괴하여 비교할 것이 없다.”
– 《열하일기》, <황도기략黃圖紀略>, 양화洋畫

천주당 벽에 그려진 병든 아이를 안고 있는 부인과 부근에 있는 시종들의 모습, 날개 달린 천사와 악마의 모습을 세밀하게 전하고 있다. 연암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읽은 사람이 천주당 안에서 직접 보고 느끼는 것 같다. 연암의 현장감 있는 문장 묘사가 직접 그림을 보는 듯이 생생하다.


연암의 서화 품평

연암은 《연암집》 제7권 별집, <종북소선鍾北小選>에 7편의 제발題跋을 남겼다. 제는 서화·비첩碑帖 등의 앞면, 발은 뒷면에 쓴 글자이며, 대부분 그 내용이 품평·감상·고증·기사記事 등이다. 서화의 제발은 작품의 일부분이다. 한 편의 제는 이당李唐의 그림에 대한 것이고, 6편의 발은 <천산엽기도天山獵騎圖> 1건,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4건, <국화시菊花詩 시축詩軸> 1건에 대한 것이다.
이당(1066〜1150)의 그림에 대한 제이당화題李唐畵는 연암 나이 37세 때인 1774년 섣달 그믐날 저녁에 쓴 글이다. 이당은 북송 말 남송 초의 화가이다. 고종(高宗, 1107~1187)이 평소 그의 그림을 사랑해 건염建炎 연간(1127~1130)에 화원대조畵院待詔를 제수除授하고 금대金帶를 하사하였다.
이당의 화첩은 만력 연간(1573~1620) 말에 조선에 들어왔고, 연암이 이당의 화첩을 본 것은 한양의 고동화 가게나 거간꾼을 통해서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화첩의 주인이 설을 쇨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그림을 내놓았다. 연암은 아마도 기계 유씨兪氏 집안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했다. 화첩의 값이 자그마치 5천냥이라 가난한 연암은 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므로 그 내력이나마 기록했다. 화첩이 아니라 연암 자신의 용지에 작성하였을 것이다.

무덤에 묻힐 뻔한 <청명상하도>

4편의 <청명상하도발淸明上河圖跋> 중 1건은 소장자 표기가 없고, 나머지 3건은 관재觀齋 서상수(徐常修, 1735∼ 1793), 일수재日修齋 박명원(朴明源, 1725~1790),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소장자였다.
<청명상하도>는 북송 시기 풍속화로 중국의 대표적 명화이다. 화가 장택단(張澤端, 1085?〜1145)의 작품으로 현재 북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도4). 12세기 북송의 수도인 동경東京(변경汴京이라고도 하며, 오늘날 중국 하남성開封市)의 청명절 시기 활기찬 모습이 그 배경이다. 명·청 시기 <청명상하도>는 장택단의 진품이 아니고 후대의 화가들이 모방하여 그린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서도 명나라 화가 십주十洲 구영(仇英, 1498?〜1552?)의 것이 화품畵品으로 최고라는 평을 받았다.
서상수가 소장한 <청명상하도>는 이전에 당대 최고의 컬렉터인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 1699~1770)의 애장품이었다. 김광수는 골동품이나 서화의 감상에 정밀하여, 절묘한 작품을 만나면 집 안에 있는 자금을 다 털고, 전택까지도 다 파니 진귀한 물건은 모두 다 그에게로 돌아갈 지경이었다. 그러니 집안은 날로 가난해졌다.
노년에 이르러서 하는 말이 “나는 이제 눈이 어두워졌으니 평생 눈에 갖다 바쳤던 것을 입에 갖다 바칠 수밖에 없다”하면서 물건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팔리는 값은 산 값의 10분의 2, 3도 되지 않았으며, 이도 이미 다 빠져 버린 상태라 이른바 ‘입에 갖다 바치는’ 것이라곤 모두 국물이나 가루음식뿐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연암집》 제7권 별집, <종북소선>, 관재가 소장한 청명사하도 발문)
김광수는 자신의 <청명상하도>가 십주 구영의 진품이라 여기어 훗날 자신이 죽으면 무덤에 같이 묻히길 다짐할 정도였으나, 병이 들자 내놓아 서상수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도4 <청명상하도> 부분, 견본채색, 두루마리, 24.8×528㎝, 북경고궁박물원 소장
적게는 500여 명에서 많게는 1,695명의 사람, 각종 가축 60여 필, 배 20여 척, 집과 건물 30여 채, 수레와 가마 20여 건이 다시점 투시도법으로 그려져 있다. 사진은 청명상하도 뒷부분이다.


서화골동, 수장가와 감상가

연암은 고대 중국 하·은·주의 옛날 그릇이나 종요鍾繇·왕희지王羲之·고개지顧愷之·오도자吳道子의 친필이 한 번도 압록강을 건너온 적이 없다고 보았다. 당시 조선에 일부 수장가가 있지만, 그들이 소장하는 서적은 건양建陽의 방각坊刻이고 서화는 소주蘇州 지역의 위조품에 지나지 않았다. 건양의 방각이란 송나라 때 복건성 건양현에서 인쇄한 방각본 같이 조잡한 책을 말한다. 심지어 이러한 물건에 높은 값을 쳐주고, 진귀한 물건은 버리고 간직할 줄 모르니, 슬픈 일이라 한탄했다.
화가이자 서화고동書畫古董 감식가 및 수장가로 이름난 인물이었던 상고당 김광수에 대하여 연암은 그가 감상학을 개창한 공이 있으나, 재기가 부족하다고 보았다. 오히려 관재 서상수가 눈에 닿는 모든 사물의 진위를 판별해 내는 식견에 재기까지 겸비한 자라고 높게 평했다.

“무릇 서화나 골동품에는 수장가가 있고 감상가가 있다. 감상하는 안목이 없으면서 한갓 수장만 하는 자는 돈은 많아도 단지 제 귀만을 믿는 자요. 감상은 잘하면서도 수장을 못 하는 자는 가난해도 제 눈만은 배신하지 않는 자이다.”
–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필세설筆洗說

김광수와 서상수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고 감상의 요체를 설명하는 것에서 연암의 서화와 골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엿볼 수 있다. 연암은 수장가와 감상가 중 후자에 해당될 것이다.


[참고문헌]
박지원, 《연암집燕巖集》 (한국고전종합DB)
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 (한국고전종합DB)
박종채, 《과정록過庭錄》 : 박희병 역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개, 2010
정은주, <燕行에서 書畵求得및 聞見 사례 연구>, 《미술사학》 26, 2012
정훈식, <朴趾源의 古董書畵인식과 鑑賞之學>, 《한국문화》 88, 2019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 분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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