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③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 박지원Ⅰ

도5 박지원, <국화도>, 37×27.8㎝,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조선 최고의 문장가이며 실학자인 박지원은 글[文]을 알려면 그림[畵]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박지원의 삶 속에서 서화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박지원은 누구인가

연암 박지원(朴趾源, 1937-1805)은 본관이 반남潘南, 자는 중미仲美이다. 조부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은 경기도관찰사와 호조참판을 지냈으나, 부친 박사유(朴師愈, 1703-1767)는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도1 박주수, <박지원 초상>, 37×29.5㎝, 실학박물관 소장 – 박지원의 손자이며 박규수(朴珪壽, 1807-1876)의 동생이기도 한 박주수(朴珠壽, 1816-1835)가 그렸다고 한다

연암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그 아들 박종채(朴宗采, 1780-1835)의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연암은 안색이 불그레하고 윤기가 났으며, 눈자위는 쌍꺼풀이 졌고 귀는 희고 컸다. 광대뼈는 귀밑까지 뻗쳤으며 긴 얼굴에 듬성듬성 구레나룻이 있었다. 이마에는 달을 볼 때와 같은 주름이 있었다. 키가 크고 살이 쪘으며 어깨가 곧추 솟고 등이 곧아 풍채가 좋았다. 한 끼에 쌀 한 말과 큰 구리쟁반 세 접시의 고기를 들기도 했다는 등, 용모가 늠름하여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도1). 생전에 초상화 두 점이 있었지만 별로 닮지 않았다며 없애버렸다고 한다.
연암은 1771년경 과거를 포기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홍대용洪大容 및 문하생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유했다. 1780년(정조 4)에는 8촌 형인 박명원(朴明源, 1725-1790)이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1711-1799)의 칠순을 축하하는 사행使行의 정사正使로 가게 되자, 그의 수행원으로 청나라 수도인 연경燕京(오늘 날의 북경)을 다녀왔다. 사신단은 1780년 5월 25일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한양을 출발, 8월 1일 연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열하熱河로 오라고 하여 8월 9일에 열하에 도착해 건륭제를 만났다. 다시 8월 20일 연경에 돌아와 9월 17일 출발하기까지 각종 행사에서 다양한 인물을 만났다. 당시의 견문을 기록한 것이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이며, 이 책은 조선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연암의 문집인 《연암집燕巖集》 17권 6책이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되어 있다. 그중 제1권부터 제10권까지가 일반 시문이고, 제11권부터 제15권까지가 《열하일기》, 제16권과 제17권은 농업기술과 농업정책을 논한 《과농소초課農小抄》이다. 《연암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통틀어 시詩 42수, 문文 237편이다.


도2 《연암집》, 29.2×19㎝,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그림은 글이다

연암은 그림을 알아야 글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역周易》을 읽지 않으면 그림을 알지 못하고, 그림을 알지 못하면 글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포희씨가 《주역》을 만들 적에 위로는 하늘을 살피고 아래로 땅을 관찰하여 홀수인 양효陽爻와 짝수인 음효陰爻를 배가한 것에 불과하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그림이 되었으며, 창힐씨蒼頡氏가 문자를 만들 적에도 사물의 정情과 형形을 곡진히 살펴서 상象과 의義를 다시 빌어온 것에 불과하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글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암집》 제7권 별집, 종북소선鍾北小選, 자서自序)

복희伏羲라고도 하는 포희가 만든 《주역》이 하늘을 살피고 땅을 관찰하여 홀수와 짝수를 더한 것이고, 이러한 것이 바로 그림이라고 보았다. 연암은 나아가 그림과 글이 같다고도 생각했다. 글은 생각을 묘사하는 것인데, 그림도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글이란 뜻을 그려내는 데 그칠 따름이다. 글제를 앞에 놓고 붓을 쥐고서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거나, 억지로 경서經書의 뜻을 찾아내어 일부러 근엄한 척하고 글자마다 정중하게 하는 사람은, 비유하자면 화공畫工을 불러 초상을 그리게 할 적에 용모를 가다듬고 그 앞에 나서는 것과 같다.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옷은 주름살 하나 없이 펴서 평상시의 태도를 잃어버린다면, 아무리 훌륭한 화공이라도 그 참모습을 그려내기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사람도 어찌 이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 (중략) 그러므로 이 책을 보는 사람이 부서진 기와나 벽돌도 버리지 않는다면, 화공의 선염법渲染法으로 극악한 도적의 돌출한 귀밑털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요, 남의 귀 울리는 소리를 들으려 말고 나의 코 고는 소리를 깨닫는다면 거의 작자의 뜻에 가까울 것이다.”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자서自序)

연암이 생각하는 그림은 초상화조차도 평상시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암의 ‘사진寫眞’이라는 말은 초상화를 그린다는 의미인데, 이 ‘진’을 ‘의意’라고도 썼다. 조선의 초상화는 일반적으로 왕이나 특별한 공적을 이룬 인물이 대상이니, 이른바 왕족, 공신, 시조 등이 그 주인공이다. 화공은 용모를 가다듬고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주름살 하나 없이 핀 옷을 입은 인물을 털끝조차도 자세하게 그렸다. 연암은 이것은 평상시의 태도가 아니므로, 그 인물의 참 모습이 아니라고 했다. 훌륭한 화공은 평상시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연암은 대상을 그대로 본뜨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지닌 정신을 그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령, 잣나무를 똑같이 그리기보다는 잣나무가 가진 푸른 기상, 그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푸르른 잣나무를 마음으로 그려내는 것, 이를 연암은 몰골도沒骨圖라고도 했다.


도3 이인상, <구룡연도>, 118.2×58.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연암 집에 있던 <구룡연도>가 이 그림을 모방해 그린 것이 아닐까.


까마귀는 푸르고 붉다

연암은 한 가지 사물에 대해서도 깊이 천착했다. 색깔이 있는 것은 빛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형체[形]가 있는 것은 맵시[態]가 있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니,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모습에 주목한 19세기 후반 서양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하는 이야기와 유사하다. 그 예로 까마귀를 들어 설명한다.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유금乳金 빛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석록石綠 빛으로 반짝이기도 하며,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튀어 올라 눈이 어른거리다가 비췻빛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 새에게는 본래 일정한 빛깔이 없거늘, 내가 눈으로써 먼저 그 빛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으리오. 보지 않고서 먼저 그 마음으로 정한 것이다.”
(《연암집》 제7권 별집, 종북소선鍾北小選,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

연암은 까마귀가 검다고 하는 것이 고정 관념이라고 주장한다. 까마귀는 보는 위치나 햇빛이 비치면 유금빛, 석록빛, 자줏빛, 비췻빛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세밀한 관찰을 통해 체득했다. 까마귀의 검은 색色 안에 푸르고 붉은 빛[光]이 들어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습이나 진부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늘 새롭게 보려는 연암의 탐구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도4 傳 미불米芾, <춘산서송도春山瑞松圖>,지본채색, 62×44㎝, 대만 北故宫博物院 소장
– 그림은 송나라 시기의 모방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면 왼쪽 아래에 ‘미불米芾’이라는 글자가 있으나 후대 사람이 더한 것으로 보이며(확대한 부분), 화면 위 오른쪽에 ‘건륭어람지보乾隆御覽之寶’라며 건륭제가 이 그림을 보았다는 인장이 찍혀 있다.


박지원의 서화 수준

연암의 서화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을까. 연암은 젊을 적에 당대의 서화가로 이름난 단릉丹陵 이윤영(李胤永, 1714-1759)과 능호凌壺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을 좇아 노닐면서 간혹 장난삼아 그들의 화풍을 본떠 그리기도 했다. 이윤영은 시인·문인·서화가로서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고, 이인상도 시·서·화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이라 했다. 집에 있는 조그마한 산수화 족자 둘과 <일출도日出圖>, <군선도羣仙圖>, <구룡연도九龍淵圖> 등 여러 작은 그림들이 그때의 그림이었다(도3).

도4-1 도4 부분

이덕무는 《청비록淸脾錄》에서 연암의 글씨와 그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연암은 고문사古文詞에 있어서 재사才思가 넘치고 고금에도 통달하였다. 때로 평원平遠한 산수山水를 그렸는데, 듬성듬성하고 그윽한 정취가 넉넉히 대미大米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행서行書와 해서楷書는 뜻대로 되었을 때 쓴 것은 자태가 수려하고 기기묘묘하여 비교할 것이 없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34권, 청비록3, 연암燕巖)

평원한 산수란 다름 아닌 산수화이다. 연암의 산수화 수준으로 언급된 대미는 북송의 미불(米芾, 1051-1107)이다(도4). 그는 서법가, 화가, 서화이론가로서 채양(蔡襄, 1012-1067), 소식(蘇軾, 1037-1101), 황정견(黃庭堅, 1045-1105)과 함께 ‘송사가宋四家’라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서화에 일가를 이루어 죽석竹石과 산수화의 풍격이 독특하고 서법도 자못 조예가 깊었다. 이로 미루어 연암을 흠모하고 따른 제자의 평이긴 하지만, 연암의 서화 수준이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박지원이 그린 그림

연암은 틈틈이 그림을 그려 원하는 사람에게 주기도 했다. 《과정록》에는 성대중(成大中, 1732∼1809)에게 붓을 휘둘러 청청靑靑한 소나무 그림을 그려 주었고,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낸 윤시동(尹蓍東, 1729-1797)은 연암이 그린 바위와 소나무가 그려진 부채를 40년 동안 보배로 간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보인다. 친척에게는 공자가 제자들과 문답을 나누는 <행단언지도杏壇言志圖>를 그린 부채를 주기도 했다. 부채의 그림은 필법이 진하면서도 섬세하여 공자를 모시고 있는 뭇 제자들의 온화한 모습과 증자의 아버지인 증점曾點이 비파를 멈추고 공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모습이 생생히 그려져 있고, 그림 윗부분에는 《논어》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현재 박지원의 그림으로 남아 있는 것은 드물다. 2013년 단국대 박물관에서 한학자 이가원(李家源, 1917∼2000) 선생이 생전에 기증한 2만 5000여점의 유물 가운데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유물을 선별해 전시했는데, 여기에 연암 박지원 선생의 <국화도>가 있었다(도5).
박종채가 아버지가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는 걸 직접 본 적이 없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연암은 만년에는 그림을 즐겨 그리지 않은 것 같다.

참고문헌
박지원, 《연암집燕巖集》, (한국고전종합DB)
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 (한국고전종합DB)
박종채, 《과정록過庭錄》 : 박희병 역,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개, 2010
이덕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한국고전종합DB)
박수밀, <18세기 繪畵論과 文學論의 접점 –燕巖 朴趾源을 중심으로->, 《韓國漢文學硏究》26, 2000
黄小峰, <董其昌的1596 -《燕吴八景图》与晚明绘画->, 《文艺研究》, 2020年第6期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 분쟁> 등이 있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