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② 조선의 세시 풍속을 정리한 유득공Ⅱ

도1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 필사본, 1책 58장, 일본 동양문고 소장



유득공의 서화 이해는 예술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작가·제작 배경·전래 등에 이르는 제반 요인까지도 함께 고려하여 접근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유득공의 서화 독법은 인문 사회적 입장에서의 접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난 호에 이어 조선의 세시풍속을 정리한 유득공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강물이 거꾸로 흘러야 갈 수 있었던 연행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개성·평양·공주 등 국내의 옛 도읍지를 여행하고, 세 번에 걸쳐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다녀 왔다. 조선시대에 외국에 갈 수 있는 기회는 매우 드물었다. 유득공이 생활하던 18세기 후반 경 조선이 교류하는 나라는 청나라와 일본뿐이었고, 그것도 국가 간의 교류였다. 특히 선진문물의 도시 연경燕京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관리, 상인, 역관을 비롯하여 일반인 모두 꿈에나 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심양瀋陽에서 만난 학자들이 언제 다시 올 수 있느냐는 물음에 유득공이 서쪽으로 흐르는 심양의 강물이 동쪽으로 흐를 때라 답하였다. 강물이 거꾸로 흐른다니,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이었다.
유득공이 처음으로 청나라 사행에 나선 것은 31세 때인 1778년(정조 2)이다. 그해 7월 심양에 있는 능묘를 보러 오는 청나라 고종(건륭제, 1711~1799, 재위 1736~1796)을 문안하러 가는 조선 사신단의 일원으로 심양을 방문했다. 사행 동안에 보고 들은 것을 <읍루여필挹婁旅筆>(《영재집》권7)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했다. 읍루란 고대 만주 지역에 살던 종족인 숙신肅愼의 후예이면서 고구려와 발해의 주민이기도 했던 말갈의 선조였다. 읍루의 고향인 심양을 다녀온 기록이라는 의미로 제목을 지은 것이다. 두 번째는 유득공 나이 43세 때인 1790년(정도 14) 5월 건륭제의 팔순절 축하 사절로서 박제가(朴齊家, 1750~1805)와 연경燕京(오늘날의 북경)을 향해 출발했으나, 도중에 일정이 바뀌어 예상치 않게 열하熱河도 다녀왔다. 열하는 오늘날 북경으로부터 동북쪽 225km 떨어진 승덕시承德市인데, 온천에서 나온 강물에 겨울에도 김이 나서 생겨난 이름이고, 이곳에 청나라 황제가 여름에 더위를 피하고 정무를 처리하는 피서산장避暑山庄(혹은 열하행궁熱河热行宫)이 있었다. 열하는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박지원이 연경에서 방문했고, 그 연행 기록인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당시 조선에서 베스트셀러이기도 했다. 유득공은 그로부터 10년만인 건륭제의 80세 생일에 예상치 않게 열하를 방문했고, 사행록의 제목도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라 했다(도1). 열하를 기행한 체험을 시詩로 표현하고, 주註(설명)를 덧붙인 것이다. 세 번째는 54세 때인 1801년(순조 1) 주자서朱子書 선본善本(믿을 만한 책)을 구해오라는 명을 받고, 연경을 다녀왔다. 연경을 두 번째 다녀왔다는 의미에서 사행 기록을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이라 했다.

도2 <열하행궁전도熱河行宮全圖>, 미국 국회도서관 소장
– 전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이며, 열하에 있던 청실의 행궁(피서산장)ê³¼ 궁궐, 정원, 그리고 주위의 사묘寺廟 건축 등을 자세히 묘사했다.

청나라 문사와 화가들과의 교유

유득공은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요서遼西 지방에서 만리장성 밖을 지나 열하로 갔던 1790년 사행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이때의 정경을 유득공과 같이 검서관 생활을 한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일찍이 초정(박제가)과 사신으로 가 열하산장으로부터 계문薊門으로 들어갔다. 열하는 옛 유성柳城이다. 땅이 변방의 밖과 접하고 산천이 황량하고 풍속을 읊는 노래가 강경하여 진실로 마음속 깊이 비장함을 느껴 그 흥취를 드러낼 수 있었다. 연燕(연경)에 들어가서는 중주中州의 이름난 선비 반정균潘庭筠, 이정원李鼎元, 나빙羅聘의 무리가 공에게 많이 기울어 손을 잡고 속마음을 드러냈다. 회회回回, 몽고蒙古, 생번生番, 면전緬甸, 대만㙜灣의 여러 바깥 오랑캐는 형상이 괴이하고 건장했다. 또 문자로 토속土俗을 밝히니, 문장이 더욱 자유로워졌다.”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권11, <유득공을 애도하는 글[柳惠甫哀辭]>

유득공은 열하와 연경에서 그곳의 문사文士와 화가들을 만나 교유했다. 청나라의 이름난 선비들이 도리어 속마음을 드러낼 정도라는 데서 유득공의 학식과 인품을 알 수 있다. 청나라 최고의 화가였던 나빙(羅聘, 1733~1799)을 만난 것도 이때였다.

양주팔괴의 한 사람, 나빙

《열하기행시주》의 <나양봉羅兩峰> 항목에 나빙에 대한 일화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나빙의 호는 양봉兩峰이며 강소성 양주부 사람이다. 젊은 시절 풍류를 즐기며 놀았고, 만년에는 불교를 신봉하였다. 아들 윤찬允纘을 데리고 유리창의 관음각에 얹혀 살았는데, 실의에 빠져 가련하였다. 양봉은 유명한 양주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인 고항古杭 김농(金農, 1687~1764, 호는 동심冬心)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세상에 전하는 동심의 그림의 태반이 양봉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아내 동성桐城 방씨方氏도 시를 잘 지었고, 아들 윤찬은 소봉小峰이라 불리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유득공이 말하는 양주팔괴란 청대 강희康熙(1662~1722) 중기로부터 건륭乾隆(1736~1795) 말년까지 양자강 인근의 양주揚州 지역에서 활동한 풍격이 비슷한 8명의 화가 김농, 정섭鄭燮, 황신黃愼, 이선李鱔, 이방응李方膺, 왕사신汪士愼, 나빙, 고상高翔을 말한다(일부 다른 사람을 포함하기도 한다). 이들의 그림과 글씨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관습적이지 않고 때로는 비판적이어서 ‘팔괴(8명의 괴짜)’라 했다.

도3 나빙, <귀취도鬼趣圖> 8폭 중 3폭과 8폭, 종이에 수묵채색, 홍콩 霍寶材 소장
– 3폭(27.6×24.4㎝)은 빨간색 옷을 입은 여인이 검은 모자를 쓴 왼쪽의 남자에게 기대어 비극적인 사랑을 나누고, 높다란 모자와 옷이 모두 흰색인 귀신이 우산을 들고 부채를 흔들며 전송하는 모습이다. 8폭(27.5×20.8㎝)은 산비탈의 한림寒林에 두 구의 해골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 있는 해골은 높은 신분, 손을 모아 몸을 숙인 해골은 낮은 신분을 의미한다고 한다.

나빙의 <귀취도>

유득공은 나빙이 <귀취도鬼趣圖>를 잘 그린다고 했다(도3). 귀취鬼趣는 불교에서 중생이 윤회전생하게 되는 6가지 세계 중의 하나인 아귀도餓鬼道에 있는 자이며, 아귀라고도 한다. 나빙은 해가 지면 거리가 귀신으로 가득 차며, 부유한 집일수록 더욱 귀신이 많이 보인다고 했다. 귀신들의 모습을 통해 신분에 매여 있는 인간 사회를 표현하는 기법은 남송(南宋, 1127-1279) 이후 풍속화의 한 전통으로 자리 잡아 청나라까지 이어졌다. 18세기에는 기담소설奇談小說이 유행하고, 경제적 부를 축적한 양주 지역 소금 장수들의 취향 등을 배경으로 귀추도와 또 하나의 귀신 그림인 종규도鍾馗圖가 유행했다.
유득공은 <귀취도>가 매우 진기하고 괴이하다 묘사했다. 그가 본 <귀취도>에는 원매·기윤을 비롯하여 장사전(蔣士銓, 1725~1785), 정진방(程晉芳, 1718~1784), 옹방강(翁方綱, 1733~1818), 전대흔(錢大昕, 1728~1804) 같은 당대의 명사들의 글이 많았다. 현존 작품에는 박제가의 글을 포함하여 127편의 제발題跋이 실려 있다.

유득공이 나빙으로부터 받은 그림들

유득공은 나빙에게서 그림 두 점을 받았다. 하나는 유득공 자신의 초상화이다. 1790년의 연행에 동행한 박제가와 유득공이 며칠 만에 방문하니, 주인은 없고 첩帖 안에 가지가 꺾인 매화를 곁들인 유득공의 초상화가 있었다. 나빙은 덧붙인 시에서 “옛 친구가 요즘 완전히 나를 소원시하니, 이 매화 한 가지를 누구에게 보내줄까?”라며 유득공이 한동안 자신을 찾지 않은 것에 아쉬워하며 투정의 마음을 표현했다. 나빙이 유득공을 얼마나 막역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현재는 나빙이 그려준 유득공의 초상화는 전하지 않고, 박제가의 초상화만이 남아 있다.
유득공이 받은 또 하나의 그림은 난초도蘭草圖였다. 유득공을 위해 난을 그리고 가시나무[棘]를 보탠 그림이었다. 유득공에 비유한 난초가 좋은 사람이라면 가시나무는 나쁜 사람을 기리킨다. 유득공과의 이별을 안타까워 한 나빙은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가시나무 같은 것을 한탄했다. 유득공이 양자강 남북으로 나빙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위로했지만, 나빙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초도를 사이에 두고 조선과 청의 최고 지식인이 이별을 아쉬워하는 정경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도4 안기 소장품이었던 동원(董源, ?~962)의 <소상도瀟湘圖>, 견본채색, 50×141.4㎝, 北京故宫博物院 소장
– 안기 수장 이후 ì²­ 황실에서 소장, 마지막 황제 부의傅儀가 장춘長春으로 가지고 갔으며, ê·¸ 후 민간으로 흘러갔다. 1952년
경 중국 화가 장대천(張大千, 1899~1983)이 중국 정부에 기부하고, 1959년부터 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다.

조선 출신의 청나라 최고의 수장가, 안기

유득공은 나빙의 처소에서 그가 소장하고 있던 당나라 화가 한황(韓滉, 723~787)의 <회골무녀도回鶻舞女圖>를 보았다. 회골은 회회回回라고도 하며 오늘날 위구르족이다. 무녀도 속의 여인은 뾰족한 모자를 쓰고 변발을 하였으며, 구슬과 비취로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는데, 자못 조선의 여인 같았다. 아름다운 모직 옷을 입고 화려하게 춤추는 자태가 요염하고 고왔지만, 목덜미가 지나치게 굵게 보였다. 그런데 축軸 끝부분에 있는 ‘조선안씨朝鮮安氏’라는 낙관을 발견하고, 나빙에게 들은 이야기를 《열하기행시주》에 기록했다.

“안씨는 옹정(雍正, 1723~1735) 연간의 사람으로, 형제 두 사람 중 형의 이름은 기歧이고 호는 녹촌麓村이며 대왕부代王府에 있다가 양주로 와서 소금 일을 했다. 그 사람은 아주 고상한 취미가 있어 수장품이 매우 풍부하였고, 언젠가 지금의 황상(건륭제)에게 서화를 바치고 백금 1천 냥을 하사받았다. 본래 조선 사람 계통인데 어느 곳을 통해 중국에 들어와 왕부王府에 나아간 것인지 알지 못한다. 실로 자세히 알 수 없다. 오래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또한 자손들이 몰락하여 다시 아취를 지니지 못하였다.”

위 내용은 안기라는 인물을 조선에 소개한 최초의 기록이다. 안기(安岐, 1683~?)는 자를 의주儀周, 호는 녹촌 혹은 송천노인松泉老人이라 했다. 소금 장사로 청대 최고 갑부가 되어 천진天津 지역에 세운 개인 원림園林에서 천하의 유명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 일가는 대략 병자·정묘호란 전후로 포로 혹은 조공 사신의 일행으로 청나라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기는 역대 유명 서화를 수집하고 《묵연휘관墨緣彙觀》(1742)이라는 자신의 소장품을 소개하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의 사후 수장품 중 건륭제 어부御府에 진상된 것은 청 황실 서화 수장품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유득공의 《열하기행시주》에는 청나라 최고의 화가 나빙을 비롯한 청나라 문사들과의 정담이 실려 있다. 나빙의 <회골무녀도>를 통해 알게 된 조선 출신 수장가 안기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졌다. 유득공은 그림을 읽고 꼼꼼히 기록했다.

[참고문헌]
유득공,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기고 엮음, 《열하를 여행하며 시를 짓다–熱河紀行詩註》, 2010, 휴머니스트
최에스더, <羅聘(1733~1799)의 <鬼趣圖> 연구>, 《美術史學硏究》 300, 2018
黃晶淵, <『墨緣彙觀』을 통해 본 安岐의 書畵收藏 활동>, 《明淸史硏究》 17, 2002
임상선,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동북아역사재단, 2021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 분쟁> 등이 있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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