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서화 이야기 ① 경도잡지와 맹영광의 백동도

도2 조맹부의 글씨, 조맹부법첩趙孟頫法帖,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옛 사람들의 유명한 필적을 돌 또는 나무(판목)에 새기고 탑본하여 글씨를 익히거나 감상할 목적으로 만든 책으로 중국 원(元)대의 서예가인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글씨임.


조선의 세시 풍속을 정리한 유득공Ⅰ

18세기 문예 부흥의 시대를 산 유득공(柳得恭, 1748~1807)에게 서화는 생활 그 자체였다. 유득공의 서화 이해는 예술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작가·제작 배경·전래 등에 이르는 제반 요인까지도 함께 고려하여 접근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유득공의 서화 독법은 인문 사회적 입장에서의 접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글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유득공은 누구인가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역사가이자 문학가이고 민속학자였다. 조선의 신분제 하에서 증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유득공은 자신의 능력에 상관없이 서얼로 자리매김되었다. 부모가 결혼한 지 8년만인 1748년 경기도 남양 백곡白谷 외가에서 태어나, 열여섯에 전주 이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저서에 《영재집泠齋集》,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앙엽기盎葉記》, 《사군지四郡志》, 《발해고渤海考》,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경도잡지京都雜志》 등이 있다.
유득공이 주로 활동한 18세기 후반의 조선은 양란을 극복하고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어 발전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와 문화 방면에서도 새로운 변화의 기운이 용솟음치던 시기였다. 유득공은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오늘날 탑골공원 주변에 살던 박지원(1737~1805)을 비롯하여 성대중(1732~1809)과 아들인 성해응(1760~1839), 서상수(1735~1793), 이덕무(1741~1793), 박제가(1750~1805), 이서구(1754~1825) 등의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유득공은 1779년, 이덕무·박제가·서이수(1749~1802)와 함께 정조 시기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이 되었다. 정조는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핵심 기관으로 규장각을 설치하고, 이곳에 유능한 신진 인사를 배치하고 검서관 또한 발탁했다. 4명의 검서관은 5~9품에 해당하는 잡직이지만, 규장각의 대신을 보좌해 서적을 검토·교정·필사·편찬하고 왕실의 각종 행사, 행차에 참여하고, 초상화 관리를 담당하는 등 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왼쪽) 도1 《경도잡지京都雜志》 2권 1책, 4주쌍변, 반곽 11.4×13.2㎝, 10행 21자, 합철:洌陽歲時記, 미국의회도서관 소장
(오른쪽) 도3 <종규도鐘馗圖>, 종이, 107.9×53.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풍속화와 민화 읽기의 교본, 《경도잡지》

유득공이 1794년에서 1796년 사이에 저술한 《경도잡지》는 조선시대 최초의 풍속 관계 저술이며 조선 후기 풍속화와 민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도1). 《경도잡지》는 ‘서울에 관한 잡다한 기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권1 풍속風俗편에서는 의식주를 비롯하여 선비들의 취미와 기호 등을 19개 항목으로 서술하고, 권2의 세시歲時편에서는 정월부터 세밑까지 세시풍속을 19개 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18세기 후반 한양 사람들의 서화 생활은 《경도잡지》 풍속편 <서화書畵> 항목에 잘 묘사되어 있다. 먼저 한양 사람들이 좋아하던 글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글씨는 촉체蜀體가 있는데, 조송설(趙松雪, 조맹부)의 서체를 말한다.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 성종의 부마태위로 심양왕으로 진작되어 연경 저택에 머무를 때 송설이 드나들었으므로 필적이 많이 동쪽으로 와 지금도 그 서체를 본받는다. 촉체는 초체肖體의 잘못이고, 초肖는 조趙 자의 반이다. 또한 액체額體라는 것이 있는데, 원나라 승려 설암雪菴의 서체이다. 제액題額에 적당하므로 액체라고 한다. 지금 설암이 쓴 병위삼첩兵衛森帖이 세상에 유행한다. 비백서飛白書 서체는 버드나무 가지를 깎아 그 끝을 갈라 먹을 묻혀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耻’ 등의 글자를 쓰며, 점찍기, 긋기, 파임, 삐침 등을 임의로 하여 물고기, 게, 새우, 제비의 형상을 만든다.”
– 《경도잡지》, 풍속, 서화

유득공은 당시 한양에서 유행하던 서체를 조맹부체, 설암체, 비백서체라 이야기한다. 설암체는 건물의 편액에 적당하여 액체라 하며, 비백서체는 오늘날의 혁필화에 해당되는데 당시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깎아 그 끝을 갈라 먹을 묻혀 글자를 쓴다고 상세하게 기술했다.

조맹부체인가, 촉체인가

흥미로운 점은 조맹부체에 대한 설명이다.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서체가 조선에 유행하게 된 연유를 고려 충선왕(1275 ~1325, 재위 1298, 1308 ~1313)이 연경에 머물 때 조맹부가 드나든 것에서 찾고 있다. 조맹부체는 조선 세종 때 안평대군(1418~1453)이 대가였고, 16세기 이후 조선시대의 대표적 서체로 유행했다(도2).
그런데 조맹부의 서체를 촉체라 이름한 이유에 대해서 조선에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었다. 촉체蜀體의 촉이 소동파(1036~1101)를 가리킨다는 성호 이익의 주장(《성호선생사설》권10)과 초체肖體의 잘못이라는 유득공의 의견이다. 최근에는 조맹부의 이름에서 생긴 조체趙體가 나중에 촉체로 잘못 읽혀 촉체가 되었다거나 혹은 ‘조체’가 우리말로 욕이 되므로 촉체라 변형시켜 관용적으로 사용하였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이유원(1814~1888)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우리나라 서체를 조맹부의 촉체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인 진체晉體로 구분하고 각각 대표적 명서가를 들기도 했다.

그림이 있는 한양 사람의 집안 정경

한양 사람들의 집안 정경을 통해 그들의 서화 생활을 자세히 살펴보자. 기름 먹인 누런 장판인 유황지를 깔아 매끌매끌하고, 그 위에 ‘수壽’자, ‘복福’ 글자를 넣은 돗자리를 깔고 화문석과 방석을 배치한다. 들창은 미닫이로 된 만卍자 무늬 이중창을 달고, 창호지도 기름을 먹여 정결하기가 은빛 같고, 밖을 내다볼 수 있게 조그마한 유리를 넣었다(《경도잡지》, <풍속>, 제택). 그리고 집안에 각종 그림이 걸리고 병풍이 놓여 있었다.

“집안 벽에는 <종규포귀도鍾馗捕鬼圖>, <선인기록도仙人騎鹿圖>를 건다. 병풍에는 금강일만이천봉 혹은 관동팔경을 그리고, 작은 병풍에는 꽃과 새, 나비 그림을 그리며, 혼례 병풍에는 <백자도百子圖>,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요지연도瑤池宴圖>를 그린다. 공식 잔치에는 제용감濟用監에서 제작한 모란대병牡丹大屛을 사용하는데, 사족들이 혼례 때 빌려 쓰기도 한다.”
– 《경도잡지》, <풍속>, 서화

한양 사람들의 생활에 글씨와 그림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집안 벽에 거는 것과 병풍의 그림은 달랐다. 벽에는 귀신(종규포귀도)과 신선(선인기록도) 그림을 걸었고, 각종 행사나 장식으로 사용하던 병풍에는 자손번성(백자도, 혹은 백동자도, 백자동도), 부귀영화(곽분양행락도), 불로장생(요지연도)을 묘사했다. 이러한 그림들은 1844년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지은 풍물가사風物歌辭인 <한양가漢陽歌>에 의하면 오늘날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과 중구 다동 사이 청계천에 있던 광통교 아래 가게에서 팔았다고 한다. 집안 곳곳을 서화로 장식할 수 있는 것은 유력 양반이나 상민, 중인, 서얼 출신으로 부와 지식을 축적한 사람 중에서 서화에 대한 식견과 애정이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제 한양 사람의 집을 장식하던 그림과 병풍을 좀 더 살펴보자. <종규포귀도>는 글자 그대로 종규가 귀신을 잡아먹는 그림이다. 송나라의 축목祝穆이 편찬하고 그 후 조충된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전집前集》 <몽규도夢鍾馗>조에는 당나라 황제 현종(재위 712∼756년)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병에 걸린 현종이 꿈에서 자신을 못살게 굴던 귀신을 잡아먹은 종규鍾馗를 화가인 오도자(吳道子, 약 680∼759)에게 그리도록 하고, 그것을 궁에 걸어두어 악귀를 쫓게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에서도 종규를 그려 사악한 귀신을 쫓는 풍속이 있었음을 《경도잡지》는 전하고 있다(도3).
병풍 도상인 <곽분양행락도>는 당나라 무장으로 부귀공명과 다복을 누린 곽자의(郭子儀, 697∼781)의 생일잔치 장면이고, <요지연도>는 중국의 신화와 전설에서 기원한 서왕모西王母가 곤륜산 요지瑤池에서 주나라 목왕穆王과 벌이는 잔치 장면과 여기에 참석하는 여러 신선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도4 <백동자도> 8폭 병풍, 화폭 59.5×36.5㎝, 전체 85×330㎝,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장군놀이, 원님놀이, 투계, 행차놀이, 낮잠, 원숭이 놀이, 매화 따기 등이 그려짐.


맹영광의 백동도(백자도)는 어떤 그림일까?

한양 사람들의 혼례 병풍 도상이 대부분 중국 역사나 문화와 관련이 있음에도, 조선에 전래된 경위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백자도의 경우는 유득공이 직접 보고 기록한 <맹영광백동도가孟永光百童圖歌>(《영재집泠齋集》권5)라는 글이 있어 도움이 된다. 이 그림은 병자호란의 치욕 후 오늘날 중국 길림성 심양瀋陽에 끌려간 봉림대군(1619~1659, 귀국 후 효종으로 즉위)을 위해 맹영광이란 한족 출신 화가가 그렸다는 것이다.
당시 이모 선비가 소장하고 있던 백동도의 1폭에는 아홉 동자가 모두 벌거벗은 채 노는 모습이 있고, 2폭에는 종려나무 그늘 아래 닭싸움 하는 모습, 3폭에는 해당화·맨드라미·흰나비를 쫓는 아이들, 4폭에는 풀싸움을 하는 친구들, 5폭에는 원숭이를 희롱하는 모습, 마지막 6폭에는 붉은 매화 나무를 꺾는 동자들과 수레 모습 등이 실감 나게 담겼다.
그런데 백동도의 도상이 자손 번성과 다복을 상징한다는 일반적 해석에 따를 경우, 봉림대군에게도 이러한 해석을 적용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유득공은 백동도가 명과 청나라의 전쟁을 묘사한 것이라며, 화가인 맹영광의 이력과 백동도가 그려진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백동도는 요양과 심양 전쟁터의 만주족과 한족 건아健兒들의 싸움을 묘사한 것으로 ‘백동도가 우의적 그림[百童是寓筆]’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도4).
유득공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가 있다. 봉림대군이 심양에 있을 때 맹영광에게 그의 고향인 회계 지방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는 내용이 유득공과 검서관 생활을 같이 한 성채응의 <맹영광회계도기孟永光會稽圖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권32, <풍천록風泉錄>2)에 보인다. 성해응은 회계會稽는 중국 춘추시대 부차夫差에게 패한 구천句踐이 와신상담한 곳이고, 그곳의 “우거진 대나무 숲과 붉고 푸른 절벽은 모두 우리의 원통함을 가탁하기에 충분하니, 이것이 바로 성조(효종)께서 그림을 그리게 한 까닭[足以寓我痛寃。此乃聖祖所以畵者]이며”, 효종이 치욕을 갚으려는 뜻을 잠시도 잊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復雪之志未之暫忘如此]고 기록했다. 맹영광이 효종을 위해 그린 <회계도>가 와신상담하던 효종의 마음을 빗대어 그린 ‘우의도’라 한다면, 맹영광이 그린 <백동도>도 절치부심하던 효종의 마음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그림 읽기[讀畵]가 아닐까. 그렇다면 봉림대군에게 백동도는 명과 청 사이의 싸움에 휘말린 조선의 입장, 나아가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절감하고 다시는 이러한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절치부심을 다짐하는 그림이기도 했을 것이다. 백동도에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보통 화가들은 그림의 뜻을 모르고 백동도를 혼례 병풍으로 베껴서 아들 낳기를 축원하는 데 썼으니 유득공 입장에서는 개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유득공은 조선 병풍의 주요 소재인 백동자의 도상 형성과 전래에 한족 화가 맹영광과 봉림대군을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요인이 있고,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유득공의 서화 이해는 예술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작가·제작 배경·전래 등에 이르는 제반 요인까지도 함께 고려하여 접근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유득공의 서화 독법은 인문 사회적 입장에서의 접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유득공 저, 국립민속박물관 번역, 《조선대세시기(경도잡지·열양세시기·동국세시기)》Ⅲ
개정증보판(국립민속박물관 세시기번역총서 5), 2021
李完雨, 조선시대 松雪體의 토착화, 《서예학》2, 한국서예학회, 2001, 262쪽
鄭煥局, <18세기 ‘풍속’의 발견 – 유득공의 풍속 관련 기록의 내용과 ê·¸ 성격 ->, 《震檀學報》136, 2021
유정서, <朝鮮 百子圖의 형성과정과 圖像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11
임상선,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동북아역사재단, 2021


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이다. 저서로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발해사 바로읽기> <동아시아의 역사 분쟁> 등이 있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