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읍성의 전형, ‘살아있는 민속마을’ 순천 낙안읍성

순천 낙안읍성
순천 낙안읍성

읍성은 궁궐과 종묘를 둘러싸 지키는 도성과는 달리 지방의 작은 행정단위인 마을을 지키는 성으로 조선 세종 이후 집중적으로 세워져 조선시대 성제城制의 근간을 이뤘다. 고을의 방어기지와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함께 감당했던 읍성은 무엇보다 조선시대 지방문화와 마을 구조의 성격을 잘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중 순천의 낙안읍성은 본래의 형태가 가장 온전하게 전해지는 대표적인 읍성이다.

본래 모습 가장 잘 남아있는 조선시대 읍성

조선 초기의 이름 난 경세가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 같은 이가 일찍이 간파했듯이, 우리나라는 무엇보다 ‘성곽의 나라城郭之國’였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전역에 남아있는 옛 성은 무려 2천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이만하면 전 국토가 요새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어떤 면에서 성城은 유난히 잦은 외침에 시달려야 했던 작은 나라가 택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지혜롭고 효과적인 방책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 옛날, 고대왕국 고구려가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였던 중원의 대제국 수나라, 당나라의 침입을 거뜬히 물리칠 수 있었던 까닭의 하나도 국토의 내외곽을 요소요소 지키고 있던 든든한 성의 덕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를 넘본 나라들도 그렇게 말했다.
고대인들은 험준한 산에는 산성山城을 쌓았고, 왕국의 중심인 왕궁을 에둘러서는 도성都城을, 도시의 외곽에는 나성羅城을 쌓았다. 재료는 흙을 쓰기도 하고, 돌을 쓰기도 했다. 더러는 나무로 목책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축성의 전통과 노하우는 왕조가 바뀌어도 계속 이어졌다. 이미 있었던 옛 성들은 수리하거나 보완해 사용하고 필요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지닌 성들을 새로 쌓았다. ‘성곽의 나라’라는 명성은 이런 과정에서 얻어졌다.
시대에 따라 다소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성의 운영체계는 대체로 산성山城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험준한 산 정상이나 허리를 따라 난공불락의 든든한 성을 쌓고 적이 침입하면 마을이나 도시, 심지어 왕궁까지도 버려두고 산성으로 들어가 적이 물러날 때까지 농성을 했다. 이런 방법은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는 나름 효과가 컸지만,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삶의 현장을 적에 내주어 초토화되었고, 작은 전투에도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지켜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성을 바탕으로 성의 운영체계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경부터였다. 산이 아닌 평지, 정확히 말하자면 생업의 중심지에 성을 쌓았다. 성안에는 주요 관청 등 행정시설과 시장과 같은 생활 시설을 두어 늘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케 했다. 전시에는 방어시설이었지만, 평상시에는 마을의 중심가 노릇을 했다. 이러한 기능을 가진 성을 ‘읍성邑城’이라 불렀다. 한마디로 읍성은 수도를 지키는 도성과는 달리 지방의 크고 작은 마을을 지키고 다스리기 위해 지은 성이다.
읍성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부쩍 늘어나 마침내 조선 세종 조에 이르러서는 성의 운영체계를 산성에서 읍성 중심으로 바꾸게 된다. 마을에는 산성 대신 읍성을 쌓도록 하고 성벽의 높이라든가, 꼭 필요한 주요 시설들을 갖추도록 지도했다. 이를테면 중앙 정부가 직접 나서 축성築城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관리 감독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읍성의 수는 크게 늘어나 조선 중기에 이르면 어지간한 고을이나 마을에는 모두 읍성이 세워지게 된다. 조선 성종 임금 무렵 전국의 행정구역은 약 3백 3십 곳이었는데, 이 중 1백 9십여 곳에 읍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듯 많았던 읍성이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난리로 무너져 없어지기도 했고, 특히 국권침탈을 전후해 일제의 강압으로 대부분 헐려버렸다고 한다. 그나마 본래 모습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는 있는 읍성은 부산의 동래읍성, 서산의 해미읍성, 고창의 고창읍성, 순천의 낙안읍성, 진도의 남도석성 등 몇 곳에 지나지 않는다. 이 중에서도 가장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읍성으로는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낙안읍성을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방어시설의 하나인 ‘치’
서문쪽에서 바라본 낙관읍성의 마을풍경. 실제 주민이 살고 있는 집들이다.
성가퀴를 갖춘 성벽의 모습. 성가퀴는 동쪽 성벽에만 복원돼 있다.
지방수령의 거처인 내아
지방수령의 집무실인 동헌
읍성이 반드시 갖춰야 할 시설의 하나인 연못
잠시 낙안군수로 순천지방을 다스렸던 임경업 장군 선정비각
 
조선시대 마을 구조와 풍경 보여주는 읍성의 전형

낙안읍성은 성벽의 보존 상태가 좋기도 하지만, 성안의 마을이 거의 옛 모습에 가깝게 살아있다는 것이 가장 돋보이는 점이다. 낙안읍성에는 2백여 동의 민가民家를 포함 3백여 동의 집이 있고, 이 집들에는 1백 2십세대, 3백여 명의 주민들이 실제로 살고 있다. 한마디로 억지로 꾸며놓은 테마파크가 아니라 살아있는 조선시대의 마을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읍성의 전형적인 형태는 물론, 그 시대 시골 마을의 구조와 풍경을 가장 실감 나게 보여주는 소중한 민속자료이기도 하다.
낙안읍성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 중기의 명장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이곳 낙안군수로 부임해 하루 만에 지었다고 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전설일 뿐인 것 같다. 임경업이 살지 않았던 조선 초기의 기록인 <동국여지승람> 같은 책에도 낙안읍성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태조 때 낙안 출신의 무인 김빈길金贇吉이 흙으로 쌓았던 것을 세종임금 때인 1424년 돌로 다시 쌓으면서 규모를 크게 넓혔다고 한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와 개축을 했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 <대동지지>, <증보문헌비고>, <낙안읍지> 등 여러 기록에 남아 전하고 있다.
낙안읍성도 격동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많이 무너지고 본래의 모습을 잃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지난 1983년 성곽과 성안의 마을이 한꺼번에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면서 1990년대 초까지 대대적인 발굴과 보수작업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다. 읍성의 가장 중요한 시설인 동헌과 내아, 객사와 누각 등이 이 시기에 복원되거나 건립되었다.
앞서 말했듯, 조선시대의 읍성은 방어기지이자 지방 행정의 중심지이다. 그러려면 전투시설은 물론 행정과 생활시설을 아울러 갖춰야 한다. 방어력을 갖추려면 우선 성벽이 높고 든든해야 한다. 성벽 주위에는 큰 도랑인 해자垓字를 두르고 성벽 위에는 성가퀴를 설치한다. 성가퀴는 성벽 위에 요철처럼 솟아오른 나지막한 담이다. 여기에는 총을 쏘는 총안이 있어 병사는 성가퀴에 의지해 몸을 가리고 총을 쏠 수 있다. 성문은 옹성甕城을 쌓아 보호하고 성벽의 중요한 지점에는 치성雉城을 두어야 한다. 옹성은 적의 공격이 집중되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앞에 쌓은 성이고 치성은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튀어나오게 해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옆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조선시대의 읍성은 이런 시설들을 모두 갖추도록 국가가 지시하고 감독했다.
한편 고을의 중심지인 성안에는 행정에 꼭 필요한 기관과 시설들이 들어찼다. 가장 중요한 시설은 객사客舍이다. 객사는 중앙 정부에서 오는 관리나 사신들이 묵는 숙박처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기능은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이른바 ‘향궐망배向闕望拜’ 의식을 치르는 일이었다.
객사 옆에는 동헌東軒이 있었다. 동헌은 지방수령의 집무실이다. 동헌에는 수령의 거처인 내아內衙가 딸려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 외에 죄인을 가두는 감옥, 아전들의 집무실인 서기청과 양곡창고, 군기창고 등이 있었다. 한편 백성들의 생활과 관련된 시설들도 필요했다. 남북으로 교차하는 널찍한 도로가 있었고 닷새마다 큰 장이 서는 장터, 그리고 연못과 우물이 있었다.
현재 낙안읍성에는 이들 시설이 거의 다 복원돼 수많은 민가와 어우러져 옛 읍성의 모습을 운치 있게 재현해 내고 있다.

마을 방어의 기지, 행정의 중심지

낙안읍성은 성 뒤쪽으로 멀찍이 솟아오른 해발 681m의 금전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낮은 구릉을 살짝 끌어안은 평지에 펼쳐진 자그마한 성이다. 전체적인 모양은 남북南北이 짧고 동서東西가 긴 장방형에 가까운 타원형이다. 성벽의 둘레는 약 1.2km 정도이고 높이는 평균 4m 정도이다.
보통 읍성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 하나씩 모두 4곳의 문이 있는 것이 보통인데, 더러는 풍수적인 이유로 주산이 있는 북쪽에는 문을 두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낙안읍성이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옛 기록에도 낙안읍성에는 북문이 없고 동서남쪽에 3개의 문만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풍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한양 도성의 구조를 그대로 모방한 데서 비롯된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읍성의 정문은 보통 남문南門이지만 현재 낙안읍성은 동문인 낙풍루樂豊樓가 정문 노릇을 하고 있다. 성벽을 휘감아 도는 해자를 건너 ‘ㄱ’자 형태의 옹성을 통과해 낙풍루로 들어서면 읍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곧장 마을 안으로 들어서도 나쁠 것은 없지만, 읍성을 가장 잘 답사하는 방법의 하나는 우선 성벽 위로 올라가 성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다. 성벽 중간 중간에 꼭대기로 오르는 계단이 있어 힘들이지 않고 성벽 위로 오를 수 있다.
낙풍루에서 가장 가까운 성벽에 오르면 성의 가장 중요한 방어와 공격 시설인 성가퀴와 치성을 볼 수 있다. 낙안읍성의 치성은 모두 4곳인데, 4곳 모두 동쪽 성벽에 모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4개의 치성 중 2곳은 벽 중간에 돌출되어 있고 나머지 2곳은 성곽의 좌우 모서리에 설치돼 있다. 성가퀴는 낙풍루 근처의 성벽 위에만 있어 이곳에서만 성가퀴의 구조를 살필 수 있다.
성벽은 서문 부근에 이르러 다소 높은 언덕을 끼고 높아지게 된다. 이 부근이 낙안읍성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피곤한 다리를 쉴 겸 여기서 잠시 성벽에 걸터앉아 사방을 둘러보면 낙안읍성 내부의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선 주산이 있는 북쪽으로 행정관서인 동헌과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 왼쪽에는 동헌과 내아, 오른쪽으로는 객사가 있다. 객사는 읍성에서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인 만큼 본래는 홍살문→외삼문→내삼문→객사마당의 동선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낙안읍성의 객사는 내삼문 하나와 객사만 복원되어 단출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객사 앞에는 전설의 주인공인 임경업 장군의 선정비각이 자리 잡고 있다.
고을 사또의 일터인 동헌과 거처인 내아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붙어있고, 그 앞으로는 누각인 ‘낙민루’가 서 있다. 읍성에서 누각은 관아의 부속 건물 중 하나로 내빈의 접대와 연회宴會 등이 주요 기능이다. 낙민루는 헌종 연간 낙안군수로 부임한 민중헌이 중건했으나 이후 유실되었던 것을 1984년부터 시작된 보수공사에서 새롭게 복원했다.
객사와 동헌 앞으로는 동서와 남북으로 교차하는 열십자 형태의 길이 나 있다. 이 길은 동문과 서문, 남문과 북문을 이어주는 이른바 ‘동서대로’와 ‘남북대로’인데, 북문이 없는 낙안읍성에서는 관아와 객사 권역 앞에서 길이 끊겨 T자형 길을 이루고 있다. 두 길의 교차지점에는 시장이 있다. 본래는 오일장이었을 터이다. 그밖에 읍성 남쪽으로 옥사와 연못, 그리고 우물이 자리 잡고 있다.
지형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이런 정도가 조선시대 읍성의 전형적인 구조이다. 복원된 건물의 위치에 다소의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낙안읍성은 대체로 조선시대 읍성의 전형적인 구조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읍성 축조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잘 지어진 훌륭한 성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방어기지의 역할은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9월 왜군의 낙안침공 당시, 마을이 온통 잿더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낙안읍성의 방어시설은 치열한 전투를 치러내기에는 너무나도 보잘것없어 보인다. 작은 도랑이나 진배없는 해자도 그렇고 사다리 하나만 걸치면 충분히 오를만한 성벽의 높이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옛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정말로 옛사람은 이 정도의 성을 방어기지로 생각했을까? 아니면, 단지 옛 법식에 따라 모양만 냈을 뿐, 진짜 전쟁을 대비한 성이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앙증맞은 초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정겨운 풍경 속에 숨어있는 잔잔한 미스터리가 골목길 아이들의 고함소리에 섞여 귓가를 어지럽힌다.

 

글·사진 : 유정서 본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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