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유문화와 선유도船遊圖

선유도는 조선시대 양반계층이 주로 향유하던 뱃놀이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금호선사선유도>, 《평양감사향연도》 속 <월하선유도>, 심사정의 <선유도>, 신윤복의 <주유청강>을 통해 조선시대 선유문화와 각 작품에 대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여가문화로 바둑, 활쏘기, 시 짓기, 서예, 그림 그리기, 뱃놀이 등의 놀이문화를 즐긴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여가문화 중에서 뱃놀이는 강과 더불어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느 곳에서도 이루어지던 놀이였는데 이를 그린 그림을 선유도라 한다. 배를 타고 여러 가지 풍류를 즐기는 놀이를 주유舟遊,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궁중에서 오락으로 즐기던 선유를 수희水戲라고 부르는 듯하다.
일반 서민들은 주로 삼복에 선유를 즐겼다. 배를 타고 고기를 낚아 매운탕을 끓여 먹거나 어죽을 쑤어 먹으며 소탈하게 하루를 보냈다. 이에 반해 고급관리나 선비들의 선유는 거창하고 화려했다. 배를 타고 그 자리에서 혹은 이동해가며 주변의 경치를 즐기기도 하고 흥취에 따라 즉흥시를 읊거나 자리를 함께 한 악공이나 기녀들과 음악과 춤을 즐기기도 했다. 물론 술과 음식도 빠지지 않았다. 현장에서 고기를 잡아 회를 쳐서 먹거나 매운탕을 끓여 먹는 즐거움도 곁들였다. 이들의 선유는 음력 7월 기망(旣望, 16일)에 베푸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적벽부赤壁賦’의 영향인 듯하다. 송나라의 소동파는 1082년 7월 기망 밤에 적벽에서 뱃놀이를 하고 ‘적벽부’라는 명문을 남긴 바 있다. 조선시대에는 소동파가 뱃놀이를 한 적벽을 배경으로 한 선유도 그림(도1)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양호洪良浩는 중원절(7월 15일) 밤에 평양의 대동강에서 선유를 즐긴 체험을 ‘부벽루감고사浮碧樓感古事’라는 시로 남겼다. ‘무숙이타령’에서 김무숙은 7월 기망(旣望, 16일)에 한양의 한강에서 선유를 베풀었다고 했다. 하회의 선비들도 매년 7월 기망에 낙동강에서 선유를 즐겼다.

안동지역 낙강(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선유문화

영남지역의 선유문화에 관한 연구로 한양명 교수가 《실천민속학연구》에 게재한 <안동지역 양반 뱃놀이(선유)의 사례와 ê·¸ 성격>이 있다. 이에 따르면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안동지역은 선비들이 주도한 다채롭고 깊이 있는 양반문화가 전승되어 왔다. 뱃놀이는 보통 인근의 강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므로 낙동강가에 자리 잡은 안동은 지리적으로 최적지였고, 다행히도 뱃놀이의 경과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일부 기록들도 남아있어 ê·¸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 구분하면 이른 시기에는 안동지역의 뱃놀이 문화는 분강分江위에 있는 애일당愛日堂을 거점으로 한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 주도한 16세기 중반의 뱃놀이와 17세기초의 뱃놀이는 안동부사 김륵(金玏, 1540-1616)ê³¼ 권기(權紀, 1546-1624) 등 안동지역 사족들이 참여한 1606년의 뱃놀이인데 악공을 태우고 안동일대의 명승지를 유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음 시기인 18세기의 안동지역 뱃놀이 형태는 임청각臨淸閣에 거주하면서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강호자연을 벗하면서 학문을 쌓고 예술을 즐긴 처사 허주 이종악(李宗岳, 1726-1773)이 참여한 뱃놀이로 1763년 4월 4일부터 4월 8일까지 지인들과 임청각 앞에서 배를 타고 약산藥山 반구정伴鷗亭까지 뱃놀이 한 모습을 허주 이종악이 직접 그린 그림을 남겼는데 그의 후손들이 《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猶帖》이라는 화첩(도2)을 만들었다. 초창기에는 일정지점에서 머물며 즐기는 ‘체류형 뱃놀이’였고 후대에는 여러 곳을 순행하면서 즐기는 ‘유람형 뱃놀이’로 구분했다. 《허주부군산수유첩》에서 그림 순서는 <동호해람東湖解纜>–<반구관등伴鷗觀燈>–<선어반조鮮魚返照>–<양정과범羊汀過帆>–<이호정도伊湖停棹>–<운정풍범雲亭風帆>–<칠탄후선七灘候船>–<망천귀도輞川歸棹>–<사수범주泗水泛舟>–<선창계람船倉繫纜>–<낙연모색落淵莫色>–<선사심진仙寺尋眞>의 순서로 첩장되어 있다. 동호해람이란 화제에서 보듯이 ‘동호에서 출항한다’는 의미로 동호는 임청각 앞에 있는 강을 동호라고 하였고 해람은 출항한다는 용어로 보아 첫 출발지가 동호임을 알 수 있다.(도2-1) 이 화첩에 대해서는 다음 회차 글에서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안동지역 선비들의 선유놀이에서 체류형과 유람형 뱃놀이로 구분한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으나 필자는 이 글에서 조선후기를 망라하는 회화를 조망하면서 선유도의 구분은 그림의 성격에 따라 ‘선비들의 계회적 성격의 그림’과 <평양감사향연도>에 등장하는 선유도와 같은 ‘관료들의 행사를 위한 선유도’ 및 ‘와유적 성격의 선유도’ 그리고 ‘행락이 주목적인 선유도’로 구분하여 각각 한 점씩 살펴보고자 한다.

선비들의 계회적 성격 잘 드러난 <금호선사선유도>

<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는 1601년(선조34년) 3월 23일에 낙재 서사원(樂齋 徐思遠, 1550-1615)과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1554-637) 등 23명이 대구 인근 선비들이 금호강에서 뱃놀이 한 것을 그린 그림이다. 이 뱃놀이를 주관한 사람은 조선중기 경상도를 대표할 수 있는 대학자인 낙재 서사원(樂齋 徐思遠, 1550-1615)이다. 이 뱃놀이 장면은 낙재 서사원이 공직을 마치고 고향인 금호강가 이천리 선사仙査에 완락재를 건립하였고, 이 건물의 낙성일날을 맞이하여 지역 선비들 23명이 낙성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날 뱃놀이 겸 시회詩會를 했던 장면을 그린 것이다.
<금호선사선유도>(도3)는 난파 조형규가 그린 일종의 계회도契會圖로 약 420여년에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읍 선사 인근의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시·서·화 행사를 한 선유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낙관에 작가와 계사년癸巳年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1833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영남 큰선비 서찬규(1825-1909)의 현손 서대규 댁에서 400년 만에 발견되어 복원하였다.

<금호선사선유도>는 한양명 교수의 논문에서 설명한 17세기 초반 안동지역(영남지역)의 뱃놀이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인다. 우선은 이 그림의 배경이 안동과 낙동강의 뱃길로 연결되는 금호강 선사 지역으로 낙동강과 붙어있는 지류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낙동강을 중심 생활권으로 한 선비들로서 당시 영남 일대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의 교유가 그림에 잘 나타난다. 이 시회에 참여한 것으로 기록된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1554-637), 서사원, 여대로(呂大老, 1552-1619) 등 23명의 인물은 당시 지역을 대표하는 선비다. 그들의 회합과 교유하는 실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사례가 1601년에 이루어진 선사 선유 모임이었다. <금호선사선유도>의 구성을 살펴보면 화면의 상단에 ‘금호선사선유도’라는 화제가 있고 화제 우하에 ‘주회암(회암은 주자의 호)선생시朱晦庵先生詩’라는 묵서가 있고 바로 아래 주자의 어정시漁艇詩가 있다. 그리고 ‘분음각득일자分音各得一字’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이는 주자의 어정시를 분운분자分韻分子하여 참여한 선비들 23명중 15명이 분음한 한자씩을 가지고 한시 15수를 지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도4) 따라서 그림의 상단에 있는 글씨들은 행사에 참석한 선비들의 좌목과 주자의 어정시를 분운하여 총 글자 20자를 한자씩 운으로 하여 참석한 선비들이 지은 시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出載長烟重(출재장연중, 나갈 때는 짙은 안개 자욱하게 내려 앉았고)
歸裝片月輕(귀장편월경, 돌아올 때는 한조각 가벼운 조각달을 싣고 오네)
千巖猿鶴友(천암원학우, 수많은 바위는 원숭이와 학의 친구이고)
愁絶棹歌聲(수절도가성, 뱃노래 소리에 근심이 사라지네.)
– 주자의 어정시

화면의 중앙에는 선사일대 금호강가에서 선유를 하면서 시회를 하는 장면을 묘사했고, 하단에는 감호 여대로가 찬한 서문인 <호선사선유도서琴湖仙査船遊圖序>가 묵서로 기록되어 있다.(도5) 이 서문은 선유에 참석한 선비들 중에서 최연소자인 21세 김극명의 요청으로 여대로가 지은 것이 서문에 나와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행보(서사원)의 이천伊川별장은 낙동강과 물이 합치하는 곳인데 어찌 이러한 곳에 별장을 지었는고, 덕회(장현광)는 행보와 뜻이 같은 벗인데 덕회가 옥산에서 서사원의 별장에 오니까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주자의 뱃놀이와 같이 하면서 주자의 어정시 20자를 운으로 나누어 시를 지으면서 재미있게 지내다가 헤어지니 아쉽구나. 이에 김극명이 서문을 지어달라고 청하므로 서문을 짓는다.
신축(1601) 늦은 봄 3월 23일 성산 후학 감호鑑湖 조도釣徒 여대로呂大老 서序’

글을 살펴보면 선유에 초대한 서사원의 별장에 대한 찬사와 지역의 아름다운 모습, 시회의 모습과 주자에 대한 존경, 벗들과 보낸 행복한 시간에 대한 내용이다. 여대로의 서문을 보니 선비들의 풍류가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조선시대 영남지역 선비들의 선유는 학문적 원기를 재충전하는 휴식의 과정이자 서로간의 연대와 단합의 자리였다. 선유문화가 낙동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은 낙동강 주변의 선비들이 낙동강 주변 지역에서 학문적 동질성을 형성하는 학파의 형성기인 16세기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했고, 17세기에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1,000리를 상회하는 낙동강의 유역 중에서도 선유문화가 화려한 꽃을 피운 곳은 상주, 인도, 성주, 칠곡, 고령, 영산, 창녕, 함안에 이르는 낙동강 중류지역이었고 이런 문화를 양성한 인적 집단은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이 중심이 된 선비들이었다. <금호선사선유도>는 이러한 낙동강 주변지역 선비들의 선유문화를 기록한 소중한 그림인 것이다.

화려한 잔치 풍속의 면모 여실히 보여주는 <월하선유도>

속담에 ‘평양감사도 제하기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조선시대 감사 중에서 평양감사를 제일가는 자리로 쳤다. 그러한 평양감사가 뱃놀이를 한다면 얼마나 성대할까? 《평양감사향연도》중 <월하선유도>(도6)는 선유도 중에서 평양감사의 부임을 환영하기 위해 열린 환영식에서 뱃놀이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엄청난 규모와 화려한 면모가 그림에도 잘 나타난다. 이 작품은 <월하선유도>, <부벽루 연회도>, <연광정 연회도> 3점을 그린 연작 작품으로 각 작품의 가로가 196.9㎝인 대작이다. 이 작품 중 <부벽루 연회도>에 단원의 서명과 도장이 있지만, 진위가 분명하지는 않아서 전傳 김홍도 작품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 그림은 관청에서 주관한 선유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월하선유도>의 화면에 나타난 광경은 평안감사가 탄 배를 중심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 및 관선官船이 늘어서 있고(도7) 뒤로는 관기官妓들이 탄 배가 있으며(도8) 음식물을 준비하는 배, 사대부나 아전들이 탄 작은 배들이 따르고 있다. 전경에는 잡목들을 횡대로 묘사했고 강가에서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있으며 성 안 마을 집집마다 환영 깃발이 세워져 있다. 부두에는 배들이 정박해 있고 평양에서 열린 잔치의 화려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회화가 갖는 서사적인 모습과 당시의 풍속을 알 수 있는 사실적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곽과 성의 모습, 깃발과 관청의 행사모습 및 관선의 구성이나 형태, 당시의 복식이나 관식 등을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한편으로 관청의 그림이 아닌 회화적인 느낌이 있는 경기대 박물관 소장의 <월하선유도>(도9)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선비들의 ‘와유臥遊’정신을 표현한 심사정의 <선유도>

심사정의 <선유도>는 선비들의 ‘와유정신’이 포함되어 있다.(도10) 와유臥遊는 사전적으로 누워서 즐긴다는 의미인데 심사정의 <선유도>에서 느낄 수 있는 회화정신을 필자는 와유라고 느꼈다. 이 그림은 단순히 와유의 정신에서 한발 더 나아가 배라는 공간에 파묻혀 배와 함께 이동하면서 산수를 즐기는 형태의 와유라고 생각한다.

와유라는 용어는 《송사宋史》 <종병전宗炳傳>에 처음 등장한다. 종병(宗炳, 373-443)은 나이가 들고 병들어 밖으로 나가자 못하자, 과거에 유람했던 명산을 그림으로 그려 방에 걸어 두고 누워서 소요유逍遙遊하면서 그림을 즐겼다고 한다. 종병은 《화산수서畵山水序》에서 ‘산수화는 자연풍광을 그린 것이 아니라 대자연이 가진 장중한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자연미를 반영하는 산수화의 작용을 창신暢神 즉, 정신을 펼쳐내는 것이라 생각했으며 산수화보다 사람의 정신을 유쾌하게 해주는 것은 없다’고 했다.
심사정의 <선유도>에서는 두 사람의 선비가 배에 눕듯이 기대어 물결과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있고 사공은 노를 열심히 저어 이동하는 모습이다. 그림의 상단에서 용이 이동하는 듯 구름이 떠다니고 그 아래에는 물안개가 자욱하고, 화면의 하단에는 파도는 거세게 일고 있는데 두 선비의 시선을 볼 때, 뱃머리에 기대어 여유롭게 산수를 즐기며 유유자적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와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배의 뒤편에 탁자가 놓여 있는데 탁자에는 책이 놓여 있고, 백자에는 홍매가 꽃혀 있으며, 고목 위에는 학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는 선비의 서재를 배로 옮겨 놓은 것으로 임포(林逋, 967-1024)의 매처학자梅妻鶴子를 연상케 하는 선비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임포에 관한 이야기는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 <인사人事>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포林逋는 항주의 고산孤山에 은거했는데, 두 마리의 학을 길렀다. 학은 풀어 주면 구름 위까지 날아올라 한참을 날아다니다가 다시 새장으로 돌아왔다. 임포는 항상 작은 배를 타고 서호西湖 근처의 절들을 찾아 노닐었는데, 혹시 손님이 임포의 집에 찾아오면 동자가 문 앞에까지 나와 손님을 맞이하면서 새장에 있는 학을 풀었다. 그러고 나면 한참 후에 임포가 배를 저어 돌아왔다. 일찍이 학이 나는 것이 손님이 왔다는 경험이 되었기 때문이다.
[林逋隱居杭州孤山, 常畜兩鶴, 縱之則飛入雲霄, 盤旋久之, 復入籠中. 逋常泛小艇, 遊西湖諸寺. 有客至逋所居, 則一童子出應門, 延客坐, 爲開籠縱鶴. 良久, 逋必棹小船而歸. 蓋嘗以鶴飛爲驗也.]”

매처학자에 대해 중국의 사서辭書인 《사해辭海》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송나라 때의 임포는 항주 서호의 고산에 은거하였는데 부인도 없고 아들도 없었다.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스스로 즐겼는데, 사람들은 그를 보고 매화로 아내를 삼고 학으로 자식을 삼았다고 말했다.
[宋代林逋隱居杭州西湖孤山, 無妻無子, 種梅養鶴以自娛, 人稱其梅妻鶴子.]”

심사정의 <선유도>는 임포의 매처학자 고사에서 임포를 찾아온 손님과 서호의 경치를 즐기면서 유유자적하는 선비의 와유정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시대 선비들은 심사정 생전을 전후해 임포의 삶을 사는 것이 일종의 로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행락 그 자체로서의 선유, 혜원 신윤복의 <주유청강>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에 나오는 <주유청강舟遊淸江>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선유의 일면목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신윤복은 그 명성에 비해 알려진 것이 없어 영·정조, 순조 초년까지 궁중의 자비대령화원으로 활동한 화원 신한평(申漢枰, 1726~?)의 아들이라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지만 그의 풍속도는 조선사회의 이면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주유청강>은 선비들이 기생을 불러 배에서 선유놀음을 하는 그림으로 선비들의 선유문화가 단합과 행사, 와유 등의 고고한 목적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한량들의 행락을 위한 놀이였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도11) 조선시대 한양에서는 한량들의 놀음 중에 선유놀음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북촌 한량들이 각색 놀음 장할시고,
선비의 시축詩軸놀음, 한량의 성청成廳놀음
공물방貢物房 선유놀음, 포교의 세찬歲饌놀음
각사 서리書吏 수유受由놀음,
각집 겸종傔從 화류花柳놀음
장안의 편사(편사)놀음 장안의 호걸놀음
제상의 분부놀음 백성의 중포놀음
각색 놀음 벌어지니 방방곡고 놀이철다.

한양 한량들의 선유놀이는 공물방의 놀이로 지칭한 것으로 보아 선비들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유청강>의 그림에서 보면 이들의 뱃놀이는 어느 장면으로 보더라도 수준 있는 놀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들 등장인물들의 면면이나 행동거지에서 선비들이 배위에서 시를 주고받으면서 품위 있게 놀거나 평양감사처럼 지체 높은 관리의 환영식에서 볼 수 있는 절도 있는 모습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선비들의 유유자적한 와유를 보여주는 모습은 더더욱 아니다. 즉 어느 정도 지체는 있는 양반들이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 남의 눈이 보이지 않는 곳, 배를 타고 강에서 이동하면서 기생들과 희롱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습들이 신윤복의 눈에는 그려서 남겨놓고 싶은 풍속이었던 것이다.
<주유청강>의 그림 구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에로틱한 장면과는 다른 장면이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선비와 기생은 3쌍으로 각기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쌍은 화면에서 혜원의 낙관落款 아래에 있는데 선비가 기생의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긴 담뱃대를 잡아주는 장면이고, 두 번째 쌍은 강물에 손을 담그고 즐기는 기생의 모습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이다. 두 쌍의 모습은 애정을 담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머지 한 쌍의 기생과 선비의 모습에서 무언가 부조화가 있는 듯한 모습이다. 기생은 선미船尾에서 생황을 불면서 토라진 듯하고 기생의 파트너인 선비는 배 중앙의 포장 밑에서 뒷짐을 진채 안타까운 모습으로 기생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장면의 비밀은 아마도 선비의 허리띠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선비는 허리에 세조대細絛帶라는 흰색의 허리띠를 차고 있다. 이것은 이 선비가 상중喪中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이 그림을 보면 당장 상중의 선비라는 것을 알겠지만 지금은 비밀을 풀 듯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다. 신윤복은 그림 속에서 선유의 향략을 이야기하면서도 이 시대가 유교적인 가치는 여전히 지켜야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선유도는 조선시대 양반계층이 주로 향유하던 뱃놀이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림을 통해 선유의 목적은 단합이나 평양감사향연도 중의 <월하선유도>와 같이 공식행사의 일부로써, 혹은 선비들의 와유를 위한 목적이나 오로지 향락을 위한 뱃놀이 등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세시풍속사전》 <선유>, 국립민속박물관
한양명, <한동지역 양반 뱃놀이(선유)의 사례와 그 성격>
《실천민속학연구》(실천민속학회, 2008)
팔거역사문화연구회, 《금호강 선유 및 누정문학》
(팔공신문출판부, 2017)
김학수, <선유를 통해 본 낙강연안지역 선비들의 집단의식: 17세기 한려학인(寒旅學人)들을 중심으로>
《영남학》 18호(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0)
송신용 교주, 《한양가》


글 이상국 ((사)한국민화센터 이사장)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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