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보물처럼 귀했던 밀랍초蜜蠟燭

한 눈에 봐도 굉장히 화려한 이 초는 조선후기에 사용된 것으로, 모란병풍과 마찬가지로 서민들이 혼례식에서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귀한 화초이다. 이번 시간에는 전통초의 오랜 역사와 다양한 종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초는 가연성 고체인 밀랍이나 기름을 원형 혹은 사각으로 성형하고 그 중심에 심지를 넣어 붉을 밝히는 등화구이다.
재료로는 밀랍, 수지, 목랍, 경랍, 충백랍, 파라핀납, 동·식물성 기름 등 여러 가지가 사용된다.
파라핀 소재의 양초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전 주원료였던 납蠟은 꿀벌의 집을 만드는 주성분으로 꿀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를 가열, 압축하여 만들었으며 양봉법이 보급되기 전까지 주로 야생에서 채취하였기에 매우 귀한 재료였다.
초는 난방이나 조명을 얻기보다는 고사告祀나 축원, 제사, 불공 등 종교적이고 의례적인 목적을 위해 배타적으로 사용되었다. 제의에서 향을 사르고 촛불을 켜는 일은 신불神佛이나 신령을 일깨우고 인간의 마음 속 염원을 환기시키는 상징의 빛으로 받아들여진다. 마을의 동제洞祭나 무당이 굿을 할 때 역시 반드시 촛불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고 세속의 때를 태워 없애버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제의 공간에 촛불을 켬으로써 부정을 막아 신령을 감응케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대낮에 치성을 드릴 때조차 촛불을 밝히고 있다. 제사 때 대문에 촛불을 밝혀 두어 조상신을 안내하고, 제사가 끝난 후에는 촛불 든 사람이 대문으로 앞서 나가 조상신의 가는 길을 밝혀 주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찰의 법당에 밝힌 촛불은 마음의 탐욕을 누르고 그 위에 불심을 심고자 하는 중생의 숙원을 담고 있다. 어두운 사바세계를 밝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광명의 빛으로서 촛불을 밝히는 것이다. 또 이사를 할 때 촛불을 켜 요강 안에 넣어 이사한 집의 큰 방 한가운데 두는 풍습은 집안의 재산이 불같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주술적 염원을 담고 있다. 촛불이 어둠을 밝히듯이 만사형통하기를 바라고, 그 불빛처럼 집안의 운이 뻗어 나가 그 집이 다복多福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민들은 일생에 단 한 번 쓸 수 있었던 화초

지면에 소개된 화초畵燭(도1)는 조선후기 민간에서 혼례 때 사용하였다. 화초는 ‘화촉華燭’이라하여, ‘화촉을 밝히다’는 말 자체가 혼례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조선후기 혼례복으로 관복 착용을 허락한 것처럼 일반 서민들도 평생 한 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인 혼례식에서만큼은 신분을 뛰어넘어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모란 문양이 새겨진 이 화초는 41㎝ 높이의 밀랍초로, 큼직하고 화려해 결혼식처럼 큰잔치에 쓰기에 제격이다. 촛대의 가운데 부분에는 모란과 모란 줄기, 나뭇잎이 양각으로 정성스레 새겨졌다. 총 두 송이의 모란이 활짝 피어있으며 모란꽃은 모란꽃대로, 나뭇잎은 나뭇잎대로 각각 다른 색의 무늬가 양각돼 있으며 나뭇잎의 가느다란 잎맥, 모란꽃잎 한 장 한 장이 구분될 만큼 도상이 정교하게 묘사됐다. 세월의 흔적으로 촛대의 전체적인 색상이 많이 바랬고 가장자리 부분의 문양이 상당부분 훼손됐지만 청록빛 나뭇잎, 가장자리를 둘러싼 문양의 미세한 붉은 빛은 제작 당시 화려함을 가늠케 한다. 촛대 맨 위에 달린 부채꼴 모양은 한지로 만들어진 심지이다. 혼례 때 화초를 사용할 때는 보통 2개를 한 쌍으로 사용했으며, 궁에서는 낱개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귀하게 쓰인 화촉이 등장하기까지 오랜 역사가 뒷받침됐다. 국내 초의 발전 과정과 다양한 종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초가 등장한 것으로 추정

우리나라에서 초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통일신라시대일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안압지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유물 중 촛대와 초가위가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하지만 그 시기 초를 직접 생산했는지는 어떤 문헌이나 사료도 없기 때문에 확인할 수 없다. 초가 워낙 귀하게 여겨져 고려시대에도 대부분 횃불을 사용했다.
그러면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언제부터 초가 제작, 사용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진, 한 문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과 진나라 때의 문서 <박물지博物志> 중에는 밀랍蜜蠟과 봉랍蜂蠟에 관한 내용이 있다. 봉랍은 황랍이라고도 하며 벌이 벌집을 만들기 위해 분비하는 물질이다. 여기에서 중국은 진나라(기원전221~206년)때에 이미 봉랍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급취편急就篇>에는 밀랍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밀랍도 봉랍으로 만든 초라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중국 고등기를 수집하면서 한나라의 출토품 고등기를 수십 점 수집했는데 종류로는 청동기, 석재, 옥, 토기 등 많은 재질의 종류가 있으며 형상 또한 곰, 인물, 벽사 등 다양한 형태가 제작되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한나라 시대부터 활발하게 등촉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라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밀초의 제조법이 유입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봉촉을 제작하여 왕실의 연회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초가 귀해 등잔이나 초를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등촉겸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광명대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질이 좋지 못하여 냄새와 그을음이 심할뿐더러 밝지도 않았다는 기록, 초의 질이 좋지 못한 관계로 당시 송으로부터 수입해 사용했다는 기록, 고려사에는 왕족의 관혼상제에서도 왕의 허가가 있어야 초를 사용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초가 얼마나 귀하게 관리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서 사치풍조가 만연하여 궐내에서만 사용하는 홍대초가 일반 사가의 상제喪祭나 혼례에도 사용되어, 1278년(충렬왕 4)에 일반인의 홍대초 사용을 금하였다. 그러나 1279년에 희종의 아들인 경원공 조慶源公祚의 장례에 홍대초를 사용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일반인들도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충선왕 때에도 일반인의 홍대초 사용을 금하였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공민왕 즉위년에는 홍대초를 사용하는 자는 감찰사가 탄핵하도록 강력한 조처를 취했다. 이와 같이 일반인의 사용은 억제했으나, 왕실의 불사에는 막대한 양의 화려한 홍대초를 사용했다.

조선시대 촉장만 4명, 초 제조술 크게 발달

조선 초기에 와서도 국산 초의 질은 여전히 좋지 않아 수요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했으며, 이 때문에 국가에서는 초의 사용을 엄격히 통제하고 사적 매매를 금지시켰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궁전의 등촉류는 내시부(조선 시대에, 내시를 관할하던 관아)에서 관장했다. 즉 내시부를 맡은 관원 중 종육품의 상촉원 4명이 대전문, 왕비전문, 세자궁 등 등촉방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공전항에는 촉장(초 만드는 일을 맡아 하던 사람) 4명을 두고 유구장(기름을 먹인 도구를 만드는 일을 맡아 하던 사람)은 각 도 관찰사 이하 지방관아에 한 사람씩 두었고 등기류는 치장, 유장, 목장, 지장, 칠장, 사기장 등에 명하여 분담, 제작하도록 했다.
조선초기에 촉장이 4명이나 되었다는 점을 미뤄볼 때 초의 제조술이 상당히 발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등구류의 장인들을 살펴보면 조선초기의 등촉기구는 목제, 유제, 사기제 등 많은 등구가 제작되었으리라 짐작되며 또한 등구류는 각 부문별로 전담하는 장인들이 모여서 제작했던 것을 감안하면 아주 고급스러운 등촉기구가 제작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세월이 흐르면서 잦은 전란으로 인하여 조선초기의 등구가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다.

(좌)도2 <우지초> – 조선시대, 각 20×4㎝, 고은당 소장
(우)도3 <돈지초> – 조선시대, 24×5㎝(라이터와 크기 비교), 고은당 소장

초의 다양한 종류들

그럼 초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살펴보자. 전통초는 종류가 굉장히 다양한데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초刺燭,는 갈대를 베로 감싸 묶고 그 표면에 납蠟을 바른 가장 원시적인 초로, 연기와 그을음이 심했다고 한다.
중국 고대의 예법을 정리한 《주례周禮》에서 사훤씨司煊氏가 제사때 바쳤다는 분촉墳燭이 그 원형일 것으로 추측된다. 초목을 다발로 묶은 홰(거화炬火)의 형태에 싸리로 심을 하고 베로 얽어맨 다음, 겉에 엿과 꿀을 발라 불을 밝힌 것이다. 분촉에서 엿과 꿀 대신에 밀랍을 발라 개량한 것이 바로 자초이다. 조악하여 나중에 밀초로 대체된다.
홍대초紅大燭는 포초布燭의 하나로, 다섯 새의 거친 베 오승포五升布에 붉은 물을 들인 납蠟을 발라 길이 1척尺 보다 크게 잘라 만든 초이다. 포촉은 납을 오승포五升布에 바른 것이다. 다시 이 포촉에 붉은 물을 들여 길이 1자보다 크게 자르면 홍대초가 되는 것이다.
밀랍의 밀초蜜燭는 황밀초黃蠟燭와 백밀초白蠟燭가 있다. ‘황초’라고도 하는 황밀초는 담황색의 반투명 색채를 띠며, 봉밀을 물에 끓여 불순물을 제거한 다음 밀랍을 판위에 놓고 굴대로 굴려 원통형으로 만든 후 굴대를 빼고 심지를 끼워 마무리한 것이다. 밀초는 대부분 이와 같은 굴림법에 의해 만들었지만, 조선후기에는 밀랍을 녹여 대통 속에 넣어 굳히는 주촉법鑄燭法도 이용했다.

도4 <용초>, 조선시대, 각 27×3㎝, 고은당 소장
용초는 너무 귀해 궁궐이나 사찰에서만 사용했다.

용초龍燭는 백랍을 주홍朱紅 안료로 물들여 용을 양각한 것이며, 화초畵燭는 백랍을 물들여 모란을 장식한 밀초의 하나이다. 용초는 고급스럽고 너무 귀해 주로 궁중이나 사찰에서 사용했다.
지초脂燭는 송진이나 밀랍을 섞어서 만든 좋은 초가 있지만, 소나 돼지기름을 이용해 만든 우지초牛脂燭(도2), 돈지초豚脂燭(도3)가 주로 이용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소나 돼지의 지방을 잿물[灰汁]에 넣고 끓여 찌꺼기 버리기를 서너 번 반복하여 깨끗한 기름을 걸러 낸 다음 반으로 쪼갠 대통에 넣어 끈으로 묶어 굳힌 것으로, 심지는 면포를 사용했다. 이러한 지초는 불에 잘 녹는 특성이 있어 빨리 닳고 헤펐지만, 충남 공주지역의 우지초가 특히 품질이 좋았다고 한다. 그 비법은 기름 찌꺼기를 걸러내는 요령에 있었다고 하며 더러 초의 겉면에 붉은 물을 들이고 금박金箔을 입힌 것도 있다.
용초(도4)는 궁중의 일상생활에 쓰였으며, 왕이 정치를 잘하기 위하여 어진 신하에게 하사하는 중요한 품목 중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내치와 외교의 성공으로 국력이 신장되고 산업 경제가 발달되어 중기 이후에는 각종 초가 개발되고, 후기에 이르면 초의 사용계층은 서민층에까지 확대된다.
초의 제조법으로는 담금법, 굴림법, 주촉법 등이 있다. 담금법이란 용해된 원료에 심지를 담갔다 빼내어 식히는 동작을 반복하여 굵게 만든 것이다. 굴림법이란 심지 위에 용해된 원료를 붓고 반듯한 표면 위에서 굴려 만드는 방법이다. 주촉법鑄燭法은 용기나 대통에 원료를 부어 만드는 것으로 담금법이나 굴림법에서 발전된 것이다. 이러한 수공법은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이 이루어진 요즈음에도 특별한 목적을 위한 초의 제작에 이용되고 있다. 심지로는 대마·무명·종이·양모가 쓰였다. 초는 서민충에서는 보통 우지(소의 기름), 돈지(돼지기름), 밀초(일정한 형식이 없이 손으로 뭉개서 한지 꼰 것 또는 삼실로 심지로 사용함)를 사용했고 궁에서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용의 문양이 양각된 용초와 모란꽃이 양각된 화초를 사용했다.

한 자루의 밀초, 조선시대 최고급 선물

조선 초부터 왕실에서는 검약한 생활을 장려했으며, 또 밀랍도 귀하여 태종 때에는 궁궐과 민간의 길흉행사에 고려 이래로 사용했던 홍대초 대신 송거(松炬, 소나무횃불)를 사용하도록 했다. 세종은 수륙재水陸齋에 밀초 대신 유등油燈을 쓰도록 했다.
태종 이래로 홍대초 대신 사용된 송거는 화재의 위험이 크므로 포촉布燭을 만들어 대전과 동궁전에 매일 한 개씩 바치도록 했다. 성종 때는 문소전제文昭殿祭에 자촉刺燭을 쓰므로 연기와 그을음이 심하여 밀초로 바꾸었다고 한다. 특히, 효종연간에 밀랍의 생산지는 영서의 몇 읍과 호남의 무주, 호서의 청주지방에 불과했고 영남지방은 밀봉이 절종되어 생산이 없었다.
이와 같이 밀랍이 귀하여 이수광李睟光 같은 사람은 평생동안 초를 켜지 않았으며 벼슬아치들도 한 자루의 초를 선물로 받으면 무척 좋아했다. 부자들은 제사용 납초를 시장에서 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친구에게서 빌리거나 등으로 대치했다.
밀랍이 귀하므로 재료를 적게 쓰기 위하여 초는 속이 비고 얇게 만들어 형체만 유지하도록 만들어 초가 오래 타지 못하고 곧 꺼졌다고 한다. 영조 때에도 관혼상제에 관청의 밀초를 사용하도록 하고 일체의 사적 매매를 금하였으나 이의 시행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재상의 집 머슴방에서도 밀초를 켰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은 제사에도 초 대신 등을 켜 타인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밀초가 귀하므로 누런 콩가루로 만든 가짜밀초가 생겨나기도 했는데, 초를 직접 태워봄으로써 진부를 가릴 수 있었다. 비록 밀랍초는 귀하였으나 전기와 양초가 보급되기 시작한 1900년대 초까지 지초를 비롯한 각종 초가 양산되어 꾸준히 사용됐다.



참고자료
월간 문화재 신문 <한국의 고등기6 – 촛대와 초에 관한 고찰>
민병근, <전기역사를 찾아서 46회 - 초[燭] - 촛불>
민병근, <전기역사를 찾아서 47회 - 초[燭] - 우리 조상들이 사용한 여 러 초들>
김삼대자, <조선시대 등기구에 관한 고찰(석사논문)>
참고문헌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임원경제지》, 《격치경원》, 《신농본초경》,
《박물지》, 《급취편》, 《고려도경》

글 정하근(고은당 대표, 한국고미술협회 부회장) 사진 이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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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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