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지혜 깃든 목가구, 서안書案 – 조선 문인의 삶을 엿보다

조상의 지혜 깃든 목가구, 서안書案
조선 문인의 삶을 엿보다

서안의 사전적 의미는 ‘책을 보거나 글씨를 쓰는 데 필요한 서실용의 평좌식 책상’을 이른다.
서안은 다른 목가구들과 달리 골재를 사용하지 않고 판재로만 구성된 단순한 형태의 목가구이다.
천판의 크기도 책 한권을 펼쳐 놓을 정도로 크지 않으며 천판 아래에는 서랍을 달거나 선반식으로 제작하여 문방용품을 보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기능과 모양 등은 비슷하나 용도 등에 따라 서안, 경상 또는 서탁 등으로 조금씩 달리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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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인사동 주변이나 답십리, 또는 지방 어느 고미술품상을 들러 보면 서안 하나쯤은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요
즘엔 쉽지 않은 일이다. 아주 좋은 서안이나 경상은 상점주인이 가게 안쪽 깊숙이 모셔 놓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 같다. 특히 천판의 양쪽 귀가 힘을 가득 주어 올라가고 다리에도 호족 모양에 죽절모양을 더해 멋들어지
게 조각되어 있는 경상 형태의 것은 정말 보면 볼수록 이를 만든 조선시대 장인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신
이 부끄러워질 뿐이다.
유래 및 발달과정과 관련한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우선 낙랑고분에서 절첩각折貼脚으로 된 목제 서안이 출토된 바 있으며, 부여에서는 청동제 수형안각獸形案脚이 출토된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유물로서는 청동경상經床이있다. 경상은 절에서 불경을 얹어놓고 읽는데 쓰였던 책상으로 서안에 비해서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고려 말기 나한도羅漢圖나 조선시대 풍속화와 초상화에서 보이는 책상들은 제상祭床, 향탁香卓과 유사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
현재 전하는 서안은 대부분이 19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서안은 조선시대 선비의 공통된 취향에 의해 소박하게 제작된 책상으로 보인다.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 및 서유구의 『이운지怡雲志』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경상經床은 글을 읽거나 글씨를 쓸 때 사용하던 책상인데 책상冊床과 경상經床으로 구분된다.
책상은 일반 민가에서 사용된 직선적인 단순한 형태이며 흔히 서안書案이라 부른다. 경상은 사찰에서 불경을 읽을 때 사용하였지만 후에 일반 가정에서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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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사회상과 서안의 등장 배경

우선 서안에 대한 이해를 좀 더 돕기 위해 간단하게나마 조선 후기 전반에 걸친 목공예 발달 및 서안이 주로 사용되었던 사랑방 실정을 둘러 본 후 서안과 경상에 대한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아가 조선시대 당시의 사람들은 어떠한 식으로 이러한 기물을 사용하였는지를 현존하는 조선시대 그림 등을 통해 확인해 보면 좋겠다.
조선 후기에 가구 및 목칠 공예품이 발달하게 된 배경은 당시의 주택 양식의 변화와 관련하여 조선 중기 이후의 전반적인 온돌 보급으로 평좌식 주택이 일반화하게 되었다는 사회문화적 측면과 17세기 중엽 이후 수공업 기술의 발달과 관영 수공업 외에 자영 수공업이 활성화된 시장경제 속에서 점차 발달해갔다고 하는 경제 체제의 변화적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먼저 평좌식 주택의 일반화라는 측면에서 온돌의 보급에 대하여 살펴보면, 온돌이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사에 요양療養을 위한 공간에 난방을 하기 위해 시설하였다거나, 약재를 건조乾燥시키거나 잠업蠶業을 위한 공간에 온돌시설이 있었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까지는 아직 온돌이 주거 양식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학자마다 온돌의 보급 시기에 대하여 의견은 분분하나 대체로 조선시대 중·후기인 인조(1632∼1649)대에 와서 전국적으로 온돌이 보급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것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섬용지贍用志, ‘와상臥床조’의 뒷부분에 “근세에는 온돌방의 구들위에 거처하는데 익숙해졌으나”라는 내용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조선 후기의 사회 체제적 변화를 보자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한동안 혼란에 빠졌던 조선 경제는 화폐의 통용과 세제稅制의 변화로 인하여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이앙법의 확산등 농업 기술의 발달로 인한 단위 면적당 생산량 증가와 함께 부농富農과 도고都庫라 일컬어지는 거상巨商의 출현을 가져오게 되었다.
영·정조대에 이르면서 유교 철학의 정점과 동시에 문화 예술 각 분야 역시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같은 문화적 중흥은 경제력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경제의 발달은 수공업의 수요를 증폭시켰다. 수요의 급증은 상품에 대한 유통의 발달로 이어져 차후 주택 발달이 이루어지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조선시대 가구를 이야기하려면 당시 주거 공간의 형태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주택의 주거住居 공간은 크게 사랑방과 안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여기에 나오는 사랑舍廊이란 뜻은 자신의 남편을 타인에게 높여 부르는 말로서 사랑방은 전통 가옥에서는 가장이 거처하는 공간을 뜻한다. 한편, 안방은 가족의 의·식·주를 전담하는 가정의 중추부로서 주택의 가장 안쪽에 폐쇄적인 공간으로 배치하여 남편과 그의 직계존속直系尊屬 이외의 출입을 금禁하는 여성 위주의 공간이다.
상류층의 사랑방은 기거· 침식· 학문· 사색· 접객· 휴식 등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남자 주인의 거처이므로 단순하고 기품이 있는 공간이다. 문방구 및 가구는 주인의 문화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로서 중요시되었고, 가구의 모양이나 배치에 있어서 소박하고 안정된 분위기가 강조되었다.
사랑방의 가구는 수납가구· 문방가구· 소품· 취미 용구로 분류된다. 주요 수납 가구에는 의걸이장· 책장이 있으며, 문방 가구로는 문갑· 탁자· 서안· 연상 등이 있다. 소품으로는 필통· 지통· 벼루집· 서가 등을 두었으며, 벽면에는 두루마리나 서안지를 꽂아두기 위한 고비를 걸었다. 그 외에 차茶· 향香· 금琴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는 수행구修行具에 속하는 것들과 촛대와 같은 조명 기구, 바둑판과 같은 취미 용구, 끽연구· 팔걸이· 목침 등의 소품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여러 사랑방 용품 중에서 서안은 사랑방 주인을 대표하는 가구 중 으뜸에 속한다 볼 수 있다.

서안書案
서안은 글을 읽거나 쓰기 위한 문방 가구로 낮은 책상을 말한다. 이는 책상의 용도이외에도 주인과 내객來客
또는 연장자의 위치를 공간적으로 구분지어 주는 사랑방의 필수적인 가구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서안의 구조는 천판天板과 층널, 판각板脚 등을 기본으로 하여, 보통 30∼36cm 내외의 높이로 이루어져 팔꿈
치의 편안함을 고려하여 제작된다. 한자로는 기丌, 서상書牀이라고도 표기하는 서안은 상판의 길이가 긴 것은
두루마리에 글을 쓸 때 사용하며, 짧은 것은 독서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화리목花梨木을 써서 만들고 중앙에 대리석을 댄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화리목만
을 써서 만든 것은 그 다음이다. 우리나라의 제주도에서 나오는 산유자나무(山柚木), 호남지방의 여러 군에서
생산되는 먹감나무(墨柹木), 해서海西(황해도) 지방의 대청도에서 나는 늙은 뽕나무(老桑木)로 만든 서상도 역
시 그 다음으로 좋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서안 역시 조선 후기에 이르면 다양한 재질을 활용하여 실용
성과 공예적 가치에 따른 선호도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남해반닫이, 청도반닫이, 양산반닫이, 밀양반닫이, 상주반닫이 등이 있다.
들어졌다. 내부에는 천판 상단에 서랍이 부착된 형태가 많다.

경상經床
경상은 사찰에서 쓰이던 서안의 일종으로 양끝이 말려 올라간 형태와 호족형의 다리를 가진 것이 특징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사랑방의 가구에서 이러한 양식이 쓰이기 시작했다. 양끝이 새의 꼬리처럼 말린 형태는 16세기 이전의 중국 가구인 제대안祭臺案이라고 하는 제사의 탁자 양식에서 발견된다. 중국의 이 제대안祭臺案은 보통의 높이가 80cm 이상으로 높고 큰 가구의 모습을 보이며 조선시대의 경상과 같은 호족형의 다리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양쪽 끝이 올라간 형태로 제작된 이유는 사찰에서 두루마리 형태의 불경을 읽을 때 양끝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역할이라 주장이 주를 이룬다.
대부분의 경상에는 천판 아래 서랍이 있거나 판재로 마감되어 있는 경우에는 안상眼象형이나 여의두 무늬를 투각하였고 호랑이 다리 모양인 호족虎足형의 다리에도 투각 장식을 안쪽에 하였다.

조선시대 회화 속에 보이는 서안

우리는 조선시대 회화에서 서안의 존재를 찾아 볼 수 있다. 수없이 많이 보아온 그림이지만 그 안에 그려져 있는 서안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의미나 관심이 없었던 부분일지도 모르나 서안 또는 경상은 그림 속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 풍속화, 산수화, 초상화 및 인물화 등에 나오는 서안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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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서당>
김홍도의 풍속화첩 중 <서당>은 이후 제작된 여러 서당 그림들이 구도와 인물 구성, 포즈 등을 계승하였을 정도로 서당 이미지의 기본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다. 가장 상석에는 훈장이 널찍한 서안과 연상硯床을 곁에 놓고 앉아있으며 학생들은 모두 바닥에 책을 놓고, 그것도 무릎을 꿇은 채로 수업을 하고 있다.
이처럼 풍속화의 서당 풍경에서 서안은 교탁으로서 스승과 학생간의 우위관계를 성립하는 도구이자, 스승에 대한 도리를 깨우치는 중요한 역할로 그려지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책을 올려놓고 공부를 돕는 책상으로 기능한다. 이는 서안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서안의 형태도 평평한 천판과 장식없는 다리를 덧붙인 단순한 형태가 대부분이다. 또한 그 위에 책 외에는 어떠한 물건도 올려놓지 않고 깔끔하게 표현함으로써 책상으로 만들어진 서안의 기능성과 실용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균관이나 궁중에서 행해진 수업에는 스승과 학생이 모두 각각 서안을 사용하였지만, 서당에서는 일반적으로 스승만 서안을 사용했던 것으로 여러 그림에 표현되고 있다. 이는 학생과 구분되는 스승의 위치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이를 통해 스승의 권위를 높이고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정선의 <계상정거도>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는 퇴계 선생이 도산서원에 은거하며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짓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전형적인 독서형의 서재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이 우리가 사용하는 1,000원짜리 지폐의 뒷면에 인쇄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또한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안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의 배경인 도산서원은 조선의 대표적인 사액서원으로 여러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규모 있는 서원이다. 정선은 이미 1721년 부감시齎瞰視로 도산서원의 구조와 규모를 자세히 묘사하는 그림을 그린 적이 있어, 도산서원에 대한 이해는 충분했다. 그러나 <계상정거>는 자연 속에 지어진 고요한 서원에서 『주자서절요』집필에 몰두하는 퇴계의 학자로서의 풍모를 강조하기 위한 그림이었으므로, 도산서원의 건축적 묘사는 담장과 대문, 두 개의 기와지붕만으로 최소화하였다. 더불어 전면으로 활짝 열린 창문과 흑관을 쓰고 정좌한 퇴계, 직사각형의 서안을 배치함으로써 완
벽한 문사의 공간을 형상화 하고 있다.

화담대사華潭大師(1786~1848)의 초상
화담대사는 화엄종주 동국율사에까지 이르렀던 선승으로, 그의 초상화는 여러 번 이모되어 현재 여러 곳에 봉안되어 있다. 모두 동일한 형식으로,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국립중앙박물 관본이다. 화폭 오른편 상단에는 당시 판부사였던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찬문이 있고, 표충사 소장본엔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찬하고 있어, 당시 화담대사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화엄경 강학에 뛰어나기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의 높은 학식을 반영하기 위해서, 진영의 전면부에 이례적으로 경상을 배치하고 있다. 경상 위에는 『화엄경華嚴經』과 『범망경梵網經』이 올려져 있고, 펼쳐진 경전 위에 화담대사가 손을 얹고 있어, 책장을 넘기는 찰나를 포착한 듯 자연스럽다. <이현보 초상>과 마찬가지로, 경상은 부감시와 역원근법을 적용하여 그렸으며, 이는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다른 초상화에도 계속적으로 적용되고 있어 경상 위 기물에 대
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화담대사 경상의 가장 큰 특징은 천판과 다리부분의 재질이 확연히 다른 것이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에서 최고라고 평한 화리목 같은 무늬가 선명한 장식목이나 대리석을 감입한 서안이 바로 이와 같은 모양새였을 것이다. 귀가 말려 올라가는 것이 경상의 형태상 주요한 특징이지만 천판 질감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형태상의 꾸밈은 점차 배제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호족형의 다리와 풍혈장식은 유지하고 있어 경상의 맥을 잇고 있다. 화담대사의 경상은 대리석을 감입한 것으로 보이는데, 제작 기술의 어려움과 대리석이라는 재질의 희소성을 고려할 때, 상당히 귀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상을 진영에 그려 넣음으로써, 화담대사의 높은 학식 뿐 아니라, 당시 상당했던 지위와 명성을 한 층 더 부각시키는 효과를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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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기록화에 보이는 경상
사가에서 책을 읽기 위해 사용한 책상을 서안이라 부른 것이 일반적이라면, 궁중에서는 주로 책안冊案이라 일컬었다. 궁중에서 사용되는 집기의 규모는 사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자를 의미하는 안案의 분류에 속하는 가구만도 수 십 가지에 이르렀다. 보안寶案, 인안印案 등 주로 위에 올려놓는 물건에 따라 명명하였는데,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것이 주 용도였기 때문이다. 책안이라는 명칭은 세종대에 처음 등장하는 것을 시작으로 순조대에 이
르기까지 두루 사용되었다.
1765년 영조와 관련한 <영수각송靈壽閣頌>과 <친림선온도親臨宣醞圖>의 그림에서처럼 조선의 왕이 사용한 서안은 주칠의 경상 형태로, 왕의 권위에 맞게 사가나 사찰에서 사용하던 것보다 크기가 크고 화려했다. 그러나 이 서안은 왕만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궁중의 여인인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위해 열린 진찬에서도 동일한 서안이 사용되었다. 무신년에 열린 잔치를 기록한 <무신진찬도戊申進饌圖>는 병풍형식으로 모두 8폭으로 되어있는데, 왕이 주인공인 장면과, 왕대비가 주인공인 장면에서 모두 서안이 등장하고 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가구의 사용에 왕과 왕비의 구분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 가지 의문점은 흥겨운 연회의 자리에 별다른 쓰임도 없는 서안을 가져다 놓은 이유가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아마도 서안이 갖는 상징적 의미로서 왕과 왕비의 권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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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사인초상>
<사인초상士人肖像>은 김홍도의 자화상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정좌하고 앉아있는 인물 옆으로 명·청 시대 유행한 가구인 항궤炕几에 벼루, 연적, 산호와 공작 깃털이 꽂힌 고동기, 필통, 서화 두루마리, 서책, 도장 등이 놓여있고 벽엔 자명종까지 걸려있다. 단출한 방 분위기나, 인물의 복장과는 어딘가 맞지 않는 화려하고 값비싼 물건 일색이다. 실제 김홍도가 호사취미로 인한 사치성 소비 때문에, 그림 값을 상당하게 받는 유명화원이었음에도 만년까지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사인초상>의 여러 기물 중 항궤는 얼핏 보기엔 일반 서안 같지만, 중국에서 조선의 온돌과 비슷한 炕이라는 특수한 가옥 형태 위에서 서안과 같은 용도로 사용하던 것으로,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항궤는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전하는 <신선도神仙圖 8곡병>에도 등장하고 있어, 그의 관심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책거리에 보이는 서안과 경상
지금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는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문자도·책거리’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조선 후기 200여 년간 집중 제작되어 사용된 58점의 문자도와 책거리 병풍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 실제로 그림 앞에 서보면 마치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듯 흥미롭고, 머릿속엔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전시된 책거리는 대체로 18세기 정조 때와 그 이후에 그려진 것인데 함께 그려진 진기한 도자기, 청동기, 문방구, 서재와 책, 동식물 등 다양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특별히 하단부에 서안과 경상의 그림이 많이 그려진 책거리가 이번 전시에 제법 포함되어 있다. 특히 경상처럼 양쪽 귀가 올라간 서안 위에 책을 쌓아 놓고 열심히 공부하는 동자가 그려진 19세기 책거리 4곡병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귀한 유물로 여겨진다. 이 많은 책을 늘 읽어 학문을 수양하고 그 진귀한 보물들을 소유하고 즐기고 싶은 자신을 대신하는 듯하다.

 

글 : 박주열(나락실 갤러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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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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