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을 향한 지극한 마음을 담다 – 감모여재도 感慕如在圖(上)

조상을 향한 지극한 마음을 담다
감모여재도 感慕如在圖(上)

지난달에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박물관에 관람객들의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5월 6일이 대체공휴일로 지정되면서 나흘간의 연휴가 생기자 멀리 사는 자녀들이 부모님 계신 고향을 방문하
는 경우가 많아 마치 추석이나 설과 같은 명절에나 겪을 법한 인구 대이동이 있기도 했다.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시대에 이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효孝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번 호에서는 효 사상에서 비롯된 조상에 대한 그리움뿐 아니라 자손 번창의 염원까지 함께 담았던 감모여재도에 관하여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필자는 현재까지 진행된 감모여재도에 관한 선학들의 연구에 조금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컬럼에서 한국민화뮤지엄의 명품을 소개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필자의 입장을 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 자체만을 소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판단 하에 감모여재도 주제를 총 2편으로 나누어 이번 호에서는 선학들의 연구에 대한 필자의 논지를 전달하고 다음 호에서 작품의 구체적인 소개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감모여재도와 사당도

우선 명칭에 등장하는 ‘감모여재感慕如在’는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실재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조상에 대한 지극한 마음을 드러낸다. 일각에서는 감모여재도에 주로 사당이 그려진다는 이유로 이를 ‘사당도’로 칭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당도’라는 명칭은 사당뿐 아니라 교의를 그린 작품까지 폭넓게 포함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또한 ‘사당도’라는 명칭이 실제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니 《가례家禮》에 나오는 사당도祠堂圖에 관한 기록만이 ‘사당도’라는 명칭이 언급된 유일한 사례로 확인되었으며, 이는 그 내
용으로 보아 사당의 건물과 내부 구조를 그려놓고 제례에 관련된 규칙을 써넣은 그림을 지칭하는 ‘사당지도’로 감모여재도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도1) 물론 ‘감모여재도’나 ‘감모여재’라는 표현은 실록 상에 한 건도 등장하지 않지만 실제로 그렇게 쓰인 그림이 현재 남아있으며 의미상 교의가 그려진 그림도 포함할 수 있는 넓은 개념이므로 용어를 감모여재도로 통일하는 것이 타당성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용계층에 따른 형태상 분류

감모여재도에 관한 연구는 1978년 조자용의 《한국 민화의 멋》에서 사당과 위패가 그려진 그림을 사당도로 지칭한 것을 시작으로 한다. 그리고 그 후 진행된 모든 연구에서 감모여재도에 등장하는 건축물이 사당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감모여재도에 대한 연구들은 그 사용계층을 사당을 지을 형편이 되지 않았던 서민계층과 관직이나 유배, 여행을 이유로 고향을 떠나 생활했던 사대부로 파악하였으나, 병풍형, 족자형, 3폭가리개형(도2)으로 나눌 수 있는 감모여재도의 형태상 분류와 각각의 주요 사용계층을 연결시켜 파악하지는 못했다.
우선 감모여재도에 그려진 건축물이 사당이 맞는가에 대해 필자는 병풍형이나 족자형의 경우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3폭가리개형에 등장하는 제재는 직접적으로 사당을 그렸다기 보다는 오히려 후대로 갈수록 점차 사당의 형태와 유사하게 제작되는 경향을 보였던 ‘주독’을 그 모델로 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형태상 분류와 사용계층에 있어서는 병풍형과 일부 작품성이 뛰어난 족자형의 경우는 주로 양반에 의해 사용되었던 반면 3폭가리개형 감모여재도는 그 향유 계층도 주로 서민에 국한되었을 것으로 보고 이에 관한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주독은 사당에서 신주를 모셔두는 곳을 뜻하며 원래 불교의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만든 작은 공간을 지칭하였다. 《가례》에는 주독의 형태로 좌개坐盖와 양창독兩窓櫝을 그린 그림이 제시되었는데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좌식과 개식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송시열, 박세채, 권상하, 민필 등과 좌개와 양창독 모두 사용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구준, 송인, 이이 등의 의견이 대립되었다.(도3)(도4) 사당 안에 주독이 모셔진 공간을 ‘감실’이라고 하는데 조선 후기에 양창독의 경우 신주를 모셔 두거나 장이나 궤 형태로 제작되어 좌개형 주독을 보관하는 역할까지 하였기 때문에 사당 의 감실 기능을 겸하 게 되었다.(도5)

당시 제를 올리는 방 식을 총 4가지로 분 류하면 첫째, 사당이 있는 경우는 사당을 3칸으로 짓고 그 안에 4개의 감실을 만들어 고조부모까지 신주를 모신 주독이나 벽감, 즉 벽에 만든 작은 감실을 이용하여 제를 올렸다.(도6) 둘째, 사당이 없는 경우에는 집안에 벽감을 두고 그 앞에 제상을 차려 제사를 지냈다.(도7) 셋째, 집에 벽감도 없
는 경우에는 사랑방이나 대청의 시렁 위에 양창독을 올려놓고 신주를 모셨으며 마지막으로 이도 여의치 않을 경우 감모여재도 중에서도 가장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던 3폭가리개형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에 관하여 자세히 살펴보겠다.(도8)

경제성과 편리성을 추구한 3폭 가리개형

3폭가리개형의 감모여재도의 경우 양 날개가 양창독의 양 문이 열린 형태와 유사하게 만들어졌는데 이는 제사를 올릴 때 신주의 출입을 위한 양창독의 기능처럼 날개를 열고 닫는 모양으로 만들어그 안에 신주대신 지방을 붙이고 제사를 올렸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제를 올리는 형태를 신분이나 형편에 따라 위와 같이 4가지로 구분하였을 때 3폭가리개형의 감모여재도는 가장 신분이 낮거나 형편이 어려운 서민층이 주요 사용계층이며 그보다 약간 나은 형편에서 양창독을 놓고 제사를 올리는 것을 본떠 그림의 제재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당시 가옥의 구조를 보면 사당은 외부인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대문에서 가장 안쪽에 배치되기 때문에 서민들이 사당을 직접 모델로 한 작품 보다는 사당의 모습과 비슷한 양창독이 그림의 제재가 된 감모여재도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크기 면에서도 3폭가리개형은 크기가 큰 병풍형이나 족자형과 달리 양창독과 유사하여 제상에 올리고 그 앞에 제수를 진설하여 제를 올리기에 알맞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3폭가리개형 감모여재도의 경우 상부 중앙에 끈이 달려있기 때문에 제사 시 벽에 걸어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3폭가리개를 벽에 걸었을 경우 양 날개가 앞으로 휘어지는 불편함이 있을 뿐 아니라 작품 하단에 굳이 붙어있는 굽의 필요성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주로 제상에 올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필자가 파악하기로는 《가례》나 《국조오례의》에 그려진 양창독이 지붕이 없는 장이나 방의 형태인 반면에 이보다 후대에 편찬된 《사례편람》의 창독도에서는 간략하지만 지붕이 덮힌 건물 형태로 그려졌음을 보아 후대로 갈수록 사당의 외형을 본따 지붕을 갖춘 건물 형태로 제작된 양창독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한다.(도4)(도9)(도10) 실제로 현존하는 양창독 중에서도 사당의 건물과 비슷한 형태의 양창독을 다수 확인할 수 있었는데 조선시대라는 것 이외에 구체적인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었으나 사당형 건축물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후기 또는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현존 사당의 경우 대부분 맞배지붕인 반면 감모여재도에서 보이는 건축물의 지붕은 주로 팔작지붕과 우진각 지붕인데 예를 들어 조선민화박물관 소장의 3폭가리개형 감모여재도를 살펴보면 역시 팔작지붕으로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도2) 그 이유 면에서 선학들의 연구 결과처럼 중국 가당도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해남과 봉황 지방에서 남아 있는 양창독이 팔작지붕과 우진각 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음을 보아 당시 서민들이 접하기 힘든 중국의 가당도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양창독의 다양한 지붕 모양이 반영된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도11)(도12)(도13) 물론 양창독 자체도 현대의 중국 가정집이나 식당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지신地神 제사용 독을 보아 중국과의 영향관계를 조사해 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주독마저 살 여유가 없던 서민들이 주독을 같은 용도에 비슷한 크기로 제작된 종이 속 그림으로 대체하여 경제성과 편리성을 추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양반층을 위한 족자형과 병풍형

3폭가리개형에 그려지는 감모여재도는 족자형이나 병풍형에 비해 그림의 격이 떨어지고 서투르게 그려지는 경향을 보이며, 현존 작품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교의형과 같이 세밀한 묘사가 요구되는 경우는 모두 족자형으로만 제작되었다. 따라서 작품성으로 보아 완성도가 높은 족자형이 3폭가리개형보다 가격적인 면에서 부담이 컸을 것이고 병풍형도 서민이 감당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3폭가리개는 그 주요 수요층이 서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 속담에 “양반은 사귀면 병풍 두른 듯하고 쌍놈은 사귀면 가시 밟는 것 같다”는 말은 병풍이 양반처럼 귀하게 여겨졌던 물건임을 보여준다. 물론 1934년 조선총독부령 《의례준칙》에서 신주보다 지방을 독에 붙여 사용하고 이마저 여의치 않을 경우는 병풍 또는 흰 종이에 지방을 붙일것을 권하고 있지만 인쇄술의 발달로 인쇄병풍이 널리 보급되 었던 일제강점기에 비해 조선후기의 사회에서 독조차 소유하기 힘든 서민이 고가의 병풍을 소유했을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이 기록은 지방을 붙이는 용도의 병풍이나 종이가 사당 자체가 아니라 독을 대신하는 용도였다는 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에 해당하여 위에서 밝혔듯이 적어도 3폭가리 개형 감모여재도의 경우 사당이 아닌 주독이 직접적인 모델이었을 것이라는 필자의 의견에 힘을 실어준다. 따라서 병풍형과 일부 작품성이 뛰어난 족자형은 3폭가리개형과 달리 주로 양반에 의해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된다.
실제로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송자대전宋子大全》의 기록을 찾아보니 사당에 감실이 없는 경우는 병풍이나 족자 등으로 감실을 구획하면 된다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때 사용된 병풍이나 족자가 어떤 그림이 그려진 것인지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그 사용자가 사당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며 제사용으로 사용되는 공간인 감실을 구획하는데 쓰였다는 점에서 병풍형이나 족자형으로 제작된 감모여재도를 지칭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현대의 종가집 불천위 제사 등에서 쓰이는 병풍을 보면 그림이 제외된 경우가 다수이지만 병풍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가격적인 부담을 줄 수 있는 회화적 요소가 점차 줄거나 생략되어 온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이는 다시
말해 선행연구 중에서 감모여재도가 사대부에 의해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관직이나 유배, 여행을 이유로 고향을 떠나있는 상태에 국한 된다고 보았던 관점은 오류일 가능성이 있으며 오히려 사당에서 감실을 구획하는 용도로 병풍형이나 족자형의 감모여재도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만 이에 관한 다른 기록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연구를 통해 보충되어야 할 부분이다.

주독의 역할을 대신한 감모여재도

감모여재도의 분류와 사용 계층의 관계에 있어 과연 조선 후기 사회에서 반상에 관계없이 경제적 여건만 되면 사당을 지어 그 안에서 제를 올릴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병풍형과 일부 작품성이 뛰어난 족자형 감모여재도의 주 사용층이 사대부라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이를 위해 당시 실록의 기록을 확인해 보았다.
1413년(태종 13년)의 기록을 보면 승중자承重者로 하여금 모두 사당을 세우게 하라는 내용이 나오지만 이는 모두 사대부에 국한된 것으로 확인된다. 세종 연간에는 사당이나 제례에 관한 기록을 여러 건 확인할 수 있었는데 우선 1429년(세종 11년) 3월 14일과 같은 해 7월 18일의 기록에서는 조상의 신주를 처리하는 문제와 제례에 대해 논하면서 관직이 있거나 후에 관직을 얻게 될 가능성이 있는 자를 그 대상으로 하였다. 1432년(세종 14년)에는 예조에서 크고 작은 관리가 가묘를 세우지 않는 실정을 꼬집으며 집이 가난하여 노비가 없고 집이 10간을 넘지 않으며 집터가 3, 4부 이하인 자는 한 간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며, 의관衣冠한 사족士族의 집안이 아닌 자는 침실에서 제사 지내게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 밖에도 사당이나 가묘에 대한 기록이 많았지만 대부분 종묘나 특정 사대부 가문의 사당에서
문제시 되는 부분을 지적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따라서 이상에서 살펴보면 사대부의 경우 사당을 세우는 것이 법으로 엄격히 정해진 필수조건이지만 상인이나 천인의 경우는 반드시 지어야 한다는 내용이 없으며 이들이 경제적 여유가 되어 사당을 짓고자 했을 경우에 지을 수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사족의 집안이 아닌 자는 침실에서 제사를 지내게 한다는 기록을 통해 대부분의 서민은 사당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며 이 경우 안방에 제상을 차리고 그 위에 올릴 수 있는 3폭가리개형 감모여재도가 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조선 후기, 양란兩亂 이후 유교적 질서가 강조되면서 서민들에게도 제례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존재했으며 그에 따라 주독마저 마련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그들에게 하나의 방안으로 등장했던 것이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사용되었던 주독을 모델로 하는 3폭가리개형 감모여재도였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감모여재도가 어느 정도 사당의 역할을 대신하는 용도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3폭가리개형의 경우는 엄격한 의미에서 사당 그 자체 보다는 사당의 대체물로 사용되었던 주독을 대신하였다고 본다. 즉, 사당이 없는 경우는 벽감을 만들거나 주독을 사용하여 제를 올리고 이마저도 여력이 안 되는 서민들은 주독을 본떠 그린 3단가리개형 감모여재도를 사용하여 선조들에 대한 예를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사당이 3단가리개형 감모여재도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지만 직접적이라기보다 주독을 거친 간접적인 영향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3폭가리개를 제외한 병풍형과 일부 작품성이 뛰어난 족자형의 경우는 실제 사당을 소유할 정도의 여유가 있는 양반 계층이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에 그 실질적인 모델이 주독이 아니라 사당 그 자체였는지에 관해서는 향후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요즘은 명절에 가족끼리 여행을 함께 가는 신풍조가 유행이라고 한다. 가족의 친목을 다지고 자주 오지 않는 연휴를 즐긴다는 면에서 합리성과 편리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명절에 꼭 제사의 형태는 아니더라도 살아있는 가족뿐 아니라 조상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은 굳이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중요할 것이다. 필자는 지난해 말 외할머니 상을 당해 연재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바 있다.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 손에 자라서인지 유독 외할머니에게 각별한 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분이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끝도 없는 공허함에 여전히 문득문득 슬픔이 밀려온다. 그래서인지 감모여재도와 어버이날이 다른 때보다 조금은 더 애틋하기도 했고 살아계실 때 효도해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월간<민화> 독자 여러분들도 ‘감모여재도’를 통해 떠나간 조상에 대한 그리움과 현재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가족들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본다.

 

글 : 오슬기(한국민화뮤지엄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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