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개인전 개최한 김정자 화백 – 민화에서 길어 올린 현대美

김정자 화백이 지난 11월 16일부터 11월 24일까지 혜화아트센터 기획 초대전 <金靜子 展>을 개최했다. 이 전시는 한국 근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어낸 미술계 지성인이 구순에 선보인 삶의 역작을 모아 놓았다는 점, 나아가 그 절정의 순간에 민화적 요소를 올려두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김정자 화백이 들려주는 민화, 그리고 예술에 대하여.


꽃봉오리를 열어젖히는 자그마한 꽃잎 한 장에서조차 약동의 기운이 느껴진다. 유화는 물론 헝겊, 골판지, 철제, 나무 등 다양한 재료들을 적용한 꼴라쥬 작품, 추상화까지… 선이며 색마다 형언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작품 앞에서 격변의 한국사를 온몸으로 헤치며 70여년 화력畵歷을 켜켜이 쌓아온 작가의 열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1990년대의 작품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100여점의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주요 작품 대부분이 연꽃, 책거리 등 전형적인 민화적 소재, 즉 한국적 정서가 기반임을 알 수 있다. 서울 혜화동 혜화아트센터 기획 초대전에서 만난 김정자 서울대 명예 교수(90)는 “서양미술에서의 모더니즘이 형성되기 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이루어놓은 모더니즘에 대해 감탄한다”고 운을 뗐다. “회화의 숙명적 과제는 2차원에다가 3차원을 그리는 것, 한마디로 평면에 입체를 그리는 것인데 우리 민화는 평면 속에 3차원, 심지어 4차원까지 표현합니다. 피카소는 4차원의 세계를 어느 시점에서든지 2차원으로 통합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우리 조상들이 피카소보다 몇 백 년 앞서 책거리 그림들을 통해 이같은 차원의 세계를 표현했던 것은 충격적이기까지 해요.”
사실, 김화백은 1929년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가 초등학교 시절 교사로부터 ‘조센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직접 학교를 방문해 사과를 받아낼 정도로 당당했으며 고급 옷감을 떼어다 백화점의 명품 못지않은 옷을 손수 지어 가족들에게 입힐 만큼 눈썰미와 바느질 감각 역시 탁월했다. 부친은 한국 미술품을 즐겨 수집했는데 간간이 딸에게 민화 두루마리를 보여주곤 했다. “보여주신 민화가 굉장히 원시적이면서도 현대적이었어요. 궁중화와 달리 자유분방한 표현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 그대로를 끄집어낸 창의성이 참 놀라웠습니다. 극히 순수하고 밝은 에너지의 정수, 무공해의 미술인 민화에서는 그만의 힘이 느껴지죠.” 부모가 일궈놓은 비옥한 문화적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그였지만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 1945년 3월 연합군이 쏟아내는 포탄을 피해 가족과 동경을 탈출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쟁의 상흔 딛고 국내 현대예술의 근간 마련해

이후 평양의 서문여고에 입학했다가 38선이 그어지기 전, 동생들과 서울로 탈출했으며 1950년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미술학부를 수료했다. 6.25 전쟁이던 당시, 그는 미군부대에 근무한 인연으로 미국인 부부의 후원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귀국하여 한국에 힘을 보태리라 약속하고 10여명이 떠난 유학이었지만 그 약속을 지킨 것은 1957년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학 미술대학에서 학사 정규과정 및 석사과정을 졸업한 김화백이 유일했다. “전쟁통인 한국과 달리 미국에 가니 평범한 가정집에 머물러 있는데도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어요. 혼자만 편히 지내는듯해 죄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공부해 귀국하리라 다짐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의 선진적 교육 시스템을 통해 회화는 물론 건축, 판화 등을 두루 섭렵한 그는 미국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 미술대학 정규코스를 졸업한 지성인으로서 서울대학교 디자인학과 교수로 부임한 그는 교육에 헌신했다. “‘베이직 디자인’이라는 과목을 가르쳤어요. 언어로 말하면 ‘문법’과 마찬가지이죠. 학생들이 제 수업을 그렇게 싫어했다고 하더라고.(웃음)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대학교에 디자인 기초 과목이 없었거니와 미국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미술대학 최초로 판화과정을 교과목으로 지정하기도 했죠.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는데…” 50년대 말 전후 황폐해진 우리나라에서 그는 당시만 하더라도 생소한 디자인 개념을 도입해 공예, 인테리어, 미술이론 등을 교육하며 국내 현대미술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척박한 문화적 환경에서 그의 실험적인 수업 방식에 대한 반감, 여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 등 숱한 시련이 있었지만 김화백은 그에 굴하지 않고 35년간 후학을 양성하는 등 국내 예술 영역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조상의 민화, 오늘날의 예술로 발전시켜야

강의를 나가면서도 틈틈이 붓을 잡던 그는 퇴임 이후에도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이어왔다. 최근의 전시는 김화백의 작업을 눈여겨본 그의 제자 윤혜경 Yoon Interiors & Assoc. 소장의 제안에서 비롯됐다. 처음엔 김화백조차 생각지 않은 일이었지만 전시장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윤 소장의 동창인 김철주 혜화아트센터 대표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덕분에 그가 혼신으로 그려낸 작품들은 ‘때를 기다린 듯’ 고고한 아름다움을 활짝 피워내며 드넓은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국내에서는 서양화를, 미국에선 현대미술을 섭렵한 그가 종래 한국 전통의 민화적 서정을 좇은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페인팅(회화)이면 페인팅이지 서양화, 동양화를 나눌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긴 했지만 수업 시간에 동양화 과정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엔 지루했어도 미국에서 그때 배운 점묘법을 유용하게 활용했죠. 어디 그뿐인가요? 건축 분야에서도 설계도를 그려야 하니 이것 역시 회화가 될 수 있지요. 옆집 것도 배우면 다 쓸모가 있는데, 굳이 장르를 나눌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회화의 장르를 분류해 놓은 국내 대학교의 미술 교과 과정이 틀린 거지.”
덧붙여 김화백은 민화붐인 오늘날, ‘스스로 미술가라고 나섰다면 자신만의 스타일이 필요하다’며 모사模寫에 대한 입장을 확고히 했다. “초보라면 얼마든지 옛민화를 모사할 수 있겠지만 아티스트라면 뭘 하든 간에 창의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만 돌아보더라도 풍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어요. 민화는 우리 조상들이 남겨주신 것이고, 이를 모티프로 한다면 자신만의 시각을 더하는 것이 현재 작가들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글 문지혜 기자 사진 이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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