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정의 창작민화론⑧ 현대 창작민화 – 피카소에서 숨은 민화 찾기

정하정의 창작민화론⑧
세계 명화, 우리 민화를 담다
피카소에서 숨은 민화 찾기

현대에 걸맞은 창작민화는 과연 어떻게 그려야 하는 것인가? 창작을 위해 마음을 정하고 하얀 화선지 앞에 서면, 대책 없는 막연함에 앞이 막막해지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막연함의 위력은 대단하다. 화가가 아무리 굳건한 의지를 품었고 천재적 소질을 지녔더라도 막연함에 사로잡힌 상태라면 창작을 향한 어떤 길도 열어가기 힘들다. 아니면, 멋모르고 달려가다가 엉뚱한 곳에 당도하기 일쑤다. 화가에게는 그 막연함을 최대한 멀찌감치 물리치고, 그 자리를 채울 분명한 방법론을 장착한 다음에 화선지를 펴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 될 것이다. 이번 호에는 그런 차원에서 몇 가지 방법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민화가 지닌 현대적 미학의 가능성은 그야말로 차고 넘친다. 세계의 미술 역사를 바꿔 놓고, 또 세상을 심하게 흔들어 놓았던 세기적 화가 불과 두어 사람만 예를 들어도 그 증거를 확실히 찾을 수 있다. 그들을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 화가로 만들었던 창작품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민화와 공통된 특성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떠한 역할을 했었는지 밝혀낸다면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위에서 말한 그 막연함을 생각 밖으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참고할 것은, 이제부터 말할 이 민화적 특성들은 지금도 국내외 화가들에 의해 왕왕 쓰이는 기법이 되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 현대민화가들은 그들이 해놓은 것들을 그저 바라보면서 감탄만 하고 있는 듯해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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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 우리 민화의 독특성

먼저 피카소Pablo Ruiz Picasso를 만나보자.(그림3. 참조)
피카소는 얄밉도록 간단하게, 우리 민화가 가진 구도적構圖的 독특성 중의 하나와 똑같은 구도법 사용으로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화가다. 피카소에 대해선 그의 작품생활 초기부터 할 얘기가 많지만 생략하기로 하고, 1913년에 발표한 <안락의자에 앉은 여인(Woman in an armchair, 1913, 캔버스에 유채, 146×98㎝)>이라는 작품을 중심으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그는 본 작품을 제작하기 불과 몇 해 전인 1906년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d'avignon)>을 발표하면서 동료 화가 조르주 브라크 Georges Braque 등과 함께 이른바 ‘입체파 혁명(큐비즘 Cubism)’의 기수가 되었는데, 당시에 그들이 주창했던 ‘분석적 리얼리즘 표현’ 방식을 적용하던 모습, 즉 화면을 수많은 요소의 단면적 기호들로 분해하여 그려내던 방법으로 부터 미학적으로 급진전하더니, 1912년부터는 그의 작품을 대표하는 미술 양식인 ‘종합적 입체파(Synthetic Cubism)’ 라는 새로운 조형어법을 적용하기 시작했고, 1913년 <안락의자에 앉은 여인(Woman in an Armchair)>을 통해서 드디어 더욱 새롭고 강력한 진술을 해낸다. 그 이전에는 작품의 주제를 3차원(입체)에서 2차원(평면)으로 번역하여 그려내는 방법이 실제 눈에 보이는 사물의 형태에서 느껴지는 감성보다 개념적으로 더 깊고 완전한 의미로서 대상(주제)의 본래 가치, 즉 객관적 진실을 밝혀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피카소는 ‘안락의자에 앉은 여인’에서 단면적 기호 같은 요소들로만 분해하여 나열하는 화법이 아닌 ‘파피에 콜레Papiers colle’ 수법*과 함께 3차원의 특징(입체감)까지 화면에 포용, 배치함으로써 ‘입체파’의 철학 원칙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는 걸 확인시켜 준다. 피카소는 남다른 천재성을 과시하며 이때부터 동료 큐비즘 화가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돋보이는 존재가 된다. 필자는 입체파 시기의 피카소 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 민화 중 책거리의 구도법이 떠오른다. 그가 사용했던 방법론을 그의 말을 빌려 설명한다면 ‘원근법, 단축법短縮法(foreshortening), 모델링, 명암법 등의 전통 기법을 거부함으로써 화폭의 2차원적 평면성을 강조’하여 오히려 더 주제의 객관적 진실성을 확보해낼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 표현 기법정신의 골간은 이미 조선 민화에서 크게 활용되던 방법론 중의 하나인 이른바 ‘다시도적多視圖的 구도법構圖法’의 변용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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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이전까지의 우리 민화는 주제의 보이는 방향이나 초점이 무시되어 일정하지를 않고, 눈으로부터 주제를 가려지게 하는 장애물 등도 무시하고 여러위치, 여러 방향에서 보이는 것을 이어 그리거나 중첩하여 그려 넣는, 또는 사물의 원근에 의한 크기를 무시하거나 뒤바꿔 그리는, 또는 복합적 중첩 등의 ‘다시도적 구도법’을 사용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민화책거리 중에는 심지어 앞면과 함께 그 옆면, 심지어 뒷면까지를 이어서 그린 그림도 있다. 19세기 말 이후부터는 빠른 속도로 밀려드는 서양적 표현법의 성행으로 말미암아 전통 방식은 점차 뒤로 물러나고 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통 방식들이 현대에 와서도 사진기의 촬영술과는 뭔가 차원을 다르게 표현해내고 싶어 하는 미술적 풍조와 걸맞아 앞으로도 한참은 더 활발하게 활용될 전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창작을 위해서 선조들이 물려준 그 회화법을 고맙게 꺼내어 써 볼 일이다. 피카소의 그림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자.
<-전략- 입체파 시기 내내 그의 예술의 중심이었던 객관성에의 추구를 통해, 그는 많은 세부 요소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의자의 팔걸이, 의자의술 장식, 블라우스의 부채꼴 가장자리 장식, 머리칼 등등. 그러나 그는 사물의 외양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적 성질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전의 입체주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원근법의 일방적 우연성을 피하고,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사물 그 자체로서, 우리가 그것을 체험하는 대로 표현한다. 그리하여 그는 의자를 정면 시각으로뿐만 아니라 위에서 본 모습으로도 보여주며, 인물의 젖가슴은 정면과 측면의 두 가지 시각이 병치된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리얼리티를 기호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형태의 시각, 곧 더는 일시적 또는 우연인 시점에 의존하지 않는 -(필자 주: 눈에 보이는 대로만의 시각에 의존하지 않는)- 사물의 세계에 대한 진술을 획득한다. -중략- 리얼리티에 대한 그와 같은 시각의 준엄성과 객관성 때문에 이 작품은 피카소의 과거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극적인 특성을갖게 된다. -(필자 주: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극적인 특성=입체감을 포함하는 큐비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한스 야페 Hans L. C. Jaffe 저, 중앙일보사 73p 부분>
피카소가 변용하여 사용했던 ‘다시도적 구도법’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새로운 변용의 가능성을 주는 기법이다.

샤갈과 민화가 공유하는 불합리적 구성법

다음으로는 더욱 다양한 민화의 특성적 화법을 적용한 작품들로 세계 미술계를 감동하게 한 화가 샤갈Marc Chagall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지면이 짧은 관계로 <아내에게(to my wife, 1933~44, 캔버스에 유채, 131×194㎝)>라는 한 점의 작품만을 가지고 민화의 상징적 특징을 찾아 설명해보려 한다. (그림4. 참조) 다른 것들은 다 빼고 민화의 상징적 특징에 관해서만 논하기로 하자. 이 작품은 샤갈이 10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것으로, 우리 민화가 안팎으로 품고 있는 ‘불합리적(비과학적) 구성법’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 작품 제작 의도는 우리의 민화와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우리의 민화가 그림을 통해 ‘관람자 생활의 향상성’을 추구했던 것과는 달리, 샤갈의 그림은 지금껏 샤갈이 삶의 기쁨으로서의 환상과 서정을 노래하던 모든 추억의 요소들을 발언하려는 용도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위에서 말한 불합리한 설명 방법론이 합리적(과학적) 방법론의 회화보다 오히려 관람자의 마음을 크게 붙잡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한다면, 우리는 지금 하고 있는 창작민화 작업을 위한 참으로 큰
수확을 얻어내게 되는 것이다.
첫째, 샤갈의 그림은 한 화면 안에 상당히 여러 가지의 동물과 사람 그리고 각종 기물을 섞어 넣음으로써 관람자를 마치 동화같은 상상의 나라로 안내한다. 그리고 그 모두는 등신대等身大(a life size)나 모양새가 이미 사실성에서 벗어나 있다. 민화는 이런 어린아이 그림 같은 천진난만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음을 이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둘째, 모든 등장인물 혹은 물체들을 화면 안에 적절히 분산시켜 각기 제 자리를 차지하는 각각의 주인공처럼 그려 넣는다. 이 점은 샤갈의 큐비즘적 사고에 의한 것으로서, 피카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도적 구도법’을 따르고 있다. 여인의 누드 뒤편의 가옥들 역시 전체 균형적인 질서를 따르지 않고 삐뚤빼뚤 제각각 독자적인 형태들로 그리고 있다. 마을을 이렇게 ‘경관미景觀美’의 주체가 아닌 ‘자기 체험의 흔적인 양’ 등장시킴으로써 관람자가 묘한 흥분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주인공을 둘러싼 축하객들 역시 거꾸로이거나 똑바로 하늘을 날기도 하면서 ‘방향이 무시되는 채’ 그려졌다. 또 ‘실내와 실외의 차이도 무시된 채’ 한 공간에 자연스럽게 나타낸다. 민화의 어해도 같은 그림에서도 물속의 물고기가 물 밖에 있는 듯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셋째, 결혼식을 하는 듯 서로 밀착된 두 연인과 화면 우측의 관능미를 뽐내는 누드 여인 등 주인공 역할을 하는 등장인물들은 크게 그리고, 주인공의 주변에서 나팔을 불거나 현악기를 타면서 축하해주는 조연급 등장인물은 모두 작게 그렸다. 이는 민화에서 말하는 ‘주대종소법主大從小法’과 같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을 크게 그리고 그 주인공에 종속된 것들은 작게 그리는 방법으로써, 고대 회화에서 주로 쓰이던것이 민화에도 전해져 그려지던 방법이었다.
넷째, 각 동물이나 물고기가 ‘의인화擬人化’ 되어 더욱 잔치 분위기의 흥을 돋운다.
다섯째, 촛대를 든 염소나 사람들이 하늘을 나는 등 지구의 중력이 완전히 무시된다. ‘중력무시법重力無視法’은 민화에서도 작품에 신비로운 흥을 돋우면서 자주 보이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여섯째, 색채 사용에서도 자연이 가진 원칙을 벗어나 마치 우리 민화가 사용하는 ‘오방색五方色 그림에서처럼 포치抛置’하고 있다.
일곱째, ‘원근법(투시도적 원근법)이 무시된 상태’로 그려졌다. 우리 민화에서는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역원근법逆遠近法까지 사용하기도 한다.
여덟째, 모든 명암법이 무시된 채로 표현되고 있다. ‘명암법 무시’는 민화의 기본적인 표현방법에 불과하다.
이 작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이 밖에도 우리 민화가 사용하던 불합리적 구성법으로는 계절 또는 밤과 낮 등의 ‘시차時差가 무시된 채’ 그
려지는 그림들도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민화적 방법론은 우리나라에서도 김기창, 박수근, 장욱진, 박생광 등등 수많은 화가가 자기 방식으로 활용했으며, 앞으로도 더욱 많은 화가에 의해 번져 나갈 것으로 예견된다.

현대인의 고뇌 어루만지는 민화만의 독창적 기법

지난번에도 언급했듯이, 오늘날 현대인들은 넉넉한 생활의 안락함 속에서도 여전히 불안과 외로움을 벗어나지 못하는 채 살아간다. 그리고 사회적
경쟁 심리에 의한 수많은 상대 평가들 때문에 이유 없이 겪게 되는 낙오감과 외로움 등 심적, 의식적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러한 사회 현상의 늪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의 정신적 안위를 지켜내야만 그나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이 부분에 대해 사회학적 측면으로 파고들면 각종 해석으로 풀이할 수 있겠지만, 화가들에겐 우선 눈에 보이는 현상학적인 면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지 않다.
과거 조선 시대의 지독한 가난과 제도적 억울함을 감내하던 시절의 입장과 비교한다면, 그때의 문제 중 대부분이 해결된 오늘의 이 사회적 상황에서의 뜻하지 않은 부정적 체감 요소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이 상황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새삼 놀라게 된다. 오늘날의 민화가들 앞에 놓인 이 시대적인 과제를 어떻게 창작으로 풀어 사회에 기여할 것인가를 조선 시대 민화가들이 겪었던 선험적 방법을 통해 터득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하겠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민화의 일부 특성에 근거하는 창작 표현법은 관람자의 마음을 깊이 파고드는데 상당히 유리하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주의는 우리에게 육체적 편안함과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럴수록 더 많은것을 기대하는 사람의 심리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
에 대한 정서적 보호 방안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앞으로의 미술품 창작에 있어서 민화만의 특성적 기법이 보다 효과적으로, 보다 널리
적용될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계속>

 

글 : 정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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