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정의 창작민화론⑧ – 아이디어는 기록하고 원초적 감각을 믿어라!

창작민화그리기 실전 첫걸음
아이디어는 기록하고 원초적 감각을 믿어라!


이번에는 필자가 직접 작업하는 과정과 개인적인 습관을 있는 대로 소개해보려 한다. 미리 당부할 것은, 이러한 그리기 방법은 어떤 화가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 그저 저런 방법도 있구나 하며 가볍게 흘려 넘겨도 좋겠고, 또는 자기 작업을 위한 응용에 조금의 도움이라도 된다면 필자에겐 더 없는 보람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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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그릴 작품들은 모두 10호 내외의 작은 크기에 구도 역시 비교적 간단한 소품들로 정했다. 요즘 즐겨 그리는 호랑이 연작 중 세 점이다. 창작 작업에 대한 안내용으로 쓸 이미지로는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서이다. (그림1, 2, 3 참조) 호랑이 그림에 유독 마음이 끌려 가깝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큰 몫을 차지한다.

서민적 공감대 품어 더욱 매력적인 민화 호랑이

사실 우리나라의 민화 호랑이는 아무리 보아도 호랑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이다. 민화 호랑이는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사실적 모양의 호랑이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게 그렸다. 그런데도 전 세계인으로부터 친숙한 인간적 호랑이라는 평가 속에 유례없을 만큼의 호평을 받고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실물 같은 느낌의 호랑이 그림이라면 중국의 공필화나 일본 전통화에 전해지는 사납고 용맹스러운 그림들이 더 호랑이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실물과 전혀 다른 모습의 우리나라 민화 호랑이가 그들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인기가 더 높다. 이런 점에만 착안하더라도 우리 민화가 사실(팩트fact)에 어떻게 접근하고, 또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그려내는지 그 포인트 키를 쉽게 손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본다면, 사실을 사실대로 그리는 것은 창작 수업의 첫 단계인 자연 모사 차원에 해당할 것이다. 어쩌면 미술대학 입시 지망생들이 석고 데생 연습을 위해 입시학원 등에서 스파르타식 수업으로 고생 끝에 얻은 모사 능력(석고 데생)을 정작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그것을 뒤로 한 채 그 차원을 넘어선 전혀 다른 작업에 천착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실물 호랑이와는 전혀 다르게 그렸는데도, 실감 나는 외국 호랑이 그림들을 제치고 우리 민화 호랑이가 세계적 인기 스타가 된 근거는 무엇일까? 그 민화 호랑이를 가만히 보면 인간애人間愛 가미加味 방식으로 의역해 놓은 호랑이에 당시 서민적 공감대를 얹어 놓는 방법이 주된 기술이다. 그 기술이 우리 민족의 서민미술이 자랑스러운 쾌거를 이루게 한 것이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호랑이를 실물처럼 그려내는 것이 우리 현대민화인들의 작업 목표는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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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 마스터 후, 창작? 순서는 중요치 않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 내는 노력을 다 끝낸 후에나 변화미 있는 창작에 임해 보겠다는 계획은 세웠다고 한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차원의 자연 모사력을 얻기 위해서는 아마도 자기 일생을 다 바쳐도 모자랄지 모를 일이라는 것이다. 평생을 노력해도 그만 못 할 것이 뻔하다면 그 경쟁은 하나 마나다. 매우 역설적인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차라리 최대한 우리네 서민들 소망의 공통 관심사에 집중하면서 인간 원초적인(유아적인?) 묘사력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실속 있는 선택일 것이라는 뜻이다. 과거의 민화 중 대부분의 작품은 인간 원초
미적 표현 방식에 동시대인의 소망을 더해 표현하는 데 초점을 두었을 뿐 현상적 팩트라든지 실물의 사실적 표현에는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더욱이 오늘날 예술가적 비전을 제시하는 대부분의 미술 이론가들 역시 ‘화가가 자기 개성에 더 집중할 때 가장 독보적인 화풍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배움의 내용이나 순서에 대해 더더욱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사실(팩트fact) 자체가 아니라 그 팩트fact를 예술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인식하되, 지智, 정情, 의意, 예藝, 기技 등의 방법을 활용하여 예술적 확장 또는 변형deformation해낸 그 어떤 공감이거나 깨달음이다. 이 부분은 중요하므로 반복하여 말해보자면 예술의 척도尺度는 예술가에 의해 인식된 팩트가 이상적인 의미 확장과 변형(또는 왜곡)을 거치며 나타나는 결과까지의 거리 또는 진폭振幅을 표출表出하는 감동적 기술 정도일 것이다.
이러한 정의 아래에서 민화 호랑이를 바라본다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그림일지라도 그것이 재미있고 친근한 공감의 방법으로 인간적 인식과 변형을 이룬 표출물이기에 누구나 즐기며 예술적 격려를 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직접 그리기 순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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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1. 에스키스 만들기

작업의 첫 단계는 에스키스esquisee 만들기다. 에스키스란 주로 서양화가들이 작품의 기본 설계도 삼아 대충의 구도와 예측 효과를 가늠하기 위해 잡아 놓는, 민화식의 말로는 밑그림(본)과 같은 것이다.(그림 4 참조)
우선 작품 구상을 위해 필자의 손에 항상 들고 다니는 수첩 속 메모들을 살핀다. 필자는 언제, 어디서라도 아이디어나 영감이 떠오르면 즉시 메모하려고 손에서 항상 노트를 놓지 않는다. 처음에 메모할 때는 별것 아닌 거 같아도 나중에 다시 보게 되면 메모할 때와는 또 다른 아이디어가 보태지기도 하고, 아예 새 발상이 떠오르기도 하는 등 매우 유익하게 쓰인다. 설령 그것 중 수많은 메모를 모두 다 버리고 한두 개만 얻어낸다 하더라도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또 아이디어를 즉시 메모해두지 않으면 아예 뇌리에서조차 하얗게 사라져 버리기 일쑤여서 더더욱 그렇다.
필자가 듣기로는, 민화의 창작을 하고는 싶으나 작품 소재를 생각해내는 게 어렵다고들 한다는데, 이렇게 생활 수첩을 활용하여 그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음을 조언한다.
작품 주제와 방향을 생각하면서 낙서와도 같은 메모들을 살피는 동안 처음에 메모 그림을 그리던 때를 회상하면서 잠시 행복해진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끄는 녀석을 선택한다. 의인화된 호랑이 가족이다.(그림 1 참조)
호랑이의 실제 모습에는 전혀 근처에도 안 갔고, 옛날 민화 호랑이 도상들과 비교해도 그 냄새만 풍길 뿐 형상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새로운 상상의 모습으로 이미지 업image up되는 것을 순간 포착하여 남겼던 즉흥적 낙서다. 즉흥적으로 그리는 것이 오히려 작정하고 그리는 것보다 예상외로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는 것은 아마도 누구나 다 경험해봤던 일일 것이다.
구도에서는, 전체 화면 구성의 변화미를 위해 왼쪽 상단부분을 제법 넓게 남겨 놓고는 그곳에 녀석들의 꼬리들로 낙서하듯 채우며 다소 무질서한듯한 분위기를 표현해 오히려 지루함이 덜어지도록 장치했다. 또한 놈들의 꼬리를 이용해서 가족애를 나타내고, 호랑이 등 위에는 하나씩 사과를 얹어 놓았다. 이 사과는 보는 관람객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역할을 하는데, 사과 자체가 가지는 몇 가지 의미로 인해 그림을 보는 이에게 일종의 스토리텔링적 기대감을 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분명한 답을 화가가 내리기보다는 관람자들이 제각각 다른 상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과 역시 실물적인 표현은 피할 것을 권한다. 그리고 모든 호랑이는 따듯한 표정으로 웃어야만 한다. 우선 작업 당시의 내 취향을 즐겁게 맞춰주지 못하는 녀석이라면 왠지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남들 앞에 자신 있게 내보이질 못한다. 내 그림을 보는 이들의 행복을 기도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고 있는 필자로서는 그림의 소재들이 다 크게 웃고 있는 걸 좋아한다.
그려보고 싶은 메모(혹은 낙서)가 이렇게 선택되면, 그리려고 하는 실제 작품 크기의 모조지에 메모 그림을 연필로 확대하여 그린다. 이 과정에서 화면 비례는 물론이고, 탄탄한 화면 구조가 되도록 짜임새를 꼼꼼하게 살피면서 그려야 한다. 때로는 메모와 상당 부분 달라지기도 한다.
실제 크기로 확대하다 보면 작은 메모일 때와는 달리 구도가 싱거워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에스키스들은 나중에 작품이 완성되는 즉시 찢어버릴 것이다. 그대로 놔두면 다시 그것을 활용한 똑같은 그림이 다시 태어나는 걸 막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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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2. 먹선 그리기

다음으로는 순지(화선지)를 에스키스의 위에 포개놓고 먹선 작업을 한다.(그림 5 참조) 이 때에도 본래의 기초 그림에서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림이 그려지는 대로 맡기고 그냥 따라가기를 권한다. 필자는 작업 도중에 일탈되는 현상, 즉 내 앞에 다가오는 우연적 현상을 그저 있는 그대로 살려내는 것을 즐긴다. 이 부분은 우리 동양예술 문화사에서도 매우 귀하게 다뤄오던 자연주의 철학 중 하나다. 물론 북화풍北畫風의 채색화 전통정신을 들어 우연을 억제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할 수 있겠으나, 어차피 이 분야에 관련한 요즘의 문화사적 트렌드를 적용한다 하더라도 순수 단일 방법(정신) 적용보다 실용적 효율성에 따르는 총체적 융·복합 철학이 그보다 우위의 자리를 지키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에 착념해서이기도 하다. 이 점은 사실 서양의 인위적 과학주의와는 크게 다른 것으로서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에 특히 이 부분에 대한 존숭尊崇이 거의 신앙과 같을 정도로 컸었다. 이 부분은 다음 호에서 한 번 더 다루게 될 것이다. 아무튼, 선대의 문인이나 화가들처럼은 아니더라도 필자는 내 그림에 그들이 하던 고민과 철학적 쾌감이 민화적 전통과 함께 융·복합되는 형식으로 흐르게 하려는 방법론에 슬며시 마음을 기대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생각은 필자만의 경우일 뿐, 미술 역사의 전통 정신 중에서 놓치기 아까운 중요한 것들은 이 밖에도 많으므로 화가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것을 골라 취하면 나름의 민족 전통에 잇대인 현대 방법적 논리가 내 작품에 적용될 것이다.

Step3. 색칠하기

다음은 채색이다. 필자는 순지를 아교포수하지 않은 채번지는 종이 상태 그대로 사용하는 걸 좋아한다. 과거 70년대 초반에 수출용 민화화실을 운영하면서 많은 양의 그림을 짧은 시간 안에 똑같이 그려내기 위해 아교를 백반과 비율 맞춰 적당히 녹여 넣은 물로 종이에 포수包水를 하든지 아니면 보일유(Boil oil)에 시너에 희석하여 포유包油해서 썼지만, 요즘에는 그럴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물론 아교 물 포수 방식도 옛날부터 있었던 전통이기는 하다.
필자의 호랑이 그림에는 요란하고 번잡스러운 채색보다는 담백한 느낌의 설채 방식이 더 어울리며 전통 분위기도 더 잘 표현된다고 생각한다. 호랑이 그림 채색의 노하우는 다음과 같다. 채색이 번지는 정도를 잘 조절하고, 번짐이나 얼룩조차도 그림의 느낌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면서 채색 정도를 고려하여 색을 다 칠한 다음에는 호랑이의 귀와 눈, 그리고 주둥이, 또 코 끝 등을 진한 색으로 악센트를 가하여 생동감을 더한다. 호랑이의 등 부분 또한 다른 곳보다는 상대적으로 진한 느낌이 들도록 칠해서 전체적 균형을 맞춰준다. 모든 동물은 머리 끝, 코 끝, 눈, 주둥이, 등, 발 끝 등에 악센트를 주고 더욱 정성스럽게 그려야만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을 잊지 말자.
이렇게 하여 간단하고 비록 못난 작품일지라도 현대적 의미를 품은 창작 민화가 또 하나 태어나는 것이다. (그림 6, 7, 8 참조) <계속>

 

글 정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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