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황토현 전적지, 성난 농민들의 거친 숨소리 혁명의 함성으로 메아리치다

정읍 황토현 전적지
정읍 황토현 전적지

황토현 전투는 전라북도의 한적한 시골 고부에서 일어난 소규모 농민봉기가 한반도 전역을 휩쓴 초유의 농민전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분수령을 이룬 사건이다. 농민군은 이 싸움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승승장구, 마침내 조선왕조의 본향本鄕이자 호남의 중심지인 전주로 입성, 혁명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열게 된다. 이런 점에서 황토현 전투는 동학농민혁명의 가장 찬란한 봉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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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운동의 첫 장, 고부농민 봉기

전봉준동상조선조 말, 19세기 후반은 한마디로 ‘민란民亂의 시대’였다. 안으로는 수백 년을 두고 누적된 봉건적 모순들이 곪아 터지고 밖으로는 도도히 밀려드는 외세外勢 앞에 나라 전체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왕조의 말기현상으로 나타난 탐관오리들의 착취와 횡포는 거대한 전환기를 힘겹게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을 극단으로 내몰아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봉기가 그칠 날이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종의 즉위 이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까지 일어난 민란은 약 60여 회로 집계되는데, 중앙에 보고조차 되지 않는 작은 소요까지 합치면 무려 1백여 회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 엄청난 무게로 기록된 동학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된 ‘고부민란’도 사실은 그 무렵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난 수많은 민란 중의 하나였다.
1892년, 전라북도의 한적한 농촌 고부군에 새로운 군수가 부임한다. 한양 조정의 세도가와 줄을 대고 있는 조병갑趙秉甲이라는 인물로 조선 말 탐관오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부패한 관리였다.
그는 전라도에서 가장 기름진 들판으로 꼽혔던 배들평에 있는 만석보에 쓸모도 없는 새로운 보洑를 쌓는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부려먹었는가 하면 이를 핑계로 새로운 세금을 만들어 어거지로 거둬들였다. 또한 인근 태인군의 군수를 지냈다는 제 아비의 비각碑閣을 세운다고 또 세금을 거둬들여 이를 착복했다. 그것도 모자라 죄 없는 고을 사람들을 수시로 잡아들여 불효를 했다는 둥, 음란한 행동을 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둘러 씌워 재물을 빼앗았다.
견디다 못한 고부 고을 농민들은 대표를 내세워 제발 이런 일은 거두어 주십사 하는 진정서를 써 올렸다. 그러나 포악한 조병갑은 잘못을 고치기는커녕 고을 대표를 잡아들여 곤장을 쳐서 옥에 가두고 말았다.
어렵사리 올린 진정마저 이렇듯 무참한 보복으로 돌아오자 고부 농민들은 참았던 분노가 폭발, 마침내 목숨을 건 무력 봉기에 나서게 된다. 그 고장에서 훈장을 지내고 있던 전봉준全奉準을 우두머리로 내세워 몽둥이와 죽창을 꼬나 쥐고 고부관아를 습격했다. 관아의 무기를 빼앗고 옥문을 열어 무고하게 갇힌 백성들을 풀어주고 내친김에 거기서 3km쯤 떨어진 배들평으로 내달려 수탈의 상징이었던 만석보까지 허물어 버리고 만다. 1984년 1월 10일의 일이었다. 여기까지가 동학농민전쟁의 첫 단계인 ‘고부민란’ 혹은 ‘고부농민봉기’의 전말이다.
높이 쳐든 무장항쟁의 깃발, 역사를 새로 쓰다
고부 땅에서 큰 난리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보고되자 조정에서는 나름대로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 시행한다. 우선 난리의 원인을 만든 조병갑을 잡아 올려 심문하는 한편, 용안 현감縣監을 지내던 박원명朴源明을 새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龍泰를 안핵사按覈使로 임명 현장에 파견해 사태를 진정시키도록 했다.
새 고부 군수로 부임한 박원명은 전라도 광주 출신의 관리로 고부 지방의 민심을 비교적 잘 알고 있는 합리적인 관리였다. 그는 온당한 수습책으로 성난 민심을 가라앉혀 일단 농민들을 해산시키는 데 성공한다. 고부의 난리도 다른 민란처럼 한 때의 소동으로 끝나는 듯싶었다.
그런데 진정국면에 접어든 고부 봉기에 재차 불씨를 붙여 심각한 무장항쟁의 단계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은 얼마 뒤, 사태 수습을 위해 조정에서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의 무자비한 진압 행태였다. 그는 난리를 수습하기는커녕 보복이라도 하듯 살인과 약탈, 방화와 같은 끔찍한 방법으로 농민군을 몰아쳤다.
농민들은 이렇듯 무자비한 진압작전에 밀려 일단 흩어졌지만, 곧 전봉준을 중심으로 인근 ‘백산白山’에 모여들어 본격적인 무장 항쟁을 준비하게 된다.
백산은 고부읍 북쪽에 있는 야산으로 높이가 50m 정도 밖에 안되는 야트막한 구릉이지만, 시야가 탁 트인 데다 넓은 평야로 둘러싸여 양식을 보급하기에도 편리했다. 게다가 삼국시대에 쌓았다는 성이 있었다. 한마디로 전투를 준비하는 요새로서는 그만인 곳이었다.
전봉준은 이곳 백산에 항쟁의 둥지를 틀고 인근 여러 고장에 동참을 호소하는 격문을 띄우는 한편 당시 동학교의 유력한 접주接主였던 무장의 손화중孫化中, 태인의 김개남金開男 등과도 손을 잡게 된다. 농민군과 동학 조직 간에 최초의 연합이 이루어졌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으로 연결되는 농민군의 지도부가 이렇게 해서 구성된다.

혁명전쟁의 분수령, 황토현 전투

항쟁의 본부가 된 백산에는 각지에서 농민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손화중과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을 포함, 백산에 모여든 농민의 수는 1만 명이 훨씬 넘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여기서 농민군의 총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은 손화중, 김개남을 총관령으로 삼아 지휘 체계를 갖추고 농민 무리를 실전에 알맞은 전투체제로 편성, 무장항쟁의 준비를 마친다. 이어 감영監營이 있는 전주를 1차 공격 목표로 삼아 마침내 5월 8일, 인근 금구 관아로 물밀 듯 진격하면서 본격적인 무장항쟁의 깃발을 높이 쳐들게 된다.
농민군의 봉기 소식이 전해지자 크게 놀란 전주 감영에서는 감영의 군사 8백여 명과 보부상 8백여 명으로 군대를 편성, 진압작전에 나선다. 감영군의 출동 소식을 접한 농민군은 금구관아를 습격한 뒤 진로를 바꿔 부안을 거쳐 다시 고부로 돌아와 전주감영군과의 한판 싸움을 대비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1894년 음력 4월 6일, 농민군과 정부군은 황토현黃土峴에서 정면으로 맞붙게 된다. 황토현은 이름 그대로 누런 황토로 덮여있는 나지막한 고개였다.
전투는 6일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날 전투에 대해서는 남겨진 기록의 내용이 조금씩 달라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구성하기는 어렵다. 어떤 기록은 먼저 공격에 나선 감영군을 농민군이 매복 작전으로 무찔렀다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기록은 감영군이 미처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농민군이 먼저 공격을 퍼부어 크게 승리했다고 적고 있다.
어찌됐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농민군과 정부군의 첫 전투인 이 싸움에서 농민군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무기에서는 열세였지만, 전봉준, 손화중 등의 영민한 지휘 아래 ‘제폭구민除暴救民’의 대의로 무장,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농민군에 비하면 보부상까지 동원해 급조되다시피 한 전주감영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이날 전투에서 정부군은 무려 7백5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무참하게 패배하고 만다. 농민군으로서는 정부군을 상대로 거둔 역사적인 첫 승리이기도 했다.
황토현 전투는 고부에서 일어난 소규모 농민봉기가 한반도 전역을 휩쓴 초유의 농민전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분수령을 이룬 사건이다. 농민군은 이 싸움의 승리를 발판으로 정읍, 흥덕, 고창 등 여러 고을을 거침없이 점령하고 무장, 함평, 무안을 거쳐 마침내 조선왕조의 본향本鄕이자 호남지역의 중심지인 전주로 입성, 혁명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열게 된다. 이런 점에서 황토현 전투는 동학농민혁명의 가장 찬란한 봉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적인 싸움터에 서린 농민군의 거친 숨결

그 옛날 수천의 군중들이 천지를 뒤흔들 듯한 함성 속에 한데 얽혀 뒹굴었을 이 역사적인 싸움터는 덕천면 하학리 산 2번지에 펼쳐져 있는 널찍하고 야트막한 구릉이다. 명색 재峴라고는 하나 높이가 고작 30여 미터에 불과해 사실상 평지나 다름이 없다. 현재는 이 일대 16만 3천2백23㎡가 사적 295호로 지정되어 ‘황토현전적지’라는 이름으로 보존되고 있지만 그 날의 흔적은 남아있는 것이 전혀 없다. 대신 현대에 만들어진 몇몇 기념 조형물들이 농민혁명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주고 있다.
현재 황토현전적지 내에 있는 조형물과 건물들은 지난 2004년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1973년부터 1986년 말까지 진행된 이른바 ‘황토현전적지정화사업’ 기간에 완공된 것들이다. ‘동학혁명기념탑’, ‘전봉준장군 동상’, 전봉준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구민사’ 등이 그것이다. 보국문輔國門이라는 현판이 달린 전봉준기념관의 문을 들어서면 이들 조형물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이중 가장 눈에 띄는 흔적은 구민사 뒤편 언덕에 우뚝 서 있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다. ‘정화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1963년에 세워진 이 탑은 정읍에 있는 동학관련 기념조형물 중 가장 오래된 흔적으로 전라북도기념물 제43호로 지정돼 있다. 반세기의 연륜이 묻어나는 훈훈한 고색古色이 그나마 옛 유적 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농민혁명과 관련된 옛 유물과 흔적을 더 만나려면 전봉준기념관 맞은편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들어서야 한다. 농민혁명 110주년에 맞춰 지난 2004년 5월에 문을 연 이 전시관에는 ‘사발통문’을 비롯한 동학관련 유물과 서적이 나름 알차게 전시돼 있다.
그밖에 황토현전적지 내에 있지는 않지만, 거기서 가까운 곳에 있는 ‘전봉준장군고택’과 ‘만석보유지비’등도 황토현전적지권에 있는 유적으로 보아야 한다. 이들 역시 ‘황토현전적지정화사업’ 기간에 단장된 곳이다.
이평면 장내리 마을 초입에 남아있는 ‘전봉준 고택’은 고부 농민 봉기의 난리 통에 불탄 이후 겨우 흔적만 남았던 것을 지난 1974년 대대적으로 확대 복원한 것이다. 흙담으로 지은 4칸짜리 ㄱ자형 초가집으로 조선시대 가난한 시골 농민들의 전형적인 가옥형태이다. 실제로 당시 전봉준의 살림살이 또한 일반 농민들의 궁색한 처지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좁은 툇마루와 금이 간 황토벽에 내리쬐는 햇살을 바라보며 생가를 한바퀴 돌다보면 이 비좁고 허름한 공간에서 코흘리개 아이들을 다독이며 웅장한 혁명의 꿈을 애써 삭였을 고독한 혁명가의 고뇌에 찬 숨결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
거기서 동쪽으로 6km쯤 떨어진 이평면 하송리 들판에는 농민봉기의 출발점이 된 ‘만석보’의 옛터가 있다.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쳐져 동진강이 시작되는 곳, 기름지기로 유명했다는 ‘배들평’의 복판이다. 이곳에는 본래부터 농민들이 스스로 쌓은 보가 있었는데, 농민을 쥐어짤 생각에 골몰하던 조병갑이 세금을 더 걷기 위해 쓸모없는 보를 또 쌓은 것이다. 그 만석보는 진작 없어지고 그 자리에 이를 기념하는 비를 세워놓았다. 1976년에 세워져 전라북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맞은편에는 양성우 시인의 장편 서사시 ‘만석보’를 새긴 시비가 너른 들판을 내려다보며 서 있다.
무심히 흐르는 정읍천은 보고 들었을까? 그날 밤, 봄이 오는 배들평 들판을 쩌렁쩌렁 울렸을 녹두장군의 고함과 민초들의 그 거친 숨소리를.

들리는가, 친구여/갑오년 흰눈 쌓인 고부들판에/성난 아비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만석보 허무는 소리가/들리는가, 그대 지금도/ 그 새벽 동진강머리 짙은 안개 속에/푸른 죽창 불끈 쥐고 횃불 흔들며/아비들은 몰려갔다/굽은 논둑길로…

 

글 : 유정서 본지 편집국장
사진 : 박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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