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의 금강산 화첩과 민화 금강산도
– 민화가들을 매료시킨 겸재의 금강산도

걸출한 실력과 독창적인 화풍으로 명망이 드높았던 겸재 정선. 그의 역작으로 손꼽히는 금강산도는 당시에도 수많은 민화가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민화 금강산도를 탄생시켰다. 실제로 금강산을 주제로 그린 옛민화 가운데 상당수가 겸재의 화풍을 많이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시간에는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 화첩과 민화 금강산도를 비교해보며 겸재의 화풍과 민화의 양식적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금강산 화첩은 현재 두 종류가 전해오고 있는데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 風樂圖帖》은 정선이 36세이던 1711년에 만들어졌고,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은 그로부터 다시 36년 뒤인 1747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신묘년풍악도첩》은 겸재가 진경산수화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의 초기 작품이다. 《해악전신첩》은 정선이 말년에 완성한 화풍과 필력이 녹아있는 역작이다. 이 두 화첩은 18세기 금강산도 그림의 전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기 때문에, 사대부나 무명의 화가들이 이를 모사하여 금강산 그림을 그릴 때 참고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겸재 화첩 1 《신묘년풍악도첩》

《신묘년풍악도첩》은 제작연도가 1711년인 신묘년으로 표기된 화첩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했으며 <단발령망금강산斷髮令望金剛山>에서 총석정叢石亭, 시중대侍中臺 등 13점의 작품과 1면의 발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화첩은 겸재가 젊은 시절 그린 작품으로 만년의 금강산 그림에 비해 조형적 완성도는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금강산의 기묘한 풍경을 처음으로 대한 젊은 화가의 설렘과 진경산수화에 대한 영감 및 화법 수련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그림 속에 묻어난다. 화첩 속 13점의 그림은 <피금정披衿亭>, <단발령망금강산>, <장안사長安寺>, <보덕굴普德窟>, <금강내산총도金剛內山總圖>, <불정대佛頂臺>, <백천교百川橋>, <해산정海山亭>, <사선정四仙亭>, <문암관일출門岩觀日出>, <옹천甕川>, <총석정>, <시중대>이다.
겸재가 36세이던 1711년에 이 화첩을 그리게 된 계기는 백악사단의 동문수학자로 겸재의 예술적 지지자인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이 1710년에 금강산 가는 초입에 있는 금화金化의 현감으로 부임했고 이듬해에 겸재를 초청했기 때문이다. 화첩의 발문에 당시 금강산 여행을 동행하였던 인물 중 백석공白石公이 거론되는데 그가 누구인지, 어떠한 연유에서 같이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가 겸재정선기념관 개관 3주년 ‘제3회 겸재 학술논문 현상공모’에서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경화씨가 논문 <겸재의 신묘년 풍악도첩-1711년 금강산 여행과 진경산수화풍의 성립>을 통해 이를 밝혔다고 주장했다.
“이 여행에 정선과 동행하며 그림을 그려 받았으나 신원이 알려지지 않았던 백석공白石公이 ‘신태동(辛泰東, 1659-1729)’이라는 정선의 동리인洞里人임을 밝혔다. 신태동은 신응시(辛應時, 1532-1585)의 후손으로 장의동에 세거하며 어려서부터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을 종유한 인물이었다. 이병연을 비롯한 신태동 주위 문인들의 기록으로 미루어 신태동과 정선 일행은 비슷한 시기 금강산과 관동 일대를 유람한 김창흡, 김시보와 내외금강산에서 동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즉, 백석공이 정선과 같은 동리사람인 신태동이라는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했고 신태동이라 인물이 정선으로부터 화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겸재의 《신묘년풍악도첩》에는 1711년 금강산 여행을 통해서 전통 산수화인 남종화법을 벗어나 자신만의 실경산수인 진경산수화로 넘어가는 초기 단계의 고민들이 보인다. 겸재는 화가로서 중국과 한국의 화법을 두루 섭렵한 다음 금강산 여행을 통해 자신만의 진경산수화를 그렸는데 금강산의 봉우리들을 백색 암봉으로 표현하는 한편 서릿발 같은 필선의 상악준霜鍔皴을 쓰고 토산은 미가운산법(米家雲山法, 산의 중허리는 그리지 않아 구름에 둘러싸인 듯 표현하고 나무로 울창한 산봉우리는 타원형의 점을 찍어 구름산을 그리는 방식)을 써가며 암봉과 토산을 대비시키고 음양조화의 화면을 구성했다.
화첩 속에 나오는 화제의 지명은 다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피금정은 한양에서 금강산을 가려고 하면 금화에서 반드시 마주치는 경치이고, 피금정을 지나서 최초로 금강산을 보게 되는 곳이 단발령이라고 한다. 단발령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누구나 이곳에 오르게 되면 금강산의 장엄함과 신령스러움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속세를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감격과 장엄함을 그린 그림이 <단발령망금강산>이다. 이 그림은 겸재가 진경산수화법으로 그린 초창기 또는 최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겸재가 중국의 화법을 모두 섭렵한 후 국내 산천을 우리식으로 가장 잘 표현한 출발점의 작품으로서 의의가 있다. 한양에서 금강산 유람을 하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은 단발령에 이르러 내금강의 전모를 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발령은 대개의 금강산도에서 보듯이 금강산의 전체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내금강을 세세히 사생할 수 있는 곳이다. 금강산도를 그리는 작가의 입장에서 단발령은 금강산의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였던 것이다. 겸재는 단발령에서 본 금강산의 모습을 <금강내산총도金剛內山總圖>로 그려 금강산의 중요 지형지물과 전체 내금강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아놓았다.
이 화첩 중에 봉우리마다 봉우리의 이름을, 사찰에는 사찰명을 써넣어 회화와 지도가 결합된 형식으로 제작된 특이한 작품이 있다. 이러한 지도식 표현 방식은 당시에 산수를 즐겨 유람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그림을 보기만 해도 금강산을 직접 여행하는 것처럼 자세히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겸재는 조선전기와 중기를 이어온 사경산수寫景山水와 지도식 기법을 합하여 《신묘년풍악도첩》을 만들었다.
겸재가 화가로서 금강산 화첩을 회화식 지도와 같은 형식으로 금강산을 한눈에 볼 수 있게 그린 이유는 금강산에 가보지 못한 한양의 지인이나 유력자에게 그곳의 명소를 상상할 수 있게 하고 한편으로는 금강산으로 여행 가는 사람에게 사전 답사에 대한 연구 및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으로 판단된다.

겸재 화첩 2《해악전신첩》

《해악전신첩》은 1747년 정선의 나이 72세가 되던 해에 그린 만년의 작품들로 꾸며졌다. 그림 21폭과 글씨 21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선은 1712년 8월 이병연의 초청으로 이병연의 아버지인 이속, 동생 이경성 등과 두 번째로 금강산을 여행한 후 30여 폭의 《해악전신첩》을 만들어 이병연에게 주었지만 그 화첩은 전해지지 않는다. 1747년 정선은 그 해에 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에 상심하다가 세 번째로 금강산을 여행 후 현재 전해지는 《해악전신첩》을 남겼다. 이 《해악전신첩》은 1712년 화첩을 다시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림이 1712년에는 30점이었다가 1747년에는 21점으로 줄었다. 하지만 이병연은 이 화첩에 자신이 1712년의 화첩에 썼던 제화시를 다시 썼고, 이미 고인이 된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시
를 홍봉조(1680년-1760)가 대필해 넣었다. 화첩은 그림마다 김창흡과 이병연의 시가 수록되고 장첩 경위를 알 수 있는 발문까지 갖추어져 완전성 면에서도 그 가치가 높다. 또한 《해악전신첩》은 정선 특유의 다양한 필묵법과 옅은 청록색의 선염법이 고른 수준으로 능숙하게 구사되어 금강산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대표작으로 노년의 무르익은 필치가 집약되어 있어 금강산 그림 중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보물 제1949호로 지정되었고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불쏘시개가 될 뻔한 해악전신첩이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일화가 작품의 품격 만큼이나 흥미롭다. 골동계의 원로인 문헌화랑 장형수張亨秀씨는 《해악전신첩》의 수장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간송선생을 처음 뵙게 된 것은 내 나이 30쯤 됐을 땐가. 시골 구가舊家를 찾아다니면서 서화를 사서 서울의 수집가들에게 넘기는 일을 시작했을 무렵이었어요. 내 나이 올해 일흔 넷이니까 1933,4년 무렵이겠군요. 가을께 경기도 용인군 양지면 추계리 마을 앞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친일파 매국노 집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송병준(宋秉畯, 1858-1925, 일진회를 만든 대표적인 친일파로 정미칠적의 한 명)의 집을 구경하게 되었어요. 큰 기와집인데 그 시골에 전화까지 들어와 있어요. 그래 매국한 역적이 얼마나 잘 사나 해서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그 속에 귀한 서화도 많을 것 같고. 내가 갔을 때엔 송재구宋在龜라는 손자가 살고 있었는데 나이는 33,4세쯤이고 양지면 면장을 지내고 있더군요. 처음엔 몰랐는데 집구경을 하고 있노라니까 웬 젊은이가 말을 타고 마당에 나타나요. 알고 보니 그 집 젊은 주인인데 나를 보고는 누구를 찾아 왔느냐는 거예요. 그래 유명한 댁이라고 해서 지나다 구경 좀 하려던 참이라고 했더니 뜻밖에도 친절하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해요. 그러면서 하는 일을 묻길래 서화 골동을 수집한다 했더니 사랑방을 열어 보이는데 뭔가 많더군요. 지금 내 기억에 생생한 것 중 하나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의 산수화 병풍인데 대단하더군요. 그 밖에 고려자기 향합, 불상 등이 있었고 벽에는 역시 친일파의 집답게 일본 서화가 걸려 있더군요.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보니 해가 저물고 심심했던지 나보고 자고 가라는 거야. 그래 결국 함께 자게 됐는데 사랑채 한 쪽에 붙은 변소엘 가다 보니까 머슴이 군불을 때고 있는데 무슨 문서 뭉치를 마구 아궁이에 쳐 넣고 있단 말예요. 그런데 문득 들여다보니 초록색 비단으로 귀중하게 꾸민 책이 하나가 눈에 띄었어요. 아마 무식한 머슴이 군불 땔감으로 휴지며 문서 뭉치를 어디선가 안고 나올 때 잘못 섞여 나온 거겠지요. 나는 반사적으로 그 책을 보자고 했지요. 그리고 펼쳐보니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화첩이란 말예요. 내가 그 시각에 변소엘 가지 않았거나 한 발짝만 늦었어도 그 화첩은 아궁이 속에서 불타서 영원히 사라졌을 테지요.”
이 화첩에 수록된 금강산 일대의 그림 21점은 <화적연禾積淵>, <삼부연三釜淵>, <화강백전花江栢田>, <정자연亭子淵>, <피금정>, <단발령망금강산>, <장안사비홍교長安寺飛虹橋>, <정양사正陽寺>, <만폭동萬瀑洞>, <금강내산金剛內山>, <불정대>, <문암門巖>, <해산정>, <사선정(삼일호)>, <문암관일출>, <총석정>, <시중대>, <용공동구龍貢洞口>, <당포관어唐浦觀漁>, <사인암舍人岩>, <칠성암(星岩)>이다.

겸재의 금강산 화첩과 민화 금강산도

현재 전하는 민화 금강산도는 겸재 정선 화풍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물론 김홍도나 다른 양식의 작품들도 있지만 겸재 화풍의 작품들이 월등히 많은 것으로 연구되었다. 겸재의 진경산수화풍이 18세기 말을 정점으로 쇠퇴하였음에도 금강산도에서는 오히려 더 큰 호응을 얻었는데 이는 정선의 개성적이고 뚜렷한 금강산도 작품이 무명의 민화작가들에게는 따라하기 쉽고, 하나의 양식을 형성하기에도 알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특징적인 몇 가지 단순한 기법으로 대상의 특성만 뚜렷이 부각시켜 표현하는데 정선의 화풍이 적합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화첩 중에서도 먼저 그린 <신묘년풍악도첩>의 화풍이 후대의 민화 금강산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마도 지도식 화법으로 그렸기 때문에 가보지 않고도 금강산을 이해하는데 용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정선의 두 가지 화첩에 있는 그림 중 몇 점 살펴보고 민화에서는 어떻게 표현되는지 기메박물관 소장 <금강산도>병풍을 위주로 민화 금강산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① 단발령망금강산
겸재 정선의 두 화첩과 정선의 화첩을 모사한 화첩, 민화 금강산도 병풍 등에서 빠지지 않는 장면이 <단발령망금강산>이다. 겸재가 단발령 고개에서 금강산의 전모를 바라보는 감흥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신묘년풍악도첩》에서는 금강산의 암봉을 백색으로 표현하면서 강한 필묘(筆描, 붓질이 만들어내는 선으로 그려내는 방법)로 그렸고, 수림이 우거진 토산은 남방계의 부드러운 묵묘(墨描, 붓으로 칠하는 먹칠법)으로 표현하였다.(도1) 이에 비해 《해악전신첩》의 <단발령망금강산>은 《신묘년풍악도첩》의 암봉과 수림 표현은 유사하나 암봉을 채색하지 않고 금강산의 암봉을 적절히 표현한 상악준(霜鍔皴, 서릿발처럼 끝을 모지고 날카롭게 꺾어내려 바위산을 이루는 선묘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금강산의 모습도 암봉과 하단부의 수림을 분리하여 표현하여 《신묘년풍악도첩》보다 한결 원숙하고 여유있는 필법을 선보인다.(도2)
이에 비해서 기메박물관 소장 금강산도 병풍에서 <단발령망금강산>의 장면(도3)은 정선 화풍의 특징적인 장면인 암봉을 뾰족하게 표현한 준법과 단발령과 금강산의 모습을 대각선으로 가르는 구도는 유사하나 단발령에 올라가는 인물과 도착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부각시켜 상세히 그렸다.

② 장안사 비홍교
장안사長安寺는 금강산 초입에 있는 사찰이다. 장안사는 내금강의 모든 냇물이 빠져나오는 마지막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냇물을 금강천이라고 하는데 금강산 초입에서 장안사로 들어가는 다리인 만천교萬川橋가 있다. 이 다리는 석조로 만들어졌으며 무지개다리 형식으로 되어 그 모습이 웅장하고 장엄해 금강산의 경치 못지않은 하나의 명물로 회화의 소재가 되었다. 겸재는 석조 무지개다리의 웅장함과 장엄함에 감흥을 받아 그 이름을 비홍교飛虹橋라 하였다. 《신묘년풍악도첩》의 <장안사>(도4)와 《해악전신첩》의 <장안사 비홍교>(도5)는 같은 장면을 좀 더 당겨서 그리거나 멀리 두고 그린 차이가 있고 화면의 석가봉, 관음봉, 장경봉 등 금강산의 뛰어난 암봉의 표현은 앞의 그림과 비슷하다.
기메박물관 소장 민화 병풍의 <장안사>(도6)에서는 겸재가 화첩에서 중시한 비홍교의 모습은 초라하게 그려졌고 오히려 원경에 있어야 할 금강산의 암봉에 일일이 명칭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보아 실용성에 우선순위를 둔 듯하다.

③ 보덕굴
《신묘년풍악도첩》의 <보덕굴>(도7)은 <금강내산총도>를 기준으로 보면 좌측에는 산의 수목을 미점으로 표현한 육산肉山과 우측에는 하단의 소나무숲을 겸재 특유의 묵법과 산봉우리를 뾰족하게 표현한 골산骨山으로 대비를 이룬다. 화면의 중심을 가르는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표훈사에서 금강대를 거쳐 만폭동을 올라가면 벽하담碧霞潭에 이르는데 벽하담의 좌측으로 금강대에서 위로 소향로봉과 대향로봉이 자리잡고 있고 우측으로는 법기봉이 높이 솟아 있다. 벽하담의 좌우를 가르는 계곡 물줄기는 여러 곳에서 담潭을 이루고 있는데 벽하담의 우측으로 난 소로길을 따라 보덕굴에 이르고 있다.
기메박물관 민화 금강산도 병풍의 <보덕굴>(도8)에서는 겸재의 화첩에 있는 보덕굴을 그림의 중심에 놓고 그린 것은 분명하나 민화에서는 보덕굴보다 훨씬 멀리 있는 월출봉月出峯, 일출봉日出峯, 혈망봉穴望峯 등 멀리 있는 봉우리를 강조하고자 역원근법을 사용하여 멀리 있는 봉우리를 더 크게 묘사했다. 겸재 화첩을 잘못 이해하여 벽하담 우측에 난 길을 따라 보덕굴에 이르는 산길을 만폭동의 물길로 표현한 자유로움도 볼 수 있다. 또한 화면의 중심을 가르는 계곡의 웅덩이 명칭[潭]을 일일이 기록하고 물줄기를 과장되게 표현하였다. 특히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혈망봉의 구멍 두 개를 돼지코처럼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다.(도9)

④ 총석정
총석정은 관동팔경 중에서 으뜸이 되는 경치로 알려져 있다. 총석정의 위치는 통주(通州, 지금의 통천) 북쪽으로 20리쯤 되는 바닷가에 있다. 정자가 있는 위치도 바닷속으로 쑥 밀려들어가 있는데 기둥모양의 절벽지대, 주상절리柱狀節理가 절경이다.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기둥모양의 네 개 바위를 사선봉四仙峯이라고 한다. 이중환은 《택지지擇里志》에서 “무릇 돌봉우리는 위는 날카로우나 밑둥은 두꺼운 법인데, 위와 아래가 똑같으니, 이것은 기둥이고 봉우리는 아니다. 밑에서 위에까지 목공이 칼로 다듬은 것 같으며, 기둥 위에는 늙은 소나무가 잠잠이 이어져 있다. 기둥 밑, 바닷 물결 가운데도 수없는 작은 돌기둥이 혹은 섯고, 혹은 넘어져 파도와 더불어 씹히고 먹히고 하여 사람이 만든 것과 흡사하니, 조물주의 물건 만든 것이 지극히 기이하고 공교롭다 하겠다. 이것은 천하에 기이한 경치이고, 또 반드시 천하에 둘도 없을 것이다.”라고 극찬하였다.
겸재는 《신묘년풍악도첩》의 <총석정>(도10)에서 정자에 이르는 바닷가 절벽의 주상절리를 상세히 묘사하였고 화면의 좌우측에 묘도卯島와 천도穿島, 그 사이의 돛단배까지 세부적으로 표현하여 가급적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화면 가득히 경물을 배치한 것은 겸재가 본 총석정의 아름다운 경치를 모두 표현하고자 한 것인데 경물이 너무 많이 배치돼 구도가 산만해진 듯하다. 이에 비해 《해악전신첩》(도11)의 총석정은 겸재 말년의 정제된 화풍을 보여준다. 주요 소재에 집중하는 여유로운 표현법에서 만년 겸재의 무르익은 실력을 보여준다. 정자 옆에서 바다의 바위기둥을 가리키는 등이 굽은 노인네는 겸재 자신을 표현한 것으로 느껴진다.
총석정 그림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김규진의 작품으로 1920년에 창덕궁 희정당에 걸린 <총석정절경도>(도12)인데 이는 조선의 마지막 궁중장식화로 통한다. 희정당 대청 양쪽의 동·서 침실 문 윗부분을 벽화처럼 장식할 요량으로 너비 약 885㎝, 높이 195.5㎝로 비단 7폭에 그려진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림들이다. 이 작품은 배를 타고 나가서 바다를 등지고 본 총석정의 모습을 그렸는데 너무나 웅장하고 아름답다. 검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주상절리의 무더기는 신세계를 보는 듯하고 바위절벽에 부딪치는 파도는 살아있는 생선을, 밀려오는 파도는 눈부신 물고기 비늘 같다. 총석정은 민화가 유행하면서 민화 금강산도보다도 관동팔경도 내지 관동십경도에 포함되어 그려진 작품들이 많이 있다. 김혜중 소장 <관동십경도>병풍의 <총석정>(도13)은 김규진의 <총석정절경도>와 같이 배를 타고 나가서 총석정을 바라보면서 그린 형태를 취하고 있다. 화면의 상단에 비로봉인 듯 보이는 봉우리 하단에 울타리를 두른 듯 소나무를 그렸고, 그림 중앙의 총석정을 둘러싼 주상절리는 오히려 소략하게 그렸다. 그 이유는 화면 전체에 가능한 많은 경물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주상절리 바위기둥에 비해 총석정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크기가 비례에 맞지 않게 큰 느낌이 있고 이들 두 사람이 걸어오는 방향이 오히려 바닷가에서 올라오는 듯하다. 더욱이 바위에 철썩거리는 파도의 모습을 악보에 있는 콩나물 대가리처럼 묘사한 것은 너무나 이채롭다. 이러한 비현실적이고 소박한 필력에서 민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겸재의 금강산도

겸재는 평생 금강산을 잊지 못해 수시로 금강산 경치를 그렸다. 그가 남긴 금강산과 일대 관동의 경치는 후세 화가들에게 겸재의 금강산도 화풍을 따라하게 하였을 만큼 최적의 화풍과 화법을 구사했다. 민화로 전해지는 금강산 그림에서도 겸재의 화풍이 오랫동안 전해짐을 알 수 있으며 화첩도 많이 그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민속박물관 소장 금강산 화첩은 겸재의 《신묘년풍악도첩》과 유사한 편제를 하고 있어 겸재의 화첩을 본받은 것이 분명하다. 금강산도에 있어서 겸재의 화풍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도서 및 논문
최완수,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여행》(대원사, 1999)
진준현, <민중의 꿈, 민화금강산도의 양식계보>, 《미술사학연구 제279·280호》


글 이상국 ((사)한국민화센터 이사장)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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