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모 교수의 명품 민화 순례④ – 개인소장 <낙도樂圖> 태극太極에서 말똥까지… 상식을 뒤엎은 그림

정병모 교수의 명품 민화 순례④
개인소장 <낙도樂圖>
태극太極에서 말똥까지… 상식을 뒤엎은 그림

민화의 스펙트럼은 매우 폭넓다. 어느 한 세계에 머물러있지 않다. 삶과 꿈, 이상, 구상과 추상, 현실과 이념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궁중화나 문인화는 소재선택이나 표현에서 제한적이다. 사실이나 이념에 근거해야 한다. 누구보다 그림에 대한 취향이 까다로웠던 정조는 화원으로서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을 분명히 제시했다. 특히 화원들이 문인화를 핑계로 제멋대로 그리는 것을 경계했다.

“화원 그림에서 말하는 바 남종南宗이라는 것은 귀한 점이 치밀 섬세한 데 있는데, 이처럼 제멋대로 그렸으니 이것이 비록 자잘한 일이라고는 하나 역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시고 그 자를 쫓아내라고 분부하셨다.”

정조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리지 않았다고 화원을 쫓아내 버렸다. 김홍도가 그린 금강산 그림이 매우 섬세하고 치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정조의 요구 때문이다. 정확한 묘사도 중요하게 지켜야 할 규범이다. 세종 때에는 조선에서 용과 봉황 그림을 그릴 때 몸통과 날개 등에 한 획도 틀림없이 그리지 않았다고 임금이 아니라 중국에서 견책을 한 일까지 있다. 이러한 일화는 궁중에서는 사실성과 규범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문인화가에게는 격조가 높은 작품세계를 창출해야 한다는 높은 임계점이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민화는 이러한 원칙이나 규범에서 자유롭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그대로 그리면 그뿐이다. 민화가 품고 있는 세계가 넓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현실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어느새 꿈의 세계로 넘어가고, 분명 상상의 세계인데 자연스럽게 현실의 세계로 연결된다.

합체가 의미하는 것

용 두 마리가 합체하면서 물 위로 솟구쳐 오르고 있다. 개인소장 <낙도> 병풍 중 <쌍룡>(도 1)이다. 즐거운 그림이란 뜻의 낙도는 후대에 붙인 이름이고, 병풍의 제재는 화조도다. 원래는 쌍용이라고 할 때 청룡과 황룡이 짝을 짓는 것이 원칙인데, 여기서는 청룡과 갈색의 빛깔을 띤 적용赤龍이 어떤 기운에 의해 꽈배기처럼 휘몰아치며 오르고 있다. 그림 위 제시에는 “쌍룡이 봄날 맑은 시냇가에서 솟아오르다 雙龍倚上碧溪春”라고 읊고 있다. 용의 빛깔은 서로 다르지만 둘이 하나라는 표시가 용 주위를 감싼 빠른 붓질의 회오리 선으로 휘감겨져 있다. 다른 민화에서 볼 수 없는 이 장면은 무엇을 나타낸 것일까? 이들을 감싼 둥근 햇무리 위에 “태극太極”이란 두 글자가 이 장엄한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작가는 쌍용의 융합을 통해 모든 존재의 근원이 태극이라는 이야기를 전해준 것이다. 만물의 생성하기 이전 혼돈의 세계를 용으로써 표현했다. 융합의 모드는 이 그림에만 그치지 않았다. <쌍학>(도 2)은 ‘우아한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두 마리의 학이 하나의 날개를 공유하고 있다. 마치 부드럽고 아름다운 깃털로 숄 망토를 걸치고 발레를 하듯 우아한 춤을 추고 있다. 배경의 장면이 무엇인지는 제시에 묘사되어 있다.


연꽃 나래 구름 속의 학이 초당 앞에 있고 蓮翼雲鶴草堂前
밝은 태양 부상에서 떠오르니 머리부터 붉게 빛나네 白日扶桑耀斗紅

두 마리 학을 감싼 둥근 원은 해무리이고 비파나무에 걸린 커다란 해가 초당에 밝게 빛나고 있다. 이 역시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혼연渾然의 세계요 일체의 세계다. 둘이 하나가 되는 또 다른 버전이 있다.
거위 두 마리가 X자로 교차하고 연꽃도 이에 부응한 <거위>(도 3)다. 거위와 연꽃의 이러한 모습에 대
해 화면 위에 이렇게 적혀 있다.

구름 같은 연못 위 거위가 춤을 추네 雲荷塘上蠲鵝舞

두 거위가 엇갈리는 모습을 춤을 춘다고 표현했다. 흥취로 가득한 그림이다. 민화에 담긴 정서는 그렇
게 무겁거나 딱딱하지 않다. 밝고 명랑하고 흥겹다. 어쩌면 두 거위는 이적과 김동률의 ‘거위의 꿈’처럼
무거운 세상 속에서 자유로운 날갯짓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화면 중앙을 가로 지르는 고매 위에는
닭이 가볍게 깃들여져 있다. 닭도 춤을 추고 있다. 이 그림의 키워드는 흥취다.
<연꽃>(도 4) 중 연꽃의 표현이 매우 독특하다. 이 병풍의 그림들은 다른 그림에서 본 적이 없는 도발적인 모습으로 나를 매우 곤혹스럽게 만든다. 어떻게 연꽃을 기하하적 형태로 그렸을까? 가위처럼 교차한 연꽃은 깃대처럼 서있다. 연꽃잎은 깃발처럼 휘날리고 있다. 연꽃의 모습도 그렇지만 그 아래 두 마리의 새도 무엇을 그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대개 연꽃그림에서는 오리나 청둥오리가 등장하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도 그러한 관계를 무시했다. 이 그림의 제시를 보면 아래와 같다.

연꽃으로 만든 깃발과 거북배로 황하를 거너고 蓮旌龜舸渡黃濟
한 쌍의 방울새 산호를 희롱하네 一隻鈴鳥弄娜蝴

이 시를 보면, 오리가 아니라 방울새인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방울새는 귀엽고 앙증맞은 모습이지만 이 그림에서는 바람을 가득 불어넣은 것 같은 뚱뚱하면서 우스꽝스러운 새로 변신시켰다. 마치 콜롬비아 출신 예술가 페르난도 보테로 Fernando Botero Angulo의 조각을 연상케 하는 캐릭터다. 제시처럼 방울새가 산호를 희롱하듯 연꽃 사이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는 한 쌍의 나비가 스카이다이버처럼 사랑스런 유영을 하고 있다. 모든 동물이 반드시 쌍으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홀연히 그 위세를 뽐내는 새도 있다. 바로 <봉황>(도 5)이다. 고고함의 대명사격인 봉황은 해당화 숲 위를 가로지르는 나무 위에 앉아 있다. 이 나무는 변형이 심하여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화제를 보면 산철쭉이다. 그림 위에 “해당과 산철쭉 붉은 봉황 아름답다 海棠山躑丹鳳琪”라고 적혀 있다. “닭 머리에 공작 꼬리”라는 봉황의 일반적인 형상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봉황은 아무 나무에 앉지 않고 오동나무에만 깃든다는 원칙도 이 그림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이 그림의 매력은 봉황 아래 펼쳐진 해당화 꽃밭에 있다. 산들바람에 휘날리는 해당화의 일사분란하게 가어어진 몸짓은 우리의 미묘한 미적 감성을 자극한다.

상식의 틀을 깬 그림들

이 병풍의 그림들은 모두 철학적이고 이상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장면도 포함되어 있다. <까치호랑이>(도 6)는 민화의 단골 메뉴다. 그런데 이 까치호랑이는 여느 까치호랑이와 다르다. 안경, 그것도 선글라스처럼 짙은 안경을 낀 호랑이가 소나무 위에서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그림을 “선글라스 낀 호랑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호랑이는 백수의 왕이지만 딱 하나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나무를 타는 것이다. 그런데 욕심 많은 호랑이는 무리하게 나무를 타다 그만 낙상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짙은 안경까지 썼으니 나무에 오른 호랑이가 떨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혀를 길게 내민 호랑이의 표정에는 낭패한 빛이 역력하다. 이 장면은 왠지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 사태가 연상되어 재미있으면서도 한편 씁쓸한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이 병풍에는 기물들을 그린 <기명器皿>(도 7)이 있다. 술상과 술병을 가운데 두고 그 위로 버드나무와 새, 그리고 달이 떠있다. 이 장면만 보면 분명 정물화이지만, 그림 위에 적혀 있는 제시를 보면 의외로 중국 신화에 나오는 신들에 대한 이야기다


넘실대는 파도 위에서 나눈 사랑의 인연 倰波臺上雲雨緣
낙비가 가버린 뒤 초나라 버들만 드리웠네 洛妃去後楚楊垂

여기서 ‘倰波’는 ‘凌波’의 오기로 넘실대는 파도라는 뜻이다. 이 시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예가 낙수洛水에서 하백의 부인 복비宓妃와 사랑을 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에 걸맞은 이미지는 고개지의 <낙신부도>와 같은 인물화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일상의 물건들을 내세우고 있다. 달, 버드나무, 달, 술상, 술병 등을 자연과 기물로 대신했다. 때문에 신화를 그린 그림이라고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신화를 철저하게 현실화하고 의물화했다. 어떻게 이러한 역설이 가능할까? 이는 상식파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격적이다. 까치호랑이처럼 이상에서 현실로 떨어지는 그림 중 압권은 <백마>(도 8)다. 제주도의 조랑말을 연상케 하는 이 말이 백마라는 사실은 그림 위에 적혀 있는 제시에서 알 수 있다. 원 제시는 “창송정하백계마蒼松亭下白繫馬”인데, 이는 “창송정하계백마蒼松亭下繫白馬”로 뒤의 두 글자가 순서가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바꿔서 그 뜻을 새기면, “푸른 소나무 정자 아래 백마가 매여 있네.”가 된다. 침엽수를 활엽수로 그린 소나무 아래 색깔이 시커멓게 변한 백마가 서있다. 조선시대 화가들이 즐겨 활용한 나무 아래 동물을 배치하는 “수하동물樹下動物”의 형식이다. 그런데 백마의 자세가 어중된다. 아뿔싸! 그 뒤에 배설물이 떨어져 있는 것이다.

아마 민화는 물론 옛 그림 속에서 이처럼 똥까지 표현한 그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더럽다기보다는 놀랍다. 쌍룡에서는 태극을 운운했었는데 여기서는 돌연 똥까지 등장하다니.
이처럼 극과 극이 대비시킨 작가의 의중은 무엇일까? 그것은 극과 극이 통한다는 평범하지만 오묘한 진리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 같다. 성리학에서는 태극은 무극이라 하지 않았던가? 지극한 이상과 생생한 현실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제주민화’ 재평가해야


이처럼 극과 극을 자유롭게 오고간 엄청난 스케일의 화가가 누구인지 궁금해지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작가 이름을 알 수 없다. 다만 이 병풍이 그가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똥을 싼 백마는 민화적인 변형을 감안하더라도 그 모습으로 보아 제주도의 조랑말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이 병풍의 그림들이 제주민화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쌍룡>이나 <까치호랑이> 등에서 그림 아래 좌우에 배치된 구슬 모양의 더미는 제주 문자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주도표 흙더미’다. 예를 들어 제주도의 문자도(도 9)를 보면, 상단에 삼각형 모양의 흙더미 위에 기학학적으로 정년하게 뻗은 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바로 구슬모양의 흙이 삼각형모양으로 쌓여있는 것이 앞의 그림과 상통한다. <쌍학>의 상단을 장식한 나뭇가지는 제주도에 자생하는 비파나무다. 이 나무는 제주문자도 즐겨 등장하는 넝쿨문양이면서 가볍고 탄력이 좋아 제주도의 생활용품으로 이 나무를 즐겨 활용한다.
미술에서 상식파괴는 피카소와 같은 서양의 근대 화가들에게나 가능한 역사적인 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민화 속에서도 조용하게 이러한 변화가 가볍게 이뤄지고 있다. 그것도 제주민화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제주의 민화작가는 한 병풍 속에서 이념과 현실을 간단히 오고가는 광폭의 행보를 보여줬다. 이것은 비단 제주민화에만 국한된 특징이라기보다는 우리민화가 갖고 있는 스케일이자 세계관이기도 하다. 대개 제주민화 하면 문자도를 떠올리지만, 화조화도 있고 산수화도 있다. 다만 그것들이 충분히 조사되거나 연구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민화 명품으로 평가받는 상당수가 제주민화라는 사실을 볼 때, 제주민화에 대한 재평가가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다.

글 정병모(경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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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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