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모 교수의 명품 민화 순례③ – 금강산이 사람들로 북적인 까닭은?

정병모 교수의 명품 민화 순례③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금강산도>
금강산이 사람들로 북적인 까닭은?


금강산도 하면,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전도>(도1)를 최고로 손꼽는다. 조선시대 일반회화로는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명품이다. 바위산과 흙산으로 이루어진 금강산 전경을 태극같은 원형의 구도로 표현했다. 오주석은 이 작품에 대해 “주역을 응용해 조선왕조의 번영과 평화, 심오한 철학적 이해를 담아낸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정선의 <금강전도>에서 맛볼 수 없는 웅혼한 기상의 금강산그림이 있다. 작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금강산도>(도2) 병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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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의 스펙터클한 위용

이 그림은 민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의인화와 같은 민화 금강산도의 특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민화의 테두리 속에서 논할 수 있는 작품이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의 위용을 10폭에 가로 6m에 달하는 커다란 병풍에 파노라마식으로 웅장하게 펼쳐놓았다. 차일봉, 비로봉, 능인봉 등의 하늘을 찌른 듯 우뚝 솟은 봉우리 아래에 삼라만상의 바위산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있고, 그 아래 부드러운 능선으로 연결된 흙산들이 이들을 꽃받침처럼 떠받쳐주고 있다. 작가의 이름을 알 수 없다뿐이지 그야말로 명찰을 떼고 작품 자체로만 평가한다면, 정선의 <금강전도>와 더불어 우리나라 금강산 그림의 1, 2위를 다툴 명품이다. 기본적인 화풍은 정선이 창안한 금강산 그림의 형식과 양식을 따르고 있다. 흙산과 바위산의 조화가 아름답게 활짝 핀연꽃같은 구성과 바위산을 수직준으로 나타낸 기법에서는 정선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금강산의 스펙터클한 위용을 병풍에 담은 장쾌한 표현은 정선과 판연히 다를 뿐만 아니라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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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금강에 빼곡하게 그려진 야단법석

<금강산도>의 또 다른 매력은 바위산들의 표현에 있다. 내금강에 빼곡하게 들어선 봉우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위인지 사람인지 아니면 사람인지 바위인지 대부분 사람 형상의 바위들로 가득 차있다. 정선의 금강산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이 그림만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사람들의 형상을 보면, 삿갓이나 고깔처럼 삼각형 모양의 관모를 쓴 이들이 많이 보인다. 이들은 스님일 수 있고 아니면 관람객일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경배하는 모습인 점으로 보아 스님을 비롯한 신도들이 종교적인 의례를 행하고 있는 것 같고, 아니면 스님들과 여러 관람객들로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야단법석의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고려시대는 금강산이 불교의 성지로써 이름이 높았다. 노영이 그린 <금강산담무갈지장보살도현신도>(도3)에 나타나 있듯이, 고려 태조는 금강산에서 담무갈살의 현신을 만나 예를 표한 바 있다. 송나라 시인은 금강산에 대해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 한 번만이라도 금강산을 보았으면 소원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중국 사신들은 조선에 오기만 하면 꼭 금강산을 보려고 했다. 급기야 1469년 정동이란 중국 사신은 금강산을 탐승할 때 일행 중 한사람이 “여기가 참으로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이곳에서 죽어 조선 사람이 되어 길이 부처님의 세계를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하여 보덕굴 앞 벽하담에서 빠져 죽은 사건이 벌어졌다.
일반 신도들이 금강산을 기행하는 목적은 이들과 달랐다. 고려말기 학자인 최해는 당시 금강산이 인기가 좋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람을 속여 유인하여 말하기를, ‘한번 이 산을 보면 죽어서 악도(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하여 위로는 공경에서부터 아래로는 선비와 서인에 이르기까지 아내를 데리고, 자식을 이끌고 다투어 가서 불공을 드린다. 눈과 얼음으로 혹독하게 추운 때와 여름에 장마가 오래고 홍수가 넘쳐서 길이 막히게 된 때를 빼고는 산을 유람하는 무리가 길에 줄지어 서있다. 또한 과부와 처녀를 따라가는 자가 있어 산 속에 이틀씩 숙박하면서 추한 소문이 때때로 들리건만 사람들은 괴이쩍게 여길 줄 모른다.”
금강산을 보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이 많은 사람들을 금강산으로 이끈 것이다. 얼마나 구경꾼들이 들끓었는지 최해는 이 글의 말미에 “산 부근에 사는 백성들은 응접하는 일에 피곤하여 성내며 꾸짖어 말하기를 ‘금강산은 어찌하여 딴 고을에 있지 않았던가’라고 욕지거리를 내뱉을 정도다. 조선시대에도 금강산을 보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이 퍼지면서 많은 이들이 앞을 다투어 금강산을 찾았다. 이 그림 속에 스님과 일반인들이 가득 찬 것은 이러한 금강산 기행의 열풍을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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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적 설화로 의인화, 의물화한 봉우리들

유독 <금강산도>에서 돋보이는 의인화적 표현 중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금강산에 얽힌 설화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점이다. 이 그림에서는 사람 형상의 표현이 압도적이지만, 다른 민화 금강산도에서는 구룡연이면 주변의 바위를 아홉 마리의 용 형상으로, 사자암이면 그 바위를 사자모양으로 표현한다. 많은 설화로 얽혀 있는 금강산의 바위들은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그 설화에 맞게 의인화하고 의물화한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에 와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 이전의 금강산 문학에서는 금강산을 정선의 그림처럼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19세기에서는 각 봉우리나 계곡에 얽힌 설화로 흥미롭게 엮는 일이 많아진다. 대표적인 예로 『금강산유록』 가운데 만물초를 읊은 장면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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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만물초에 서민들이 좋아하는 설화를 모두 구현해 놓았다. 학을 타고 내려온 옥동자, 달 속의 선녀, 난세를 피해 상산에 숨은 4인의 의인들(상산사호商山四晧의 선비들), 석가여래와 오백나한, 삼국지의 장비와 제갈량, 춘향전의 이도령과 춘향, 구운몽의 성진과 팔선녀, 청룡황룡, 불사약을 찧는 옥토끼, 소상팔경의 기러기 때, 봉황, 학 등. 만물초에 민화의 이미지를 집대성해놓은 형국이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치면 온갖 사람이 다 있고, 동물로 치면 갖은 짐승이 다 있는 곳이 만물초라는 것이다. 이 가사는 1894년 시골의 한미한 선비인 조윤희趙胤熙가 지은 것인데, 이는 민화가 유행한 시기와 민화작가의 신분에서 비슷한 면모를 볼 수 있다.
만물초의 바위에 여러 인물과 동물의 형상으로 의인화하고 의물화하는 현상은 민화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특색이다. 괴석모란도를 보면, 궁중 회화에서는 생긴 그대로 사실적으로 표현한 반면, 민화 괴석모란도에서는 괴석의 형상을 스님, 도사, 개, 호랑이, 사슴 등으로 변화시킨다. 이것은 애니미즘적인 표현이다. 모든 대상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신앙이다. 원래 애니미즘은 원시종교나 미술에 나타나는 원초적인 현상인데, 조선말기 그것도 봉건제가 끝나가는 시점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극과 극은 통한 것인가?

민화 속에 나타난 애니미즘과 스토리

1982년 경주의 남산을 처음 답사했을 때, 할머니 한분이 절벽처럼 커다란 바위 앞에 정안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할머니는 그 큰 바위 속에 신이 계신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신라시대에도 바위 속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여 그 속의 부처님을 드러내 보여준 것이 바로 경주남산의 마애불들이다. 삼국유사에 경덕왕이 백률사로 행차하던 중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꺼내어 드러낸 것이 굴불사사방불이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예전에 할머니들은 장독대 항아리를 보고, ‘그놈 튼튼하고 잘 생겼다’, ‘아가리가 커서 잘 들어가겠네’, ‘배가 불러서 든든하다’고 했다. 사람을 보는 눈으로 그것을 바라본 것이다. 할머니에게 항아리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자기 자식에 다름없다. 그래서 늘 정성스럽게 닦아주고 주변을 정결하게 갈무리했다. 그러다 어떤 때는 항아리에 새끼줄을 매고 버선을 거꾸로 붙이고 두 손을 모아 빌기도 했다. 이때 항아리는 신격이다. 이러한 할머니의 항아리에 “물이나 술 액체 혹은 곡식 같은 고체의 저장용
으로 30cm 이상의 것을 이른다”는 사전적 정의를 갖다 댄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바위나 땅이나 항아리나, 모든 대상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이다.
애니미즘적 인식은 모든 것을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로 풀어낸다. 사람이 아닌 다른 대상까지 애니미즘적인 이야기로 환원시킨다. 생활의 본질적인 것을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런 모습을 존중하고, 모든 사물을 인간을 기준으로 바라본다. 그런 점에서 민화는 말없는 이야기다.
말이 없기에 더욱 극적으로 표현해야 할 이야기다. 인간적인 표정이 살아나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표출되며 드라마틱한 관계도 설정된다. 존 나일스John D. Niles는 『이야기하는 인간』이란 책에서 인간은 이야기하는 본능이 있고 이야기를 통해서 사회를 이해한다고 했다. 민화에서 이야기 그림인 고사인물도가 많이 그려진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본능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유교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이야기의 본성이 오랫동안 억제되었다. 체면 때문에 또는 점잖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나 이러한 굴레를 훌훌 던져버린 민화에서는 또는 가사에서는 이야기로 풀어가는 본능을 숨김없이 드러내었다.
최근 한류라고 하여 우리의 드라마가 세계인의 동감을 얻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본성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같은 이야기라도 더욱 끈끈하게, 같은 이야기라도 더욱 흥미롭게 자아내는 우리의 능력이 드라마에서 한껏 발현된 것이다. <금강산도>에서 보여준 설화적 이미지는 그것이 야단법석이든 아니면 『금강산유록』 같은 민화적 이미지든, 유독 이야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본성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글 정병모(경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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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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