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한 생활장식화의 멋 빗접고비

(도 2-1) 빗접고비(도 2)의 봉황도 부분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우리만의 세간으로 고비라는 것이 있다. 사랑방에서는 문서나 편지를, 안방에서는 여인들의 빗접을 수납하는 데 쓰였다. 특히 빗접고비는 실용품인 동시에 여인들의 일상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는 기능을 했다. 선조들의 생활공간 속에 배어 있는 멋, 빗접고비를 소개한다.

프랑스의 기메박물관은 우리나라의 민화(民畵)를 소장한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구한말 프랑스의 인류학자와 선교사들이 서울에서 수집해 간 다양한 민화들이 이곳으로 들어갔다. 1997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이 박물관의 한국문화재들을 조사하여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라는 보고서를 펴냈다. 이 책에 실린 도판을 통해 약 백 년 전 프랑스로 건너간 우리 민화의 대강을 살필 수 있다. 여기에 소개된 여러 점의 민화 가운데 (도 1)이라는 한 점이 필자의 눈에 들어왔다. 족자(簇子) 모양의 형식과 화면 구성이 특이했다. 보고서에는 조선말기에 궁중의 벽걸이용으로 만든 걸개그림으로 소개되어 있다. 색상과 문양이 고급스러워 궁중 물건으로 본 듯하다. 그런데, 이 걸개그림이 과연 궁중의 생활공간을 장식하고자 만든 것일까? 우리가 몰랐던 다른 용도가 있었을 법하다.
첫 번째 빗접고비의 그림은 붉은색과 황색조를 띤 화면에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에는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두 마리의 용(龍)이 대칭을 이루며 웅크린 모습이다. 중단에는 화면을 분할하여 봉황(鳳凰) 한 쌍을 그려 넣었다. 화면은 크지 않지만, 이 그림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오동나무가 등장하고 암수 한 쌍에 아홉 마리의 새끼봉황까지 그려넣었다. ‘구추봉도(九雛鳳圖)’로 불린 부부의 화합과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봉황 그림이다. 이런 형식은 궁중장식화(宮中裝飾畵)로도 제작되었지만, 민화로 그려진 것이 훨씬 더 많다. 특이한 것은 화면의 아래에 나무로 ‘발’을 만들어 붙인 점이다. 화면 밖에 붙여놓은 발 부분은 어떤 기능을 했던 것일까? 그림을 벽에 세워놓고 보면, 마치 서랍장과 수납함이 딸린 목가구를 연상하게 한다. 특히 그림에 붙인 발은 목가구의 다리와 같아서 목가구의 형태를 응용하여 그린 그림으로 추측된다.

여성들의 생활용품, 빗접고비

위에서 살펴본 걸개그림과 비슷한 형식의 작품을 또 한 점 찾을 수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이다.(도 2) 상단에 끈을 맨 모양이나 아랫단에 발을 붙인 형태가 기메박물관의 걸개그림과 매우 흡사하다. 그런데 그림의 구성은 앞의 것보다 조금 더 단순해졌다. 전체가 3단 구성이지만, 중앙에 그린 그림의 네 귀퉁이에 ‘壽福康寧(수복강녕)’의 네 글자와 간단한 문양이 들어가 있다. 상단과 하단에는 구름 문양을 장식한 화면에 학(鶴)과 용을 대칭형으로 그렸다. 중단에는 팔각으로 구획한 면에 암수 봉황 한 쌍이 마주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앞서 본 기메박물관의 봉황보다 형태는 단순하지만, 번잡함을 덜어낸 간결함이 오히려 정감을 느끼게 한다. 전반적으로 정교함보다 회화적(繪畵的)인 분위기가 강하며, 서민들의 소박한 정서가 붓 끝에 묻어난 듯하다. 이 그림 속의 봉황이 부부간의 금슬을 상징한다면, 학은 고위 관직을, 용은 과거(科擧) 합격과 출세의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들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이 그림은 공예품으로 분류되어 ‘빗접’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걸개그림이라고 했던 기메박물관의 작품도 바로 ‘빗접고비’라고 불린 생활용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빗접’이란 머리단장에 필요한 도구를 담아두는 물건을 말한다. ‘고비’란 편지나 종이를 꽂아 두기 위해 벽걸이용으로 만든 생활용품을 가리킨다. 따라서 ‘빗접고비’는 벽걸이용 빗접이라 할 수 있다. 전통 복식(服飾)이나 미용(美容) 분야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자료이지만, 의외로 전하는 실물이 많지 않다.
빗접은 예로부터 신부가 시집올 때 챙겨 오는 필수 혼수품의 하나였다. 위 아래에 나무를 대고서 종이를 여러 겹 붙인 뒤 기름을 먹여 족자 모양처럼 만들었는데, 이를 소첩(梳貼)이라고도 불렀다. 머리를 빗을 때, 이 소첩을 방바닥에 펴놓고 빗음으로써 머리카락이 그 위에 모이도록 했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머리를 빗을 때 빠진 머리카락은 한 올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身體髮膚(신체발부) 受之父母(수지부모)’라는 믿음이 지켜지던 때였다. 여성들은 머리를 단장할 때 먼저 얼레빗으로 긴 머리를 빗은 뒤에 참빗으로 꼼꼼히 다시 빗었다. 이때 빠진 머리카락은 버리지 않고 빗접에 모아두었다고 한다. 머리를 빗는 일상의 행위에도 여성들의 정갈한 기품을 엿볼 수 있다. 단장을 마치고 소첩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장식품처럼 벽면에 걸어 두었다. 이때 두껍게 붙인 종이의 옆은 봉하지 않고 틈을 두어서 빗과 비치개 등을 그 사이에 꽂아두게 만들었다.
앞서 살펴본 기메박물관의 빗접고비는 국립민속박물관의 것 보다 도안과 문양이 좀 더 정교한 편이다. 그러나 궁중에서 사용한 물품은 아닌 듯하다. 궁중의 생활용품 가운데 이러한 모양의 빗접은 알려진 것이 없다. 궁중에서는 아마도 목공예품으로 만든 빗접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기메박물관의 빗접고비는 주로 상류층의 여성들이 사용하였고, 국립민속박물관의 것은 중산층이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빗접고비는 머리를 빗을 때 깔개의 기능을 하였고, 도구를 보관하거나 벽면을 장식하는 등 복합기능을 한 생활용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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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에 나온 빗접고비

빗접고비는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민간에서 널리 사용하였고, 언제든 시전(市廛)에 나가면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때는 양반집 여성들만 주로 사용하였지만, 조선말기에는 중산층으로까지 수요 계층이 늘어났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1900년경의 시전을 촬영한 사진에 우연히 빗접이 걸려 있는 장면이 나온다.
흑백사진에 채색을 입힌 (도 3)은 20세기 초 서울의 어느 잡화점과 지전(紙廛)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 속의 왼편이 잡화점이고, 오른쪽에 구멍가게처럼 보이는 곳이 종이를 파는 지전(紙廛)이다. 종이가 빼곡한 좁은 가게 안에 주인과 종업원이 보인다. 그런데 이 지전의 바깥쪽에 그림 하나가 걸려 있다. 가까스로 사진 안으로 들어와 있는 이 그림에는 상하로 단이 나누어져 있고, 가운데에 팔각형의 모양에 청색과 적색의 도안(圖案)이 어렴풋이 보인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선명하지 않지만, 앞서 살펴본 두 빗접과 같은 형태로 보인다. 종이로 만들었기에 지전에서 판매할 수 있는 품목이다.
빛바랜 사진에서 발견한 빗접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단서이다. 사람의 손으로 직접 그려서 만든 이 빗접 그림은 진정한 의미의 민화라고 할 만하다. 일찍이 조자용(趙子庸, 1926~2000) 선생은 민화의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생활화(生活畵)를 강조했다. 빗접이 바로 여기에 부합하는 사례이다. 감상만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는 점, 생활용품을 장식한 그림이라는 점, 서민들의 소박한 길상의 의미를 담은 그림이라는 점에서 20세기 초까지 남아 있던 마지막 민화 생활장식화라 해도 손색이 없겠다. 그러나 이 빗접을 사용한 계층은 서민층이기 보다 중산층의 범주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림은 서민화가가 그렸을지라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가 서민인 경우는 매우 드문 편이다. 빗접고비도 예외가 아니다.
또 하나의 사례인 사진(도4)은 종로 시전의 어느 골목을 촬영한 것이다. 점포가 아니라 길거리에 멍석을 깔고 물건을 널어놓은 좌판의 모습이다. 소년으로 보이는 점원이 손님을 기다리며 앉아 있다. 여기에도 여러 생활용품들이 나와 있다. 품목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 사이에 빗접고비가 고객의 손길을 기다리듯 진열되어 있다. 좌판의 왼쪽 상단에 걸개그림처럼 놓인 여러 점이 바로 빗접고비이다. 고비의 중앙에는 팔각형의 도형을 구획하였고, 그 안에 봉황이나 새를 그린 형상을 볼 수 있다. 화가가 손으로 그려서 대량으로 만들어낸 물건인 듯하다. 여러 개를 진열한 것으로 보아 잘 팔리는 인기 품목이라는 짐작이 간다. 구한말의 시전을 촬영한 사진을 통해 빗접고비가 얼마나 대중과 친숙한 생활용품이었는가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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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점의 빗접

빗접은 주로 여성들의 규방(閨房)에서 사용한 생활용품이다. 흥미로운 것은 벽걸이 형태의 고비 외에도 빗 등을 종이로 싸서 보관하던 물품도 전하고 있다. 휴대용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이 빗접은 평면으로 된 종이나 천을 접어서 만들었다. 가로 세로를 각각 3번씩 접었는데, 접힌 자국이 우물정(井)자를 나타내기에 ‘구정첩(九井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기존에 알려진 구정첩 가운데 하나가 개인소장의 (도 5)이다. 두꺼운 종이로 만들었는데, 펼쳤을 때는 세로가 84㎝, 가로가 93.5㎝이고, 접었을 때는 세로와 가로가 각각 34㎝이다. 이 정도 크기라면, 머리를 단장하는 도구 몇 가지는 충분히 담을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사각형으로 접었을 때 표면이 되는 빗접 앞뒷면에 그려 넣은 그림이다. 사소한 물건이라 할 수 없지만, 이런 실용적인 물건에까지 세밀하게 그림으로 장식한 점이 놀랍다. 앞뒷면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았지만, 가운데에 큰 원을 그린 뒤 한 쪽에는 연꽃문양을, 다른 한 쪽에는 물고기를 그렸다. 큰 원의 네 귀퉁이에는 다시 작은 원을 그리고서 각각 “壽福康寧(수복강녕)”과 “子孫滿堂(자손만당)” 네 글자씩 써넣었다. 연꽃을 그린 문양은 위에서 내려다 본 모양으로 매우 정교하다. 작은 원과 원 사이에는 날개를 펼친 박쥐를 한 마리씩 배열하였다. 박쥐는 경사(慶事)나 행운을 주는 오복(五福)을 의미하는 소재로 알려져 있다. 화려한 색감을 쓰지 않았지만, 순박함이 오히려 더욱 친근한 미감(美感)으로 다가온다.
이 빗접의 반대쪽 면에는 크기가 다른 물고기 두 마리를 그렸다. 물고기는 ‘자손들이 집안에 가득하다’(子孫滿堂)라는 의미의 다산(多産)과 풍요의 상징이다. 그런데 물고기 위에 약간 흘려 쓴 글씨로 “濠上無人 誰知其樂之悠然自得”, 즉 “호상(濠上)에 사람이 없으니, 누가 (물고기의) 그 유연자득(悠然自得)하는 즐거움을 알겠는가?”라고 써놓았다.(도 5-1) 조선후기의 어락도(魚樂圖)에 많이 써넣는 문구이지만, 빗접 위에 쓴 글씨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여성이 아닌 남성의 글씨로 추측되는데, 글씨를 쓴 사람은 이 그림에서 자유롭게 물속을 노니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떠올린 것이다. 같은 그림을 두고서 한 쪽에서는 ‘자손만당’을 기원하는가 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유유자적하는 물고기를 감상화로 보고 있는 셈이다.
빗접에는 장수(長壽), 건강, 자손의 번창, 오복과 풍요 등을 상징하는 그림과 글씨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중산층 이상의 여성들이 수요층이었으며, 머리 한 번 매만질 겨를이 없던 서민층 여성들에게는 그저 구경거리에 불과한 물건이 아니었을까. 실용과 장식의 용도에 길상의 의미를 결합시킨 빗접고비. 그 안에는 구한말의 생활장식화로 유행했던 민화의 또 다른 세계가 담겨져 있다.

 

글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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