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혁림 – 전통과 현대의 물고기를 향해 던진 그물

민화와 한국현대미술작가⑦
전혁림
전통과 현대의 물고기를 향해 던진 그물

대가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영예를 누리고 90세가 넘은 현역작가로서 이름을 알린 매우 드문 작가들 중에는 전혁림全爀林(1916-2010)이 있다. 아름다운 통영의 바닷물빛을 연상시키며 세간의 화제로 떠오른 작가는 평생 그런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고 산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술관 하얀 벽 위에 화사한 색채를 떨구고 사라진 이 작가에게도 어두웠고 힘든 시절이 있었을 테다.


전혁림미술관 홈페이지는 ‘1977년 부산 동광동 삼호여관’이라 적힌 사진에 대해 ‘고독했던 시절’로 묘사하고 있다. 부산의 여관방에 펼쳐진 화구와 벽면을 빼곡히 채운 그림들 속에서 화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하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오히려 자긍심에 빛나는 얼굴을 하고 있음은 그가 젊어서만은 아니었으리라.
사진 안의 작은 공간에서 벽이며 책상이며 바닥에 가득한 캔버스들 사이에 둘둘 말려진 종이다발과 도자기들이 눈을 붙잡는다. 청화안료로 보이는 푸른색으로 그림이 그려진 전면의 둥근 접시에는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대표적인 문양인 두 마리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그가 6.25전쟁 때 도자기 회사에서 그렸던 그림의 추억이라고 보면 과언일까? 일제강점기 정규 미술학교가 없던 조선에서 전혁림은 미술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프랑스 유학을 꿈꿨으나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화가로 우뚝 선 그는 근현대 역사를 온몸으로 살았다. 그에게 있어 한국의 자연 그리고 전통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작품의 보고였으며 20세기 들어 적극적으로 표현한 민화는 바로 통영 바닷물에 던진 그물에서 건져 올린 전통과 현대라는 한 쌍의 물고기와 같은 것이었다.
고갱 같은 이가 그런 화가이다. 금융인에서 화가가 된 고갱과 같은 경우를 한국 현대미술사에서는 전혁림을 예로 들 수 있다.
1915년 7월 초이틀(호적에는 1915년 1월 21일생) 경남 통영의 소지주 집에서 태어난 그는 통영공립학교를 졸업하고 부상으로 인해 학교진학에 차질을 빚어 고향에 있는 3년제 수산학교에 진학하였다. 당시 수산학교의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았던 전혁림은 그저 중학과정이나 마치자는 생각으로 학교를 다녔다는데 여기서 가와시마 도시야스(樺島年案)라는 일본인 아마추어 화가인 선생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미술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당시 수산학교에서 미술과목 교육이 행해지지 않았기에, 미술선생은 아니었으나 미술에 취미가 많았던 이 일본인 아마추어 화가의 존재는 초등의 도화교육을 받은 전혁림에게 그림의 세계를 열어준 것이 분명하다. 그는 당시 한국에 와 있던 대개의 일본인 아마추어 화가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의 전람회에 응모하였고, 선생들을 대상으로 한 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하는 정도였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의 전혁림에게 미술에 대한 눈을 뜨게 해준 것임에 틀림없다.
1933년 수산학교 졸업 후 진남금융조합에 근무하던 전혁림은 독학한 그림을 1938년도 ‘부산미술전람회’에 출품하였다. 이때 출품한 작품은 〈신화적 해변〉, 〈누드〉,〈월광〉이었다. 이 전람회에서는 일주일 동안 참가하여 누드 2점을 그렸던 ‘이과회 하기 양화강습회’의 강사였던 토고 세이지가 심사위원을 맡았었다. 그림은 망실되었지만 작가의 기억에 따르면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이었다. 30년대 후반 한국 화단에서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은 조선미술전람회의 주요 흐름과는 다른 경향이었으며, 모던한 아방가르드적인 세계였다. 지방화단인 부산에서 전혁림의 세계는 일본에서부터 수입된 서적과 잡지를 통한 독학이라는 체계와 단 1주일 동안의 일본인 강사의 강습회를 통해 자유로운 당시 첨단의 일본 미술계와 나란히 하고자 했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고의 작품과 신진의 기류를 전달하는 미술잡지와 개념서를 통해 전혁림은 시류에 부합하는 그림에서부터 자유로이 앞서 나갈 수 있었다.


전통이라는 선생

독자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화업에 들어선 전혁림에게 큰 영향을 준 스승은 없었으나 덕수궁 이왕가미술관에 걸리던 일본작가들의 작품이나 야스이 소타로(安井曾太郞),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 등의 작품은 감명을 주었다. 일찍부터 서적을 통하여 외부 미술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던 전혁림에게 이들의 그림은 다소 아카데믹하게 보였지만 좋아보였다는 것은 단단한 구성에 흥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잔느나 마티스 등의 세계도 화집을 통해 이해하였고 피카소에 대한 관심 또한 화집을 통해서였다. 결국 전혁림의 프랑스 유학 결심의 계기는 자신이 당면한 문제이자 한국 화단의 한계인 일본 미술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을 통하여 유포된 프랑스 화단에의 동경이었다.
광복이 되자 전혁림은 윤이상, 김춘수, 유치환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었다. 목적은 문화계몽이었는데 이들
은 통영여중고의 선생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이 지역의 문화인들이었다. 연극을 주로 하기도 하고 관보에 공식 등록까지 되었던 단체이지만 경제적 곤란으로 해체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 즈음 제1회 〈국전〉에 응모하였으나 입선에 머물고 말았다. 6.25전쟁을 부산에서 보낸 전혁림은 1952년 부산 밀다원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당시 부산 화단은 중앙에서 내려온 화가들의 작풍에 의해 지방적인 색채가 사라졌다고 판단하여 지방의 작가들이 결속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혁림, 양달석, 우신출 등은 이미 1947년에 경남미술연구회를 결성하여 지방을 단위로 한 화가의 단체를 규합한 바 있었다. 미술이 상품성이 없던 시절에 지방에서 미술가들의 단체는 별다른 활동을 보일 수 없었고, 자연히 해체되고 말았다. 물론 전혁림은 생활근거지가 남쪽에 있었다. 하지만 전쟁통에 겪은 고난의 강도는 한국민 누구에게나 다를 바 없었다. 갑작스레 밀려들어온 서울 등 중앙화단의 경향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화단에 심각한 반성의 기회를 주었으며 향토성에의 회귀 내지는 지방적인 특색에 대한 눈뜸을 가져왔다. 6.25전쟁은 전혁림에게 하나의 계기가 되었는데 손응성, 박고석 등 당시 이론적으로도 탄탄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던 작가들과 어울렸고 한묵, 이중섭과도 교유했다. 또한 김환기와 유대관계를 맺었으며 부산에서 이중섭, 유강렬, 장윤정과 4인전을 갖기도 하였다. 당시의 그림은 달, 구름, 하늘 등이 소재였는데 바로 한국적인 것이라 여겼던 때문이다. 한국인의 정서를 한국적인 것이라 생각한 것은 전쟁을 겪으며 고조된 자아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 유학은 못 갔지만, 나는 대신 우리 민화, 벽화, 자수 같은 거보면서 그림을 그렸어요. 불화, 단청, 비단이불, 전통 공예품, 이런 게 내 선생이지.”
한국전쟁기에 부산으로 피난 갔던 화가들은 도자기 회사에 근무한 경험들을 이야기하곤 한다. 이중섭 등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대부분의 화가가 미술가 본업이 아니라 단지 피난화단에서의 일로 기억하는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이 전혁림에게는 스스로의 조형실험을 위하여 일찍이 택한 길이었다. 평면에서 해결되지 않은 점을 도자기를 통해 구현해보려 한 것이었다. 그는 지인의 도움으로 도자기 회사에서 현대적인 방식으로 안료를 처리해보기도 하고 조형 등을 실험하였으며 이때의 경험은 그의 화면에 하나의 변화를 도출하였다. 조선백자 등을 한국의 이미지로서 채택하여 화면의 구성요소로 삼은 다른 작가들과 달리 그는 도자기 자체의 본질 즉 흙과 불 그리고 표면의 안료에 의해 얻어지는 과정에 집중함으로써 한국적 미에 도달한 것이다. 이미지가 아닌 본질을 통해 한국적 미에 접근하는 방식은 그가 민화의 모티프나 전통의 오방색을 한국적 미의 조형요소라는 이유로 채용할 때조차 다른 깊이를 지니게한다.
전혁림의 마산과 부산에서의 활동은 지방작가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의 미적 안목에 따라 작품을 하였다. 골동수집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그의 생활이었기에 한 작가 안에서 체득된 한국적 요소를 볼 수 있다. 즉 외래의 영향에 의해 일부러 찾아 나선 의擬전통이 아니라 몸에 배어 있는 체득의 전통이었던 것이다.


전통 색채와 민화로 꽃피우다

일제강점기의 <조선미술전람회>에의 참여나 해방공간과 그에 따른 심판 이후 정권의 변화에 따라 국가가 요구하는 미술 혹은 그에 등 돌리고 순수의 세계로 침잠하는 등 격동하는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미술인은 조형적 이념보다는 추구한 세계관 혹은 사회적 판단에 따라 행보를 결정하였다. 한국 화단에는 〈국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은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그에 맞서는 재야의 힘으로서 제도권 미술에의 편입을 꿈꾸는 이들만 있던 것도 아니었다. 드물지만 자신의 작품경향을 판단하고 화단 내 헤게모니에 영합하지 않고 소신껏 작업에 임했던 전혁림과 같은 작가들이 있어 한국의 현대미술은 다양성을 지향하는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근대화단과 현대화단의 증인이자 묵묵히 화업에 전념한 화가의 전형을 보여준 전혁림의 작품은 초기 추상작가로서의 위상을 넘어 20세기 말,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다소 평면적이며 화사한 그의 화면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에 의해 탄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다양성과 주변부에 대한 관심이 우리 내부에서도 일어났고, 소재주의적 접근을 벗어난 차원으로 민화가 논의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1955년, 단순한 물고기의 평면적인 형태와 위로 치솟은 물풀의 직선적 형태, 둥근 달과 펼쳐진 날개의 새를 화면의 표현요소로 삼은 〈달과 호수〉는 그의 평면적인 감각이 드러난 작품이다. 문인화적 선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이 화면은 추상적 원, 직선, 타원 등으로 일러도 별 무리가 없어서 구상과 추상의 경계 혹은 동양의 정신으로 추상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탐구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1950년에 제작한 〈화조도〉의 지워진 배경이 여백과 같고 흩어진 색채에서 화사한 색감을 발견할 수 있으니, 이 화사한 색감의 진원지를 굳이 추정해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즉 그는 민화 열풍 안에서 소재에 천착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추구한 추상의 원형, 형태의 기원을 민화와 불화 같은 평면적이면서 화사한 화면에서 찾아왔던 것이다.

“결국, 사실 내 정신의 형성은 프린트 문화 덕택입니다. 서적문화!”라고 한 작가의 고백은 문학청년이 그림에 이르는 방식, 근대화가들이 명화를 대하던 방식 그리고 조금은 평평하게 균일하게 조정된 색감에 익숙해진 감각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 평평함이 생명력을 갖고 공간을 휘어잡으려면 색감은 변화무쌍해야 하고 형태는 구축적이고도 굳건해야 가능한 것이다. 1953년의 〈붉은 노을〉의 전통적인 소재는 색채로 해체되어 세잔느의 파사주와 같은 단위로 구성되어 추상의 길로 향하였다. 1955년의 〈시장풍경〉은 한국적인 특성을 지닌 오방색의 구현, 형태의 유비 등을 보여주었지만 1957년의 〈어촌풍경〉으로 나아갔다. 두 마리 물고기의 이미지와 바다와 배와 해와 머리에 광주리를 인 여인의 구성은 평면적이지만 형태의 대양한 시각을 공유한 입체주의적 시각을 보인다. 새로운 시각적 경험인 입체파적 화면의 시도는 새로움 미술이 시작되는 지점이지만 그는 간파했을 것이다. 오랜 전통이라 생각한 민화에서 이미 그러한 해체되는 시각의 지점이 있었음을. 그리하여 우리는 무어에도 거리낌 없이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그려지고 색칠해진 노화가의 화면을 만날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제작한 많은 그림들이 ‘민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음은 자신의 시각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으며, 사회에서 통용되는 코드의 확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전혁림이 이룬 개가중에는 바로 한국의 현대미술사에서 전통과 새로움이라는 것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일찍이 알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확신이 어떻게 변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실도 있음 또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글 조은정(미술평론가/미술사학 박사)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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