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먹색은 한국美 농축한 역사적 색감, 맥 끊겼던 전통먹 부활시킨 한상묵 먹장




한상묵 먹장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전통방식으로 먹을 제작한다.
스승은 커녕 자료조차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전통먹을 재현해냈으며 우수한 기술을 인정받아 문화재청을 포함해 여러 업체와 활발히 협업 중이다. 가시밭길도 마다않고 묵묵히 먹장 외길을 걸어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글 문지혜 기자 사진 이주용 기자


이슬비가 포슬포슬 내리는 선선한 여름날, 충북 음성에 위치한 먹공방 ‘취묵향’을 방문했다. 예로부터 먹을 만드는 먹방이 있어 묵뱅이, 또는 먹뱅이라 불렸다는 동네답게 연두빛 신록이 무성하고 아침 공기가 청량하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취재진을 맞이하는 한상묵 먹장의 뒤를 따라 공방에 들어서니 그간 받은 상장부터 각종 먹, 먹으로 만든 조형물들이 빼곡해 인고의 시간을 짐작케 한다. 2006년 먹제조 부문에서 ‘경기 으뜸이’, 2014년 전통먹 숙련기술전수자로 선정된 바 있는 한상묵 먹장墨匠(63)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전통기법으로 먹을 제조한다.

먹을 먹틀에서 빼는 모습

여기서 전통기법이란 석유나 천연가스 정제 과정에서 추출한 그을음인 카본(Carbon)이 아닌 송진, 콩기름, 참기름 등 식물성 기름을 활용해 수작업으로 먹을 생산하는 방식을 뜻한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하는 거의 대부분의 먹과 먹물은 카본으로 제작되는 실정. 취묵향에서 생산하는 먹은 소나무 그을음으로 만든 송연먹松煙墨과 식물성 기름으로 만든 유연먹油煙墨으로, 송연먹은 푸른빛이 돌아 산수화 등 그림에 잘 어울리며 붉은빛이 나는 유연먹은 주로 서예에 사용된다. 특히 한상묵 먹장이 연구에 주력한 송연먹에는 한민족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선조들은 소나무로 만든 초가집, 기와집에서 태어나 소나무 숲에서 뛰놀고 솔가지로 만든 밥을 먹고 군불도 떼다가 소나무 관棺에 묻히기까지 일평생을 소나무와 함께 했어요. 소나무를 태워 먹도 만들었지요. 사실 먹은 신라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수출품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신하들에게 먹을 나누어 주었고, 특정지역에서는 먹을 임금님께 진상품으로 올리기도 했죠. 송연먹이 지닌 두터운 먹색은 빛의 반사가 적고 깊이감이 있습니다. 요즘에도 많은 작가들이 송연먹을 찾는 이유에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하다

놀랍게도 한상묵 먹장은 독학을 통해 전통먹 제조기법을 익혔다. 그는 먹공장을 운영하는 이모부의 권유로 28세이던 1986년 먹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그때 만들던 먹은 전통먹이 아닌 카본으로 만든 현대먹이었다. 전통먹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1994년 이모부의 공장에서 독립을 앞둔 시점으로, 그는 당시 국내에 전통먹을 만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역사적 가치를 지닌 전통먹으로 차별화를 모색한 것. 문헌 자료조차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연구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송연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1993년 일본, 이듬해 중국까지 각 나라의 주요 먹공장을 다니며 송연 제조 과정을 물어보았지만 대부분의 업체에서 이를 거절하기 일쑤였고 간신히 송연 만드는 과정을 보았다고 해도 이를 한국에서 재현하는 과정 또한 쉽지 않았다. 2002년에는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서 전통가마터가 발굴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가 학예연구사로부터 유적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듣기도 하고, 이를 재현한 가마를 공방에 설치해 사용해보았지만 일말의 성과를 얻는데 그칠 뿐이었다. 소나무를 태워 만든 연기 속에서 그을음을 얻어야 하는 일련의 작업들은 그의 말마따나 ‘뜬구름 잡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2003년 한경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하기에 이른다. 현장에서 겪는 기술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대학교 부설 산업의료원을 적극 활용했으며 수많은 실험을 바탕으로 유용한 데이터를 축적해갔다. 그는 대학교에서 실험하는 동안 많이 배웠노라 회상했다.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굴된 전통가마터를 재현한 가마 앞에서.
한상묵 먹장은 이 가마와 계량가마 2개를 사용한다.

사람의 일생과 닮은 먹, 건조 기간만 10년

송연먹 제조 공정은 소나무를 태우는 것부터 시작한다. 송진에서 그을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송진이 달라붙어 있는 관솔 부분을 태워야하며 열흘 동안 1톤 분량의 소나무를 태운 뒤 하루 동안 식혀 일산화탄소를 배출시키고 공기 중의 그을음이 가라앉길 기다린다.

먹을 건조할 때는 생선 굴비 엮듯이 짚으로 20개를 엮어서 자연건조한다. 먹이 제대로 건조되기까지는 그 해의 기후와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200~360일이 걸리며 10년 정도 성숙되어야 먹색이 좋아진다.

1톤의 소나무를 태우면 4.5×17cm 크기의 먹 100여개를 만들 수 있다. 그을음을 가마에서 긁어낸 뒤엔 아교와 10 : 6의 비율로 섞어 향료를 가하고 반죽한 뒤 형틀에 넣어 모양을 잡고 건조해 완성하는데 건조 기간만 보통 1년에서 10년이 소요된다.
“먹의 숙성과정을 살펴보면 생로병사를 겪는 사람의 일생과 닮았어요. 맨 처음 먹이 완성됐을 땐 아기를 다루듯 온도와 습도를 잘 맞춰서 건조시켜야 해요. 먹은 흐린 날 수분을 머금고 맑은 날 수분을 뱉길 반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먹 입자 사이의 틈이 점점 벌어져 수용성이 좋아지죠. 건조 기간 10년에 이르기까지는 먹색이 차츰 좋아지는 청소년기라고 볼 수 있겠네요. 먹의 수명은 50여년으로 제작된 지 50년이 지난 먹은 점점 갈라집니다. 주성분인 아교가 수분을 오랫동안 잡고 있질 못하거든요.”
현재 그가 만든 송연먹 80%가 문화재청으로 납품된다. 일례로 한상묵 먹장은 2013년부터 2019년까지 규장각 소장품 복원사업 및 조선왕조실록 복제품 인쇄 사업, 2015년부터 5년 동안 전국 사찰 목판 인쇄 작업, 2015년부터 2017년까지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삼국유사 목판본 인쇄 작업에 참여한 바 있다. 주요 문화재 관련 사업은 그가 대부분 참여한 셈. 더러 누군가는 “송연먹이 70년 동안 단절됐는데 전통먹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있다 해도 가짜”라고 말하며 한상묵 먹장이 만든 전통먹을 부정하기도 했지만 그는 현장에서 먹 제조 공정을 시연하거나, 국민대학교 산림과학원에서 자신의 먹의 안정성을 입증한 증서를 발부 받아 의혹을 말끔히 해소했다.

한국적인 묵색, 해외로 미래로

이처럼 그의 전통먹이 인정받기까지 한상묵 먹장은 끝이 보이지 않는 사투의 시간을 보냈다. 처음 독립하여 사업체를 꾸릴 때만 해도 88 올림픽으로 인한 전통문화 붐에 힘입어 서예산업이 흥행가도를 달리던 때였고 먹의 수요 또한 어마어마했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로 먹의 주요 소비처인 서예부문이 급격히 침체됐다. 한상묵 먹장은 한국특허전략개발원, 국립중앙과학관 등에서 주최하는 공모사업에 매진하며 돌파구를 찾았다.
동시에 한국 전통먹을 알리는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7년에는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첫 개인전을 개최했고, 2015년부터 매해 먹뿐 아니라 먹으로 만든 각종 조형 작품 100여점을 선보이며 개인전도 꾸준히 열고 있다. 2018년에는 런던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에서 먹 만들기 체험을 개최하기도 했는데, 2시간 만에 신청자 30명 접수가 완료될 정도로 인기를 끌자 추가 신청자를 30명 모집해 프로그램을 성료했다.
“흥미로운 점은 프로그램 참여자 전원이 영국 사람이었다는 거죠. 참여자들은 ‘그동안 한국먹은 중국이나 일본의 아류로만 생각했는데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만이 지닌 먹의 문화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보람된 시간이었습니다.”
한상묵 먹장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최하는 ‘송연먹 명품화 사업’에 기대를 걸고 있다. 송연이 들어간 잉크를 본격 상품화하는 사업으로 송연 먹색을 한국의 색으로 지정, 누구든 이를 쓸 수 있도록 프린터기 잉크, 만년필 잉크, 붓펜, 드로잉 펜 등에 그의 송연 먹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 외 막걸리, 향수, 비누, 마스카라, 심지어 타투 잉크 업체 등 품목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회사들과 전통먹을 활용한 콜라보레이션 사업을 진행 중이다. 그의 뚝심 어린 발걸음은 전통을 넘어 미래를 향하고 있다.
“송연먹색은 꾸준히 사랑받고 이어져야 할 우리의 전통문화입니다. 단순한 검정색이 아닌, 한국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역사적 색감이지요.”

한상묵 먹장이 만든 다양한 먹 작품들


취묵향
충북 음성군 음성읍 초천로174번길 24-1
010-3356-7220
blog.daum.net/sangm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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