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미술의 겉과 속 ⑬ 상징, 그 다중성多重性

어떤 사물이 가진 상징성이라는 것은 고정 불변적인 것이 아니다. 이유는 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층이나 집단의 입장 차에 따라 그 상징하는 바의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동양의 옛 그림은 화가 개인의 주관적 정신세계보다 자연과 인간의 근원적 가치나, 집단 정서 표현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재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신분 또는 향유 집단의 사유 방식과 지향점, 더 나아가 시대적 환경까지도 따져봐야 한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이 글에서는 특정 소재가 다중적 상징성을 가지게 되는 원리를 연꽃과 관련해 간략히 살피려 한다.


군자의 기상

연꽃의 상징적 의미는 다양하다. 그만큼 사고 태도와 방향, 처지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연꽃을 사랑했다는 증거다. 실제로 유학자나 불자佛者, 민간을 막론하고 각계각층 사람들이 연꽃을 사랑했다. 하지만 연꽃을 바라본 관점과 사랑한 이유는 각각 달랐다. 유학자들은 특히 진흙탕에 자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의 생태 속성에 주목했다. 그들은 그것을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君子와 연결시켜 해석, 미화했다. 송나라 성리학자 염계 주돈이가 쓴 <애련설>에서 그들의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나는 홀로 연꽃이 진흙에서 나왔으면서도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이 비어 있고 겉이 곧으며 덩굴 뻗지 않고 가지 치지 않으며,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고 우뚝이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음을 사랑한다.”
《고문진보후집》 권10

염계는 주희(주자)에 앞서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철학자다. 그는 연꽃의 자태에서 맑은 지조, 고고孤高, 고결高潔한 군자의 기상과 경계를 발견했다. 그런데 군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군자여야 가능한 일이니 염계는 연꽃을 통해 스스로 군자임을 드러낸 셈이다. 조선 유학자들에게 연꽃은 ‘군자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그런 인격을 가진 성현이 특별히 사랑한 꽃이라는 점에서 더욱 사랑할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연꽃을 사랑한 이유가 군자 자태가 연꽃과 같아서가 아니라 연꽃이 군자의 자태와 같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연꽃은 주어진 속성대로 그냥 자랄 뿐이지만 유학자들은 연꽃의 생태적 속성을 자기중심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군자의 상으로 의역하고 애호했던 것이다.
고려시대까지 연꽃은 불교의 강력한 상징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에 와서 군자의 상징으로 사랑받게 된 것은 염계의 영향력이 컸다. 이렇게 된 배후에는 숭유억불의 정치이념과 성리학의 발달이라는 사회·문화적 변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연꽃의 상징적 의미가 달라졌다 해도 연꽃 그 자체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달라진 것은 연꽃이 아니라 연꽃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대 상황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청정불염과 화생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오니汚泥에 물들지 않는 연꽃의 속성을 불교에서 불·보살의 경지로 해석했다. 앞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보살 경지가 연꽃 자태와 같아서가 아니라 연꽃의 속성이 불·보살의 경계와 같기 때문이다. 불·보살의 대좌를 연꽃 모양으로 만들고 연화좌, 연대蓮臺라 부르는 것은 사바세계에서도 고결 청정함을 잃지 않는 불·보살 경계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불교의 대표적 경전 중 하나인 《묘법연화경》이 연꽃과 관련된 이름을 갖게 된 것도 부처 경계의 청정불염淸淨不染함이 연꽃과 같다는데 연유한다.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 고대인도 바라문교의 신비적 상징주의 가운데에 혼돈의 물밑에 잠자는 영원한 정령 나라야나의 배꼽에서 연꽃이 솟아났다는 신화가 있다. 이로부터 세계연화世界蓮花 사상이 생겨났고, 이것이 불교에 수용되어 연화화생蓮花化生의 의미로 연결되었다. 신화 역시 자연 생태나 현상의 인간 중심적 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연꽃이 화생化生의 상징이 된 것은 필경 꽃이 진 뒤에도 씨앗과 뿌리에 생의生意를 품고 있는 속성에 기인한 것일 것이다.
파주 보광사 대웅보전 뒤쪽 판벽板璧에 만개한 수십 송이 연꽃마다 보살과 동자가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다. 생전에 선업善業을 쌓으면 사후에 극락왕생한다는 아미타경의 내용을 시각화한 것이다. 반야용선도 류 불화에서도 화생의 상징으로 표현된 연꽃을 볼 수 있는데, 양산 통도사 극락전 후벽의 <반야용선도>가 그 중 하나의 예이다.
‘화생의 연꽃’은 일반 대중들의 관념 속에서도 살아 있다. 판소리계 소설의 하나인 <심청전>에서 심청이가 앞 못 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졌으나 죽지 않고 용궁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난 후 용왕의 배려로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올 때 연꽃을 타고 물 위로 솟아오른다. 이 연꽃은 단순한 탈 것이 아니라 선업에 따른 선과善果이자 화생의 상징이며, 불교와 습합된 무교적 사고를 배경으로 한 연꽃이다.

연생귀자

일반 대중들이 향유했던 민예 미술의 연꽃은 유, 불교의 연꽃과 모양은 같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군자, 불·보살의 경지나 화생의 상징이었던 연꽃이 민예미술에서는 다남多男, 불로장생의 상징물로 애호되었다. 그것은 그 경우와 일반 대중들이 추구하는 바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본초학을 대표하는 «본초강목»에서는 연꽃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연꽃은 생명력이 강하여 가히 영구적이다. 연밥은 생명의 기운을 지니고 있으며, 뿌리에서 트는 싹은 끊임없이 자라나서 그 조화가 쉬지 않는다. 石蓮堅剛 可歷永久 薏藏生意 藕發萌芽 展轉生生 造化不息”

실제로 1951년 일본의 연꽃 박사 다이카 이치로大賀 一郞가 지하 이탄층에서 발견한 약 2천 년 전 연꽃 종자를 발아시켜 꽃피고 열매 맺게 한 사실이 있다. 한편, 꽃에 대한 백과사전인 «군방보»에서는 “모든 식물들은 꽃을 치운 뒤 열매를 맺는데 오직 연꽃만은 꽃과 열매가 함께 나란히 생겨난다. 凡物光華以後實 獨此華實齊生”라고 설명하고 있다.

현세 복락을 중시하는 서민들은 연밥과 연근의 강인한 생명력을 자손번창의 의미로 해석했고, 꽃과 수많은 열매를 동시에 드러내는 생태적 속성을 연생귀자連生貴子 의미로 연결시켰다. 중국 전지(剪紙, 종이를 오려 내어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드는 지공예의 일종)나 자수 공예에서 연꽃과 여자를 결합시킨 모티프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연꽃이 다산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우리 민화 백동자도의 연꽃, 연화도의 연꽃 역시 다남의 상징으로 그려졌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일 뿐이고, 모란은 모란일 뿐이며, 연꽃 또한 연꽃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사람의 입장과 관점, 그리고 추구하는 바에 따라 어느 속성은 강조되고 또 어떤 것은 무시되면서 다중적인 상징성을 얻게 된다. 상징성은 대상 그 자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성과 자태를 보고 아전인수 격으로 부여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옛 그림의 소재와 상징성에 관한 연구란 결국 당대 사람들의 사고태도와 욕망에 관한 연구라 해도 무리가 없다.


글 허균(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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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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