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미술의 겉과 속⑨벽사辟邪와 주술呪術

예로부터 우리 조상은 절일(節日), 방위 등 시간과 공간적 조건에 유의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경복(慶福)과 길리(吉利)를 추구했다. 길상의 함의가 충만한 그림을 생활 속에 향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벽사화를 매개로 평안과 행복을 해치거나 방해하는 요소들을 물리치려 했다. 길상화이든 벽사화이든 삶의 행복과 평안을 확보 유지하는 일에 관여하는 그림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 일반 길상화가 미화 장식에 보다 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에 반해 벽사화는 주술(呪術)의 힘으로 사귀와 재액을 물리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역사시대 이전에는 미술과 주술이 동일 선상에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벽사 목적의 민화는 원시 인류 미술의 맥을 잇는 그림이라 해도 좋다

– 글 허균(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길상, 그리고 벽사

‘화(禍)를 부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화를 입었을 때 그 원인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복(福)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복받을 만한 일을 했을 때 주어지는 것이 복이라고 옛 사람들은 믿었다. 고대인들에게 화와 복, 길상과 불상(不祥)은 결국 사람의 선악에 호응하는 것인 셈이다. “선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고, 악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주역》 〈문언〉) “하늘의 도는 선한 자에게 복을 주고,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린다.”(《서경》 〈탕고〉)는 말도 화복에 대한 동양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벽사에 관한 시각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벽사 행위는 인간의 삶을 괴롭게 하는 역병과 재액 등의 원인이 사기(邪氣)나 사귀에게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기(邪氣)나 귀신은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또 쫓으려 한다는 것은 합리성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대인에게는 그런 사고와 행동이 삶의 행복과 평안을 유지하는 절실한 방도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기나 사귀를 물리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컨대 과거 궁중에서 나례(儺禮)와 같은 의식이나 처용무 같은 가면 연희를 통해 벽사를 꾀한 일이나, 민간에서 동짓날의 팥죽, 황토, 금줄, 가시 많은 엄나무 등 다양한 장치로써 사귀와 재액을 물리치려 하는 것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벽사용 민화 역시 같은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 벽사진경에 대한 욕망과 주술적 사고가 배후에 깔려 있다.

벽사의 힘, 주술

주술(呪術)은 인간 의지로써 어떻게 할 수 없는 삶의 어려운 문제를 초월적 힘으로 해결하려는 술책이다. 무속에서 이것은 기도, 주문 등 의식(儀式) 형태로 나타나지만 미술에서는 시각적인 방법으로 표출된다. 예컨대 민화에서 호랑이, 매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은 대개 벽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그림은 용맹함과 예리한 시력을 가진 호랑이와 매로 하여금 사귀와 재액을 찾아 물리치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주술 도구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또한 옛 기록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입춘 시절에 계·견·사·호 그림을 대문이나 벽에 붙이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주술 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주술 도구와 행위 뒤에는 공히 그것이 가진 신령한 힘이 인간이 바라는 바를 이루어 줄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가 깔려 있다. 옛 사람들이 벽사화를 주변에 두고 그것이 내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벽사화에서 중요한 것은 효험 유무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현대에 와서 벽사화가 신이한 힘을 상실한 것은 사람들이 그 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벽사용 민화

인간 능력 밖에 있는 삶의 문제를 초월적 힘을 빌려 해결하려는 술책이 주술임을 앞서 말했다. 술책 가운데 민간에서 널리 이용된 것이 부적(符籍)이다. 부적의 ‘부(符)’는 기호를, ‘적(籍)’은 문서나 서적 등을 가리킨다. 대개 부호나 글씨를 위주로 하면서 문서 형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부적 중에는 회화적 성격이 강한 것들이 있는데, 이들을 보통의 부적과 구별하여 부작화(符作畵)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남아있는 같은 용도의 그림을 보면 닭, 개, 호랑이, 매가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정초 민가에서 벽에 닭·개·사자·호랑이 그림을 붙여 재앙과 역병을 물리치려 했다.”는 《동국세시기》의 기록이 이 그림들의 용도를 설명해 준다.
호랑이가 주인공인 벽사화에는 <그림 2>에서 보는 것처럼 호랑이를 단독으로 그린 것, 까치호랑이그림 형식을 갖춘 것 등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이들 그림에 각각 ①‘眼前邪鬼齒消滅(안전사귀치소멸)’, ‘出林猛虎逐三災(출림맹호축삼재)’, ②’龍輪五福(용륜오복) 虎逐三災(호축삼재)’ ③‘松有凌霜節(송유능상절) 虎將逐邪滅(?))(호장축사멸(?))’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데, 풀이하면 ①눈앞의 사악한 귀신을 이빨로 씹어 없앤다. 숲에서 나온 맹호가 삼재(화재·수재·풍재)를 몰아낸다. ②용은 오복을 통합 관장하고 용맹한 호랑이는 삼재가 몰아낸다. ③소나무는 서릿발을 능가하는 절개를 가지고 있고, 호랑이 장수는 사악한 것을 몰아내어 소멸시킨다. 하는 뜻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부 민화 연구자가 주장하듯이 까치호랑이 그림은 우둔한 지배층을 놀리는 내용의 풍자화가 아니라 삶의 원천적 문제와 직결된 길상·벽사화라는 점이다. 혹자는 피지배층인 서민을 상징하는 까치가 사대부 등 지배계층을 상징하는 호랑이를 조롱하는 장면이라는 구체적 설명까지 내놓고 있다. 이것은 이 그림을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본 것으로, 과거 민화 향유층의 정신세계나 세계관이 아닌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가치·호랑이를 본 잘못된 결과다.

매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 역시 호랑이 그림과 같이 벽사를 목적으로 한다. 거친 발톱과 예리한 눈매로 곳곳에 숨은 사귀를 찾아내 날카로운 부리로 쪼아[啄] 퇴치할 것이라는 믿음이 이 그림 배후에 숨어 있다. 벽사화의 맹수·맹금은 그들의 포악성, 용맹성을 현실 이미지로 바꿔주는 매개 장치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동시에 그것은 호랑이와 매의 상(像)이면서 용맹성과 예리함 그 자체이기도 하다. 옛 사람들은 이 추상적 힘을 빌려 벽사진경 추구와 함께 심리적 위안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용맹스럽거나 위협적인 존재가 아닌 닭이나 개가 벽사의 주체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인들은 수탉이 우는 것과 해 뜨는 현상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면 이 두 사건이 서로 연결돼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주술은 이처럼 대상간의 관념적인 연결 관계를 실제적인 연결 관계로 오인(誤認)하는 데서 출발한다. 닭의 울면 해가 뜨고, 해가 뜨면 어둠이 물러가고, 세상이 밝아지면 음습한 사귀들이 물러난다고 믿는 것이다. 벽사의 주술력은 닭 울음소리로부터 나오지만 그림을 가지고는 그 소리를 표현할 길이 없다. 그렇지만 옛 사람들은 닭 그림을 보면서 상상 속에서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것이 가진 주술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개는 어떠한가? 민화 벽사화에 등장하는 개 중에 세 개의 눈을 가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름이 ‘당삼목구(唐三目狗)’이다. 개의 눈을 세 개로 표현한 것은 벽사의 영력(靈力)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장례 때 귀신 쫓는 방상씨 가면에서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삼목구 이미지 자체로도 주술과의 관련성을 충분히 느끼게 해 주지만 개가 벽사의 주체가 된 진짜 이유는 평소에 보지 못하던 것이 나타나면 경계하며 짖는 개의 속성과 관련이 있다. 사귀는 평소에 보지 못한 괴이한 것이므로 그것이 나타나면 처음 본 개가 짖기 시작하고, 그 소리를 들은 수많은 개가 따라 짖으면 사귀가 무서워 달아날 것이라고 옛 사람들은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상상에 의한 연관을 현실적인 연관으로, 주관적인 연관을 객관적인 연관 관계로 인식하는 전형적인 주술적 사고방식이다.

마치면서

아무리 극진한 필치로 잘 그린 그림이라 해도 그것이 실제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벽사용 그림의 틀 속의 모든 것은 현실과 다른 전혀 별개의 것이다. 엄밀히 말해 그 틀 속에는 예컨대 계·견·사·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계·견·사·호의 ‘그림’이 존재하는 것이다. 주술 도구이자 행위인 벽사화의 진면목은 외형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는 데서 찾아진다. 그러므로 벽사화를 두고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거나 다투는 것은 아무 쓸 데 없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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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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