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미술의 겉과 속⑧ – 좌·우左右

전통미술의 겉과 속⑧
좌·우左右

현대인들은 글을 쓸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횡서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오른쪽 맨 위에서 아래로 내려쓰면서 왼쪽으로 행갈이 하는 종서를 기본으로 삼았다. 여기서 말한 ‘오른쪽’ ‘왼쪽’은 ‘나’를 중심으로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전통시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내가 아닌 제2, 제3의 주체의 관점에서 좌·우를 분별했다. 중심이 되는 주체는 천도天道와 일체가 된 성인聖人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왕 또는 성현일 수도 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왼쪽’ ‘오른쪽’은 고대인들의 방위관념에 의거한 좌·우 개념이다.


평생도처럼 전개상 시간의 선후가 있고, 효제문자도처럼 본말本末이 분명한 내용을 병풍으로 꾸밀 경우 맨 왼쪽에 시始와 본本, 맨 오른쪽 마지막에 종終과 말末에 해당하는 내용을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것은 매사를 천도天道와 나란히 하기 위한 것이며. 그 배후에는 천인합일의 정신이 숨어 있다.


좌선左旋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 유교 문화권의 전통적 방위관의 핵심은 성인남면聖人南面의 위치, 다시 말해 성인이 북을 등지고 남을 바라보는 배북향남背北向南의 자리를 방위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동이 왼쪽, 서가 오른쪽, 남이 앞, 북이 뒤가 된다. <그림 1>에서처럼 해가 떠서 움직이는 동→남→서를 연결하면 시계 방향의 회전이 확인되는데 이것을 좌선左旋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 조익은 천도天道가 좌선하는 것을 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저 천지의 방위를 말할 때에는 좌측을 양陽으로 하고 우측을 음陰으로 하며, 동쪽을 좌左로 하고 서쪽을 우右로 하니, 천체의 운행이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간다면 우선右旋이라 해야 할 터인데, 어째서 좌선이라고 하는지 의심스럽다. 이에 대해 생각해 보건대, 필시 좌측에서부터 돈다는 뜻으로 좌선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포저집》, <도촌잡록 하>)


시작의 위치-좌

남향집의 경우 앞쪽이 남, 뒤쪽이 북이 되고, 이에 따라 앞쪽 맨 왼쪽 기둥이 동東, 맨 오른쪽 기둥이 서西에 해당된다. 집의 실제 좌향이 어떻든 남향으로 간주하므로 정확히 남향집이 아닌 경우에도 전·후와 좌·우 방위는 이 기준에 의해 규정된다.

《주역》의 방위에 관한 해석에 의하면 동쪽은 만물이 시생始生하는 방위다. 생성쇠멸의 천지 순환은 해 뜨는 동쪽, 곧 왼쪽에서 시작된다. 집에 주련을 걸 때 집 앞면 맨 왼쪽 기둥에 첫 번째 시구詩句를 거는 것은 이 기둥이 천도의 운행 방향, 즉 좌선의 시작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실례로 창덕궁 후원의 취한정 주련을 살펴보자. 여덟 개의 네모기둥을 가진 이 정자의 기둥마다에 주련이 걸려 있다. 전체 시구는 ①‘일정화영춘류월一庭花影春留月(온 뜨락의 꽃 그림자에 봄은 달을 붙잡고)’에서 시작해서 ⑫‘불수류화천만점拂水柳花千萬點(물을 스치며 버들 꽃이 천만 송이 피었네)’에서 끝난다. 실제로 정자 앞면 맨 왼쪽 기둥 앞면(<그림 3>에서 원으로 표시된 기둥의 1의 자리)에 첫 번 째 시구인 ‘일정화영춘류월一庭花影春留月’이 걸려 있고, 마지막 위치인 정자 앞면 맨 왼쪽 기둥 옆면(<그림 3>에서 원으로 표시된 기둥의 12의 자리)에 마지막 시구인 ‘불수류화천만점拂水柳花千萬點’이 걸려 있는 것이 확인된다. 천도는 좌선하기 때문에 그 속에 처한 모든 것들도 그대로 따라 돈다. 주련의 시구를 왼쪽에서 시작해서 오른쪽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한 것은 곧 천도와 나란히 하기 위함이다.
궁궐·서원·향교의 출입문은 대개 3칸의 삼문三門 형식으로 돼 있고, 입문入門과 출문出門이 구별돼 있다. 이 문의 출입 방법에 대한 문화재 안내판의 설명을 보면, ‘안으로 들어갈 때는 오른쪽(동쪽) 문을, 나올 때는 왼쪽(서쪽) 문을 이용한다’고 돼 있다. 원래 입入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는 것’을, 출出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들어 올 때는 입문入門, 즉 왼쪽 문을 사용하고, 나갈 때는 출문出門, 즉 오른쪽 문을 사용한다고 해야 이치에 맞다. 앞서 말한 대로 좌·우와 출·입은 내가 아니라 한 공간의 주체를 기준으로 판단되고 규정되기 때문이다.
‘들어온다’는 것은 문 안쪽 생활이 바야흐로 시작된다는 의미이고, ‘나간다’는 것은 ‘안[(內)’에서의 생활이 끝남을 뜻한다. 때문에 들어 올 때는 시始의 위치인 좌측 문을, 나갈 때는 종終의 위치인 우측 문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옛 사람들은 건물 기둥에 주련을 걸거나 삼문을 출입하는 사소한 일까지도 천계 운행의 이치에 맞게 하려고 했다. 계단을 오를 때 주인은 왼쪽 계단, 손님은 오른쪽 계단으로 오르며, 손님은 왼발을 먼저하고 주인은 오른발을 먼저 한다. 이것은 억지로 안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천리天理의 자연스러움이기 때문이다. 의미가 이러함에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자기 마음대로 좌·우와 선·후 위치를 바꾸었다면 그는 천도에 역행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병풍그림과 좌·우

병풍의 경우 어디가 왼쪽이고 어디가 오른쪽인가? 장성 필암서원 누문인 확연루를 본보기로 삼아 병풍과 비교해보자. 확연루의 앞은 ‘확연루廓然樓’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는 쪽이다. 문에 앞과 뒤가 있듯이 병풍에도 물론 앞과 뒤가 있다. 그림 또는 글씨가 있는 쪽이 앞, 그 반대쪽이 뒤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병풍에서 맨 왼쪽 화폭은 삼문의 좌측 입문入門에 해당하고, 집의 경우 앞면 맨 왼쪽 기둥에 해당한다. 따라서 병풍의 맨 왼쪽 화폭이 내용 전개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효·제·충·신·예·의·염·치’ 여덟 글자 그림을 8폭 병풍으로 꾸밀 때 ‘효’자를 맨 왼쪽에 두는 이유다.
‘효’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확인시켜주는 근본 지점이며, 사회, 국가윤리의 기초이자 발단이다. ‘효’가 행해지지 않으면 ‘제’도 무의미하며, 부모께 ‘효’를 행하지 않은 자에게는 임금에 대한 ‘충’도 기대할 수가 없게 된다. ‘효’는 모든 윤리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천도 좌선의 시작점에 해당하는 맨 왼쪽 화폭에 ‘효’를 배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민화 화가가 그린 효제문자도 병풍 중에 이 질서가 흐트러져 있는 사례가 눈에 띄어 아쉽다. 아마도 전통의 좌·우 관념과 유교 덕목의 본·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일 것이다.
한편, 평생도는 삶의 여정 속에서 의미 깊고 경사로운 일들을 골라 그린 그림으로, 각 장면 사이에는 시간의 선후가 존재한다. 대개 돌잔치가 인생의 첫 경사로 선택되며, 혼례, 회혼례 등의 평생의례,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는 장면, 그리고 은퇴 후 처사로서 은일한 삶을 즐기는 모습 등이 시간 순으로 배열된다. 돌잔치 장면을 병풍의 가장 왼쪽 화폭에 배치하는 이유는 돌이 인생의 시작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돌잔치 장면을 그 반대쪽 화폭에 배치했다면 그것은 인간 생애의 시종始終을 뒤바꾼 결과가 되고, 따라서 그 그림은 상식에 반하는 이단적인 그림이 되고 만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변화하는 대자연의 모습을 주제로 한 사계산수도 병풍 또는 두루마리 그림의 경우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그림 1>에서 본 것처럼 좌선의 시작점은 동쪽, 즉 왼쪽이다. 동쪽은 《주역》에서 말하는 시생始生의 방위이고, 사계절로 말하면 봄에 해당한다. 그래서 병풍의 경우 봄 경치를 맨 왼쪽에 배치하고, 두루마리의 경우는 가장 먼저 드러나는 쪽에 배치하는 것이다. 계절과 관계가 깊은 경직도耕織圖에서 춘경이 가장 왼쪽에 배치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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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제문자도와 같이 본·말本末이 확연하고, 평생도, 사계산수도와 같이 시·종始終이 분별되는 병풍 그림이나 두루마리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본本과 시始에 해당하는 것을 어느 위치에 두며, 어느 방향으로 내용을 전개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천도와 나란히 하느냐, 거스르느냐 하는 문제와 연결된 것이므로 옛 화가들은 이 부분을 결코 가볍게 생각지 않았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렸다 해도 내용 전개에서 선·후가 뒤바뀌고 본·말이 전도된다면 천도를 거스른 이단적인 것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 허균(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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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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