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량張良, 제왕의 스승, 신선이 되다

도 1
장량張良

민화 고사인물도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주제가 바로 장량이 다리 위에서 노인에게 신을 주워준 이야기일 것이다. 장량은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공신으로 병법과 지략이 뛰어났던 재사才士이다. 또한 자신의 고국 한韓나라를 망하게 한 진시황에게 복수하기 위해 가산을 털어 철퇴를 만들고 역사力士를 고용해 암살을 시도했던 협객이다. 장량의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기록이 상세한데, 그는 정사正史에 기록을 남긴 역사적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한나라 건국 후에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 신선을 자처했던 신비의 인물이니, 고사인물도에 다루어진 인물 가운데 가장 다채로운 면모를 지녔던 사람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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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양기성, <이교수리도>, 《만고기관첩》, 18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33.5×29.4cm, 일본 야마토분카칸
도 2. 필자미상, <이교납리도>, 종이에 채색, 79.1×35.3cm, 선문대박물관 산수 배경은 백묘법으로, 화면 중앙의 인물은 채색으로 그려 독특한 미감을 자아낸다. 흙다리를 마치 출렁이는 물결처럼 굴곡지게 묘사한 점이 흥미롭다.
도 3. <이교수리도>, 고사인물도 8폭병풍, 종이에 채색, 74.5×34.5cm, 가회민화박물관 사선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두 인물을 그렸다. 자유로운 필치가 돋보인다.
도 4. <이교납리도>, 고사도 병풍 8폭 중, 종이에 채색, 79.3×26.6cm, 선문대박물관
도 5. <이교납리도>, 18세기 후반, 31.8×102cm,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 벽화

이교에서 노인에게 신을 주워 준 장량

장량의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가 이교에서 노인에게 신을 주워 준 대목일 것이다. 사마천이 기록한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장량이 하비下邳에서 숨어 살던 어느 날 다리를 건너는데 한 노인이 다가와 신발을 다리 밑으로 떨어뜨리고는 장량에게 주워오라고 하였다. 장량은 욱하고 화가 치밀었으나, 참고 다리 밑에서 신을 주워 노인에게 신겨주었다. 그러자 노인은 닷새 뒤 새벽에 다시 그곳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장량이 시키는 대로 가보니 노인이 이미 와 있다가 기다리게 했다고 노여워하며 닷새 뒤에 다시 오라고 하였다. 장량이 닷새 뒤 닭이 울 때 갔으나 노인은 역시 먼저 와 있다가 또 닷새 뒤에 오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새벽이 오기 전 밤에 미리 가 있다가 비로소 노인을 만났는데, 이때 노인에게서 병법서를 받았다. 그는 이를 깊이 연구하여 병법의 대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제왕의 스승, 전략의 대가, 건국의 공신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놓고 대치하던 시기 장량은 뛰어난 지략으로 군주를 보필하여 진나라와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를 세웠으며, 한나라 건국 후에도 나라의 기틀을 잡는 데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나라 고조가 된 유방이 말하기를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 리 밖의 승리를 결정짓는 데는 장자방子房(장량의 字)이 나보다 낫다’고 하였으니 장량은 제왕의 스승이요, 전략의 대가요, 건국의 공신이었다. 이는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후대 사람들이 본받고자 한 인간상이었다. 《만고기관첩》이라는 왕실에서 열람 되었던 고사인물화 화첩에도 이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도 1)
이 그림에서 장량과 노인은 버드나무 아래에 배치되었고, 화면의 오른편에 넓게 펼쳐진 강과 흙다리가 일부 보인다. 이 화폭의 맞은편에는 장량 고사의 원전인 『사기』의 「유후세가留侯世家」 편에서 발췌한 글이 단정한 해서체로 필사되어있다. 글씨를 쓴 사람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서예가인 윤순尹淳이다. 권위 있는 역사서인 『사기』에도 기록된 장량의 이야기는 현명한 신하 그리고 충忠의 덕목을 대표하는 유교적 교훈을 담아 왕실과 사대부는 물론 민간으로까지 널리 감상되었던 것이다.(도 2, 3)

진시황을 응징하고자 한 협객

장량은 사실 한韓나라 귀족으로 다섯 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집안 출신이었다. 진시황에게 고국 한나라가 망하자 그는 원수를 갚고자 재산을 털어 철퇴를 제작하였고 역사力士와 결탁하여 진시황이 동방을 순수할 때 박랑사博浪沙에서 시황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가까스로 몸을 피해 하비下邳에 숨어 지냈는데, 이 은둔의 시기에도 농민 봉기를 이끄는 등 진나라를 전복시키고자 애썼으니 이는 장량의 또 다른 면모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문사들의 글 속에 협객으로서의 장량의 이미지는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20세기 전반에는 협객 이미지가 주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문대 박물관 소장의 <이교수리도>(도 4)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의 화면 상단에 적힌 시 구절을 보면 협객으로서의 장량을 노래하고 있다.

박랑사에서 마른하늘에 우레가 울리니,
이것은 어떤 협객이 싸우는 것인가?
博浪沙中晴雷 是何鹿俠爭

명리名利를 버리고 신선을 표방하다

장량이 이교에서 만난 노인은 책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읽으면 제왕의 스승이 될 것이다. 십삼 년 뒤에 너는 제북濟北에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인데, 곡성산穀城山 아래의 누런 돌[黃石]이 나다.” 장량이 받은 책은 『태공병법』이었는데, 태공은 바로 태공망 여상呂尙이다. 강태공으로 널리 알려졌다. 십삼 년이 지난 어느 날 장량이 한고조를 따라 제북을 지나갔는데 과연 곡성산 아래에 누런 돌이 있었다. 장량은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보물처럼 받들며 제사까지 지냈다고 한다. 『사기』의 이 기록에 따라 노인의 이름은 황석공으로 전해진다. 다분히 도가의 신선과 같은 존재로 그려졌다.
진시황 때 상산商山에 들어가 은둔했던 네 명의 은군자隱君子인 사호四皓를 태자의 스승으로 불러내도록 꾀를 냈던 이가 장량이었다. 한고조가 태자를 바꾸어 세우려 하자 여후呂后가 이를 막기 위한 계책을 물으니 장량이 알려준 것이었다. 사호 역시 신선과 같은 존재이다. 사실 장량이야말로 도가적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유후세가」의 기록에 따르면 장량은 태어날 때부터 병이 많아 도인술道引術을 하면서 곡식을 먹지도 않고 문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 일 년 남짓 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도가적 신체 수련법과 화식火食을 금한 식이요법을 행했다는 말이다. 그는 또 ‘세속의 일을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자 바랄 뿐이다’라며 신농씨神農氏 시대의 신선인 적송자를 따를 것을 밝혀 세속의 명리에 뜻이 없음을 표방했다. 이에 한고조가 한신, 팽월 등 한나라를 세운 수많은 공신을 숙청했을 때 홀로 살아남았다.
세간에 그는 신선이 되었다고 믿어졌다. 이와 관련 주목되는 것이 사찰 벽화로 그려진 장량의 고사이다. 경기도 용주사의 대웅보전에는 장량이 황석공에게 신발을 신겨주는 장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도 5)
이 그림은 신선 그림과 함께 그려져 있어 신선으로서의 장량의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글 : 유미나(원광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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