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품은 빛깔, 조선시대의 전통안료④ 짙푸른 바다를 품은 빛깔 청색계열 안료

청색계열 안료

청색은 오방색의 하나로서 단청색상대비의 변화와 조화를 유발하는 감초 역할의 색상이다. 금을 포함하여 모든 색상의 안료를 사용, 채화하는 단청을 오채금장五彩金裝이라 하여 최고의 등급으로 여겼다. 따라서 청색은 단청채화의 극채색의 조화를 연출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색깔이다.

조선시대에 단청에 사용된 청색 안료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천연광물은 구리산화물의 일종인 남동석Azurite이다. 주성분은 산화구리의 감청색 결정으로 다른 구리광석에 혼합되어 분포되어 있다. 남동석을 가루로 만든 것이 곧 석청이다. 북송시대에 이명중이 편찬한 『영조법식』과 조선 후기 이덕무李德懋가 편집한 『청장관전서』에는 석청의 제조법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영건단청에 주로 사용된 청색 안료는 청화·삼청·이청·대청·심중청·양청 등이다. 각 안료별 특성은 다음과 같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큰 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① 청화靑花

청화청화는 조선시대 단청에 삼청과 더불어 가장 많이 사용된 청색 안료이다.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당청화唐靑華’라고도 불렀다. 청화는 단청뿐만 아니라 악기와 각종 기물의 가칠에도 주요 안료로서 사용되었음이 『가례도감의궤 영조정순왕후』,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 등에 기록되었다.
『영조법식』의 단청안료 가운데 “생청生靑을 세분하고 수비하여 가라앉은 가장 위의 것을 청화靑花, 위로부터 두 번째 것을 삼청三靑, 세 번째 것을 이청二靑, 맨 밑의 것을 대청大靑”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청화는 가장 밝은 명도의 청색임을 알 수 있다. 1667년에 세조와 원종의 어진을 봉안하였던 남별전南別殿의 중건 시에는 네 가지 안료 모두가 단청에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청화의 원광석에 대한 국내 산출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함경남도 단천에서 청화석靑花石의 산출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사료가 전한다. 『중종실록』 중종15년(1520년)의 기사가운데 공조 정랑 이확梨確이 단천端川의 은銀과 청화석靑花石을 캐서 바치니, 전교하기를, “은 열 덩어리와 청화석 20두를 궁궐로 들여오라. 내가 품질을 보겠다. 그 나머지는 아울러 상의원에 보관하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비록 안료로서 그 품질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청화의 원광석이 국내에서도 산출되었다는 점에 주목된다. 함경남도 단천지역은 조선시대 금과 은의 주요 산지였다. 현재에도 단천은 석탄을 제외한 다양한 광물자원이 집중적으로 매장된 북한의 광업 중심지이다.
조선 후기 화성 축조 시 건축단청에 소요된 청화는 총 3근11냥5전이었다. 값은 근당 1냥5푼으로 삼청보다는 싸지만 비교적 비싼 안료였다.

② 삼청三靑

삼청삼청은 조선시대 건축채화에 사용된 주요 안료 중 하나이다. 단청뿐만 아니라 궁중의 각종 의궤도 및 일반 그림과 악기 등의 채화에 사용된 안료이다. 단청에서는 청색 안료 중에서 청화와 함께 가장 많이 사용되었음이 각종 영건도감의궤에서 확인된다.
삼청의 재료는 남동석Azurite이다. 천연 구리광의 일종인 남동석을 갈아서 미세한 가루로 만들고 수비하여 조제했다. 송나라 『영조법식』에는 생청生靑을 미세하게 갈고 수비법으로 청화靑花·삼청三靑·이청二靑·대청大靑 등 네 가지 명도의 청색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선 후기 이덕무李德懋가 편집한 『청장관전서』에도 삼청의 조제법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석청의 조제는 사기그릇에 담고 맑은 물을 조금 부어 휘저은 다음 채취한다. 맨 위 가루는 ‘유자油子’란 것으로 의복에 들이는 물감으로 쓰이고, 중간의 것은 가장 좋은 석청으로 청록색 산수를 그리는 물감으로 쓰고, 맨 밑의 것은 협엽夾葉을 상감象嵌하거나 견첩絹帖(명주화첩)의 후면에 바르는 데 쓰는데, 이것을 두청頭靑·이청二靑·삼청三靑이라 한다.”
조선시대 삼청은 대부분이 중국에서 들여왔다. 정기적으로 명나라에 파견한 삼절사를 통하여 다른 안료들과 함께 주기적으로 무역해온 내용이 문헌사료에서 확인된다. 이와 더불어 삼청의 국내생산을 확인할 수 있는 기사도 전한다. 『세종실록』 세종15년(1433년) 기사에 “강원도 회양부에서 생산되는 토삼청土三靑을 상시 공납으로 할 것을 정했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세조10년(1464) 기사에 “경상도 관찰사가 울산군에서 나는 심중청深重靑·토청土靑·삼청三靑을 채취하여 바쳤다”라는 기록도 있다. 『신동국여지승람』 제50권 함경도 명천현 토산 편에도 “토삼청土三靑이 영평산永平山에서 산출된다”고 기록되었다. 이상의 내용과 같이 조선시대에 강원도 회양부, 경상도 울산군, 함경도 명천현 등지에서 삼청의 재료인 토삼청이 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성축성 시 건축단청에 소요된 삼청은 1근2냥5전으로 다른 안료의 소요랑에 비해 매우 소량이었다. 그러나 값은 근당 16냥으로 안료 가운데 가장 비싼 안료였다.

③ 이청二靑

이청이청은 삼청보다 한 단계 어두운 명도의 청색 안료로서 천이청天二靑이라고도 한다. 이청은 삼청과 더불어 조선시대 전기부터 말기까지 건축단청과 각종 그림에 지속적으로 사용된 안료이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이청의 재료는 천연 산화구리광석인 남동석이며, 제조방법은 삼청과 동일하다. 다만 이청은 삼청보다 미세하게 굵은 입자이기 때문에 수비 시에 삼청의 밑에 가라앉는다. 주지된 바와 같이 『영조법식』과 『청장관전서』에 이청의 제조법이 기록되고 있다.
이청 역시 다른 안료와 함께 중국에서 무역해온 기록이 조선 전기 『왕조실록』의 여러 기사에서 확인된다. 이와 더불어 국내에서도 이청의 광석을 캐냈다는 문헌사료를 찾을 수 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10년(1504년) 5월 16일 기사에 “천이청석天二靑石을 산출하는 고을로 하여금 3백 덩이를 캐어 바치게 하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같은 해 7월19일 기사에는 “충청도 감사 안침安琛(조선 전기의 문신)이 캐어 보낸 천이청天二靑 3백 괴塊를 실은 배가 두모포豆毛浦에 닿았으니, 한성부의 수레로 날라 들이라”는 기사가 전한다. 두 기사의 내용을 종합하면 천이청석 3백 덩이를 충청도 광산에서 캐어 배로 수송하여 한성까지 오는데 약 2개월이 걸린 셈이다.
예로부터 충청도는 경상도와 더불어 우리나라 동광銅鑛의 대표적인 산지로 알려지고 있다.
화성 축성 시에 건축단청에 소요된 이청은 1근6냥이며, 근당 15냥이었다. 삼청과 더불어 최고가에 해당되는 가격임을 알 수 있다.

④ 대청大靑

대청대청은 산화구리광석의 일종인 남동석Azurite을 갈아서 수비하여 제조하는 저명도의 청색 안료로서 천대청天大靑이라고도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영조법식』에 생청生靑을 세분하여 수비법으로 네 가지 명도의 청색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그 가운데 입자가 굵어 가장 밑에 가라앉은 것을 채취한 것이 곧 대청이다. 대청은 주로 궁중화의 안료로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건축단청에 사용된 사례도 『남별전중건청의궤』(1667년), 『진전중수도감의궤』(1748년), 『경복궁창덕궁증건도감의궤』(1900년) 등 세 건이 확인된다.
다른 안료와 마찬가지로 대청도 중국에 연례로 파견되었던 삼절사를 통하여 수입된 기록이 여러 사료에 기록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천대청의 국내 산출과 관련된 다음의 기사가 주목된다. 『연산군일기』 연산군10년(1504년) 3월 4일, 기사에 “사노 이배근李培根과 양민 이효산李孝山 등이 천대청天大靑 1봉을 바쳤는데, 물은즉 단양군 산중 돌 사이에서 얻었다”하였다. 전교하기를, “상의원 관원을 보내어, 화원을 데리고 가서 조사해 아뢰도록 하라”는 기사이다.
주지된 바와 같이 조선시대에 단청에 사용된 주요 안료들은 국내에서 산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중국 및 일본에서 비싼 가격에 무역해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각도에 명을 내려 각종 안료의 천연광물을 찾고 산출을 독려했다. 비록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내용이지만 위의 기사는 대청석의 국내 산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라 하겠다.

⑤ 심중청深重靑

심중청은 궁궐의 단청과 각종 도화에 사용된 진한 색상의 청색 안료이다. 심중청은 사료에서 단청보다는 주로 궁중의 채색화에 사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1676년(숙종3년)에 조선 왕실의 어진御眞을 봉안했던 남별전의 대대적인 중건 시에 사용된 안료가운데 심중청을 확인할 수 있다.
심중청의 천연광석 및 성분에 대해서는 명확한 자료가 없지만 다음의 기사에서 추정이 가능하다. 『세종실록』 세종29년(1447년)의 기사가운데 경상도 감사에게 유지를 내리기를, “듣건대, 영해부寧海府에서 산출되는 동석銅石 속에 심중청이 간간이 있다 하므로, 지금 부사정 이창문李昌門을 보내어 채취하게 하니, 그 나머지 군현의 동銅이 생산되는 땅에도 또한 모두 이를 시험해 볼 것이다” 하였다. 이창문이 영해 시라동時羅洞에 이르러 굴을 파서 심중청 4돈 6푼과 삼청 8푼을, 진보현眞寶縣 유영곡柳永谷에서 6푼을 얻고, 청송군 선구지리先仇知里에서 1돈을 얻었다.
위의 기사 중 동석銅石은 곧 구리산화물의 일종인 남동석Azurite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심중청과 삼청을 얻었다는 것은 곧 다양하게 산화된 남동광을 발견했다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심중청의 원료는 천연광물인 남동석임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조선 초기 심중청을 일본에서 들여온 사료가 전한다. 『세종실록』 세종11년(1429년) 기사 가운데 일본에서 심중청의 원석을 들여와서 사용했으며, 화원을 일본에 보내 제조법을 조사하게 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또한 세종11년(1429년) 다른 내용 중에 “최원崔源이 일찍이 심중청深重靑을 만드는 방법을 전습傳習하기 위하여 일본日本에 가서 죽었으니……”라는 기사에서 당시 청색 안료로서 심중청의 소요가 많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심중청의 국내 산지에 관한 다양한 문헌사료가 확인된다. 『세종실록』 세종13년(1431년) 기사, “황해도 수안遂安에서 심중청을 채취했다” 『세종실록』 세종29년(1447년) 기사, “도내(전라도)의 용담龍潭 관할 안에 있는 동향銅鄕에서 산출하는 심중청석深重靑石·수은석水銀石을 폐단 없이 채취하여 바치고, 또 산출의 많고 적은 것과 채취의 어렵고 쉬운 것을 갖춰 아뢰라” 『세조실록』 세조10년(1464년) 기사, “경상도 관찰사가 울산군에서 나는 심중청深重靑·토청土靑·삼청三靑을 채취하여 바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울산군…심중청이 고을 성 북쪽 문 밖에서 난다” 이상의 내용은 심중청의 다양한 국내 산출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심중청은 짙푸른 청색의 안료로서 도화에 긴요하게 사용되는 안료이다. 그러나 국내 산출이 미미하고,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무역해 왔기 때문에 매우 귀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심중청의 소중함을 파악할 수 문헌사료가 전한다. 『세종실록』 세종12년(1430년) 기사에 공조에서 아뢰기를, “수은과 심중청 등의 물건은 지방에서 산출되는 것이 상당히 많은데, 각 지방의 아전과 백성이 그 폐단을 받기가 싫어서 서로 숨기고 있습니다. 청하건대, 감사로 하여금 수령을 뽑아 보내어 자세히 탐문하여 만일 진짜 수은과 심중청을 발견하여 보고하는 자에 대하여는, 승려나 양민에게는 계급에 따라서 관직으로 상을 내리시고, 향리와 역자驛子는 역役을 면제하여 주며, 천인에게는 돈으로 상을 내리게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상의 내용에서 단시 심중청이 매우 귀한 안료였음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⑥ 양청洋靑

양청양청은 조선 말기에 국내에 유입된 짙푸른 청색 안료이다. 화학합성안료인 양청이 조선 말기에 국내로 유입된 내용을 다음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종실록』 고종11년(1874년) 기사, “요즘 ‘양청洋靑’과 ‘양홍洋紅’ 같은 물감은 서양 물품에 관계되고 색깔도 몹시 부정하니 엄하게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 또한 1890년에 간행된 『신정왕후국장도감의궤』에 양록洋碌과 함께 양청洋靑의 기록이 확인된다. 이와 같이 양청·양록·양홍 등은 19세기 후반에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의 합성안료들이다.
화학합성으로 제조된 양청은 천연 안료에 비해 빛깔이 선명하고 착색력과 은폐력이 좋다. 따라서 양청은 유입 직후부터 단청뿐만이 아니라 궁중화, 불화 등의 채색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양청은 짙푸른 빛깔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부드러운 천연색상에 익숙해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을 가져왔다. 상기의 기사 중에 “색깔이 몹시 부정하다”는 말은 곧 색깔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낸 임금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파악된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사이에 제작된 불화에 사용된 대부분의 진한 청색은 양청을 사용한 것이다. 색감이 너무 짙푸르고 강렬하기 때문에 다른 색깔들과 조화가 되지 않고 시각적으로 강한 거부감이 느껴진다. 이러한 특성은 양청을 사용한 구한말 불화작품의 큰 특징으로 각인되고 있다.

 

글·사진 : 곽동해(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