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품은 빛깔, 조선시대의 전통안료② 조선궁궐 단청을 물들이다, 적색계열 안료

적철석-적갈색의 원광석
적색계열 안료

조선궁궐 단청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색깔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붉은색이다. 우리나라 단청에서 상록하단上綠下丹의 조화로운 배색은 안정된 건축의장의 핵심이다. 궁궐건축의 기둥과 문에는 강건함의 상징인 붉은 흙(주토)이 칠해졌으며, 정전의 용상과 연輦과 같은 어용기물에는 강력한 왕권의 위엄을 표방하는 빨강색(주홍)이 칠해졌다. 붉은 색은 조선궁궐의 단청색감을 대표하는 상징색깔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전통안료 중 적색계열 안료에 대해

조선시대 영건단청에 주로 사용되었던 단청안료 가운데 적색계열은 반주홍(번주홍)·당주홍·왜주홍·황단·주토·편연지·석간주·장단 등이다. 주홍은 조선시대 궁궐건축채화에 사용되었던 가장 중요한 단청안료이다.
조선시대에 단청안료로서 사용되어 영건도감의궤에 기록된 주홍은 반주홍(번주홍)·당주홍·왜주홍 등이 확인된다. 건축단청뿐만 아니라 정전正殿의 용상, 임금이 타는 연輦, 종묘의 신탁, 가례도감의 각종 소목 등 궁궐의 중요한 어용기물에는 반드시 주홍색을 칠했다. 그러나 주홍의 원료인 진사Cinnabar의 국내 산출이 미미했기 때문에 외국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주홍안료는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중국과 일본은 물론 유구국琉球國(현재의 오키나와) 등지로부터 지속적으로 유입되어 단청에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각 안료별로 그 특성에 대하여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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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반주홍磻朱紅, 번주홍燔朱紅

조선시대 각종 의궤에 기록된 국내산 주홍색 안료는 반주홍磻朱紅과 번주홍燔朱紅이 대표적이다. 1647년의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로부터 1926년의 순종효황제어장주감純宗孝皇帝御葬主監編에 이르기까지 약 1천6백여 건에 달하는 반주홍의 명칭이 확인된다. 번주홍燔朱紅도 각종 의궤에 약 3백여 건의 많은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지금까지 조사된 단청관련 사료의 동일문건에서 반주홍과 번주홍이 동시에 기록된 사례는 단 한건도 없다. 따라서 양자는 동일한 안료의 이칭으로 병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궁궐건축의 각종 영건도감의궤에서는 번주홍보다 반주홍이 훨씬 많은 표기를 보여준다.
반주홍은 건축단청뿐만 아니라 탁자·함·악기 등의 칠에도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일성록』 정조즉위년 기사에는 보책寶冊을 보관할 책장을 만드는데, 때에 따라서 당주홍칠과 번주홍칠로 달리 기록되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이로서 번주홍이 당주홍과 유사한 색감의 안료였음을 알 수 있다.
반주홍의 국내산지를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은 각종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죽창한화竹窓閑話』(찬성贊成 이덕형李德泂 저)에 기록된 번주홍의 산지는 황해도 평산으로 확인된다. 또한 『세종실록』 세종29년(1447) 기사에는 전라도 용담龍潭에서 주홍의 원료인 수은석水銀石을 채취한 내용이 전해진다. 이 역시 반주홍의 원광석으로 추정되는 기사이다.
『연행기사燕行記事』 「문견잡기聞見雜記」의 기사 가운데 “자금성과 능묘의 곡장曲墻은 모두 붉은 흙으로 발랐는데, 저들은 이를 홍토紅土라고 한다. 그 품질이 우리나라 번주홍燔朱紅보다 나으나 곳에 따라 모두 좋고 나쁜 것이 있어 또한 각각 같지 않다고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하여 번주홍의 색감이 중국산 주홍보다 다소 떨어지는 품질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화성성역의 단청에 사용된 당주홍은 근당 5냥의 고가였음에 반해 번주홍은 근당 1전2푼에 불과했다. 값으로 비교하자면 번주홍이 당주홍보다 약 40분의 1에 지나지 않은 가격이다. 번주홍의 국내 산출량이 결코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수입되는 당주홍보다 훨씬 저렴했음을 알 수 있다.

② 당주홍唐朱紅

‘당주홍唐朱紅’은 조선시대에 중국에서 수입된 주홍안료이다. 당주홍은 조선시대 각종 도감의궤에 2천5백건이 넘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붉은색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주홍의 원료는 황화수은(HgS)을 주성분으로 하는 천연광물 진사辰砂/Cinnabar이며, 주사朱砂·경면주사鏡面朱砂·단사丹砂·광명사光明砂라고도 부른다. 중국의 쓰촨성四川省과 후난성湖南省 등이 주산지이다. 진사의 조흔색은 심홍색이며, 일반적으로 진사 중에서 좋은 것을 광명사라고 한다.
명나라의 종합기술서 『천공개물』에는 당주홍의 원료인 주사朱砂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사·수은·은주銀朱는 원래 같은 물질이다. 명칭이 다른 까닭은 그 질의 정교함과 조잡함, 오래된 것인가 새것인가의 차이 때문이다…상 등급에 못 미치는 주사는 약으로 쓸 수 없고, 갈아서 그림물감의 재료로 사용한다.” 한방에서 진사는 경련이나 발작을 진정시키는데 특효약으로 쓰였다. 수은의 함량이 높은 것은 약재로 사용되었고, 그 이외의 것이 주홍의 재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상기한 바와 같이 당주홍은 조선시대 건축단청에 쓰인 적색안료 가운데 국내산 반주홍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된 안료이다. 당주홍에 관련한 가장 이른 사료는 1502년 『연산군일기』연산군 8년의 기록이다. 이 후 1926년의 『순종효황제어장주감純宗孝皇帝御葬主監』까지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되며, 당주홍의 색감이 국내산 주홍과 비교하여 다소 양호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주홍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파견된 삼절사三節使를 통해 지속적으로 수입되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수입된 당주홍은 값이 매우 비쌌다.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1617년) 기사에는 중국에서 들여오는 당주홍 안료의 값이 너무 비싸니 궁궐 건축에 있어 일부 중요한 부분만 당주홍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우리나라 주홍을 사용하는 것을 논의하는 내용이 전해진다.
『영조실록』 영조25년(1749년) 기사, 옹주翁主의 혼인에 자초紫草로 물들인 화촉華燭을 쓰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당주홍唐朱紅으로 물들인 것을 사용하여 공가貢價가 몇 배나 되었으므로, 임금이 이는 외면치레라고 하여 고쳐서 규식을 만들었다.
이상의 두 기사는 당주홍이 국내산 주홍보다 양호한 색감이었으며, 비싼 가격이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③ 왜주홍倭朱紅

일본에서 유입된 왜주홍倭朱紅은 중국산 당주홍 및 국내산 반주홍과 더불어 조선시대에 많이 사용된 붉은색 안료이다. 반주홍과 당주홍이 건축단청에 주로 사용된 반면 왜주홍은 용상, 연輦과 같은 국왕의 어용기물과 삼전三殿의 기용器用 및 국장國葬의 각종 소목기물의 가칠에 주로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1824년 『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의 단청소입丹靑所入기록과 같이 왜주홍이 단청에도 사용되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왜주홍의 성분은 당주홍과 마찬가지로 황화수은 성분의 수은석으로 확인된다. 세종 11년(1429) 기사 가운데 “이번에 가져 온 일본의 심중청석深重靑石과 수은석을 각도로 나누어 보내어 그 모양의 돌을 널리 구하라”는 내용은 왜주홍의 재료가 수은석, 즉 천연진사임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
왜주홍의 국내 초입 시기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조선 초기부터 왜주홍의 무역이 활발히 성사되었음이 문헌사료에서 확인된다. 『세종실록』 세종3년(1421년) 10월 18일 기사에 “대마도 도만호 좌위문대랑左衛門大郞이 사람을 보내어 유황硫黃 1천 근, 단목丹木 2백 근, 주홍朱紅 10근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왜주홍의 문헌사료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다. 이후 『현종실록』에 따르면 현종 즉위년(1659년)까지 왜주홍의 무역과 관련기사가 33건에 이를 정도로 지속적인 유입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왜주홍의 무역은 주로 삼포를 통해서 국내로 들어온 왜인과의 교역을 통하여 성사되었다. 특히 성종연간에 대마주(대마도)에서 국내로 들어온 왜인과의 무역에서 총26건의 주홍안료 반입기록이 확인된다. 일본으로부터 주로 왜주홍과 황금 등을 수입하는 대신 조선은 면포와 명주 등을 수출했다.
한편 『선조실록』 선조35년(1602년)의 기사의 “…구하기 어려운 왜주홍倭朱紅 같은 것도 모두 시중의 백성들에게 책임지우고…”라는 내용은 당시 왜주홍이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다.

④ 주토朱土

붉은 색 흙에서 산출되는 산화철을 주성분으로 하는 전통안료이다. 주토·석간주·벵갈라Bengala·대자代赭 등은 산화철을 주원료로 하는 대표적인 무기안료이다. 주토는 도감의궤에 1천5백여 건이나 기록될 만큼 조선시대에 많이 사용된 단청안료였다. 『성종실록』 성종5년(1474년) 기사의 “종묘의 기둥에 주토朱土를 바른 것이 비가 오면 곧 뭉개져 흐려지고…”라는 내용에서 주토는 주로 건축의 기둥에 칠했음을 알 수 있다.
주토의 국내산지는 다양한 지역이 확인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주토의 산지는 황해도 황주목, 경기도 양주도호부 적성현, 충청도 충주목과 청주목,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청송군, 강원도 회양도호부 이천현과 평강현, 강원도 원주목 횡성현, 경상도 진주목 하동현 등이다. 그 중에서 황주산 주토가 주로 사용되었음이 사료를 통하여 확인된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울릉도에 큰 대밭[竹田] 세 군데와 주토朱土가 나는 굴窟 한 군데가 있는데, 주토는 매우 고와서 주사朱砂와 같다”는 기사가 있다. 이와 더불어 울릉도에서 석간주가 생산되었다는 『국조보감』의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주토와 석간주를 동일한 안료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도 석간주가 대자代赭·자토赭土·주토朱土·적토赤土·토주土朱 등으로 불린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단청에 사용된 주토와 석간주를 동일한 안료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영건도감의 모든 기사에서는 주토의 수량을 석石·두斗·승升으로, 석간주의 수량은 근斤 ·양兩으로 다르게 표기했다. 특히 『문희묘영건청등록文禧廟營建廳謄錄』의 단청에 사용된 안료에는 주토와 석간주가 동시에 기록되고 있다. 『홍릉천봉주감의궤洪陵遷奉主監儀軌』 「각양의물各樣儀物」편의 전배前排의 취색取色에도 주토와 석간주의 동시기사가 확인된다. 이것은 양자가 다른 것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사이다.
주토와 석간주의 성분은 산화철이 주성분으로 유사하다. 그러나 주토의 원료는 흙인 반면 석간주의 원료는 글자 그대로 “돌 사이에 끼인 붉은 색”, 즉 주토보다 산화철이 많이 함유된 돌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⑤ 석간주石澗朱,石間朱,石朱

석간주는 산화철을 많이 포함한 철 산화물이 많이 함유된 산화제이철酸化第二鐵 성분의 붉은 안료로서 조선시대 단청과 도자기의 채화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사료에서 ‘간’자의 한자표기가 ‘澗’·‘間’·‘’ 등으로 표기되었는데, 여기에서 ‘澗’과 ‘磵’은 동일한자임으로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석간주의 가장 이른 사료는 『승정원일기』 인조12년(1634)의 “석간주石間朱로 기화起畫하여 화룡준을 구워 만들어 당차唐差를 접견할 때 모두 이것으로 썼습니다”라는 기사이다. 또한 『영조실록』 영조30년(1754) 기사에 “자기磁器의 그림에는 예전에 석간주를 썼는데, 이제 들으니 회청回靑으로 그린다고 한다. 이것도 사치한 풍습이니, 이 뒤로 용준龍樽을 그리는 외에는 일체 엄금하도록 하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하여 17~18세기에 석간주는 철화자기의 그림안료로서 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간주가 건축단청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 말 이후로 확인된다. 1801년에 간행된 『화성성역의궤』를 시작으로 19~20세기의 『궁궐영건도감』과 『산릉도감』에 대부분의 단청안료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석간주 대신 주로 황주산 주토가 사용되었음은 주지된 내용이다.
석간주의 국내산지는 울릉도이다. 『숙종실록』 숙종28년(1702년)의 기사에 “삼척 영장 이준명과 왜역倭譯 최재홍이 울릉도에서 돌아와 그곳의 도형과 자단향·청죽靑竹·석간주石間朱·어피魚皮 등을 바쳤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울릉도에 큰 대밭[竹田] 세 군데와 주토朱土가 나는 굴窟 한 군데가 있는데, 주토는 매우 고와서 주사朱砂와 같다”라는 내용이 전한다. 즉 석간주를 지속적으로 캐낸 채굴광산의 존재와 울릉도산 석간주의 우수한 색감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⑥ 황단黃丹

황단은 납, 유황, 초석硝石, 식초 등을 끓여 가공한 주황색 안료이다. 국내산은 ‘상황단常黃丹’, 중국산은 ‘당황단唐黃丹’라고 불렀다. 원래 황단은 한방의 약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건축단청과 가칠의 안료로서도 사용되었음이 각종 사료에서 확인된다. 『경국대전』에는 경공장京工匠으로 제용감濟用監에 황단장黃丹庄 2인을 두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세종실록』 세종6년 기사에 황단제조의 원료인 납의 산출지가 기록되고 있다. “황단黃丹에 수용되는 연철鉛鐵 2백 50근을 연鉛 산출지인 황해도 서흥 지방관에게 매년 채취하여 정식으로 상납하게 하고”라는 기사이다. 이를 통하여 황해도 서흥 지역에서 납이 산출되었고, 안료와 약재로서 황단의 수요가 많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황단의 소요량은 60근5전이며, 근당 8전으로 비교적 싼 값이었다. 국내산 연鉛의 산출량과 황단을 제조하는 장인 등 황단산출의 여건이 원활했음을 판단할 수 있는 기록이다.

⑦ 편연지片臙脂

연지는 약 3천 년 전 중국 은나라 때부터 화장품으로 사용된 안료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구려 수산리고분의 벽화에 그려진 여인의 볼과 입술에 연지화장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문헌사적으로 연지는 편연지 외에 분말연지와 솜에 연지물감을 적셔 건조시킨 면연지緜臙脂 등이 파악된다. 『세종실록』 세종11년(1429년) 기사에 중국의 사신이 중궁전에 면연지를 바쳤다는 내용이 있다. 화장용 연지가 중국에서 유입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그러한 연지를 채화용 물감으로 납작하게 만든 것이 곧 편연지이다.
편연지는 1748년에 편찬된 『진전중수도감의궤』의 단청안료기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그 후 20세기 초반까지 모든 『영건도감』의 단청재료에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따라서 편연지가 단청에 사용된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이덕무가 편찬한 『청장관전서』에서 연지의 사용방법이 확인된다. “연지를 물에 넣어 잠깐 동안 담갔다가 두 개의 붓대로 마치 염색할 때 베를 쥐어짜듯 진한 즙을 짜내어서 푹 말려 둔 것인데, 미지근한 물에 개어서 사용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같은 책의 내용 가운데 “육홍색肉紅色은 분粉을 주료主料로 연지를 넣어 조제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것은 연지가 단청색채가운데 육색肉色을 조채하는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연지의 재료는 연지충臙脂蟲에서 추출된 붉은 색소가 주원료이다. 동남아시아에 분포하는 연지벌레(라카이가라무시/학명 Coccus lacca)가 분비하는 적자색 물질은 수지성분이 함유된 것으로 ‘자광紫鑛’이라고도 한다. 바로 이것이 조선시대에 사용된 편연지의 주원료로 추정된다. 중남미에서는 코치닐Cochineal 선인장을 먹고 사는 암컷 연지벌레에서 밝고 붉은 천연유기염료를 추출해서 사용했다.
이밖에도 홍화를 이용하여 만든 잇꽃연지와 주사를 이용하여 만든 주사연지가 있다. 국내 자연환경에는 연지충이 살지 않는 반면 홍화는 조선시대에 국내의 다양한 산지가 확인된다. 따라서 홍화염료를 농축하여 만든 편연지를 채화에 사용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⑧ 장단障丹, 漳丹

장단은 조선시대 말기에 사용되기 시작한 주황색 안료이다. 산화납을 주성분으로 하는 무기화합 안료로서 납이 주성분이기 때문에 ‘연단鉛丹’ 또는 ‘광명단光明丹’이라고도 한다. 장단은 납을 가공하여 만들기 때문에 황단과 성분은 유사하지만 빛깔은 좀 더 붉은 안료로 사료된다. 장단은 은폐력이 강하고 방청에 뛰어난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로 녹막이 도료로서 사용되었다. 특히 그 특성으로 ‘가리다’는 뜻의 ‘障丹’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장단의 제조법과 산지 및 유입시기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1846년에 간행된 『문조수릉산릉도감의궤』에 단청안료로 사용된 장단의 최초기록이 확인된다. 19세기 말 이후에는 양록·양청과 더불어 각종 그림과 단청의 안료로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조선 말기부터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한 인공합성안료의 일종으로 사료된다.

 

글 : 곽동해(한서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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