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주의 한국문양사 ⑲ 백제인의 무위자연관無爲自然觀 담긴 백제문양전

도9 연꽃 대좌 도깨비무늬 전돌, 백제시대



부여 규암면 외리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의 문양전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아름다운 미감을 자랑한다. 문양전의 표면에는 각각 연꽃무늬, 소용돌이 구름무늬 등 8종의 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문양 요소라든가 기법 등은 비록 중국 남조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수준은 고구려와 신라, 가야 등 다른 나라를 훨씬 앞지르면서도 온화하고 차별화된 미감을 보여 준다.

글 임영주 (한-명품 미술관 관장)


백제의 부전(敷塼, 궁전이나 사찰 등의 바닥에 깔아 장식한 전돌)은 제법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부여 규암면 외리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일련의 문양전紋樣塼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규암면 외리는 부여읍의 서쪽인 금강 강변에 위치한 곳이다. 1937년 3월 농부가 보리밭을 갈다가 근처에서 여러 가지 기왓장과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있는 방형方形의 문양전돌 15매를 발견하여 신고함으로써 유적이 확인되었다. 당시 문양전의 배열 상태는 다소 교란된 상태여서 그 이전에 일차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문양전은 정방형에 가까우며 일변一邊이 29㎝ 내외, 두께가 4㎝로서 네 모서리에는 각기 홈이 파여서 각 문양전을 연결하여 깔게 되어 있다. 문양전은 완전품 42매를 포함해 파편까지 전부 150여점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지하에 남북으로 일렬로 묻혀 있었다고 한다. 본래 이러한 벽돌은 벽면을 장식했던 것과 바닥에 깔았던 것,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 문양전은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양전의 표면에는 각각 연꽃무늬, 소용돌이 구름무늬, 봉황무늬, 반룡문(용이 물속에 서려 있는 듯한 무늬), 도깨비무늬, 산경무늬 등 8종의 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문양 요소라든가 기법 등은 비록 중국 남조南朝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도1-도4), 그 수준은 고구려와 신라, 가야 등 다른 나라를 훨씬 앞지르면서도 온화하고 차별화된 미감을 보여 준다.
이러한 문양전은 동진東晋 영화4년(348) 명銘의 남경시 중앙문 외 신령 전와창 1호묘 1의 기와, 전돌과도 매우 관련이 깊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비슷한 일본 나라奈良 미나미 호케지南法華寺에 소장된 문양전과 오카테라岡寺 출토 봉황무늬전돌(백봉시대, 39㎝, 두께 8.0㎝)의 경우 백제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부근의 유적에서 발견된 전을 통하여 통일 신라 시대에는 각종 정교하고 화려한 보상화무늬 또는 연화무늬, 당초무늬 등이 새겨진 문양전이 많이 제작되고 사용됐음을 알 수 있고, 이 또한 백제 미술의 명맥을 이어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 남조 미술이 백제와 일본에까지 전래되어 가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문양전 가운데 모양이 온전히 남아있는 여덟 종류의 문양 전돌은 보물 제343호로 지정돼 있으며 표현방식과 상호간의 연관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왼쪽부터) 도1 한나라시대(1세기경) 구름무늬 전돌 / 도2 한나라시대(1세기경) 봉황무늬 전돌

① 연화무늬 전돌 [蓮花紋塼] (도5)

둘레에 톱니무늬[鋸齒紋] 형식의 작은 꽃술에 둘러싸인 커다란 자방子方을 중심으로 10개의 연화판이 돌려졌고, 다시 그 화판 사이사이에 간엽間葉이 있다. 태양을 나타낸 것이다. 화판 끝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데, 판단의 끝이 위로 말려 안쪽으로 향하였으며, 화판 속에는 인동문으로 안쪽으로 장식된 또 1개의 화판이 부출浮出되어 있다. 자방의 안에는 중앙에 융기된 1개의 커다란 연자蓮子를 중심으로 둘레에 6개의 연자가 둘러지고, 다시 그 둘레에 10개의 연자가 둘러져서 모두 17개 연자가 배치되고 있다. 이러한 커다란 연화문의 주연에는 2줄의 융기선隆起線이 둘러진 안에 점무늬(주점문珠點紋)가 일렬로 나열되어 연속된 구슬무늬 띠(연주문대蓮珠紋帶)가 둘러졌다. 전의 네 모퉁이에는 4엽 화문을 4등분한 화문을 배치하였는데, 문양전돌을 사방으로 연속시켰을 때 사방 연속무늬의 효과를 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연화문 형식은 통일신라시대의 수막새에 많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경주 부근의 신라시대 절터에서 발견된 무늬전돌에서 더욱 발전된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왼쪽) 도3 당나라시대(7-8세기) 인동당초무늬 전돌, 중국 대명궁 궁궐지 출토
(오른쪽) 도4 당나라시대(7-8세기) 연꽃무늬 전돌, 중국 협서성 궁궐지 출토

② 소용돌이 구름무늬 전돌 [渦雲紋塼] (도6)

전의 중앙부에는 굵은 융기선으로 돌려진 원상圓狀 안에 8판 간엽의 작은 연화문을 배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바깥 구획이 구성되었다. 외구에는 8개의 소용돌이 무늬(와운문渦雲紋)를 빙빙 도는 모양으로 연속시켜 둥글게 배치하였고, 다시 그 주연에는 2줄의 융기선이 둘러진 연주문대가 둘러졌다. 네 모퉁이에는 역시 4엽 화문을 4등분한 화문을 배치했다. 이 무늬전돌은 좌우상하가 대칭 형식을 보이고 있으나 실상은 대칭이 아니며, 그 속에서 무한한 변화를 느끼게 한다. 이의 앞선 형태로는 중국 남경시南京市 성외城外에서 출토된 남조시대 인동무늬 네모전돌(인동문방전忍冬紋方塼, 일본 소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왼쪽 위부터 차례대로) 도5 연화무늬 전돌, 백제시대 / 도6 소용돌이구름무늬 전돌, 백제시대
도7 봉황무늬 전돌, 백제시대 / 도8 용무늬 전돌, 백제시대

③ 봉황무늬 전돌 [鳳凰紋塼] (도7)

연주문으로 이뤄진 원곽 내에 율동적이고 곡선미曲線美가 있는 봉황 1마리가 가득 차게 배치되어 있다. 봉황의 머리 형상은 닭의 모양을 하고 측면으로 표현되었는데, 부리는 마치 독수리나 매의 부리처럼 날카롭게 구부러져 포효咆哮하는 모습이다. 날개는 중국 한대漢代에 유행한 운기문(雲起紋, 구름 피어오르는 듯한 무늬) 형식인 C자형 곡선으로 소용돌이 구름무늬 전돌에서와 비슷한 표현을 했는데, 오른쪽 날개는 머리 위로 둥글게 치켜 올라가서 원을 그리고, 왼쪽 날개는 밑을 향한다.
꼬리는 머리부터 S자 모양으로 구부러져서 큰 원을 형성함으로써 전체적으로 회전하는 나선 모양의 태극무늬(태극문, 太極紋) 형식이다. 이러한 봉황의 형상은 고구려시대 진파리 고분에서 발견되었다는 금동 투조 베갯모[金銅透彫枕邊]의 봉황무늬와 비교하여 볼 때 좀 더 추상성을 띠고 있다. 몸체에는 비늘이 세세하게 표현되었고 융기선으로 윤곽을 둘러서 강한 인상을 돋우고 있다. 네 모퉁이에 4엽 화문을 배치했다.

④ 용무늬 전돌 [蟠龍紋塼] (도8)

이 또한 봉황문전과 같은 구성으로서 방형의 표면에 가득 차도록 연주문대의 원곽이 구성되고, 내부에 S자 모양으로 큰 곡선을 이루며 율동적이고 휘몰아 움직이는 용의 형상을 배치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용은 몸체에 비하여 머리 부분을 훨씬 과장하여 묘사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데, 눈을 크게 부라리고 입을 크게 벌려 포효하는 형상이다. 꼬리 부분은 크게 원을 그리고 네 다리를 크게 벌리어 도약하는 모습은 그 시대의 다른 유물에서 볼 수 없는 움직임이다. 몸체에는 비늘이 세세하게 표현되었고, 여백에는 역시 구름이 일어나는 모양의 무늬가 새겨졌다. 사지의 겨드랑이 밑에는 익모翼毛가 휘날리고, 발끝에는 날카로운 3개의 발톱이 표현되었으며 머리에서 등에 이르기까지 갈기가 붙어 있다.

⑤ 연꽃 대좌 도깨비무늬 전돌 [蓮華坐 鬼形紋塼 I] (도9)

연꽃 받침대 위에 정면으로 직립하고 있는 도깨비 형상이다. 전신의 크기에 비하여 머리 부분이 크게 묘사되었는데, 눈은 부릅떠 치켜 올라가고 입을 크게 벌려 아래위의 송곳니가 날카롭게 뻗었으며, 얼굴 양면에는 더부룩하게 수염이 뻗쳤고 양어깨에도 갈기와 같이 털이 뻗쳐있다. 가슴에는 큰 유방乳房에 유두乳頭가 크게 표현되었고, 허리에는 환식環飾이 매달린 허리띠 장식이 둘러졌는데, 가운데에는 허리띠 장식[요패腰佩]의 긴 내림장식[수식垂飾]이 드리워졌다. 앞발에는 근육이 울퉁불퉁하게 융기되고 날카로운 발톱이 달렸다. 뒷다리에도 울퉁불퉁한 근육과 골격을 나타내었다. 날카로운 4개의 발톱으로 버티고 선 형상은 마치 천지를 제압하려는 형세이다.
도깨비 형상이 버티고 서 있는 연꽃 받침대는 꽃잎 끝이 뾰족한 단판연엽單瓣蓮葉이다. 꽃잎 끝이 약간 안쪽으로 쏠린 형식을 보여 주는데, 이러한 연화문은 매우 고식古式의 형식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허리에 둘러진 과대와 요패의 양식인데, 이러한 장신구는 삼국시대 고분 출토품 가운데에서 다수 찾아볼 수 있는 것이어서 이러한 장신구가 지니는 의식에 따른 용도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또한, 하단의 두 모퉁이에는 삼산형三山形 산봉우리가 구름 위에 솟아 있는 형상을 반으로 나누어 배치하여 이와 같은 벽돌이 연결돼 연속무늬로 배열되도록 고안됐다.

(왼쪽부터) 도10 산악 도깨비무늬 전돌, 백제시대 / 도11 경주 식이총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금동신발 부분의 귀형문

⑥ 산악 도깨비무늬 전돌 [怪石鬼形紋塼 Ⅱ] (도10)

앞서 말한 도깨비무늬 전돌의 도깨비 형상이 그대로 배치됐고 연꽃받침대좌 대신 하단에 괴석怪石 모양의 해암海岩이 삐죽삐죽 솟아 있다. 그 아래에는 바다로 생각되는 물결이 일렁인다. 역시 하단의 양 모퉁이에는 삼산형三山形의 봉우리가 반으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여기에서의 문양을 보면 이 도깨비의 형상은 산해山海와 천지天地를 장악하여 위압하고 인간을 수호하는 신(여기에서는 나라를 수호하는 의미로 생각됨. 불교에서는 십이천十二天이라 하여 사방 팔천에 인간을 수호하는 열두 신이 있음)의 하나로서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귀신, 즉 도깨비 사상은 일찍이 중국 고대 사상에서 비롯되어 도교에서 나타나지만 불교 사상에 흡수되면서 역시 방위신方位神의 모습으로 고대 유물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괴수형怪獸形 금구金具에서 이와 매우 유사한 형상을 볼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경북 경주 노동리에서의 신라시대 고분인 식이총飾履塚에서 출토된 청동 장식신발[식이飾履(부장품)]에 장식된 귀신무늬[귀형문鬼形紋]가 있다(도11). 이처럼 전신을 나타낸 도깨비 형상 외에 백제 와당의 도깨비얼굴기와[귀면와鬼面瓦], 신라시대 안압지 출토 귀면와, 고구려 고분 벽화 가운데 건축그림의 두공枓拱에서 간혹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기와 마구리 또는 건축그림에서의 도깨비 얼굴 형상은 중국 석굴 사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도깨비무늬는 매우 오래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 외 이 귀형문전에서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배경에 깔린 산암山岩의 형식인데, 이 또한 전한시대 불로초무늬[영지문靈芝紋]의 비단에 수놓은 금수錦繡와 낙랑고분樂浪古墳 출토 금수산악도禽獸山岳圖, 한대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 등에서 이러한 고대 산경무늬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근접한 것으로는 북위 때의 묘지석에 선각線刻된 괴수상(522년)이 있다.

(왼쪽) 도12 산경무늬 전돌, 백제시대
(오른쪽) 도12-1 도12 부분. 첩첩 산중에 기와집이 있고 그 아래에 절을 향해 오르는 승려가 보인다.

⑦ 산경무늬 전돌 [山景紋塼] (도12)

8종의 무늬전돌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이 전돌은 백제 옛터의 산세山勢를 매우 부드럽고 유연하게 잘 표현했다. 앞에는 강, 혹은 바다가 조용히 흐르고 뾰족뾰족한 바위가 높고 낮게 솟아 있으며 그 뒤로는 삼산모양三山形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가 겹겹이 전개되어 장관을 이룬다. 둥그런 산꼭대기에는 소나무 숲이 무성하여 절경을 이루고 있다. 산 아래 중턱에 기와집 한 채가 있고 그 밑 오른쪽에는 그 집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가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집은 절집[寺刹], 그곳을 향하여 오르는 사람은 그 절의 승려임이 분명하다. 산 위의 좌우에는 뭉게구름이 조용히 흐르는데, 그 정경이 마치 심심산천의 적막한 골짜기의 모습을 대하는 듯하다. 아마도 충청도 부여의 옛 경치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그림에서 다른 어느 민족도, 더욱이 현대인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백제인의 슬기로움을 엿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의 구름무늬라든가 산악 형식도 중국 한대(B.C.2세기~A.D.2세기)에 나타나고 있고, 고구려 고분 벽화 중 감신총龕神塚(5~6세기초), 무용총舞踊塚(5~6세기초), 쌍영총雙楹塚(5~6세기초), 강서대묘江西大墓(6세기말~7세기 전반) 등과 특히 내리1호분內里一號墳(6세기말~7세기 전반)의 현실천정玄室天井 벽화에서도 나타나듯 양식적인 면에서나 조형성으로 보아서 전혀 별개의 제작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이미 한국적인 미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재료에 따른 기법 상 다소 차이는 있지만, 충남 공주군 송산리 백제 무령왕릉 출토 은잔銀盞에 새겨진 산악 그림(6세기초)에서도 이러한 산형이 뚜렷이 나오고 있어서 아마도 백제인의 삼산 사상三山思想 또는 삼신사상三神思想과도 관련되지 않나 생각된다.

(왼쪽부터) 도13 백제시대 봉황 산경무늬 전돌, 백제시대 / 도13-1 도13 부분. 산정에 서있는 봉황문

⑧ 봉황산경무늬전돌 [鳳凰山景紋塼] (도13)

이 역시 산경문의 일종이나 앞서의 것과는 다소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하단에 산수풍경을 부조浮彫하고, 상단에는 중앙의 산봉우리에 우뚝 서 있는 신조神鳥와 그 주위에는 산과 구름, 그리고 보운문寶雲紋으로 구성되었다. 근경의 산들 앞에는 안개구름이 겹겹이 흐르고 산 중턱에는 산과 산 사이로 집이 두어 채 보이는데 이 역시 절이 분명하고, 집 앞에는 당간 지주幢竿支柱가 기단基壇 위에 우뚝 서 있다. 앞산의 뒤편 송림 속에 살짝 가려진 집은 누각樓閣으로 보이는데, 이는 백제 건축을 연구하는 큰 자료가 될 것이다. 산의 정상에는 봉황이 양 날개를 벌려 하늘을 향하고 정면을 향해 우뚝 서 있다. 여기에서의 구름 형상은 낙랑 고지에서 출토된 한대 칠기漆器와 전한시대의 청동세문대락귀부반리문경靑銅細紋大樂貴富蟠紋鏡, 낙랑에서 출토된 비단 등에서 그 앞선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후한後漢 2세기 산동성 무씨사화상석 山東省武氏詞畵像石에서도 이러한 형식의 조운문鳥雲紋이라 부르는 괴이한 구름무늬가 나타난다. 고구려 고분 벽화 중 안악 3호분安岳三號墳 천정 받침에서 당초문 형식의 조운문에서도 많은 연관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삼국이 각기 고유의 특색 있는 미술을 남기면서도 동서 문화 교류를 활발히 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백제의 분묘는 대개 횡혈식橫穴式(땅 구덩이를 파서 무덤을 만드는 방식) 석실 고분과 전축분塼築墳으로서 전이 많이 발달하고 사용되었다. 백제의 기와와 전돌은 양식적으로 보아 대개 한대 계통과 남북조 시대의 계통을 이은 수법으로 구분되는데, 대체 남북조 시대의 인동문과 연화문이 많고 중국 남경 부근에서 출토되는 유품들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남조와의 문물 교류가 활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살펴본 부여 규암리 무늬 전돌은 백제 말기인 7세기 중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는 각종 전돌로 축조하는 기술자인 박사博士가 있어서 그 중에는 일본에 초빙되어 그들의 문화에 공헌한 사실도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 제25대 무령왕대((501~523)를 비롯하여 성왕대(523∼554)에는 오경 박사 유귀柳貴와 의박사醫博士, 역박사易博士, 승려, 그리고 기타 미술 공예에 관한 여러 기술자를 보내어 일본의 상대문명上代文明을 개발하고 지도했다.
백제의 문화는 이러한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국내외에 높이 평가되고 널리 알려지게 됨으로써 신라에서도 황룡사皇龍寺 9층탑을 쌓을 때에는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阿非知를 불러 간 일이 있을 정도였다. 온화하고 선율적인 백제의 미술은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나아가 일본 아스카飛鳥 시대 문화의 기반을 만들어 준, 가히 세계적 수준의 우수한 문화로 평가할 만하다.



임영주 | 한-명품미술관장

홍익대학교에서 목칠학과를 전공하고 동국대학교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문화재관리국 문화재 전문위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한국무형문화예술교류협회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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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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