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주의 한국문양사 ⑱ 벽돌에 그려낸 천계,天界 문양전紋樣塼

도1 공주 무령왕릉 전실분 전경. 벽체의 전축은 길이모쌓기[長手積, 4개의 벽돌을 뉘여 포갠 형태] 기법과 작은모쌓기
[小口積, 1개의 벽돌을 세워 포갠 형태]의 방법을 번갈아 되풀이하여 4평1수四平一竪의 축조방법을 취했다. ⓒ용스튜디오





흙을 빚어 만든 벽돌인 전돌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으며, 각기 특성 있게 제작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건축과 분묘 등의 제도制度가 양식을 달리하였기 때문이다. 옛 전돌은 벽전壁塼, 부전敷塼, 탑전塔塼으로 구분된다. 용도에 따라 조형 양식도 다를 뿐 아니라 의장 문양의 특색도 제각각이다.
글 임영주 (한-명품 미술관 관장)


전塼이란 흙을 빚어서 만든, 이를테면 벽돌을 말하는데 전塼 또는 벽壁이라 하였다. 전돌은 흙을 빚어 무늬를 새겨 가마에 구워져서 건축물의 바닥, 벽체, 천정 등에 붙여 장식한 기와의 일종이다. 전은 점토粘土를 빚어 틀에 넣어서 햇볕에 말린 것과 불에 구워서 만든 도질陶質의 것이 있다.
인류가 흙을 볕에 말려서 만든 벽돌을 사용한 것은 기와가 사용되기 시작한 때보다도 더 오래 전의 일이라 생각된다. 서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이러한 벽돌이 성행하였고,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불에 구운 벽돌이 전축분塼築墳이나 사찰건축, 궁궐 건축 담장이나 벽면 장식, 불교건축에서는 전탑塼塔 등에 쓰였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사용했다고 하는데, 《진서晋書》에는 ‘畵則備賃, 夜燒塼壁 (벽돌은 낮에 제작하여 밤에 굽는다)’는 기록이 있다.


도2 <문양전>, 낙랑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벽전壁塼에 그려진 하늘세계

벽면 전돌은 문자 그대로 벽을 쌓는 데 쓰이는 벽돌이다. 우리나라 지역에서 최초로 벽전이 사용된 것은 낙랑인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믿어진다. 한반도 내에서 낙랑군을 다스리고 있던 한인漢人들이 전돌을 이용하여 무덤을 축조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기의 전실묘塼室墓이다. 한인들이 구축한 전실묘에 나타나는 전에는 밖으로 보이는 측면에 기하학적 문양幾何學紋이 조각되어 있다(도1).
이러한 전돌은 기와와 함께 건축의 기본이 되어 왔다. 기와가 서주西周 시대 분묘墳墓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전돌도 한반도에 보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혈주택(竪穴住宅, 지면에 구덩이를 깊이 파고 평면을 만들어 그 위에 천막이나 지붕을 만든 주거 형태)과 가마[爐]를 탈피하고 건축이 발달한 시기는 은殷(3,000B.C∼1,100 B.C) 시대이며, 은허소둔殷墟小屯 유적 2군群의 토단土端과 초석礎石은 당시 목조 건축의 기둥과 경사傾斜 지붕의 형태를 추측하게 한다. 주대周代에도 그 전통을 계승하여 무덤을 전돌로 축조하게 하였으며 이는 후세의 전돌과 기와의 모양과 꾸미는 제도에 본보기가 되었다.
한대漢代에 이르러 목실묘木室墓가 쇠퇴하고, 돌이나 전으로 묘실을 구축한 뒤 그 벽면에 부조(浮彫, 무늬를 도드라지게 조각하는 방법)하거나 그림을 장식하는 풍습이 시작되었다. 고구려에서는 통구通溝 지방에 있는 대왕릉大王陵, 천추총千秋塚 같은 고분에 벽전을 사용했다. 대왕릉에서는 원래 석재로 쌓은 부분의 표면을 덮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전돌 파편이 석축石築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위) 도3-1 공주 송산리 백제 무령왕릉 내부 축조 전돌
(아래) 도3-2 무령왕릉 내부 축조 전돌의 문양. 원 안에 네모 구멍이 뚫린 오수전 모양과 격자무늬는 하늘에 별이 박혀있는 우주를 상징한다.


백제 시대, 전돌로 무덤 축조

백제의 경우 현재 공주公州에 있는 송산리宋山里 왕릉 중 전실분(塼室墳, 전돌로 무덤을 축조한 것)이 있다. 왕릉의 전돌에는 격자문 등의 기하학적 문양과 연꽃무늬가 촘촘하게 부조되었다. 공주 무령왕릉(백제 제25대 왕)은 벽과 천정에 전을 층층으로 포개어 높이 23㎝, 폭 40㎝ 전돌을 일렬로 쌓은 전축(塼築, 벽돌로 쌓은 담 형식의 구조물) 단실묘單室墓이다(도2). 벽체의 전축은 길이모쌓기[長手積, 4개의 벽돌을 뉘여 포갠 형태] 기법과 작은모쌓기[小口積, 1개의 벽돌을 세워 포갠 형태]의 방법을 번갈아 되풀이하여 4평1수四平一竪의 축조방법을 취했다. 이는 3개의 벽돌은 가로로 뉘여 쌓고, 1개는 세워 쌓는 방식의 중국 축조 수법과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도4 무령왕릉 내부 축조 전돌. 인동무늬가 충전된 연꽃무늬가 반쪽이 새겨진 전돌을 좌우 대칭으로 맞추어 축조하여 두 개의 전돌이 한 쌍을 이루도록 제작됐다.

무령왕릉의 전축 기술을 보면 매우 규칙적이고 정연한 솜씨를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소용된 전들은 모두 아름다운 인동 연화문으로 장식돼 남다른 미감을 느낄 수 있다. 전돌 속 연화문의 모양은 사용된 위치에 따라 몇 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길이모쌓기의 전에서 볼 수 있는 문양은 중간에 사격자의 망상문網狀紋을 두고 그 양쪽 끝단은 네모나게 구획하여 대각 십자선對角十字線의 중심에 6판의 소형 연화문을 하나씩 배치한 모습이다. 천장부의 얇은 전들도 이 문양전의 모양을 따르고 있다. 작은모쌓기 전에서는 세 종류의 문양을 볼 수 있는데, 우선 벽체 하부를 구축한 전들은 주위를 방형으로 구획하고 그 표면 내부에 유려한 8판 연꽃무늬를 반으로 나눈 것과 그 양편에 인동무늬를 하나씩 배치한 것이 있다. 이것을 좌우로 배열하여 축조함으로써 벽면에 활짝 핀 여덟 엽 연꽃무늬가 정연하게 배열된, 아름다운 벽면 의장을 만든 것이다.
벽체 상부에는 작은 네모전돌方塼을 반으로 나눈 모양의 내부에 각각 대각對角의 십자선十字線과 소형의 6판 연꽃무늬를 새긴 문양전을 배열하였는데, 벽면의 길이모쌓기에 사용한 장방형으로 기름한 전돌의 양끝의 무늬와 동일하다. 천정에 사용한 전은 대개 벽면 하부의 전과 같은 모양이지만, 면의 크기가 작아 연화문 주위에 있는 인동문이 생략되었다.
백제시대 전축분에 사용된 전돌 문양으로는 방형方形에 오수전(五銖錢, 전한시대 무제武帝 때 사용되던 동전, 둥근 원 속에 네모난 구멍이 있는 문양)의 무늬를 배치한 것과 능격문菱格文을 번갈아 부조하여 새긴 것이 있다(도3). 이러한 전돌을 구워낸 자리는 부여 전동리 가마터로 확인되었다.
무령왕릉 전실분에 축조된 무덤 전돌墓塼들은 두 개의 전돌이 한 쌍을 이루도록 만들어졌는데 8엽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네 개의 인동무늬가 각 모서리를 향하여 곧게 표현되어 있다(도4). 세워서 쌓는 이 전돌 끝단에는 풍부한 양감量感으로 표현된 연꽃무늬로 매우 자연스러운 곡선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대칭구도를 이루어 안정감을 준다.
백제 무늬전돌 가운데 매우 독창적이며 독특한 예로서 공예미工藝美를 보여주는 문양전을 볼 수 있다(도5). 이 전돌은 마치 상자처럼 생겨서 요즈음의 블럭 벽돌을 연상케 하는데, 그 사용처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사찰 건축 장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돌 측면에는 8엽의 연꽃무늬와 함께 4엽의 인동초화무늬를 아름답게 부조하여 묘사하였다. 백제 기와에서 볼 수 있는 볼륨감 있고 온화한 느낌을 자랑한다. 원으로 두른 자방子方 중앙에 있는 단판연화문은 꽃잎을 시계방향으로(우측으로) 회전시킨 문양이 마치 태극무늬를 연상케 한다. 또한 4엽의 인동무늬를 대칭되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형식의 인동무늬를 채용한 통일신라시대의 수막새기와가 경주 부근에서도 출토되기도 했다.
도5의 무늬 외곽은 톱니무늬[鋸齒文]로 채워졌는데 전체적인 구도가 지극히 안정적이다. 백제미술 특유의 우아함과 세련미를 뚜렷이 엿볼 수 있는 수작이다.


(위) 도5-1 <연화문 전> (보물 제 343호), 백제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부여 궁성지 부근 출토
(아래) 도5-2 연화문 전의 문양


신라시대, 주로 불탑의 전돌로 사용

신라의 벽전은 백제의 경우와 달리 고분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불탑佛塔을 쌓는 데 사용한 탑전塔塼이 대부분이다. 신라시대 전돌의 예로는 경상북도 울주군 농소면 중상리 어느 절터에서 발견되었다는 이 무늬 전돌(도6)을 들 수 있다. 탑 모서리에 장식된, 이른바 탑전塔塼의 한 가지이다. 전돌의 무늬는 모퉁이 장식에 맞추어 만들어졌는데, 마치 고대 솥이나 동종 등 동기銅器에 새겨진 상상의 짐승 도철饕餮의 형상처럼 생겼다. 매우 입체적이면서도 세련된 조각은 용면龍面을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연이어서 집 한 채가 해상에 접해 있고 주위로 산봉우리가 흐르는 구름 위로 솟아있는 점경點景까지 아름답고 경이하게 펼쳐져 있다. 건물은 아마도 용이 깃들어 있는 신당神堂일 것이다. 이러한 용신각龍神閣은 지금까지도 동해안에서 찾을 수 있다. 전각의 용마루 끝에는 고대의 치미鴟尾가 올려진 모양이 표현돼 삼국시대 건축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도9 약수리벽화고분 내 전실남쪽벽에 그려진 수렵도

통일신라시대 와전에는 용무늬를 새긴 것이 유난히 많다. 아마도 동해에 접한 신라의 지리적인 조건과 환경에 의해 용에 대한 신앙이 성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례로, 이 무늬 전돌은 미간에 뚫린 못 구멍으로 보아 신전神殿이나 불탑 등에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도7). 무늬는 흔히 도깨비무늬, 또는 귀면鬼面이라 하지만 사실은 용의 얼굴을 정면에서 표현한 용면龍面이 분명하다. 아래에 결구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체 면에 무늬를 베풀었는데, 미간과 눈두덩이, 잔뜩 부라린 눈, 그리고 코 등이 매우 입체적으로 부조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포효咆哮하는 모습의 입 주변에 서기瑞氣가 보이고 양편 귀 뒤쪽으로 말려 올라간 우모羽毛는 힘이 넘친다.
경주 지역에서 발견된 수렵문 전돌(도8)은 궁궐건축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상류 사회의 수렵문화를 말해주는 희귀한 자료로서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강서 우현리 중묘(6세기 초)와 약수리 벽화고분(5세기 초)에 그려진 수렵도를 연상시킨다(도9). 이러한 사냥장면은 서역벽화 등에서도 나타나며 북방민족의 기상을 역력히 보여준다. 하부가 반듯하게 절단된 모양이고 윗부분에 단을 두어 어딘가에 결구하기 위한 용도로 짐작된다. 돋을 선을 얕게 부조한 문양은 말을 타고 들짐승을 사냥하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질주하는 말을 탄 무사武士가 커다란 활의 시위를 짐승 쪽을 향해 힘차게 당기고 있으며, 이에 놀란 짐승은 앞다리를 힘껏 들어 올려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도망치는 장면이 실감나게 그려졌다.


(위에서부터) 도6 <용면누각무늬 전탑 전돌>, 통일신라시대, 경상북도 울주군 농소면 중상리 한 절터에서 출토.
도7 <용면 무늬 전돌>, 통일신라시대
도8 <수렵문 전돌>. 통일신라시대, 경주 부근 궁궐지에서 출토


나라별로 다양한 형태의 부전

부전敷塼이란 궁전이나 사찰, 또는 무덤의 바닥에 깔아 장식하였던 전돌을 말한다. 낙랑이나 백제의 전실분에 깔린 것은 장방형의 벽전과 같은 모양인 데 반하여, 궁전이나 사원에 깔린 것은 대개가 정방형의 것들이다. 고구려의 경우 부전이 발견된 예가 그리 많지 않으나, 평양 부근의 청암사지淸岩寺址에서는 정방형의 무늬 없는 전돌[無紋塼]이 많이 깔린 것을 보아 사원 건축에 많이 쓰였을 가능성도 보인다.
경주 부근의 유적에서 발견된 전을 통하여 통일신라시대에는 각종 정교하고 화려한 보상화문 또는 연화문, 당초문 등이 새겨진 전돌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도10). 전돌은 한쪽 변이 긴 장방형으로 두 개의 연꽃무늬를 양쪽에 대칭을 이루게 배치했다. 이 무늬 전돌을 좌우상하로 연속시키게 의도하여 무늬 전돌을 전체적으로 깔았을 때 사방연속무늬가 이루어지도록 했다고 하니 통일신라 당시의 건축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무늬전돌 중에는 보상화문寶相華紋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7세기경) 무늬전돌이 수백 점 출토됐다.(도11, 도12) 중앙에 둥근 원곽으로 둘려진 작은 모양의 자방子方을 두고 바깥쪽에 4엽의 보상화무늬를 배치하였으며, 8엽의 커다란 보상화무늬를 두었다. 또한 각 모서리에도 보상화무늬를 배치하여 이를 연속시켰을 때 사방 연속무늬를 이루도록 만들었다. 꽃잎에서 보이는 선의 흐름이 유려하고 아름다우며 무늬의 구도는 매우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는 당시 페르시아계의 화문이 서역을 통해 전해진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도10, 도11 <보상화문 부전>, 통일신라시대,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



(위) 도12-1 안압지에서 출토된 보상화문 전돌의 측면
(아래) 도12-2 전돌 측면의 쌍록 보상당초문



임영주 | 한-명품미술관장

홍익대학교에서 목칠학과를 전공하고 동국대학교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문화재관리국 문화재 전문위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한국무형문화예술교류협회 회장이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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