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키요에浮世絵의 세계④ – 18세기 에도(江戶)는 문화상품 개발시대

일본 우키요에浮世絵의 세계④
18세기 에도(江戶)는 문화상품 개발시대

이제 우키요에라는 그림을 유행시킨 그 바탕, 즉 에도시대 일반의 문화양상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보자. 얘기 순서로 보아 다소 역전된 것 같지만, 우키요에라는 특이한 그림의 이해를 심화시키는 차원에서 오히려 총괄적인 시대상황 설명은 지금 꺼내야 한다.

18세기 에도시대는, 서민문화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어 에도 말기 가까울 무렵에는 진정 서민문화의 전성기로 접어든다. 우키요에 또한 그러한 서민문화의 성숙에 동반되어 발전한다. 당시 무사정권의 최고 기관인 막부가 혼신을 다해 여러 번 개혁조치를 발동시켰지만 정부의 통제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걷잡을 수 없이 독주를 거듭한 서민문화는 특이하게도 거의 대부분 상품으로 연결된 것이었다. 문화상품 중심으로 개창된 서민문화였다. 상류층이 아니라 서민이 창출한 문화상품이 범람한 것이다. 문화상품 개발에의 길을 부채질한 것은 거대도시 전체에 상업중심의 소비사회가 조
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화상품의 개발로 인도한 것은 누구에 의해서 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의 상층부이다. 고급 소비자들인 사회 상층부의 무가武家를 중심으로 원예나 출판물 같은 고급문화가 우선적으로 개발되었다. 에도문화의 꽃이자 2대 악소惡所로 꼽히는 공창公娼의 요시와라(吉原)나 극장가의 가부키(歌舞伎)도 자기해소 문화에 속하는 하층민의 전유물처럼 인식되기 쉽지만, 실은 이들 환락가도 애초부터 서민용으로 번성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무사들의 이용이 더 많았던 장소이다. 남녀 성비가 극단적으로 불균형을 이룬 상황에서 남성 소비계급인 무사들이 본능해소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장소였다. 그리하여 에도 초기에는 여기저기 은밀하게 사창이 생겨나고 있었다.

출판물의 황금시대

에도시대는 출판물의 황금시대였다. 출판물이야말로 문화상품의 진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에도시대는 각종 출판물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그 기능과 역할도 다양했다. 출판물이 보급되려면 일차적으로 독자들의 지식과 문화수준이 폭넓게 형성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므로, 그것 자체가 문화역량의 척도이자 근대적 문화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출판물의 활황은 에도시대 문화발전의 모습을 이해하는 창구가 된다.
그런데 우키요에야말로 출판물다운 출판물로서 문화상품의 중심에 있었다. 에도시대 후기에는 상하귀천 관계없이 문자나 그림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무엇보다 에도 서민의 높은 식자율識字率에 지지된 것이다. 당연하지만 국민의 문자 해독력은 출판물 보급과 직결된다. 일본에서 봉건시대의 학교를 ‘데라고야(寺子屋)’ 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세시대에 유행한 사찰에서 교육이 시작되었던 것에 연유한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사찰이 한문을 가장 잘 이해하는 그야말로 고급 지식인이 모인 곳이었고 그 곳에서 한문교육이 성행했다. 에도시대에 와서는 상공업의 발전, 문서작성의 필요에 의해서 실무교육의 수요가 한층 고조됨에 따라 학교도 자금력을 가진 문화인이 설립하여 대도시 중심으로 이동되고 보급되었다. 1700년 무렵부터는 농촌이나 어촌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여 1830년대 전후로 현저하게 증가했다. 교사(師匠)는 조선시대 서당에서 선비 훈장이 담당했던 것과 다르게, 승려·신관神官·의사·무사·낭인浪人 등이었다. 배우려는 수학자受學者가 늘어남에 따라 교사 양성소[아시카가학교(足利校)라 했다]도 생겨날 정도였다. 교육은 첫째로 숫자의 습득, 다음으로 문자의 습득에 두어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교육 위주였다. 이 점은 김홍도 풍속화에서 보듯이 일반 교육기관으로서 주로 한학漢學만을 배웠던 조선시대의 서당書堂과는 대조된다.(도1)
우키요에도 역시 에도 서민들의 식자율을 높이는데 중요한 기능을 했다. 에도시대의 소설이나 우키요에는 요즘의 만화와 같은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선 그림과 문자가 병행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림을 보고 문자의 내용이 유추 가능한 것이었다.(도2) 뿐만 아니라 우키요에는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최신 매체였다. 그 결과 에도인들의 문자 해독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일조를 했을 뿐만이 아니라, 에도시대는 가히 ‘출판물의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각종 출판물의 발전을 유도시킨 기반이 되었다.
인쇄방법에서도 괄목할만한 획기성이 있었다. 그 첫째가 활자 인쇄에서 목판인쇄로 변모한 점이다. 인쇄기술로 보면 목판 인쇄에서 활자 인쇄법으로 발전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지만 에도시대는 그 반대였다. 목판 인쇄물은 일반 그림처럼 자유자재의 창작표현이 가능하다. 일본도 에도시대 이전에는 활자 인쇄방법이었다. 그것은 고정된 글자체에 얽매이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목판인쇄는 판면 전체를 하나의 예술적인 표현용 공간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글씨 형태도 자유자재의 변형이 가능하고 예술화시킬 수 있다. 목판문화가 극도로 융성한 에도시대는 진보된 판각법으로 문자뿐만 아니라 그림을 자유롭고 다양하게 창작으로 구성하는 예술적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우키요에라는 특이한 예술장르도 이런 이유로 활성화된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다색판화[당시는 니시키에(錦)라 했다]의 개발에 의해서 화려한 컬러판 출판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 출판업주가 중세처럼 사원寺院이 아니라, 자금력을 가진 부유한 문화인이 담당하여 상업 중심의 기업형 출판업으로 발전하게 된다.(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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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서적 임대업이 전국적으로 넓게 확산되어 출판유통이 근대적인 시스템으로 정착되었다. 카시혼야(貸本屋)라고 하는 서적 임대상 대부분은 단골을 순회하는 행상이었지만, 넓게 전국적인 범위로 영업하고 있었다. 1720~1730년대에는 전국 800여 점포로 늘어날 정도였다. 카시혼야는 주로 대중오락 소설의 보급 유통을 담당하였으며, 임대상이 주체가 되어 에도에 ‘독본 本(요미혼)’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창출시키기도 했다. 에도시대에 책이라는 미디어는 점차 유동성의 상품으로 발전하고, 색채 배합을 적극 시행하여 컬러판 소설본으로 발전하게 된다. 즉, 놀랄만하게도 근대 수준의 출판문화가 에도시대 후기에 이미 형성된 것이다.
에도시대의 모든 출판물은 그림과 혼연일체가 되어 발전한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에도시대 대부분의 서적은 단지 글씨만이 아니라 그림 비중도 무시 못 할 만큼 높았다. 오히려 글씨보다 삽화의 비중이 많은 것이 일반적이다. 지금의 만화처럼 삽화를 그려 넣어, 보는 사람에게 흥미롭고 내용 이해가 용이하도록 하도록 시각적인 효과를 종횡무진 구사하고 있었다.(도4) 그 때문에 모든 생활정보나 지식, 문화행사 전달과 같은 정보매체로서, 지식의 근원으로써 출판물의 역할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의 출판물이 무엇보다도 서민문화가 융성된 토대가 되고, 지식내지는 정보 사회화로 나아가게 한 중심체 역할을 담당했다. 그 점이 근대사회의 양상과 거의 동질적인 것으로서 주목된다. 또한 에도시대 출판물의 활황은 그 부수적인 파급효과로 인해 여타 수많은 문화상품의 소개나 개발을 파생시켜, 서민문화의 전성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거기에다 서적에 자주 실렸던 고전이나 새로운 정보들은 문화매체 일반으로 확산되었는데, 우키요에를 비롯한 가부키(歌舞伎) 연극이나 죠루리( 瑠璃) 연예에도 차용되어 회화화繪化 되거나, 공연물로 상연되어 전체 문화영역으로 파급되었다. 또한 장르를 초월한 입체적인 취재를 통하여 종횡으로 상품화된 정보들이 양산되어 운반되고 있었다. 특히 읽는 재미와 곁들여 보는 재미를 높이도록 삽화를 넣은 서적 출판물에는 내용에서도 은유법(대체법)이 재미있게 활용되고 있어서 즐거운 볼거리로 거듭나고 있었다.
왕성하게 발전된 출판문화는 근대의 매스 미디어와 동일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대중문화의 수준을 고양시켜 공중公衆의 사회로 이끌게 한 기반이 되었다. 에도후기는 조선시대 18세기 후반의 그것보다 확실한 모습의 공중사회로 변모되고 평균적인 대중사회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 중심 역할이 출판물이었다.

정보 미디어 사회

출판물의 한 장르인 우키요에가 정보 미디어의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고전을 비롯하여 다종다양한 전문적인 내용, 명소안내, 괴기소설에서 연애물, 거기에다 해외에서 막 들어온 신정보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그 흡인력이 너무나 폭넓고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풍부했다. 그런 이유로 당시 대부분의 출판물은 내용에서 우키요에와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종합 미디어물이었다.
우선, 명소안내기 名所案記기가 대량으로 출판되었다.
에도후기에는 많은 명소가 개발될 뿐만 아니라, 여행 붐도 크게 일어난다. 거기에는 명소안내서 출판붐이 선도역할을 했다. 명소안내서는 여행에 필요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출판물은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었다. 각종 ‘평판기評判記’의 출판은 출판문화의 수준을 알려준다.(도5, 6) 에도시대에는 각종 문화 생산물이나 전문 지식서 출간이 홍수처럼 범람하여 시민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상황에서, 알기 쉽게 이를 정리한 해설이나 평론적인 등급 판정서였다. 그러기에 방대하고 다양한 기성의 출판물을 정리한 평가와 평론을 목적으로 한 문화평론물의 성격이 강하다. 배우 평판기(役者評判記), 요시와라 평판기(吉原評判記), 씨름 평판기(相撲評判記) 등과 같은 인기인의 평판기를 비롯하여, 희작 평판기(作評判記), 요미혼 평판기(本評判記)와 같은 각종 문학 평론서도 많이 출간되었다. 거기에다 각종의 명물평판기, 농업전서 평판기 등과 같이 전문서적의 평판기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러한 평론서는 기성의 잡다한 출판물보다는 고차원적인 내용이기에 완전한 문화 평론서라고 해도 좋다. 이런 평판물이나 평론서가 왕성하게 출판되었다는 것 자체가 에도시대가 문화의 성숙도나 출판 상황이 이미 근대적인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에도시대 문화 현상의 대표격인 출판물만 보아도 오늘날의 신문이나 잡지처럼 당시 출판물이 일반 시민의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단계에까지 진보하고 있었다. 출판문화라는 언론매체의 발달은 근대적인 요소의 핵심 분야로 간주된다.
특히 우키요에는 그림 형태를 갖춘 상품이자, 에도시대의 최고급 출판물이었다. 에도시대의 소설이나 전문서적과 같은 각종 출판물은 대개 그림이 삽입되어 있어 체제나 제작방법, 주변 환경 등 모든 면에서 우키요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모든 에도 출판물은 우키요에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키요에는 그만큼 상품경제라는 틀 속에서 배양된 특이한 그림이다. 그 속에는 서민의 문화가 극도로 발달된 상업사회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따라서 우키요에가 에도시대 출판물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최적의 잣대가 된다. 대량제작이라는 제작과정은 물론 판매 루트까지도 일반서적과 동일한 방법에다. 표현내용에서도 각종 소설이나 희곡, 역사물과 같이 문학계에서 많이 취재하고, 문학과 한 덩어리가 되어 발전하고 있었다.
우키요에는 최고급 출판물이기에 일반의 예술적 회화와는 다른 점이 많다. 일반 회화는 작가가 모든 것을 단독으로 결정하는 주체적인 예술에 속하지만, 우키요에는 오로지 구매자의 관심사에 따라 주제도, 화풍도, 기법도 달라진다. 그림 주제는 완전히 오픈되어 있고, 주제가 될 수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우키요에에서 화풍 결정의 판단은 구매자의 취향이 전적으로 작용하고 배려된다. 그만큼 우키요에는 상식적인 일반의 회화와는 성격이 다른 특이한 그림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일반 그림보다는 구도, 색 배합, 제재題材 등에서 대체로 강렬하고 자극적인 자극적인 화풍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림에 무감각한 서민들의 시선을 끌 수 있게 시각적 자극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 했기 때문이다. 화풍이나 내용이 매우 다양하여 고대의 것에서 서양문물에 이르기까지 다루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주제와 화풍을 흡수하는 집적 창고와 같았다. 거기에다 주제·화풍이 시시각각으로 변모되고 다방면에 걸쳐진 것은 역시 서민들의 취향 변화를 추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과 대상에서도 일반회화처럼 일상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 구성으로 되어 있고, 그것도 시각적 유희성이 높아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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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품遊藝品의 발달

당시 에도에서 실용적 목적의 상품뿐만 아니라, 즐기기 위한 상품으로 개발된 유예품遊藝品이나 수제품手製品도 범람하고 있었다. 이렇게 향유문화의 품종이 대량으로 개발되고 유행했다는 것도, 조선의 18세기 문화 얼굴과는 크게 다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문화상품으로 왕성하게 개발되었다. 18세기 에도사회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새롭고 신기한 것이면 뭐든지 금전이 되는 사회였다. 사람들이 즐길만한 것이면 뭐든 감히 ‘문화’의 차원에서 상품화되었다. 굳이 물건이 아니라도 기이한 행위이든 만담이든 흉내이든 곡예이든 상관없었다. 남들에게 주목받는 것이면 그것이 상품이 되고 문화가 되었다. 호구지책에 허덕이는 사회가 아니라 그런 낭만의 문화상품 범람시대였다. 당시 에도에서 성행한 유예품의 종류가 무려 80여 종에 이를 정도였다. 당시 문헌에 등장하는 대중 예능으로 곡예12·특기7·물건 흉내7·무용7·만담12·경연극5·연극 죠루리( 瑠璃)7·길거리 예능[大道藝] 12품목 등 총 69종류나 되고 그것 외에도 10종류 이상이나 더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다 당시 에도에는 이들 예능을 상설 공연 할 수 있는 ‘요세(寄席)’라는 공연장도 여기저기 있었다. 요세라 함은 낙어落語·낭곡浪曲·강담講談·만재漫才·요술 등의 기예技藝를 관객에게 보이기 위하여 경영하는 상설흥행 가게이다. 상설 흥행가게가 출현한 결정적인 조건은 밤의 예능이 형성된 것에 기인한다. 밤에 등불을 사용하는 문화생활이 서민 사이로 확산되자, 한가한 밤 시간에 사람들이 쉽게 운집하게 되었다. 그것도 804~1830년 무렵의 19세기 초반이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유흥촌마다 볼거리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폭죽·저녁 피서같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낙어落語·마술·변성술 등 밤의 다양한 예능공연이 일찍부터 상상을 초월할 만큼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유예 문화에는 행동문화도 포함된다. 행동문화라 함은 신사神社나 불각 閣에 대한 참선, 명소를 찾아가는 여행, 온천장에서의 치유·유산遊山 행락·납량·달 보기·눈 구경·제례·전통춤·축일·사찰공개·볼거리·벌레소리 감상·찻물·꽃꽂이·춤·음곡音曲 등 문화적 행동 그 자체를 가르킨다. 에도 쵸닌(町人, 고급상인)문화 연구의 권위자 니시야마(西山) 씨는 행동문화를 에도 쵸닌 문화의 주요 특징으로 간주하고 있다. 에도인들은 이세(伊勢)·쿠마노(熊野) 지역의 순배巡拜를 비롯한 사찰과 신사 참배·명소순례·국화 감상·달구경·눈 구경·곤충소리 감상과 같은 자연의 소세계에 탐닉하고, 시민의 마음을 정화하여 지적으로 감각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그 희열에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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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와 유예문화의 성격

에도문화는 애초부터 몸으로 즐기는 유흥성이 농후했다. 그것도 섹스처럼 본능해소와 관련된 저급문화에 속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 마디로 남성중심 문화이다. 그러한 양상이 유리遊里나 가부키(歌舞伎)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의아하지만 그곳이 에도 서민문화의 원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악소惡所가 만들어내는 인간양태가 어떻게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고차원 ‘문화’로서 발돋움할 수 있었을까? 에도인들은 동양 근세에서 유난히 다이나믹한 행동성이 강해, 자유로운 유흥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해소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유흥은 한 마디로 금전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로서, 거기에는 활성화된 상공업이 뒷받침된 것이다. 요시와라(吉原)와 가부키(歌舞伎), 이들 두 유흥장소는 에도의 꽃으로서 눈부시게 발전하여 그 속에서 자란 문화가 일본 전국으로 확산된다. 에도 서민문화의 중심에 가부키가 있다.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이어져오는 일본 가부키는 특이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스토리가 없는 일본의 가부키는 연기 중심으로 엮어졌기에, ‘예능’ 본위의 연극이다. 단순한 연기 동작, 그것이 볼거리로 되면 그만큼 장면 하나하나의 시각적 효과가 극대화된다. 시각적인 극대화를 위해, 부수적인 재료로서 문화 품목들도 풍부하게 발달된다. 일본전통의 음악과 춤으로 된 아악雅樂, 춤과 노래를 곁들인 노가쿠(能) 연극, 샤미센(三味線)이란 악기로 연주하는 나가우타(長唄) 음악, 전통음악으로서 오하야시(お子) 등이 다양하게 곁들여져 극적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그 외에도 배우가 사용하는 갑옷(鎧), 투구, 가발, 칼, 창, 활, 담뱃대, 담배상자 등 다양한 연극 소도구가 개발되고 동원되어 최고의 볼거리 문화로 발돋움한다.
당시 가부키에서는 좋아하는 배우의 연기를 보고 큰 소리로 고함지른다든가 무대나 관객이 하나가 되어 뜨거운 극적 도가니 속으로 치닫는 분위기였다. 일체화된 군중의 열광적인 유흥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이 일본 가부키의 속성이다. 짓눌리고 따분한 체제의 속박에서 빠져나와 외부와 단절된 새로운 자기해소적인 해방감의 용광로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부키와 요시와라의 2대 색마을[色里]이었다. 그곳은 경직된 일상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번득이는 섬광을 느끼게 하고, 군중과 더불어 뜨거운 일체감 속에 일상의 갑갑함을 불태워 날려버리는 카타르시스의 장소였다. 자기 해소적인 별유천지別有天地 속으로 에도 도시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가부키는 에도인이 살아 숨 쉬는 자유의 공간이었고, 체제의 속박을 벗어던질 인간 해방구였다.
원래 무사체제에서는 애초부터 ‘자유’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사회였다. 그만큼 계급서열이 엄격하고 통제 속에 놓여있는 폐쇄사회였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유교사회의 삼강오륜처럼 목숨같이 지켜야 할 근엄한 도덕률도 미약한 사회였다. 그러기에 어딘가에서 숨통을 틔워줄 인간 해방구가 존재해야만 했다. 인간의 본능적 욕망의 분출장소였던 가부키와 요시와라가 바로 그런 곳이다. 심각한 남성과다의 소비중심 사회에서 욕구분출은 해방감을 안겨주고 살맛을 자아내게 하는 원초적인 에너지의 충전이었다. 그것이 점차 시민의 정화된 에너지로 승화되고 격식을 갖춘 상업중심의 문화양태로 발양시켜 나아갔다. 뿐만 아니라 그 원초적 문화가 자유로움의 시대 분위기도 열어가는 양상이었다. 드디어는 그들의 본능 해소적인 대중적 에너지가 응결되어 무사지배의 강고한 철의 장막을 뚫고, ‘자유’라는 토양으로 새로운 신천지를 조성해가는 형국이었다. 수도 에도에 한정된 지역에서의 협소한 ‘자유의 씨앗’이 결국에는 엄격한 통제의 벽을 허물어 ‘확대된 자유세계’로 나아가는 해빙제가 되었던 것이다. 방법에서는 육체적 본능 해소를 상업문화로 승화시킨 것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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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불야성을 이루는 일대 환락가의 요시와라는, 진정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마음껏 발휘되고, 무사도 쵸닌도 모두가 평등·대등한 관계로 환원되는 인간 본연의 장소였다.(도7) 부자유한 신분제에서 벗어나 육체적 섹스의 문제를 해방시킴과 동시에, 독립된 개체적 인간으로서 간섭받지 않은 해방구였다. 사창의 오카바쇼(岡場所, 색을 파는 마을)도 동일한 기능으로, 신분차별이 내팽개쳐지고 짓뭉개지는 해빙구역이었다. 신분의 경계, 남녀의 구분이 허물어지는, 너무나도 인간냄새가 짙게 분출되는 장소였다. 체면이나 도덕률의 껍질을 벗기고 풍성하게 살아난 인간 본래의 모습은 가부키 연극이나 요미혼(本, 落本) 문예에서 다루기 좋은 안성맞춤의 제재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에 주목할 일은 인간 해방구였던 고급 유흥장소가 단지 소모적인 자기해소 장소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란 점이다. 신분의 상하, 남녀의 간격이 해소되고 원만하게 상호 소통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격식과 룰이 조성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곳에서 격식을 가진 독특한 소통문화가 형성되고 고양되어, 드디어는 고차원의 에도의 ‘미의식’으로 발양된 것이다. 말하자면 2대 악소가 에도사회에서 유예문화의 발양지이자, 에도 미의식의 발원지였다.
18세기 중엽 이후가 되자, 피지배자들의 생활이 향상되고 행동반경이 넓게 확대되어 감에 따라, 신분차별이나 통제사회의 모순에서 빠져나오는 탈출구는 그들 스스로가 만개시킨 유예문화遊藝文化라는 곳이었다. 에도문화의 원점에서 점화된 활기와 자유의 에너지는 새로운 유예문화를 끊임없이 개발해 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유예문화의 확대 재생산의 길이다. 그리하여 차·화훼·향·음곡(音曲)·제례·사찰 참배·여행을 비롯한 각종의 유예처遊藝處를 풍부하게 개발해 나간다. 거기서도 기본적으로는 자아해소가 가능한 현실 도피처이자 정신적 안주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글 : 이중희(한국근현대미술사 연구소 소장, 전 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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