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키요에浮世絵의 세계② – 대중의 낙천적 에너지를 담다

일본 우키요에浮世絵의 세계②
대중의 낙천적 에너지를 담다

신흥 도시 에도의 낙천적이고 활기찬 분위기는 비교적 수준 높은 서민문화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지금 당장의 당세풍當世風을 추구하는 ‘우키요’를 그리는 것은 우키요에의 가장 본질적인 정신이었다.

‘우키요에(浮世繪)’의 의미

‘우키요(浮世)’라는 말은 원래 일본에서 ‘근심스러운 세상’이란 뜻의 ‘우키요(憂世)’로 쓰여 졌다. 일본에서는 고대·중세 이후로 염세적인 인생관이 팽배했는데, 정토浄土에서의 성불成佛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이상적 내세에 대하여, 현세는 싫증나고 벗어나야만 할 ‘근심의 세계’ 로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현세를 근심스러운 세상이란 뜻의 ‘우키요(憂世)’로 표현했다. 오늘날 불교나 기독교에서 현실 삶에 대해 ‘죄 많은 세상’, ‘욕심이 가득한 세상’이라고 인식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런데 경직된 무사사회도 어언 반세기가 지나 근세를 맞이하게 되자, ‘잠시 머무는 현세에서야말로 뜬구름처럼 훨훨 즐겁게 지내자꾸나’ 하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차츰 전환하게 된다. 그래서 애초의 부정적인 이미지의 ‘우키요(憂世)’를 밝은 어감의 ‘우키요(浮世)’로 바꿔 쓰게 된 것이다. 더욱이 지금 현세의 세상과 풍속, 느낌이나 사고방식을 긍정적으로 재인식하고, 현세풍現世風, 당세풍當世風과 같은 의미조차도 함께 가지게 된다. 피안의 이상세계보다도 현실을 생각하고, 과거나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의 현세에 무게를 두는 ‘우키요(浮世)’의 인생관이야말로 우키요에(浮世絵) 그림이 가지는 본질적인 모습이다.
즉 우키요에는 “현실을 낙천적인 서민의 눈으로 그려낸 그림”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만큼 신시대 신도시로 시작하는 태평의 에도시대는 현세적 향락의 시대로 부상했던 것이다. 향락적인 인생관 아래에서 호색풍을 농후하게 드러내는 현실의 유리遊里 세계야말로 우키요에 표현에 안성맞춤인 ‘우키요(浮世)’ 였다. ‘우키요’에 해당하는 당시의 대표적인 장소가 다름 아니라 최고의 미녀들과 낭만의 장소인 요시와라(吉原)나 대중극장인 카부키(歌舞伎)와 같은 환락가였다. 거기에서는 누구나가 봉건적인 신분의 벽이나 엄격한 도덕률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자신을 발산할 수 있는 열락悅樂이나 정념情念의 추구가 가능한 곳이었다.
실제로 우키요는 에도시민이 마음껏 자신을 불태우면서 현실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인생관 내지는 자세와 관련된다. 우키요 그림이 발생하는 일본의 17세기 후반에는 놀랄만하게 대중의 현세긍정 에너지가 넘쳐나고 있었다. 최고 통치자 장군의 바로 코 밑에서 전국의 영주들이 에도 중심부에 모여 있는 계획 신도시의 건설 자체가 에도인의 자긍심이었으며, 미래를 향한 전진적인 기분을 분출시키는 근원이 되었다. 거기에다 상품경제가 봉건체제의 장벽을 넘어서 돌출되게 발달하여, 에도서민의 자기해소로서 인생을 열락하는 유흥문화가 곳곳에 깔려있었다.

에도 서민문화의 꽃, 우키요에

‘우키요에’는 일본의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에서나 제작된 일반적인 그림이 아니다. 에도시대(1603-1868) 때에만 탄생된 그림이고, 더욱이 수도 에도江戶(오늘날 동경) 지역에서만 제작된 서민용 풍속화이다. 그래서 에도의 그림이란 뜻으로 일명 ‘에도에江戶繪’로 불려졌으며, 에도의 특산물로 전국으로 널리 유행되고 판매되었다. 그림이면서 서민들의 기호에 부응한 값싼 문화상품이었던 것이다. 그 종류나 화풍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속성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보면 그 다종다양함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이다. 에도라는 신도시가 낳은 현란한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세계로부터 주목을 받는 장르이다. 또한 너무나 일본다운 미의식을 지니고 있어서 19세기 후반 서구의 인상파印象派 발생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우키요에는 대부분 상업적인 판매를 주목적으로 전국적인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목판인쇄 방법으로 제작해야만 했
으며, 내용에서는 당시 일본사회에서 부각된 신종 연예물을 많이 담고 있는 서민용 풍속화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매품非賣品으로 직접 손으로 그린 조선말기 풍속화와는 성격이 다르다. 에도시대는 건국 초기의 70년 정도를 제외하고
는 전체적으로 우키요에가 만개한 시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풍에서는 많은 외래적인 요소를 적극 도입할 뿐만
아니라, 양식에서나 내용에서 기상천외하게 시시각각으로 변모되고 있어 그 변화양상 자체가 우키요에의 주요한 특성
으로 간주된다. 그 정도로 최신 유행의 다종다양한 정보와 지식, 당시의 생활상, 각종의 일본전통 문화, 거기에다 최신의 외래문화까지를 흡수하고 용광로 속 쇳물처럼 녹아서 자라난 일본문화의 꽃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우키요에는 일본 문화 내지는 에도문화의 거울로 통한다. 한 마디로 우키요에를 알면 에도시대 문화가 보이고, 나아가 일본의 문화가 보인다 해도 과장이 아닌 것이다.

우키요에의 시작

우키요에는 일본의 봉건시대 풍속화의 흐름에서 보면 그 말미에 나타난 현상이다. 에도시대의 17세기 후반이되면 2대 환락가로서 요시와라(吉原)가 1657년경 도시 외각지로 이전되어 새롭고 넓게 개장되고, 카부키(歌舞伎)에서는 인기배우 초대 이치가와 단쥬로(市川團十郞)가 아라코토(荒事)라는 용맹스런 무사 배역으로 맹활약했던 시기로서, 도시에 향락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유리 마을이 번성할 때이다. 음악, 문학, 미술 등 제반 문예활동이 그곳을 주된 취재로 하여 활성화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문화의 중심지도 전통도시 쿄토(京都)에서 신흥도시 에도(江戶)로 이동되었고, 그림 제작자도 기성 화가에서 벗어나 일반의 서민화가로 확대 전환된다. 기법에서도 대량제작의 목판화 기법이 도입되어 우키요에의 세계가 시작되는 문화지형으로 크게 바뀐다.
초기 우키요에는 기존의 목판본 소설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원래 일본 목판본 대중소설은 삽화가 많이 곁들여 있었고, 문자와 그림이 융합된 소설이었다. 그런데 우키요에를 처음 개발한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 ?~1694)라는 화가는 1670년대에 문주화종文主畵從이었던 소설본을 그림 위주에 문장이 종속되는 화주문종(畵主文從) 형식으로 역전시킨 것이다.(도1) 더욱이 모로노부는 한발 더 나아가 그림만으로 된 목판본을 제작하게 된다. 기법적으로는 비록 거칠고 조잡했지만 내용에서는 그가 그린 요시와라의 미인이나 카부키의 배우, 그리고 과감하게 도입한 성애性愛 장면은 크게 호응을 얻어 추종하는 많은 제자를 둘 정도로 인기화가로 부상하게 된다. 우키요에는 손으로 그리는 육필화肉筆畵도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입하려는 수많은 수요자층의 요구에 부응하여 대량제작이 불가피했다. 이에 목판본 소설에서 목판이라는 판형을 도입한 이래, 목판을 통한 판각법으로 어떻게 하면 인물의 동작을 실감나게 표출시킬 수 있을까 하는 기술적진보가 과제였다. 그리하여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종이, 물감, 판각법, 인쇄법 등의 기법개발을 과감하게 추진하게 된다. 애초의 기법은 형체의 윤곽선에만 먹색으로 찍는 초보적인 흑백판화였고, 우키요에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갖가지 신기법을 동원, 먹색에다 아교를 혼합한다든가 옻칠이나 운모를 칠한다든가 하여 광택을 내는 등의 특수효과를 고안해 나간다.
목판 우키요에의 획기적인 변화는 역시 다색판화법의 개발인데, 우키요에의 개발 후 1세기가 경과한 무렵에 그것을 성취시키게 된다. 1765~6년경에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 1725~1770)라는 화가가 ‘다색판화’를 고안하여 크게 인기를 얻었다. 그는 화풍상에서도 많은 변화를 일으킨 화가였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유녀나 일반 여인을 실명으로 그려 오늘날처럼 인기 탤런트화시켜 히트작을 만든 것이다.(도2) 이런 사실은 봉건사회 속에서 우키요에가 정보의 대중매체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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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판 인쇄시대로의 발전

18세기 중엽은 하루노부(春信)가 고안한 미인화풍을 모방하거나 위작까지 할 정도로 미인화풍 시대였다.
그가 개발한 다색판화 기법을 바탕으로 그 이후는 우키요에 판도가 다양한 방향으로 급속하게 전개되어, 각 유파를 거느린 수장들이 나타나서 제 각각의 영역을 확보해 나간다. 즉 화풍에 따라 계파 형성의 단계로 진입한다. 이소다 코류사이(磯田湖龍齋, 1735~?)는 머리카락을 새 날개처럼 양 옆으로 크게 펼친 뉴 헤어스타일, 그리고 새로운 의상 문양을 한 실재의 유녀를 등장시켜 본격적인 유녀그림을 개척시킨다.(도3) 실감나는 미인화 분야를 전문으로 한 화가는 기타오 시게마사(北尾重政, 1739~1820)이고, 그는 소설의 삽화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배우그림[役者繪]에 신풍을 불러일으킨 화가는 가츠가와 슌쇼(勝川春章)이다. 배우그림이 유독 인기를 얻었던 포인트는 실제의 배우 얼굴과 닮게 그려 생생한 현실감을 살린 점이다.(도4) 거기에다 무대에서의 연기 모습뿐만 아니라 배우의 일상생활의 장면까지도 파고들어 취재한 점이 독특했다. 선망의 팬들이 배우와 직접 마주대하듯 보다 친근감을 자아내게 한 것이다. 이렇게 실재감 중시의 표현은 그의 제자 슌코(春好)에 이르러 한 걸음 더 진척했다. 지금까지의 전신상 묘사에서 벗어나 클로즈업시킨 두상그림[大首繪]을 창시한 것이다. 배우의 개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브로마이드 역할을 한 그림이었다. 우키요에세계에서 18세기 후반은 이처럼 박진적인 표현을 개척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연예잡지처럼 미인이나 배우를 보다 더 생생하게 표현하려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대도시 에도의 번영이라는 시대환경에 힘입어 우키요에 판도는 상품 가치가 더욱 고조되고, 거기에다 우키요에 자체의 기법적 축적과 화풍 개발이 뒷받침되어 18세기 말부터 황금기에 들어간다. 그 시기에 두각을 나타낸 도리이 키요나가(鳥居淸長, 1752~1815)는 미인화를 특기로 하고 있었는데, 배우가 아니라 시정(市井)의 일반여성을 그린 놀라운 풍속화첩이 남겨져 있다. 500점 이상이나 되는 이들 그림에는 작은 얼굴에다 8등신의 훤칠한 여성의 이상미를 살린, 소위 ‘키요나가 미인화’의 전형을 수립한다.(도5) 미인화에 등장하는 여인은 당시 첨단 유행의 헤어스타일, 좁은 어깨, 휘어진 자태, 탄력 있는 건강미, 동그스름한 얼굴형을 가진 전형적인 이상형 미인이다. 흑색 포인트에 상쾌한 색조가 매력의 요소로 각광받았다. 키요나가는 그러다가 카부키 배우들의 실제 모습에 한층 다가선 참신한 ‘닮은 배우그림[似顔絵]’이 나타나자 인기 판도가 역전되어, 키요나가파 미
인화는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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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미인화와 배우그림

18세기 말을 장식한 대표적인 화가로는 그 유명한 우타마로(歌麿)와 샤략(寫樂)이 있다.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1753-1806)는 미인화를, 토슈사이 샤라크(東洲齋寫樂, 생몰년미상)는 배우그림을 주특기로 했다. 18세기 후반 미인화계는 여성의 반신상을 주로 그린 우타마로(歌麿)가 단연 석권했다. 저명한 프로듀서이자 공방 업주에 의해 발탁된 그는 주로 유녀들을 클로즈업시킨 흉상 미인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우타마로는 신체를 생략하고 한층 클로즈업시켜 얼굴 중심의 화풍을 고안하여, 인물의 표정이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리는 미인화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부각된 여성의 흰 목덜미, 흐르는 듯한 리드미컬한 곡선, 여성의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 등을 살려 관능적인 여성상으로 탈바꿈 시킨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다. 얼굴 위주의 미인화는 종전과 다르게 얼굴 윤곽선을 없앤 부드러운 육감미, 여성의 심리까지 묘출시킨 미묘한 뉘앙스, 고급스러운 추상적인 장식문양으로 배경 없는 배우로 우타마로 특유의 미인화 양식은 1790년대를 풍미했다.(도6) 그런데, 문제는 막부의 엄중한 단속이었다.
상공업의 과도한 발달로 인해 막부의 재정 빈곤이 도를 넘게 되고 사회적으로 사치 풍조가 만연하여 봉건기강이 무너짐으로 인해, 무사정권 막부는 개혁 조치를 발동시켜 대대적인 숙청과 풍속통제를 가하게 되는데, 우타마로 화가도 구금되어 50일간의 수갑이 채워지는 형벌을 받았다. 1793~1794년경에 배우그림 판도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샤라크(寫樂, 생몰년미상)는 10개월도 채 안된 짧은 기간에 140여 점의 작품을 남기고 사라진 불가사의한 화가이다. 반신상의 연극배우를 전문으로 그렸는데, 특히 연극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배우의 표정이나 자태를 적나라하게 포착한 것이 대부분이다.(도7) 형체나 색채를 단순화하여 주도면밀한 구도를 취한 점에서는 우타마로의 미인화와 공통점이지만, 샤라크는 이전의 이상화된 배우와는 달리 배우들이 연극 무대에서 연기하는 실제동작이나 표정을 직관적으로 포착하고 있으며, 그것을 얼마간 풍자적으로 희화戱畵하고 과장하여 감정묘사를 극대화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즉 연기하는 배우의 인상을 연극의 현장처럼 느끼도록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데 샤라크의 멋진 구성력이나 배우들을 인상적으로 파악하는 그림도 1800년 이전에 종지부를 찍게 되고 화단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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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말 풍경 우키요에 : 호크사이(北齋)와 히로시게(廣重)

우키요에 판도는 에도시대에서 말기 무렵이 되면 크게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막부의 각종 개혁정책과 에도말기의 문인문화의 발흥이 원인이었다. 강경한 막부의 조치는 환락가와 각종 출판물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으로 나타난다. 우타마로(歌麿)·슌에이(春英)·토요쿠니(豊國)와 같은 화가는 풍기 단속의 대상이 되어 50일간 수갑이 채워진다. 우키요에의 화풍에서도 그러한 강압적 정치 분위기가 여지없이 반영되어, 형태의 파괴와 왜곡, 기괴하고 강렬한 색조 등 괴기스럽고 음침한 화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야말로 봉건말기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우키요에의 본령이었던 미인그림과 배우그림은 쇄미하고 새로운 주제가 부각된다. 풍경화와 화조화이다. 사실, 에도시대는 말기에 이를수록 경제성장과 전국적인 교통망의 정비가 더욱 진척되어 간다. 풍경그림이 우키요에에서 정식 장르로서 당당하게 자리잡게 된 것은 1831년에 가츠시카 호크사이(葛飾北齋)의 『부악삼십육경富嶽三十六景』 화집에서 비롯된다. 그 2년 뒤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의 『동해도53차지내東海道五十三次之內』 화집은 도로변 풍경 그림을 정착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풍경이라는 자연의 공간표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투시원근법의 성숙, 명암법의 발달, 번짐 기법에 의한 공간표현 등, 고차적인 판각법 해결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했다. 우키요에 판도에서 에도시대 말미를 장식한 가츠시카 호크사이(葛飾北齋, 1760-1849)는 ‘화광畵狂’이라 불릴 정도로 그림제작에 탐욕스런 작가였다. 그가 개척한 풍경화라는 새로운 장르는 정감있고 대상포착에 기발한 시각을 보여준다.
<부악36경富嶽三十六景>과 같은 풍경판화에서는 서양화법을 소화한 합리적인 공간구성, 삽화를 통해 익힌 동세, 긴장감 풍부하고 의표를 찌르는 신기한 구도가 서로 고차원으로 융합되고 있다.(도8) 호크사이의 날카로운 감각에 의하여 자연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환원되고, 자연과 그림 속인물은 서로 교감을 이루고 있다. 그에게는 인간이든 자연이든 모든 대상의 본질을 ‘동세動勢’로 파악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표정을 참신한 기지奇智와 상상력으로 꿰뚫고 있다.
호크사이 예술에서 서양화법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림에서 서양화법이 단지 그리는 기법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주인공으로 상승되어 있다. 대상을 새롭고 참신한 모습으로 보이도록, 서양화법을 시각적으로 희롱하고 있다.(도9) 원래 서양화법은 사물을 실재처럼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는 묘사법인데, 그 기법을 이용하여 대상을 시각적으로 유희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원근현상에서 원遠과 근近, 명암현상에서 명明과 암暗의 극단적 대비를 통하여 의외성意外性을 얻고 있다. 우키요에는 잡식성의 용광로처럼 시각이든 대상이든 모두 집어삼켜 표현세계를 풍부하게 하는데 이용하는 체질이다. 우키요에 하면 ‘호크사이’ 로 상징될 만큼 우키요에를 혁신시킨 그의 힘은 천재적인 데생력에다 치밀하면서도 명쾌한 역학적 구성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우키요에 풍경화의 마무리는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1797-1858)에서 이루어진다. 1833년에 총 55매로 펴낸 《동해도53차지내東海道五十三次之內》는 히로시게 예술의 정수에 속하는데, 서민의 일상감각에 밀착하여 내면에 호소하는 순화된 서정성이 농후하다. 달밤, 소나기, 눈 내리는 하늘, 저녁노을과 같은 4계절이나 아침저녁으로 빚어지는 자연변화의 갖가지 표정을 아름답게 서술하고 있다.(도10) 계절·기후·시간과 같은 자연변화의 속성을 잘 발현시키고 있어 동양인의 감성이 녹아있는 서정적 작가로 평가받는다. 히로시게 역시 서양화법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서양화 기법을 극단적인 대비효과에 주로 이용하여 기법을 주제 차원으로 끌어올린 호크사이에 비해, 히로시게는 서양화처럼 3차원의 자연공간을 살리는데 서양화법을 활용하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림 내용에서는 동양적 서정성이나 자연감을 발현시키려고 한 점이 히로시게 풍경판화의 요체라 할 만하다. 결국 공간묘사를 실재감있게 하는 서양적인 표현기법에다, 정감어린 자연정취의 동양적 서정성을 절묘하게 융합시킨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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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중희(한국근현대미술사 연구소 소장, 전 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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