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민예관 소장 <까치호랑이> – 까치와 호랑이가 다투는 까닭

일본민예관 소장 <까치호랑이>
까치와 호랑이가 다투는 까닭

까치호랑이는 우리 민화의 대명사와 같은 모티프다. 그동안 까치호랑이에 대해 많은 글에서 보여준 우리의 각별한 애정이나 전하는
작품수로 보아 민화를 대표하기에 손색이 없다. 특히 88서울올림픽에서 마스코트로 까치호랑이에서 빌려온 호돌이를 내세웠고,
올해에 벌어질 평창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도 백호를 소재로 삼은 수호랑과 곰을 응용한 반다비로 정했다는 사실은 호랑이에 대한
우리의 유별난 사랑을 대내외에 보여주는 것이다.

까치호랑이는 작품 수가 많다 보니, 명품으로 꼽을 만한 것도 적지 않다. 한 점을 선택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고,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일본민예관 소장 <까치호랑이>(도 1)를 소개한다. 이 그림은 작품성도 뛰어난 데다 시대성과 상징성도 분명하여 명품으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호랑이가 특별한 명품

일본민예관 소장 <까치호랑이>는 화면 전체에 들어찬 호랑이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백수의 왕으로서의 위용과 권위를 화면을 차지하는 비율로 나타내었다. 심지어 위로 쳐들어야 할 꼬리도 화면 윗선 가까이 치고 올라온 몸 때문에 앞으로 접을 정도다. 호랑이 외의 다른 소재에 대해선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배경의 소나무를 보면 옹색하기 그지없다. 호랑이가 차지하고 남은 여백에 구겨 넣은 형국이다. 이 그림의 작가는 애초부터 소나무는 안중에 없었던 것 같다. 까치의 위치도 여느 까치호랑이와 다르다. 화면의 1/5도 안 되는 면적에다 그것도 아래쪽 코너에 몰려있다. 이때다 싶은 호랑이는 꼬리를 세우고 붉은 입속을 송곳니가 드러내며 붉은 입속이 보일 정도로 한껏 벌리며 까치를 위협하고 있다. 누가 봐도 불공평한 처지에 있는 까치는 이에 굴하지 않고 꼬리를 곧추 세우고 맞서고 있다. 독안의 쥐처럼 이판사판 대드는 것일까? 왜 호랑이는 백수의 왕답지 않게 상대도 되지 않는 까치와 싸우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 속에 우리는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파악하고 비로소 이 작품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까치호랑이의 연원과 한국적인 표현

까치호랑이를 구성하고 있는 소재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로 이뤄져 있다.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키는 호랑이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산하를 뒤덮고 있는 소나무, 아침에 소리를 들으면 좋은 소식이 온다고 믿는 까치 등 모두 우리가 좋아하는 소재들이다. 더구나 민화 까치호랑이에서는 맹수성보다 해학적인 이미지로 표현되어 우리가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매력까지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호랑이 문화가 다양하게 발달했다. 호랑이의 전설이나 민담이 6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어릴 적에 호랑이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란 이가 없을 정도다. 최남선은 우리나라를 호랑이 이야기가 풍부한 나라라는 뜻으로 호담국虎談國이라 했고, 『아Q정전』으로 유명한 중국의 문호 뤄신은 조선족을 만나면 호랑이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다. 이처럼 호랑이 문화가 발달하는 데에는 자연환경이 큰 몫을 했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뒤덮여 있고 그 속에 많이 살았던 동물이 호랑이다. 따라서 늘 호랑이가 가축을 해치고 사람을 죽이는 호환虎患이 빈번했다. 조정에서는 호랑이를 잡는 착호갑사 혹은 착호군이란 군대조직까지 두었다.
민화 까치호랑이를 세상에 알린 이는 조자용이다. 1967년 인사동 골목길가에서 주어온 까치호랑이 그림 한 장이 그의 운명을 바꿔서 그는 민화수집과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민화 까치호랑이의 가치에 대해 그는 다음과같이 설명했다.

“송하맹호도를 한자 권위의식에 의한 정통화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에는 까치호랑이 그림이라는 한글 의식의 대중화
가 있었다. 화제가 화단에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민화적으로 붙여진 일종의 별명에 지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말쑥한 까치한테 골탕 먹는 바보 호랑이로 나타낸 것이 까치호랑이 민화의 특징이다. 이 바보 같은 호랑이 그림들이 오랫동안 다락 한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세상에 나와 지식인들을 기막히게 놀래주는 것이다. 단원이나 겸재의 명작은 벌써부터 그 회화적 가치와 상품적 가치가 함께 인정되었지만, 이보잘 것 없는 까치호랑이 그림이 나와서 그런 명작을 물리치고 정상을 차지하게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까치호랑이는 최근에 우리가 붙인 별명이지만, 최근에는 까치호랑이의 한자명칭인 호작도虎鵲圖가 외국 학계에서 호랑이의 한 형식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미국 신시내티박물관 큐레이터인 호메이송Houmei Song 박사는 한국 민화계의 성과를 받아들여 ‘호작도연구虎鵲圖研究’란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호메이송 박사는 우리의 그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까치호랑이의 연원이 중국에 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그것도 88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로 민화 까치호랑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호돌이가 잠실벌에서 춤췄던 무렵이다. 호메이송 박사는 중국 호랑이 그림의 역사를 규명한 논문을 통해서 까치호랑이의 시작이 원나라 때라는 주장을 펼쳤고, 아울러 민화 까치호랑이와 비슷한 도상의 중국 그림들을 소개했다.
그렇다고 하여 “민화 까치호랑이=가장 한국적인 그림”이라는 공식이 깨지는 것은 아니다. 민화 까치호랑이는 중국 명나라의 호랑이 그림에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그림으로서의 위상은 건재하다. 그만큼 민화 까치호랑이는 한국적인 미감을 충실하게 받아들인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 도상과 형삭은 중국에서 빌려온 것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그것을 나타낸 표현은 매우 한국적이다.

급격히 달라진 서민의 위상 반영한 까치호랑이

까치호랑이의 상징은 벽사와 길상이다. 한나라 때 이러한 풍속이 있다. 집안을 들어오는 귀신은 마치 공항의 검문대처럼 대문 양옆에 세워놓은 복숭아나무 사이를 지나가게 했다. 사람에게 이로운 귀신은 통과시키지만, 해로운 귀신은 갈대끈 으로 묶어서 호랑이에게 먹였다. 여기서 등장하는 복숭아나 무, 갈대, 그리고 호랑이는 액막이의 상징이 되었다. 조선시 대에도 호랑이는 삼재를 막는 동물로 여겼다. 까치는 한자로 희조喜鳥라는 별칭이 있듯이 기쁨의 상징이다. 원래 원나라나 명나라 호랑이그림에서는 까치가 단순히 배 경 역할을 할 뿐 민화 까치호랑이처럼 서로 긴장관계를 유지 한 적이 없다. 호랑이는 호랑이대로 새끼 호랑이를 돌보느라 여념이 없거나 시냇가에서 마른 목을 축이곤 했다. 까치 역시 소나무위에서 호랑이와 큰 상관없이 소나무와 더불어 아름다 운 자연의 배경을 연출한다. 그런데 명나라 화원인 당인唐寅 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호도>(도 2)는 민화 까치호랑이를 쏙 빼다 닮았다. 호랑이 한 마리와 소나무에 깃들어져 있는 까치 한 마리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호랑이의 표현이 우리의 정서 와 다르게 괴기스러운 모습이다. 우리나라 그림 속 호랑이는 애완동물처럼 귀엽거나 부드러운 인상이 주류를 이룬다. 호랑이와 까치가 조선의 민화에 와서는 격렬하게 싸운다. 왜 호랑이는 상대도 되지 않는 까치를 상대로 화를 내고 있 는 것일까? 또한 까치는 상대도 되지 않은 호랑이와 싸우려 고 대드는 것일까? 이것은 자연의 생태계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고 당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풀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 급격하게 나타난 신분제의 동요 와 연관이 깊다. 이 시기에는 1811년 홍경래난을 비롯하여 민란이 간간이 일어나다가 1862년 임술민란과 1894년 동 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봉기하는 양상을 보였다. 급기야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금강석처럼 굳건해 보였던 신분제를 철폐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일제강점기 때에는 교육제도 등을 통해 실질적인 신분제의 붕괴가 이뤄졌다. 이처럼 급격하게 이뤄진 사회적 변화를 우화적으로 풍자한 것이 까치호랑이다. 호랑이는 부패한 관리를 대표하고, 까 치는 민초를 대변한다. 호랑이가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여 맹수성을 드러내고 까치가 구석에서 격렬하게 대든 것은 그 때문이다. 까치호랑이의 외형은 동물화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화적인 풍자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호랑이와 까치의 싸움에서 누가 이겼을까? 누구나 충분히 예상하듯, 약자인 까치가 승리했다. 마치 구약성서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비슷하다. 어린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기적처럼 쓰러뜨렸다. 민화 까치호랑이도 마찬가지다. 초기에 기세등등했던 호랑이는 점차 우스꽝스러운 ‘바보 호랑이’로 격하된다. 높이 세웠던 꼬리를 내리고 까치의 잔소리를 묵묵하게 듣는 신세가 된다. 호랑이가 백수의 왕답지 않게 까치를 위협하는 것 자체가 이미 스스로 패배를 인정한 셈이 된다.

한국적인 그림으로 탈바꿈한 까치호랑이

일본민예관 소장 <까치호랑이>는 전통적인 ‘출산호出山虎’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출산호란 말 그대로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호랑이의 모습에는 경계의 표정이 가득하다. 눈에는 노란 불을 켜고 붉은 입을 벌리며 등을 살짝 올리고 꼬리를 곧추 세웠다. 여차하면 적을 공격하기 일보 직전의 일촉즉발의 간장감이 흐른다. 출산호는 중국 호랑이 그림의 가장 오래되고 기본적인 포즈로, 일찍이 복송시대 조막착趙邈齪과 남송시대 목계牧谿의 그림(도 3) 속에서 보인다. <까치호랑이>에서는 붉은 입을 벌린 모습에서 까치를 공격하는 맹수성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으나 꼬리는 협소한 공간 때문에 아니 호랑이를 너무 크게 그리다보니 앞으로 접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호랑이를 화면에 꽉 차게 표현하고 소나무의 배경은 옹색하게 배치한 까닭은 중요한 것은 크게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작게 그렸기 때문이다. 이는 민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특색이다. 주종의 관계를 뚜렷하게 나타낸 위계적인 표현방식은 이미 고구려고분벽화와 같이 고대의 미술에서 보인다. 민화에는 오래된 전통이 사라지지 않고 연면히 이어져 내려 온 것이다. 위계적인 표현방식은 고구려시대 이후 우리의 취향으로 자리 잡았다. 임진왜란 전후에 명나라의 호랑이 그림이 조선에 전해졌을 때, 초기에는 명나라 그림인지 조선의 그림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중국식이었지만, 점차 한국적인 그림으로 변모해갔다. 한국적인 취향은 무엇보다 배경에서 두드러졌다. 명나라 호랑이 그림에서는 소나무의 수피가 섬세하게 표현되고, 까치의 꼬리가 공작처럼 길고 화려하며, 계곡의 물이 졸졸 흐르는 모습이 자세하게 나타내는 등 사실적인 표현에 치우쳤다. 그런데 그 영향을 받은 조선의 호랑이 그림에서는 호랑이를 평면적으로 표현하고 배경은 간결하게 그리거나 심지어 텅 비워두기도 했다. 이는 철저하게 주인공인 호랑이를 돋보이게 하는 배려다. 명나라 호랑이 그림이 조선에 들어온 뒤200여 년이 지난 19세기에도 마찬가지다. 호랑이가 화면에 가득해지고 그에 비례하여 배경의 비중은 약화되었다. 주객의 차이가 더욱 명료해진 것이다. 명나라 호랑이 그림과 민화 까치호랑이를 비교해 보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보기 힘들 만큼 새로운 그림으로 탈바꿈했다. 그 시작은 명나라 호랑이 그림이었지만, 민화에 와서는 완전 한국적인 까치호랑이로 재탄생한 것이다. 일본민예박물관 소장 <까치호랑이>는 중국 호랑이 그림이 어떻게 한국적인 그림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모범적인 예다. 중국 호랑이 그림과 달리 시대성을 적극 반영했고, 민화 특유의 개념적이고 과장된 표현으로 그려졌으며, 무엇보다 해학이나 풍자와 같은 서민의 정서가 뚜렷하게 드러나 한국적인 이미지 세계를 정립한 것이다.

글 정병모(경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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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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