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민예관①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우리 민화의 가치와 아름다움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우리 민화의 가치와 아름다움

야나기 무네요시는 르네상스의 기준에 비해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조선의 민화에서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을 받았다. 매혹적이고, 신비롭고, 지혜를 무력하게 만든다고 극찬했다. 책가도의 책과 기물들이 형성한 공간은 평면도 아니고 입체도 아닌, 좀처럼 어떤 형상인지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미묘한 공간이다. 불합리성 혹은 비과학적인 그 무엇은 산업화와 기계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현대적인 미감과 상통한다. 이 일을 계기로 무네요시는 조선민화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두고 수집했고, 일본민예관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조선민화 컬렉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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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민예관과 함께한 <반갑다! 우리 민화전>

2004년 6월 나는 일본에 소장된 우리 민화 전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일본민예관을 방문했다. 일본민예관에서는 당시 학예실장인 오규 신조尾久彰三 선생과 미무라 교코三村京子 선생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 자리에서 한·일 우정의 해를 명분으로 내세워 2005년 가을에 서울역사박물관과 공동주최하는 전시회의 합의를 이끌어내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직원도 없이 나 혼자 성사시킨 프로젝트였다. 그것도 일본어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당시 와세다 대학에 방문교수로 와있던 덕성여대 최성은 교수의 도움을 받아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일본민예관로부터 OK를 받아내고 나니, 다른 민예관이나 미술관을 설득하는 일은 의외로 순조로웠다. 드디어 2005년 9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반갑다! 우리 민화전>이 열렸다. 고단샤에 출간한 《李朝の民畵》에 소개되었던 일본에 있는 우리 명품 민화들을 처음 한국에서 소개하는 전시회였던 것이다. 당시 NHK에서는 이 전시회를 비롯한 우리 민화에 대해 50분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전시회는 순탄치 않았다. 전시회가 시작되기 며칠 전, 중앙일보에서 전면에 걸쳐 전시회 소개 기사가 났다. 뜻하지 않은 보도 덕분에 나와 박물관 사람들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영향으로 많은 매스컴에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마 되지 않아 전시되고 있는 까치호랑이 한 점이 가짜라는 기사가 조선일보 1면을 장식했다. 박물관이 발칵 뒤집혔다. 며칠 사이로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간 셈이다. 그런데 오히려 관람객이 늘어나고, 전시회 뒤에 필자에게 민화 강연 요청이나 원고 청탁이 많아졌다. 뜻하지 않게 노이즈 마케팅을 경험한 것이다.

민예 운동의 본산, 일본민예관의 설립

1926년 2월 야나기 무네요시는 카와이 칸지로河井寬次郞, 하마다 쇼지濱田庄司의 3인이 고야산高野山에 올라 서선원西禪院에 투숙하면서 일본민예미술관을 건립할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 내용이 “일본민예미술관설립취의서日本民藝美術館設立趣意書”에 담겨 있다. 이들은 3달 전인 1925년 12월에 함께 여행하면서 ‘민예民藝’라는 개념을 만들기도 했던, 초창기 민예운동의 핵심 맴버들이다. 계획을 세우고 9년이 지난 1934년, ‘일본민예관’으로 이름을 바꾼 박물관이 도쿄 메구로구 고마바에 건립되었다. 건립 비용은 구라시키방적회사倉敷紡績 사장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郞씨가 지원했고, 여러 제자와 동료들도 힘을 합쳤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설계한 이 박물관은 일본 전통건축의 아름다움을 살려 지어졌다. 일본 사립박물관의 시초이자 민예 운동의 본산인 일본민예관이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미 1924년 경복궁 안의 한 전각을 수리, 보수하여 조선민족박물관을 개관한 경험이 있다. 이는 조선에서 제작된 민속품을 소개하는 작은 규모의 박물관이다. 여기서는 도자기와 민화 등을 전시했는데, 이때만 하더라도 야나기 무네요시는 우리 민화보다는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 이유는 그에게 18세기의 청화백자를 소개한 아사카와 노리타가淺川伯敎 때문이다. 그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소장하고 있는 로댕 조각을 보러 도쿄에 갔을 때 방문 선물로 가져간 것이 바로 이 도자기였다. 이것은 야나기의 마음을 사로잡아 우리나라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도자기를 비롯한 여러 민속품을 수집했으며, 조선민족박물관을 개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박물관이 오늘날 국립민속박물관의 시초가 되었다.

선원근법을 무력하게 만드는 그림

일본민예관1957년 염직 공예가인 세리자와 케이스케芹澤銈介(1895~1984)의 제자는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민화 책거리 두 점을 기증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 그림을 보는 순간, 깊은 충격에 빠져 당시 아픈 몸임에도 불구하고 하룻밤 만에 글 한 편을 토해내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불사의한 조선민화’란 글이다. 이 글은 우리 민화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일본 문화계에도 영향을 미쳐 조선민화를 수집하는 붐이 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인용한다.

“나의 직관은 이 그림이 대단히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뭔가 신비로운 아름다움마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를 짜서 다시 바라보면 이 그림만큼 모든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그림은 좀처럼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사실은 이 그림이 근대인인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모든 불합리성에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된다.” (柳宗悅 지음, 유홍준 옮김, 「불사의한 조선민화」, 『민화 문자도』, 동산방, 1988, p. 66. 참조)

서양의 근대미술 교육을 받은 야나기 무네요시는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라고 불리는 르네상스식의 원근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 배웠다.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전환한 르네상스에서는 종교보다 과학을 더 신봉하게 되고, 회화조차 과학적인 표현을 더 선호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선원근법이다. 그런데 야나기 무네요시는
르네상스의 기준에 의하면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공간으로 이루어진 조선의 민화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을 가져다주는 경험을 안겨준 것이다. 그것은 매혹적이고, 신비롭고, 지혜를 무력하게 만든다고 극찬했다. 책과 기물들이 한 뼘의 여유조차 찾을 길이 없을 만큼 밀착되어 있다. 책과 기물들이 형성한 공간은 평면도 아니고 입체도 아닌, 좀처럼 어떤 형상인지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미묘한 공간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 그림을 통해서 매우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한 표현에도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불합리성 혹은 비과학적인 그 무엇은 산업화와 기계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현대적인 미감과 상통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우리 민화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두고 수집하게 되었고, 일본민예관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조선민화 컬렉션이 된 것이다.

 
‘민화’라는 용어를 향한 논란

야나기 무네요시는 우리에게 선물과 숙제를 동시에 주었다. 그것은 바로 ‘민화民畵’라는 용어다. 민화란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그림이라고 했다. 1863년 링컨 대통령이 게티즈버그 공동묘지에서 남북전쟁에 희생당한 이들을 위해 행한 유명한 연설이 연상된다. 이 개념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우리 민화에 관심이 있기 20여 년 전, 일본의 민화, 오츠에大津繪를 조사하고 정립한 것이라 우리 민화의 개념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민중의 취향에 맞게 민중 화가가 민중 수요를 위해 제작한 그림이란 뜻이다. 취향과 제작자는 우리 민화와 비슷하나, 수요는 다르다. 우리 민화는 ‘만민의 그림’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서민을 넘어 왕공사대부의 사랑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민화라는 용어를 좋아하지만,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불만을 터트리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이 용어를 받아들여 40여 년간 사용해왔고, 아직 이 용어를 뛰어넘는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여러 전문가가 이 용어의 대안으로 ‘겨레그림’, ‘한민화’, ‘천인화’ 등 새로운 용어를 제안한 바 있지만, 그들조차 책을 낼 때에는 자신들이 제안한 용어를 과감하게 쓰지 못하고 민화라는 용어를 슬그머니 쓰는 형편이다. 그러니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민화란 용어가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 것은 대중문화의 득세라는 시대적인 조류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19세기부터 농민미술peasant art, 혹은 민간미술folk art 등 유럽과 미국에서 시대적인 필요성에 의해 제기된 용어이고,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를 번안하여 자기식의 해석을 덧붙였을 뿐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젊었을 적에 서양의 미술에 심취했었고, “일본민예미술관설립취의서”에도 folk art란 말이 등장한다.
현재 한국에 이루어지는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평가는 간단치 않다. 긍정과 부정이 엇갈리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반일감정을 내세워 거칠게 비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당시 역사의 맥락 속에서 그의 업적을 냉철하게 평가해야 하고, 잘잘못은 분명히 구분해야 할 것이다. 어느 선사의 말처럼, 손가락 끝만 바라보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글 : 정병모(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한국민화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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