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두 끝에서 피어난 그림, 우리나라 낙화(烙畵)의 역사①

충청북도무형문화재 제22호 김영조 선생이 인두로 낙을 놓는 모습

미술이 발전해온 역사 속에서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무수한 도구와 재료가 등장했다. 돌로 돌에 새기는 암각화가 유행했던 시기가 있었고, 그 후로 오랫동안 붓 그림의 시대를 맞는다. 동아시아 미술에서 독창적으로 발전시켜온 인두를 이용한 낙화를 비롯해 나뭇가지로 먹을 찍어 그리는 비백서, 손가락으로 그리는 지두화, 가죽을 이용한 혁필화 등 붓 이외의 도구가 비주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회화의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여러 표현 방법 중 하나라는 데서 우리는 낙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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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로 지져 그리는 그림, 낙화

우리는 불에 달군 인두로 나무, 종이, 비단 등에 지져서 그리는 그림을 ‘낙화烙畵’라 부른다. 일본에서는 이를 ‘소화燒畵’라 하고, 중국에서는 ‘탕화燙畵’라고 한다. 소화란 불로 태운 그림이고 탕화란 달군 쇠로 지진 그림이란 뜻이니, 낙화와 그 뜻에서 별 차이가 없다. 조선시대에는 낙화를 ‘화화火畵’, 즉 불그림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수묵화처럼 재료를 기준으로 삼은 용어다. 그렇다면 지진 그림인 낙화와 불그림인 화화, 두 용어 가운데 어떤 것이 대표성이 있는가? 전통적으로는 도구를 일차적인 기준으로 삼는 관례가 있기 때문에 화화보다 낙화를 대표적인 용어로 내세우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오랜 역사를 두고, 수많은 이미지를 표현하는 도구와 방법들이 등장했다. 가장 이른 시기에는 돌로 돌에 새기는 암각화, 즉 바위그림이 유행했다. 바탕이 돌이고, 표현하는 도구도 돌이니, 모든 것이 돌인 것이다. 그런데 기원 전후에 표현하는 도구와 방식이 바뀌었다. 이른바 ‘붓 그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초창기 붓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붓들이 바로 그러한 예다. 그런데 이들 붓은 붓대의 양끝에 붓털이 달려 있는 모습으로 모양이 특이하다. 붓으로 먹을 찍어 벽, 종이, 비단 위에 다양한 방식으로 그린 붓 그림은, 이후 한국회화는 물론 동아시아 회화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붓과 더불어 다양한 도구와 방식이 함께 사용되었다. 불에 달군 인두로 그리는 낙화를 비롯하여 나뭇가지로 먹을 찍어 그리는 비백서, 손가락으로 먹을 찍어 그리는 지두화, 가죽에 물감을 찍어 그리는 혁필화, 실에 먹을 묻혀 튕기는 먹줄 놓기, 기름기 있는 먹을 물에 띄어 종이를 대고 찍는 마블링marbling 등 여러 가지다. 그렇지만 붓 그림이 단연 동아시아 전통회화의 주인공이다. 낙화처럼 붓 외의 다른 도구와 방식은 붓을 보조하는 엑스트라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늘 먹는 밥이 싫증날 때 즐기는 별식처럼, 이들은 전통회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근대에 와서 이미지를 표현하는 도구와 방식은 또다시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다. 서양회화의 도입으로 브러시로 유화물감을 찍어 그리는 방식이 유행한 것이다. 바위그림과 붓 그림에 이은 획기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브러시는 붓과 다른 맛을 내는 도구이고, 유화물감은 먹이나 천연안료와 다른 표현매체다. 현대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더욱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전통적인 도구나 방식과 전혀 다른 모습인, 컴퓨터 모니터에 디지털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디지털 이미지가 주도한 가운데 실물 그대로 나타내는 오브제의 방법, 빛으로 표현하는 방법 등 다양한 변주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낙화는 한국회화의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여러 표현방식 중 하나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낙화의 시작, 장씨 부인

우리나라 낙화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기록상으로는 그 첫머리에 안동安東 장씨張氏 부인을 만나게 된다. 장씨 부인이라면, 17세기 조선의 한 양반가의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의 저자이자 이휘일李徽逸과 이현일李玄逸 같은 영남학파의 우뚝한 인물을 낳고 키운, 신사임당과 같은 여인이 아닌가? 그녀가 그린 낙화 작품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녀가 낙화를 그렸다는 기록은 1917년 오세창이 편찬한 화가열전인 『근역서화징』에 전한다. 장씨 부인에 관한 여러 일화를 소개한 뒤, 맨 끝에 “꽃과 나비를 그리고 또 낙화에도 능했다”라고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것은 짧은 한 문장이지만, 우리나라 낙화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이다. 이를 근거로 연구가들은 장씨 부인을 우리나라 미술에서 낙화라는 분야를 처음 개척한 작가로 보고 있다.
그녀는 여러 분야에 뛰어났고, 그것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오늘날 잘 알려진 음식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근역서화징』에 실려있는 “장씨실기張氏實記 ”를 읽어보면, 이미 열 살 전후에 문예에 두루 통달했고, 붓 끝으로 써내는 것은 의젓이 풍아한 서체이며, 중국 남조시대 유명한 서예가인 종요鍾繇 와 위부인衛夫人의 법을 갖췄다고 한다. 초서로 쓴 “학발삼장鶴髮三章”이라는 시는 그녀가 시를 지어 쓰고 며느리 박씨가 채색실로 글자 획대로 수를 놓고 다시 그 비단 여백에 여덟 마리 용을 동글게 수놓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두고 조선 중기의 학자 정윤목鄭允穆은 이 글씨를 두고 “필세가 호걸스러우면서 굳센 것이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 같지가 않다”고 칭찬했고, 임금인 정조도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처음 낙화를 그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과연 조선시대의 시스템상 사대부의 여인이 낙화를 처음 시도하는 것이 가능할까? 낙화가 사대부의 여인과 어울리는 아이템인가? 사대부가의 어엿한 부인이 낙화에 능했다는 것 자체도 이색적인 일인데, 처음 시작했다는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사실이다. 물론 조선시대 회화의 역사는 궁중 화원이 아니라 사대부가 주도했다. 사대부들이 새로운 화풍을 도입하거나 시도하여 어느 정도 검증이 되면, 화원들이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이 대체적인 양상이다. 그것은 사대부를 말하는 것이지 사대부가의 여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사회의 체제 속에서, 사대부의 여인이 규방문화가 아닌 낙화를 처음 시도하는 것이 가능한지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더욱이 지금은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낙화라는 점을 떠올려 보아도, 왠지 사대부 여인과 낙화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느껴진다. 아마 그 이전부터 낙화의 전통이 이어져 왔고 장씨 부인이 그것을 받아들여 제작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것은 추정일 뿐 장씨 부인 이전에 낙화를 그렸다는 새로운 기록이나 작품을 찾지 못하는 한, 장씨 부인이 조선시대 낙화의 역사를 처음 시작했다는 내용이 달라지지 않는다.

조선시대 낙화를 혁신한 박창규 작가

장씨 부인 이후 침묵으로 접어든 낙화의 흔적은 19세기부터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일본의 낙화에 관한 내용을 담은 기록인 「금물어今物語」와 「소화고燒畫考」에서 흥미로운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통신사 접대를 위해 대마도에 간 이가이조스이猪飼如翠(생몰년 미상)가 조선의 이문철李文哲과 낙화로 실력을 겨룬 것이다. (카타야마마리코, 「일본에 전해진 조선시대의 낙화」 참조) 문화교류의 장場인 통신사 접대의 자리에서 낙화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을 보면, 낙화에 대한 한일간의 공통된 관심사였을 뿐만 아니라 기록과 작품만 전하지 않을 뿐 당시에 어느 정도 낙화 제작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심상치 않은 낙화에 대한 관심 속에서 드디어 19세기 중엽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낙화가가 출현하기에 이른다. 바로 박창규朴昌珪, (1796〜1855)다. 밀양 박씨 가문의 양반출신으로, 벼슬은 말단인 참봉을 지냈다. 자는 성민聖玟이고 호는 김석준의 시에 보듯 낭간琅玕이다. 수산垂山 혹은 화화도인火畵道人라고도 불린다. 본관은 함양이고, 전주에서 살았다. 안동 장씨를 비롯한 초창기 낙화를 그린 작가들이 양반출신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사대부나 사대부가문에서 시작한 낙화는 19세기 말에 점차 확산되면서 서민의 그림인 민화로 저변화된 것이다.
그는 낙화를 중국에서 배웠다. “밀양박씨호계공파보密陽朴氏虎溪公波譜”를 보면, 1822년(족보에 적힌 생년인 1796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27세)에 동지상사冬至上使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연경(지금의 북경)에 들어가 관광을 하던 차에 마음속으로 낙화의 이치에 통달했고, 그로부터 15년 뒤인 1837년 참봉을 제수 받으면서 그만의 독특한 화화법인 종이에 낙을 놓는 낙화법을 창시했다. 그는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과 중국을 갔고 김정희의 제자이자 중국어 역관인 김석준과 친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 중국으로부터 낙화를 배워왔다는 기록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당시 중국의 어떤 낙화가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좀 더 파고들어가야 밝혀질 문제다.
중국과 왕실에서 인정받은 박창규의 낙화 실력
낙화에 대한 그의 명성은 중국까지 자자했다. 1849년 청나라 사신 서상瑞常은 그의 낙화를 보고 매우 좋아하고 칭찬하면서 시 두 구절을 지었고, 청나라 사신 전경全慶은 그의 낙화를 보고 손뼉 치며 칭송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작품에 대한 글 가운데 김석준金奭準(1831~1915)이 지은 시집 <홍약루속회이시록紅藥樓續懷人詩錄>에 실린 ‘박창규를 생각하며 懷朴琅玕’가 눈길을 끈다.

불로 지지니 붓과 먹은 필요 없고 / 拭拂忘筆墨
쇠를 달구어 참된 모습 그려 낸다. / 煉金繪形眞
섬세하고 치밀한 솜씨 어찌 그리 지극한가 / 纖密工何極
낙관까지 더욱 묘하고 새롭구나. / 款識益尖新
나무부처가 불을 건너왔으니 / 木佛能渡火
비로서 깨달은 도인을 보겠구나 / 始見悟道人

김석준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말년에 가장 아꼈다는 제자로, 중국어 역관을 지낸 인물이다. 시구로 풀어내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평은 “쇠를 달구어 참된 모습을 그려낸다. 섬세하고 치밀한 솜씨 어찌 그리 지극한가”라는 구절에 함축되어 있다. 붓도 아닌 쇠를 달구어 그렸지만 대상의 진수를 파악했고, 그것을 표현하는 테크닉이 섬세하고 치밀한 것이다. 그리고 결론으로 “깨달은 도인”이라고 평가했다. 김석준이 본 이 작품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대상의 진수를 깨달은 그림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낙관까지 더욱 묘하고 새롭구나”라는 말의 의미는 <고목에 깃든 매枯木棲鷹>(간송미술관 소장)를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는 백문방인白文方印 의 낙관을 도장으로 찍은 것이 아니라 인두로 지져서 표현했다.
<고목 위에 깃든 매>를 가만히 바라보면, 매의 그윽한 눈만큼, 매의 꼭 담은 부리만큼 매의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간단한 구도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무언가 생각게 하는 그림이다. 갈색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채 속에서 거친 듯하지만 절제되어 있고, 간결하지만 역동적인데 이는 인두로 지진 그림이기에 가능한 미감이다. 낙화를 공예라고만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뜻밖에 남종화풍의 격조를 경험하게 하는 작품이다.
박창규와 그의 사촌동생 박복규朴復珪 (1819〜1859)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당시 낙죽으로 유명한 박창규는 낙죽으로 용을 휘감은 무늬를 베픈 담뱃대를 헌종에게 바쳤다. 헌종이 이 담뱃대를 빨면 용의 비늘이 오므라들고, 뱉으면 비늘이 퍼지는 듯하여 신기하게 여겼다. 헌종이 이것이 너의 솜씨냐고 묻자, 그것은 자신의 사촌동생 박복규가 만든 것이라고 대답했다. 1846년 다시 박창규가 박이규와 함께 입궐을 했다. 헌종이 박복규를 보고 기뻐하여 ‘홍두상사紅豆相思’라는 어필을 내려주었다. 박복규는 감격하여 이 비단을 손목에 감고 살았다고 한다. 그는 1847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했는데, 1855년 진도군수가 되었으나 4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러한 일화는 낙화 혹은 낙죽이 임금까지 관심을 가질 만큼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그것은 박창규가 낙화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기에 가능한 일이다.
박창규가 교유한 인물들도 당시 쟁쟁한 예술가들이다. 추사 김정희를 비롯하여 권돈인權敦仁, 김석준 등 추사의 영향을 받은 문인화가와 친했다. 추사의 부친과 함께 연경을 간 인연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그가 남종화풍의 격조있는 낙화를 창작했느냐의 문제는 이러한 교유관계 속에서 어느 정도 의문을 풀 수 있다. 김정희는 그의 낙화에 대해 2수의 “태제를 대작하여 제화화에 차함代台濟次題火畫作”시에서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운관화덕 볼수록 신공이 특이하여 / 雲官火德轉神工
단청과 분대 속에서 초탈했네 / 超脫丹靑粉黛中
연홍鉛汞 이라 용호龍虎 의 추환법을 터득하니 / 透得汞龍抽換法
세간의 범묵 따윈 생각조차 못 미칠 일 / 世間凡墨不煩攻
지두의 별난 맛도 범상한 공부일 뿐 / 指頭別趣也凡工
연강이라 묘법 속에 의탁하여 옮겨왔네 / 託轉蓮炕妙法中
어찌 알리 하책이 도리어 상책임을 / 寧知下策還無上
묵진이 당당해도 역시 불의 공격에야 / 墨陣堂堂亦火攻

두번째 시, 끝의 두 구절에 그에 대한 평가가 집약되어 있다. 하책에 해당하는 낙화의 “불의 공격”이 상책에 속하는 수묵화의 묵진을 당당하게 뛰어넘은 경지라는 뜻이니, 최고의 찬사를 박창규에게 보낸 것이다.
박창규는 조선시대 낙화를 새롭게 변화시킨 작가다. 그로 말미암아 낙화가 세간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그림으로 격상했고, 그 명성에 힘입어 낙화작가의 계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한국회화사에서 그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낙화를 격조 있는 남종화풍의 예술로 업그레이드시켰다는 점에 있다.

 

글 : 정병모(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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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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