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 교수의 미술사 여담 ⑨ 전북 부안 석조당간지주와 읍성의 당산들

도1 이태호, <부안읍성 당산 분포도>, 2022.12, 면지에 수묵, 36×51㎝



강문 ‘진또배기’ 나무 솟대로 옮겨간 ‘부안읍성 서문안 당산’ 내 석조신간石鳥神竿 돌솟대, 남근 형태의 ‘부안 동문안 당산’의 돌솟대 등을 보면 신라 불교의 당간이 조선시대 풍수비보風水裨補의 읍치 당간으로, 또 마을 공동체 민속신앙의 솟대나 짐대로, 성 신앙 조형물로 변천돼 왔음을 알 수 있다. 당간에서 솟대까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축으로서 추상적 조각미야말로 한국 미술의 원초적 조형미라 할만하다.

글 이태호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


지난 호에 살펴보았듯이, 고려 시대 전남 나주 동점문東漸門 밖 석당간(보물 제49호)과 조선 후기에 복원한 담양 객사리 석당간(보물 제505호)은 행주형지세行舟形地勢에서 돛대에 해당하는 석장石檣이다. 이는 풍수風水 비보사상裨補思想의 유행과 함께 한국문화의 전통으로 정착하였다. 배 모양 지세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돛대를 상징하는 탑이나 당간을 세운 일은 청주 읍성 용두사지 철당간, 화순 운주사 계곡에 천불과 조성한 천탑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 때 등장하였다. 이런 양상은 전북 부안읍성에 남은 고려 석당간과 17세기 석조 당산들도 잘 보여준다.
부안, 김제, 만경, 정읍, 고부, 고창 등 동진강과 만경강 주변의 광활한 들녘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곡창지로 꼽힌다. 부안은 이 평야의 중심 고을이었다. 동서로 긴 타원형의 산성이던 부안읍성은 해발 114.9m의 상소산(上蘇山 혹은 城隍山)을 진산鎭山으로 삼아 조성되었다. 현재 부안읍성에 있던 관아건물이나 성문뿐만 아니라 성곽도 거의 현존하지 않는다. 관아와 성문의 터로 미루어 볼 때, 상소산 정상의 소규모 산성에서 확장된 읍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중종 때 풍수의 명당 논리가 적용되며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기봉, <고지도와 지리지 속에 담긴 전라도 고을의 역사와 읍치 이해(1)>, 《고지도를 통해 본 전라지명 연구1》, 국립중앙도서관, 2015


(좌) 도2 부안 서외리 석조당간지주, 고려, 당간, 1671년 / (우) 도3 부안읍성 남문안 당산, 1689년경


호남의 곡창지 들을 굽어보는 부안읍성

북산을 배경으로 삼은 탓인지 동서로 긴 타원형의 읍성에 북문은 조성하지 않은 듯하다. 좌우와 앞이 크게 열려 있으니, 조선시대 오행의 풍수 개념으로 보면 취약점일 수 있겠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세 곳 성문에 돛대 닮은 높은 돌기둥과 수호신 돌장승을 세워 놓았을 터이다. 부안읍성과 당산의 분포도를 그려 보니, 동문·서문의 장승과 솟대, 남문의 돌기둥, 여기에 당산나무 신목神木들까지 읍치공간 내지 지역민의 공동체 문화유산으로 당산의 조합이 잘 맞아떨어진다(도1). 풍수 명당의 부안읍성 체계가 17세기에 완성된 셈이다.
부안읍성에는 평야를 굽어보며 서남향으로 관청이 들어섰다. 산정상의 고성 터에 오르면, 빙둘러 지평선이 최고의 장관을 이룬다. 관아에는 ‘蓬萊洞天’이라는 4~5m에 이르는 커다란 바위글씨가 남아 있을 정도이다. ‘봉래동천’은 신선이 사는 아름다운 천계를 뜻한다. 본디 ‘봉래산’인 금강산 같은 산세 경치를 부르는 이름인데, 풍요의 풍경을 또 다른 선계로 그리 표현한 것 같다. 진석루鎭石樓 터 암반에 활달한 초서체로 새긴 이 바위글씨는 1810년대 부안현감을 지낸 박시수朴蓍壽가 썼다고 전해진다.
너른 들녘의 풍요는 대대로 관료들과 중앙정부의 착취대상이 되어왔고, 사회적 모순이 늘 상존했다. 이런 처지를 기반으로 삼아,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은 그 명저 《반계수록》을 부안군 보안면에서 저술했다. 조선 후기 실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유형원은 여기에서 부국과 개혁의 실천방안을 찾았던 것이다.
이 지역 민중들의 빼앗김에 대한 반발은 어디보다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 말기 커다란 민중 항거의 한 유적이 부안읍내 인근의 백산白山이다. 백산은 해발 47m의 낮은 언덕 정도이지만 지평선 위에 봉긋이 솟은 돌산이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일대 농민들의 대규모 집결지로, 이곳에서 ‘백산기포’가 이루어졌다. 죽창과 농기구로 무장하고 흰옷을 입은 농민군들이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좌) 도4 부안읍성 남문안 당산의 거북모양 받침 / (우) 도5 부안읍성 동문당산 돌솟대, 1689년경


지역의 민중신앙과 역사를 담은 부안읍성 석조형물

나는 전남대학교 재직시절 1980년대 중엽부터 한국미술사나 교양 강의 중 혹은 방학 답사를 통해 부안지역을 자주 밟았다. 1990년대 갑오농민전쟁 백 주년을 전후해서는 유난히 동학유적지 안내 요청도 많았다. 백산을 시작으로 전봉준 장군 생가, 고부관아와 말목장터, 두승산 황토현, 동진강 만석보, 기념관 등 농민전쟁 관련 유적을 돌아보면서 받는 감명 중 으뜸은 너른 들의 눈맛이었다. 가슴을 열어젖히는 들을 달리며, “정말 이국적인 풍경이다”라며 찬사를 쏟아내는 첫 탐방객도 적지 않았다. 또 1980~90년대 부안지역 공동체 민속문화로 시행되던 정월 보름 줄다리기 행사나 줄 감아 옷을 입힌 모습을 보러 답사객을 이끌고 자주 방문했고, 부안지역 줄다리기에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마을에서는 인구가 감소되면서 줄다리기 참여자가 적어지니, 답사 일행을 늘 반갑게 맞아주었다.
부안읍성의 돌로 만든 조형물들은 이 지역의 민중신앙과 역사를 읽을 문화유적이다. 부안읍성 성문의 돌장승과 솟대, 당산 유적은 조선 후기 제작 시기가 밝혀진 사례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고, 근래까지 당제와 더불어 존속해 왔다. 나무로 깎아 세우는 다른 지역의 풍습과 달리 석조인 점이 유난하다. 가까이 화강암 백산을 가진 부유한 평야 지역의 조형물로 자랑인 셈이다. 백산은 화강암을 절반가량 캐낸 상태이다. 부안 내요리, 계화, 백산 등 읍성 주변 들마을에도 돌솟대나 돌장승들이 분포돼 있다. 이들의 조각미나 표현 수법은 우리네 마을 공동체 조형물의 원조로 내세울 만하다.
이들의 시원은 역시 성밖 서외리 당간지주에서 만난다. 읍성의 통치 권위를 상징하던 담양과 나주 석당간과 유사하게, 고려시대의 석조 당간지주와 조선시대 당간의 일부가 전해온다. 숙종15년(1689) 서문·동문·남문 안 읍성당산의 조성에 앞서, 현종12년(1671)에 당간을 중건해 세운 명문 기록이 새겨져 있다.


도6 이태호, <부안읍성 동문 안 용줄 감긴 돌솟대>, 2022.12, 면지에 수묵, 51×36㎝


부안읍성 당산의 원조, 고려 석조 당간지주

고려식 석당간은 이 읍성의 서쪽에 서 있다. 담양과 나주 석당간과 유사한 형식의 ‘서외리 당간지주’(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9호)이다(도2). 이 석조 당간지주 아래 고려 전기 석가탑계열의 옥개석이 현존하는 것으로 보아, 상소산의 고성古城 아래 고려 초기 사찰이 존재했을 것이다. 사리를 모신 사리공이 있어 석탑의 위층 옥개석에 해당하니, 상당히 큰 3~5층탑이었을 법하다. 조선 초기 부안읍성이 둥지를 틀며, 이 사찰 터에는 주요 유교시설로 사직단과 향교가 들어섰다.
당간의 하단에는 “崇禎紀元後 四十四年 辛亥 四月 日 立石/施主 崔哲元(???) 崔??/刻石手 ?? 朴生立”이라고 제작시기, 시주자, 각석수의 이름들이 흐릿하다. 제작 시기는 숭정 기원후 44년 신해년으로 읽혀, 현종12년(1671)이다. 고려 폐사지의 당간지주에 맞춤으로 석조 당간을 복원한, 이 시기는 담양이나 나주의 석당간 사례보다 150년가량이나 앞선다.
이 명문의 반대면에는 가운데 당간 하단에는 시주자로 여겨지는 15명 이름을 쪼았다. 그 좌우 당간지주에 새긴 글씨들은 비교적 선명한 편이다. 왼쪽 지주에는 “齋任 金尙古 崔世俊/崔錫胤 姜載文”이라 새겼다. 오른쪽 지주 상단에는 선각불좌상이, 그 아래에 “木手/僧守密/番奴/水鐵匠 鳴鶴/鄭儀吉 戒尙”이라는 글씨들이 보인다. 목수나 철 다루는 장인의 명단에는 승려들 법명이 밝혀져 흥미롭다. 그리고 ‘재임齋任’의 명단으로 보아, 향교가 당간 중건을 주도했던 듯하다. 첫 인물인 ‘김상고’가 부안지역 토호세력가로 꼽히는 사족 ‘부령(부안)김씨 사직공파’로 밝힌 바 있으며, 탐진최씨는 그 사돈 간으로 보기도 하였다. 정승모, <조선시대 石檣의 건립과 그 사회적 배경-전라도 부안·고창의 사례를 중심으로, 《태동고전연구》 10, 태동고전연구소, 1993 이 당간幢竿은 풍수적으로 행주형 지세에 돗대를 세운 석장에 해당한다. ‘짐대하나씨’ 역할을 해왔으며, 이 당간을 ‘진석鎭石’ 또는 ‘미륵彌勒’이라고 불렀다. 부안군지 《부풍승람扶風勝覽》, 1932 고려 절터의 유물에 장인 승려가 참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불교 명칭이 그같이 살아있었을 법하다. ‘서외리 당간지주’에서 윗부분이 잘려나간 당간의 높이가 745㎝이다. 당간의 기단부는 사각면이고, 당간지주 위로는 팔각 원주형이다. 몇 개의 화강암 기둥을 쇠띠 가락지를 끼워 세웠다. 현재 6개의 띠가 남아 있으며, 9개 쇠띠를 묶은 11m짜리 ‘나주 동문 석당간’과 흡사하다. 부안 것도 완전했으면, 10m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당간을 민돌로 세우지 않고, 몸에 양각을 보탠 점이 각별하다. 당간의 몸을 아래부터 위로 감싸고 오르는 용이 상당히 입체적으로 부조되어 있다. 또 기둥 중간 부근에 세 마리 거북을 양각한 점도 특이하다. 머리의 방향이 한 쌍은 하늘로 오르고, 한 마리는 땅을 향해 하강한다. 이는 다른 석당간이나 철조 당간에 없는 형식으로, 부안지역 너른 평야의 부농 고을을 나타내는 듯도 하다.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과 함께 용의 승천을 부조한 것은 기우제와 무관하지 않다. 하늘 높이 돌 장대를 세우는 일, 몸통에 용과 거북을 조각한 도상은 부안 읍성 안 석조 당산들의 모범이 되었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 특히 교통사고 예방을 기원하며 지내는 동제는 당간지주제와 거리제로 음력 정월 14일 저녁에 유교식 제례로 치러왔다. 동제는 당간 앞에서 모시는 지주제와 오거리에서 거리제를 병행했던 것 같다.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진행하는 읍성 동제의 후반부에 해당한다. 국립민속박물관·전라북도, 《전북지방 장승·솟대 신앙》, 1994. ; 전라북도 문화원연합회, 《전북의 돌문화》, 2015


도7 부안읍성 동문당산, 1689년경


긴 장대 모양으로 하늘로 솟은 남문안 당산

부안읍성 남문안 당산(전라북도 민속자료)은 돌기둥만을 깎아 홀로 세운 석조신간石造神竿으로 4.7m 높이다. 부안읍 동중리 남문 터이던 후선루(候仙樓, 혹은 聚遠樓)의 위치를 나타내는 수호신 격으로 보인다. 사각기둥 형태의 밑 둘레는 1.4m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게 만들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하늘로 솟는 상승감이 감동적이다(도3). 별도로 상하를 끼워 세운 상단에는 거북이 세 마리가 양각되어 있다. 이들은 돌기둥의 하늘 세움과 함께 서외리 당간에서 따온 상징물이다.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은 돌기둥을 떠받는 돌 받침에도 보인다. 자연석 상태의 몸통에 동그란 눈동자의 거북 얼굴에 해학이 흐른다. 훈련되지 않은 민간 조각가의 질박한 심성이 물씬하다(도4).
북쪽 아랫부분에 네 열로 쓴 행서체의 시주자로 24명이 보인다. (施主 崔致興 崔後寜 金崇(?) 張?? ???/吳信廷 金勝一 金世昌 金應先 金益溫 曺衆益 崔三龜/沈一源 女 牟月 金成道 金恩興 金從全 金施? 金??/金弘? 朴主益 金茂? 金?? 李??) 마모가 심한 편이다. 부안 김씨로 여겨지는 김씨가 많으며, 여성의 이름 ‘모월牟月’도 눈길을 끈다. 이들 시주자 명단 옆면으로는 ‘崔浴先(?)’ ‘金世辟(?)’ ‘崔??’ 등 3명의 ‘石手’ 이름도 보인다.
여기에 제작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아 아쉽다. 이 남문안 돌당산도 부안읍성 서문안 돌솟대와 돌기둥에 새긴 명문 연대 1689년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외리 당간의 선례 형식을 따른 점으로 볼 때, 1671년과 1689년 사이에 동문과 서문 당산들보다 먼저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겠다. 동문 당산과 같이 정월 보름 동제를 지냈으며, 줄다리기를 마치고 난 뒤 그 새끼줄을 돌기둥에 감아올리는 행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풍년과 평안, 액맥이 등의 소원을 빌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축제였을 법하다.


(좌) 도8 부안읍성 동문당산 돌장승 / (우) 도9 부안읍성 서문안 당산 측면, 돌장승과 돌솟대, 1689년


동문안 당산에 남아 있던 남근 형태의 줄감기

남문의 줄다리기는 일찍이 중단되었던 데 비해, 청원루淸遠樓였던 동문 당산제에는 1990년대까지 유지했다. 줄다리기와 그 줄을 돌솟대에 감는 행사가 격년제로 이루어졌다. 농촌인구의 급감으로 행사 자체가 어려워졌던 상황에서, 2003년 돌솟대 꼭대기의 오리 조각이 도난당했다. 이후 두 장승 사이에 미니어처 형태로 새끼줄을 감은 돌솟대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 염원 탓인지 최근 2019년에 되찾아 나신으로 복원해 놓았다(도5).
두 돌장승과 함께한 ‘부안읍성 동문안 당산(민속문화재 제19호)’은 동중리에 김제 전주로 가는 큰 도로가 나면서 원위치를 잃었다. 3.2m의 돌기둥에 새 조각을 얹은 돌솟대, 석조신간石鳥神竿이 중심을 이룬다. 새는 돌기둥 꼭대기에 납작하게 앉은 오리 형태이다. 이번 답사 때 맨몸을 드러낸 돌기둥을 살피니 하단에 글씨들이 보였다. 마모가 심한 편이고, 남문안 당산이나 서문안 돌기둥과 유사한 시주자 명단 같다.
1980~90년대 정월 보름날 격년제로 하던 동문 줄다리기는 남녀로 편을 갈라 진행되었다. 여자 편이 이겨야 길하다 해서, 청년들은 여자 편에 도우미로 섰다. 호남지역의 줄다리기가 대부분 그랬으며, 모계사회의 전통이겠다. 줄다리기를 마친 뒤 왼쪽으로 꼰 새끼 동아줄을 이 돌솟대 기둥에 아래서부터 왼쪽으로 감아올렸다. 이 작업은 서외리 당간의 용 부조를 떠올리게 한다. 동아줄 이름도 용줄이라 이르며, 이 과정을 ‘옷을 입힌다’라고 불렀다. 남근의 형태로 멋지게 마무리해야 풍년이 든다며 지성스럽게 다루었다. 전체적으로는 땅에서 솟은 남근의 귀두 위에 새가 날아와 앉은 모습이다. 1990년 전후에 찍은 옷 입힌 모습의 사진을 보고, 답사 시절을 회상하며 그려 보았다(도6).
줄다리기는 농경문화의 공동체 놀이이면서 밀고 당기는 과정이 성희와 관련해 유감주술類感呪術 행위로 해석된다. 줄다리기 중에 노래나 소리 지름에도 노골적인 성 관련 대사를 쏟아내는 짓도 마찬가지이다. 줄다리기의 새끼줄을 돌기둥에 남근 모양으로 감아낸 조형 행위는 다산과 풍요를 동일시한 데서 유래했을 것이다. 줄다리기와 줄감기의 성신앙적 표현은 부안읍 내요리 돌모산 당산, 고창읍 오거리 당산, 김제 월촌 당산, 영광 꿩뫼마을 당산 등 호남평야에 분포되어 있다. 부안 우동리 당산은 나무솟대를 세우며 줄감기가 이루어졌으며, 고창 성남리 당산의 경우는 줄만 말아 신목 옆에 조성하였다. 이태호,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 여성신문사, 1998
이 돌솟대는 벅수로 불리는 두 기의 돌장승과 함께 동문안 당산으로 존재한다. ‘上元周將軍’이라 이름을 새긴 할아버지 장승은 벙거지를 써 포졸과 닮은 수호신으로 조각했다. ‘下元唐將軍’인 할머니는 민머리로 앞니를 드러내고 살짝 찌푸린 표정이다. 이마에 백호를 표시해 수호신의 표정을 강조한 점이 눈에 띈다(도7, 도8). 그러면서도 퉁방울 눈에 조선 후기 돌장승의 순박함과 해학미가 흐른다. 서문안에도 이들과 똑같은 이름의 장승이 서있다. 비슷한 크기이나 동문안 장승의 조각이 선명하며, 돌의 모양은 서문안 장승이 조금 홀쭉한 편이다. 곡창지대에 살던 농부 부부의 후덕한 인상을 떠올리게 한다. 18세기 호남지역 돌장승의 시조격인 셈이다. 유홍준·이태호, <조선후기 장승의 미술사적 규명>, 《한국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학고재, 1997


도10 부안읍성 서문안 당산, 돌솟대 아랫 기단석의 성혈자국


1689년에 제작된 서문안 당산에서 읍성 동제를 시작

부안읍성 당산은 성밖 1671년의 ‘서외리 당간지주’ 이후, 동·서·남쪽 세 성문에는 할아버지·할머니 돌장승과 돌기둥, 돌솟대 등이 세워졌다. 서문안 당산에는 동문보다 돌기둥이 하나가 더 추가되어 있다. 윗부분이 잘린 형태로 보면, 새가 앉은 돌솟대였을 게다(도9). 현재 2.08m만 남아 있고, 중간 부러진 윗부분에 새를 음각해 놓았다. 할머니인 이 돌기둥 당산은 넓이로 보아 옆의 원형이 보존된 솟대보다 원래 훨씬 컸으리라 여겨진다.
이들의 조성시기는 ‘부안읍성 서문안 당산(민속문화재 제18호)’의 돌솟대와 선돌에 밝혀져 있다. 서문은 개풍루凱風樓였고, 행정구역은 서외리이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명문에 의하면 ‘康熙 28년(1689, 숙종 15) 2월’에 세웠다. 경비를 댄 ‘화주는 가선대부 품계를 받은 金成立이고 시주자는 김진창, 조갑신’ 등 14명이며, 돌조각을 담당한 ‘刻手는 金世廷과 崔아무개’로 밝혀져 있다. (康熙二十八年 己巳二月 日 立 化主 嘉善大夫 金成立 施主 金辰昌….. /刻手 金世廷 崔??/康熙二十八年 己巳二月 日 立 大院臣 張世洵 ??? ??? ???/金思仁 曺甲申 ??? ???) 이때 부안현감은 성석개成碩蓋였다. 《숙종실록》 15년 윤3월 27일 아쉽게도 그의 행적이 더 찾아지지 않는다.
여기서 조갑신曺甲申이라는 이름은 갑신년(1644)생으로 통상의 서민층 작명법이다. 읍내의 부농富農이었을 법하다. 가선대부나 앞의 서외리 당간과 남문안 당산에 보이는 부안의 양반 세족이 서민층과 어울려 있어 주목된다. 이는 당산 조성에 양반 지주와 농민이 공동으로 출자했음을 시사하며, 양대 계층이 화합된 호남지역 공동체 문화로써 돌장승과 솟대의 건립배경을 읽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곳 부안읍성의 석조물 당간과 당산에 등장한 물주에는 여성이 포함되고, 승려 장인과 조각가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다.
3.78m 높이의 돌솟대에 앉은 새는 통통한 오리가 날아와 살포시 앉은 모습이다. 새가 얹힌 이 돌솟대는 할아버지 당산으로 ‘철륭’이라는 별칭도 있다. 돌기둥은 거칠게 깎은 네모형으로 위를 좁혀 깎았다. 거친 정자국의 리듬이 마치 현대 추상미술의 맛을 지녀 일품이다. 땅바닥의 돌솟대 초석을 살피면, 아기 주먹 크기의 여러 성혈性穴 자국이 또렷하다(도10). 성혈 파기는 성행위를 모방한 유감주술類感呪術로 해석되며 다산을 상징한다. 동제 때는 풍년을 기원하듯 구멍에 쌀을 채워 넣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혈은 다산과 풍요를 동일시했음을 알려주는 성신앙적 흔적으로, 자연 바위부터 고인돌, 석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축으로 원초적 조형미 지녀

숙종15년(1689)에 조성한 이 ‘부안읍성 서문안 당산’에 조합된 석조신간石鳥神竿 돌솟대는 강릉 강문 ‘진또배기’ 같은 나무 솟대로 옮겨갔다고 여겨진다. 이태호, <강릉 강문 진또배기 上, 월간민화 p95, 2022.2 마을의 나무 새, 짐대 혹은 솟대는 돌당간의 석장에서 나온 것임을 알려준다. 또 ‘부안 동문안 당산’의 돌솟대에는 줄다리기를 한 뒤 새끼줄을 돌기둥에 감은 남근 형태는 수호신에 다산과 풍요의 성신앙적 요소를 보탠 것이다. 신라 불교의 당간이 조선시대 풍수비보風水裨補의 읍치 당간으로, 또 마을 공동체 민속신앙의 솟대나 짐대로, 성 신앙 조형물로 복합된 셈이다. 당간에서 솟대까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축으로서 추상적 조각미는 앞서 자주 언급했듯이, 한국 미술의 원초적 조형미라 할만하다.

이태호 |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및 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남대학교 교수·박물관장,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 원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이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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