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옥의 부채놀이 – 행복바람, 민화風

민화작가로서 이정옥은 조선시대 서민의 애환을 담고 있는 ‘서민의 그림’ 민화의 정신과 조형세계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석, ‘오늘의 그림’으로 재창조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과시해온 화가로 압도적인 스케일과 선이 굵은 호방한 작품세계를 자랑한다. 부채는 그가 20여 년 동안이나 집착하며 안고 다닌 무거운 숙제였다. 그의 ‘민화놀이’가 펼쳐 보이는 부채미술의 진수와 만난다.


부채 전시회에 대한 통념 깨는 용감한 전시

포항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민화계의 중진 죽리竹里 이정옥 작가의 부채전 <이정옥의 민화놀이-행복바람, 민화風>이 지난 8월 13일 포항 포스코 갤러리에서 막을 올려 여름 민화전의 대미를 장식하며 성황리에 이어지고 있다.
이정옥 작가의 19번째 개인전이기도 한 이번 부채전은 무엇보다 여름 시즌의 단골 레퍼터리인 ‘부채전’에 대한 오랜 통념을 뒤흔드는 새롭고 용감한 시도로 가득 찬 획기적인 전시회라 할 만하다.
일부 예외적인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부채전이라고 하면 바람을 일으키는 넓적한 면, 즉 선면扇面에 그림을 그린 선면화扇面畵 전시회를 말하는 것이었다. 부채의 종류와 모양은 단조로웠고, 주제와 형식 등 그림의 스펙트럼 역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정옥 작가의 부채전 ‘행복바람, 민화풍’은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발상과 개념, 조형과 구성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부채 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보여주고 있다.

부채미술의 영역 넓힌 새로운 시도

이번 전시회에서 선보이는 이정옥 작가의 작품은 크게 네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가장 고전적이고 일반적인 형식인 선면화扇面畵를 민화에 적용한 작품이다.
전통적으로 선면화는 대체로 간결한 수묵화나 담채인 경우가 많다. 그림 부채를 즐겨 사용한 계층이 이른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지향한 선비 계층이었던 탓이다. 그러나 이정옥은 그지없이 화려한 채색화이자 현실적인 염원을 담은 길상화이기도 한 다양한 민화로 선면을 장식, 부채와 민화의 절묘한 하모니를 연출해 내고 있다. 선면화로서 민화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 영역은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요 장면을 부채미술로 표현한 작품으로 사실상 이번 전시회의 하이라이트이자, 부채미술에 대한 작가의 철학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무희들의 모습을 부채 자루로 삼거나 무희들의 치마를 선면으로, 몸체를 부채자루로 처리하는 등의 시도는 기발하기도 하거니와 유구한 우리 부채문화의 아이덴티티를 상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부채로 엮어낸 삶의 스토리텔링

세 번째 영역은 부채미술 하면 으레 ‘선면화’를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오랜 통념에 일침을 가하는 작품들이다. 부채의 선면에만 고정되었던 시선을 부채자루로까지 확대, 부채 자루를 재치있고 해학적이며 아름다운 민화적 소재로 장식해 민화의 무궁무진한 조형세계를 보여주는 한편 부채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목공기계를 작업실에 들여놓고 직접 목공작업을 하는 힘겨운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 또 하나의 영역은 다양한 부채의 조합과 배열 등 창의적인 디스플레이로 흥미진진하고 더러는 가슴 뭉클한 스토리텔링을 이끌어 낸 작업이다. 갤러리 벽면에 고구려 고분벽화가 되살아 나기도 하고, 또 다른 벽면에는 부채로 형상화된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유유히 노니는 어해도가 그려지는가 하면 나비가 날고 고목이 얼크러진 화조도가 그려지고 가슴 벅찬 무궁화 동산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설치미술의 개념을 부채미술에 도입한 것으로 이렇듯 대담한 스케일은 기존의 부채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부분이다. 한마디로 이정옥 작가의 이번 부채전은 아득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채의 기원과 그 변화무쌍한 변천사를 더러는 묵직하게, 더러는 이를 데 없이 해학적으로 보여주는 대담하고도 참신한 한 바탕 부채 잔치라 하겠다.

40년 민화 외길 걸어온 원로 작가의 힘

민화작가로서 이정옥은 조선시대 서민의 애환을 담고 있는 ‘서민의 그림’ 민화의 정신과 조형세계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석, ‘오늘의 그림’으로 재창조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과시해온 화가이다. 특별히 서민의 생활공간을 장식한 이른바 ‘생활 미술’로서의 속성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적용한 ‘리빙아트’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테마이다. 이번 부채전도 사실은 그런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정옥 작가에게 부채는 이번 한 번의 전시회를 위해 단기간 준비한 작품이 아니라, 무려 20여 년 동안이나 집착하며 안고 다닌 무거운 숙제였다. 이번 전시회에 다 걸지 못한 작품이 아직도 수백점이나 된다는 사실이 이점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정옥 작가는 대구 가톨릭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에서 무신도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애초 전공대로 서양화로 화가생활을 시작했으나 가장 ‘한국적인 그림’에 대한 자각과 열망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낯선 그림인 ‘민화’로 눈을 돌려 이후 40여 년을 외길로 민화작가로 살아왔다. 시간을 쪼개 쓰는 치열한 자세로 작품에 몰두하며 이제까지 18번의 개인전과 수백 회에 이르는 단체전, 그룹전을 치렀다.
한국의 대표적인 길상화이자 채색화라는 민화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그는 여성답지 않은 압도적인 스케일과 선이 굵은 호방한 작품세계를 자랑한다. 현재 한국민화센터 이사, 진솔당규방문화 대표로 일하면서 민화의 보급과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글 유정서 기자 사진 이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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