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성 필 <하외도河隈圖> 10폭 병풍
– 벼슬살이하는 사대부의 향수와 자부심 어린 풍경

<하외도>의 중심 소재는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세거해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 집거촌集居村인 하회마을로, 대표적 사대부의 원림인 하회마을의 모습에서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작품 속 서문과 시에는 벼슬살이하는 사대부의 고향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 병풍을 제작한 류언우가 얼마나 고향산천을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의성 필 <하외도> 10폭 병풍은 안동 하회마을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인근의 승경 여덟 곳의 경치, 첫 폭(1폭) 서문, <하외도>를 그리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이 적힌 맨 마지막 폭(10폭)으로 구성되었다.(도1) 이 병풍의 1폭에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서문과 정유길의 시가 있고, 병풍 2폭부터 8폭까지는 제1곡曲 도산서원, 제2곡 안동부 전경, 제3곡 석문정石門亭, 제4곡 수회壽回, 제5곡 망천輞川, 제6곡 하회河回, 제7곡 구담 九潭, 제8곡 지보知保 등 안동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이 묘사됐다.
하회가 고향인 풍산 류씨 류중영(柳仲郢, 자는 언우彦遇, 1515-1573)이 평북 정주라는 먼 곳에서 벼슬살이[목사牧使]를 할 때, 오랜 타향생활로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화공을 시켜서 <하외상하낙강일대河隈上下洛江一帶圖>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이러한 연유를 알게 된 류중영과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의 후손이 화원을 시켜 제작한 이모작移模作이 바로 <하외도>로 1828년에 그린 것이다.

류언우의 고향유정

병풍의 1폭에는 류준영이 퇴계 이황에게 병풍의 서문을 요청하였고, 퇴계가 이를 작성하여 서애 류성룡 편에 부친다는 내용과 퇴계의 시, 그리고 정유길의 시가 묵서로 적혀있다.(도2) 양진당에 이와 같은 현판이 있는데 현판과 그림의 제목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글의 내용은 양진당에 있는 현판의 내용과 동일하게 새겨져 있다. 이 글의 해석은 안동민속박물관에서 발행한 《安東의 名賢堂號Ⅰ》에서 인용하였다.

退溪先生題河隈畵屛 並書

풍산 류언우가 정주목사로 있을 때 화공을 시켜서 하외일대(하회를 지칭하는 듯)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은 하외는 공의 마을이라, 먼 벼슬길에서 고향생각으로 그랬을 것이다. 그 후 정주목사로 갔을 때 중국칙사 성한림 헌과 왕급사새가 오는데, 동래 정임당 원길이 영위사로 중원 박사암 화숙[朴淳, 1523-1589]이 영접사로 영가 김낙곡, 운보[金德龍]가 보고 모두 찬탄하여 시를 지었으니 참으로 한때의 성사이다. 그해 겨울에 언우가 사임하고 서울에 왔다가 곧 청주목사로 가게 되었는데 떠날 때 병풍을 나에게 보이고 제시를 구하기에 언우의 청을 물리칠 수도 없고 또 나의 고향도 낙동강 상류에 있어 벼슬살이로 오래가지 못한 터이라 이 병풍을 보니 감개무량하여 시속체로 두 마디를 지어 청주에 있는 공의 둘째 아들 검열랑[西厓 柳成龍, 1542-1607]에게 부친다. 일찍이 본 소동파의 금산사 시에 “내 집이 강물 발원지에 있는데 전원이 있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강물과 같도다”는 것과 같이 우리 두 사람의 처지가 비슷하므로 맨 끝에 써 보낸다.

정주 백성들이 공의 선정을 노래하는데 [定民方詠去思吟]
또 다시 남쪽으로 전임하게 되었네. [又佩湖州印去今]
조정 내직에는 인원이 남아 발붙일 곳이 없으나 [臺閣剩員無寄足]
지방은 곤란이 많아 관심거리가 되었네. [壑溝多瘠更關心]
서울 집에서 병풍을 보고 읊으니 [風流洛舍時看畵]
천문이 광활하여 옷깃만 우루 만진다. [曠蕩天門幾撫襟]
나도 또한 고향을 떠나 돌아가지 못하여 [我亦出山乖遠志]
병풍을 바라보고 한탄만 하네. [一屛相對意難禁]
낙동강 위에 하외는 이름난 명승지인데 [洛上河隈擅勝名]
공이 일찍이 이곳에서도 백구와 벗을 삼았는데 [公曾於此占鷗盟]
벼슬살이로 얼마나 고향을 돌아갈 꿈을 꾸었나. [幾年遊宦憑歸夢]
뒷날 돌아가서 여러 곳을 마음껏 가꾸려무나. [他日丹靑感列英]
마음에 가득한 여한 눈앞에 있는데 [滿意烟霞常在目]
조그만 영달로 그 정을 잊을 소냐. [一毫榮辱可忘情]
그대로 인하여 나의 강가에 흥을 돋우니 [因君起我江源興]
춘풍 따라 고향가서 밭 갈며 살고 싶네. [欲趂春風返舊耕]

右 林塘先生(鄭林塘, 惟吉 後爲左議政)

낙동강 물은 불어서 삽짝까지 왔는데 [洛江淸漲欲侵扉]
십리안에 있는 배는 이곳 오기 어려우네. [十里帆檣到此稀]
조령산천은 기운을 뻗었는데 [鳥嶺山川通氣候]
용궁 수목에는 노을이 끼었네 [龍宮樹木雜烟霏]
땅은 그림 따라 궁색함이 없는데 [地從畵筆來窮塞]
사람들은 풍진세월 고향 꿈만 꾸네 [人在塵疆夢舊磯]
상마가 가득한 친구 마을에 [一曲桑麻知甫里]
어느 때 같이 가서 구경할거나. [何錄同駕鹿車歸]

위에서 <하외도>를 그리게 된 연유는 당시 사대부들이 벼슬살이하면서 타향에서 근무할 때에 고향에 두고 온 자신들의 전원을 그리워하는 고향유정故鄕有情의 심정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였던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서문을 쓴 퇴계도 서문의 시에서 자신도 서울에서의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춘풍따라 고향가서 밭갈며 살고 싶네”라고 했다. 이들보다 앞선 시기의 사람인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1555)도 서울에서 벼슬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유정으로 고향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린 <분천이천원림도汾川伊川園林圖>를 제작하여 침상의 병풍에 걸어 두었다고 한다. 퇴계선생의 서문을 보면 <하외상하낙강일대河隈上下洛江一帶圖>를 보고 여러 명이 제시를 지었는데 그 중 정유길鄭惟吉의 시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전쟁통에 없어졌다고 한다. 후에 이러한 사실을 안 풍산 류중영의 후손인 류철조와 동래 정유길의 후손인 정원용이 이를 애석하게 여겨 화원 이의성에게 <하외도>를 하회도를 본 떠 병풍을 두벌 만들도록 부탁했다. 여기에는 안동과 하회일대의 승경에 동래 정씨 선조 묘가 있는 순흥 부근의 구담과 지보를 <하외도>에 포함시켜 선조의 덕망을 기리고 자손들에게 경모의 마음을 품도록 하였다는 사실이 병풍의 10폭에 기록되어 있다.(도3)

제1곡 도산서원陶山書院

병풍의 제2폭부터 1곡이 시작되는데 제1곡의 중심에 하회마을을 배치하지 않고 도산서원을 배치한 것은 아마도 당시 안동지방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퇴계 이황을 정신적인 지주로 존경하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하외도> 병풍의 1곡에서 8곡까지 대부분의 그림들은 전체적인 경치를 조감할 수 있는 시점으로 그렸다. 산의 모습은 구륵법을 사용하였고 수목들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준법에 의존하기 보다는 약간의 선염과 미점을 사용하여 그렸다. 이에 비해서 강가의 수목들은 묵법을 사용하여 물을 많이 먹은 울창한 숲으로 그렸는데 실경을 그리는 우리식의 산수표현은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본받은 듯하다.(도4)

제2곡 안동부安東府

조선시대의 안동부는 8개의 속현과 3개의 부곡을 거느리는 형태를 대체로 조선후기까지 유지했다. 안동부성安東府城의 모양은 동서남북에 문이 있는 정방형의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지금 안동의 지명 중에서 남문동, 서문안(서문 안쪽이란 뜻), 남문밖, 남문안 등 성문을 중심으로 한 명칭들이 사용되고 있다. <하외도> 3폭의 안동부성은 1798년경에 편찬된 《신증안동부여지지新證安東府輿地誌》에 수록된 안동부의 모습(도5)과 거의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안동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정방형으로 성곽을 둘러싼 성벽 동서남북에 성문이 위치한 모습이나 남문을 성의 남쪽에 있는 문이라는 뜻의 진남문鎭南門이라 하는데 주변에 인가가 많이 존재하였던 장면으로 보아 진남문이 주 출입구였던 것으로 보인다.(도6)

제3곡 석문정石門停

석문정은 현재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에 있는 청성산 중턱에 있는데 전망이 좋은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석문정은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이 선조 20년(1587)에 지은 정자이다. 석문이라고 한 것은 정자 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 바위가 마치 문과 같아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석문정에서 서쪽을 내려다보면 풍산일대의 너른 들판과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다.
그림 속에는 정자가 세 개 있는데 아마도 화면 제일 가운데 있는 정자가 석문정일 것이다. 석문정 아래에 있는 정자는 송암 권호문(松巖 權好文, 1532-1587)이 거처했던 연어헌鳶魚軒으로 추정된다. 석문정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넓은 낙동강에 잎새처럼 떠 있는 나룻배와 마주보는 바위산과 암자, 희미하게 그려진 초가집의 형태들이 보인다. 이들을 표현할 때는 유달리 작은 미점을 많이 사용했고 바위는 명확한 필선으로 바위 언덕과 산을 묘사했다.(도7)

제4곡 수동壽洞

풍산과 안동 사이 국도에서 풍산읍의 동쪽 경계 부분과 안동시의 서쪽 끝 송야교 부분을 이어주는 길로 들어서면 중간쯤 되는 지점에 수동이 있다. 수동은 풍산들의 서북쪽 한 끝을 호선으로 감싸고 있는 산자락 끝에 자리한 마을이다.
수동은 학운천(중수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으로 이 마을에는 국신당이 있으며 이와 관련한 용마의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했을 때 따르는 부하가 5, 6명에 불과해 풍산 상리에서 허수아비를 병정을 세우고 동쪽으로 피신하여 팽나무가 많은 숲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이에 무사함을 기리며 이곳 수동마을 사람들이 공민왕의 영정을 모시는 국신당을 세우고 고사를 지내니 효험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국신당은 마을을 지켜주는 동신洞神을 모시는 사당으로 정월대보름에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동제洞祭를 지낸다고 한다.
그림의 하단에 있는 마을이 수동마을로 보이고 화면의 우측 산 아래 있는 건물은 국신당으로 추정된다. 그림 상단의 산들은 학가산(870m), 상산, 천등산(575m), 조운산 등으로 보인다. 낙동강을 따라서 버드나무인지 활엽수가 늘어서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도8)

제5곡 망천輞川

풍산읍 마애리는 마을의 생김새가 중국의 망천을 빼닮았다고 해서 망천이라 불렸다고 한다. 망천의 망輞은 ‘바퀴 테망’자로 망천은 ‘바퀴 테처럼 강물이 감싸고도는 아름다운 하천’이라는 뜻이다. 《영가지永嘉誌》에 “절벽이 옥을 깎아 지른 듯 여러 봉우리가 삼면에 경치를 이루고 넓은 들 맑은 모래, 그 경치와 기상은 언어로 다 형용하지 못하겠다”는 찬탄의 내용이 나온다.
그림에서 망천절벽은 좌측 상단의 절벽인 듯하고 우측하단은 마애리라고 하는 망천마을인데 강물이 마을 동쪽에서 서북으로 굽이를 돌려 절벽 앞에는 물이 고여 소沼를 이루며 흘러간다.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강 언덕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묘사되었다.(도9)

제6곡 하회河回

안동의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하회란 이름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2010년 유네스코에서 열 번째로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도 기와집과 초가집이 잘 보존된 곳이며,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謙庵 柳雲龍, 1539-1601)선생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형제가 자라난 곳으로 형제의 이야기가 전하는 겸암 정사와 옥연정사가 부용대 아래에 좌우에 있다.
마을의 동쪽에는 태백산에서 뻗어온 화산(327m)이 주산이고 이 화산의 줄기가 뻗어나오면서 낮은 구릉지를 형성해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다. 마을의 가옥배치 기본구조는 큰 기와집을 중심으로 주변에 초가집이 있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신분구조의 단면을 명확히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특히 마을의 가옥들은 우리의 전통적인 남향이나 동남향의 방향과는 일치하지 않는데 이는 마을을 둘러 흐르는 낙동강을 향하여 집을 지었기 때문에 마을 가옥전체를 보면 원형의 구도속에 있다고 하겠다. <하외도>병풍을 그린 이유나 작품의 필력을 보더라도 6곡 ‘하회’는 병풍의 중심이 되는 그림인데 하회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부감법으로 그려 겸재의 금강산도의 시점과 유사하게 보인다. <하외도> 1곡부터 8곡까지의 그림 중에 가장 세밀하게 그려서 지금 보아도 실제의 정경과 거의 흡사하다.(도10)
‘제6곡 하회’를 그릴 당시 공중촬영 장비가 없었던 바를 생각한다면 이 그림의 시점은 세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화면의 좌측 하단부터 중간쯤까지 가장자리를 따라 그린 부용대 절벽에서 강 건너 하회마을 바라보는 시점, 그림 하단의 현재 광덕삼거리의 강가에서 화산을 바라본 시점, 하회마을의 만송정 숲에서 부용대 절벽을 바라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다. 하회마을의 중요한 경치 16가지를 하회 16경이라고 하는데 이는 서애의 손자 졸재 류원지(拙齋 柳元志, 1598-1674)가 그의 문집인 《졸재집》에 ‘하회십육경’이란 제목의 한시漢詩에서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하회십육경의 위치와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화면 속의 지형지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① 겸암정사, 옥연정사, 층길
우선 마을에서 부용대 절벽을 바라볼 때 절벽 좌측에 있는 건물이 겸암정사(謙庵精舍, 1567년 건립)이고 우측에 있는 건물은 옥연정사(玉淵精舍, 1587년 건립)이다. 마을에는 빈연정사(賓淵精舍, 1583년 건립)와 원지정사(遠志精舍, 1576년 건립)라는 두 개의 정사가 있는데 부용대쪽의 겸암정사와 빈연정사는 화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빈연’은 부용대 아래에 ‘깊고 맑게 흐르고 있는 못’을 의미하는데 두 정사는 겸암 류준용이 건립한 것이고 옥연정사와 원지정사는 서애 류성룡이 건립한 것으로 겸암과 서애 두 형제를 중심으로 마을의 16경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회의 그림에서 특징적인 것은 부용대 절벽 좌우측에 상세히 그려진 겸암정사와 옥연정사를 잇는 층길로 이는 겸암과 서애 두 형제의 우애를 상징한다. 층길은 옥연정사에서 겸암정사로 이어진 절벽길로 동생인 서애가 형인 겸암을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던 길이었다고 한다. 또한 겸암정사 앞에 물속에 솟아있는 바위는 형제바위로 생각되는데 이는 ‘하회십육경’의 제1경 ‘입암청장立巖晴漲’으로 실물보다 과장되게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② 마암노도, 부용대
‘하회십육경’ 제2경은 ‘마암노도馬巖怒濤’로 마암은 옥연정사와 겸암정사 가운데쯤에 있는 물 가운데로 툭 튀어나온 바위다. 이 바위는 말처럼 생겨 선비의 기개를 의미하고 노도는 성난 강물이 지나가는 모습으로 물이 바위에 부딪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졸재는 부용대를 적벽으로 생각했고 낙동강을 적벽강으로 생각하여 부용대를 ‘하회십육경’의 제12경 ‘적벽호가赤壁浩歌’라 하였다. 부용대에서 본 마을의 중앙에는 양진당과 충효당이 자리 잡고 있고, 빈연정사와 원지정사가 부용대 적벽을 마주하고 있다. 적벽은 소동파(蘇東坡, 蘇軾, 1307-1101)의 적벽부赤壁賦로 유명하다. 적벽부는 소동파가 신종 5년(1082년)에 친구 양세창과 호북성 황주의 한천문 밖 장강(長江, 양자강) 아래 암벽을 적벽이라 하는데 이곳에 배를 띄워놓고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생각하며 지었다고 한다. 부용대의 적벽호가도 소동파의 적벽부를 생각하며 이에 비견되는 호기를 표현하였다고 보인다.

③ 하회마을의 통로 3곳
화면은 3면이 낙동강으로 둘러싸인 하회마을의 통로 세 곳을 중심으로 삼각형의 구도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외부와 통하는 지점 첫 번째가 육로, 두 번째가 나룻배로 나룻배는 만송정 숲에서 강 건너 옥연정사 앞 모래사장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세 번째는 섶다리인데 그림에서 나룻터와 대칭되는 곳에서 지금의 광덕리를 건너가서 의성 군위에 연결해주는 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섶다리는 전통 다리로 그림을 그릴 당시 하외마을에서 안동의 남쪽 지역과 연결된 중요한 통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섶다리는 통나무, 솔가지, 흙 등 자연의 재료로 만든 전통방식의 다리이다.(도11) 그림 속의 하회마을은 별도로 설명해야 할 만큼 많은 경물들이 있어서 다른 한편의 글로 쓰고자 한다.

제7곡 구담九潭

구담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아홉 개의 깊은 물구덩이[소沼]를 의미하는데 이 소는 낙동강이 안동지역에서 유달리 물굽이를 많이 만들면서 흘러내려 생긴 것이다. 이곳에 있는 마을 이름이 안동읍 풍산리 구담리이다. 안동시청 홈페이지에는 구담리에 관한 전설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가난하여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았지만 한 번도 남의 것을 탐낸 적이 없는 마음씨 착한 노인이 장성한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들 부자는 농사 지을 땅이 없어 남의 집 머슴으로 근근이 삶을 꾸려 나갔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닥쳐 그 해 농사는 이미 수확할 곡물이 없어 망치게 되어 모든 마을 사람들이 가뭄이 들어도 논에 물을 풀 수 있는 우물을 파기로 결정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이곳을 파면 물이 나올 것이라는 장소 일곱 곳을 정하여 파내려 갔지만 어느 곳에서도 물은 솟지 않고 오히려 웅덩이를 파다가 그만 착한 아들이 흙더미에 깔려 압사하는 큰 사고가 났고, 모든 마을 사람들은 실망하여 일손을 놓았다. 노인은 홀로 여덟 번째 웅덩이를 혼자 힘으로 파내려갔지만 이곳에서도 물이 나지는 않았다. 노인은 기진맥진하여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자는데 홀연히 백발노인이 나타나 ‘뒷산 고목나무 옆에서 100보 떨어진 곳에 웅덩이를 파보아라’하고는 사라졌다. 꿈에서 깬 노인이 산신령이 가리켜 준 곳을 파니 놀랍게도 굵은 물줄기가 솟아 못을 이루고 가뭄을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못이 남아 있으며 못이 아홉 개나 있다고 하여 구담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은 안동댐 공사로 인하여 방천이 생기고 개발이 되어 구담의 옛 모습은 사라지고 낙동강에는 구담습지가 생성되어 자연의 보고가 되었다.
그림에서 화면의 하단에 수양버들이 있고 활엽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 구담리이고, 낙동강이 좌측에서 우측으로 U자형으로 돌아나가는 곳에 한가로이 떠있는 나룻배가 있는 곳이 구담으로 보인다. 강건너 마을은 예천군 지보면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봉화산(401m)이다.(도12)

제8곡 지보知保

지보는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를 의미하는 듯하다. 도장리는 원래 지보리, 지포리芝圃里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때 ‘도장리’로 불렸기 때문이다. <하외도>에 구담과 지보가 7곡과 8곡에 포함된 것은 10폭에서 ‘동래 정씨 정유길의 후손인 정원용이 풍산 류씨 후손인 류철조와 인연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동래 정씨의 집안 세력과 관계있을 것으로 보인다. 동래 정씨가 예천 구담과 지보에 많이 살게 된 것은 고려 공민왕 때 정승원이란 사람이 정치의 혼란을 개탄하여 용궁현 구담촌에 자리를 잡은 것에서부터다.
동래 정씨에게는 지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지역이다. 지보에 조선초기 직제학을 지낸 정사(鄭賜, 1400-1453)의 묘가 있는데, 직제학 정사의 묘는 옥녀가 옆으로 누워있는 옥녀측와형玉女側臥形이라는 명당으로 묘혈이 여자의 자궁에 해당한다. 지보리의 지형이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있는 형국이고 그 중심이 되는 여근에 정사의 묘가 자리 잡아 천하의 명당이라고 전한다. <하외도>를 만들 당시 동래 정씨는 이 병풍의 서문에 시를 쓴 정유길로부터 11대에 걸쳐 11명의 정승이 난 명문거족이었다. 이런 연유로 또한 명문거족인 풍산 류씨와 합작으로 자신들의 세거지인 구담과 지보를 포함시키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화면의 하단에는 명당지인 옥녀측와형의 산세를 잘 그리려고 노력하였고 우측 하단에 정사의 묘가 있다. 화면의 중앙에는 지보에서 예천 풍양으로 나룻배를 타러 가는 사람들과 나룻터의 모습이 보이고 멀리 비봉산이 묘사되어 있다.(도13) 정사 묘가 있는 실제 지형도 그림의 지보와 거의 흡사하다.(도14) 주변의 산세는 유순하고 조밀하게 표현됐고 학가산 남쪽의 한 줄기 기슭인 삼태봉 밑에 정사의 묘가 있으며 안산을 비봉산으로 하고 있다. 그림의 상단에 “무자신추 근사우학림관 모로 해산정주인감정 청산류수관 거사 이의성 [戊子新秋 謹寫于鶴林館 慕老 海山亭主人鑒正 靑山流水觀 居士 李義聲]”이라 묵서 되어 화가 이의성이 그린 1828년 작임을 알 수 있다.(도15) 이상에서 살펴본 <하외도>10폭 병풍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벼슬살이를 하기 위해 객지에 있을 때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린 사대부의 고향 사진첩이라고 할 수 있다.
1곡에서 8곡은 대부분 실경을 바탕에 둔 산수화이고, 그중에서 이 병풍의 핵심인 ‘제6곡 하회’ 역시 지금까지 전해지는 ‘하회십육경’이라는 실경을 시각화하기 위해 사실적인 화풍으로 그린 진경산수화라 할 수 있다.


참고자료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명현당호Ⅰ》 (2007년 2월)
국립민속박물관, 이의성 필 <하외도>


글 이상국 ((사)한국민화센터 이사장)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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