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성 필 <하외도> 속 ‘하회16경’

조선시대 안동 하회마을을 그린 대표 그림은 <하외도> 10폭 병풍 속 제6곡 하회이다. 병풍의 구성이나 내력에 대해 지난 9월호의 글에서 상세히 설명하였던 바 있으며 이번 글에서는 하회마을의 경치를 선정한 하회16경에 대한 문헌적인 기록 및 그림과 실경을 비교해 찾아보고 그 의미를 짚어본다.


《졸재집拙齋集》의 <하회 16경>

《졸재집》 권12 <겸암옥연이정사십육경기謙庵玉淵二精舍十六景記>에 하회마을의 16경치와 그 위치와 모양에 대한 기록이 있다. 졸재는 서애 류성룡의 손자로서 황간·진안 등지의 현감을 역임했고 사서오경과 제자백가에 능한데다 성리학에도 통달했으며 화천서원에 봉해져 있다. 졸재의 <하회16경>에 대해서 양계산인 이복(陽溪散人, 李馥, 1626-1688)이 지은 시가 겸암의 종택인 양진당에 편액되어 있다.
졸재의 <하회16경>은 제목에서 보듯이 겸암정사와 옥연정사에서 본 16경에 관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겸암옥연이정사십육경기謙庵玉淵二精舍十六景記>라고 한 것이다. 졸재는 큰집 할아버지와 겸암 류운룡(謙庵, 柳雲龍, 1539-1601)과 할아버지인 서애 류성룡 형제가 주인공이 되어 탐승한 경치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겸암옥연이정사십육경기>에 기록된 하회마을의 전체적인 모습과 <하회16경>에 대해서 그 명칭의 연유까지도 설명해 놓았는데 그것을 살펴보자.
먼저 하회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은 “하회마을은 삼면三面이 모두 물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하회라 하였다. 북쪽에서 산이 오다가 앞에 큰 강을 만나 막혀 지나갈 수 없어 동쪽으로 육 칠리를 달리다가 다시 큰 강을 만나 머물러 섰다. 다시 돌아서 남으로 향하여 높이 우뚝 솟아올라 두어 마장(약 1킬로미터) 이어지니 그 이름을 화산花山이라 한다. 산허리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산줄기를 일으키고는 서쪽으로 달려 펑퍼짐한 언덕이 되고, 물이 빙 돌아간다. 한바퀴 둘러보니 탁 트여 널찍하며 평평한 땅이 되었으니 곧 하회河回마을이다.” 라고 하여 하회마을의 명칭과 지형에 대해 시적으로 잘 표현해 놓았다.
<하회16경>에 대해서는 하회주변의 경치 중에서 “그 경승지를 골라, 연유를 간략히 적고 당대 명필가의 글씨를 받아 사치스럽게 걸고자 한다”고 하였다. 경승지인 <하회16경>의 명칭을 설명하고 아랫글에서는 그 연유를 설명해 놓은 것을 살펴보자.

① 立巖晴漲(입암청장) : 형제바위=입암에 흐르는 맑은 물
謙庵前江中巨石是 (곧 겸암정 앞 강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

② 馬巖怒濤(마암노도) : 갈모바위에 부딪치는 성난 물결
巖甚口每江水盛長則 噴薄如雷聲 後改名障川巖
(큰물이 흐를 때마다 부딪쳐 뿜어대며 뇌성을 발하는 갈모바위 후에 障川巖이라 고쳐 부른다.)

③ 花峀湧月(화수용월) : 화산에 솟아오르는 달
山在精舍東南直河村東 (산은 정사의 바로 동남쪽, 하회마을 동쪽에 있다.)

④ 蒜峯宿雲(산봉숙운) : 구름에 잠긴 마늘봉
峯在南江外 聳入雲?端重 可愛以其狀 類蒜辨故 俗呼蒜峯 後改名晩隱
(봉우리는 남쪽 강 건너에 있고, 구름 속 깊이 들어가며 그 모습이 아름답고 마늘모양을 닮아서 마늘봉이라 한다.
후에 만은봉이라 고쳐 부른다.)

⑤ 松林霽雪(송림제설) : 만송정 솔숲에 개인 눈
卽村長松 林立沙堤上者是(마을 앞 모래 언덕에 서있는 소나무 숲)

⑥ 栗園炊煙(율원취연) : 밤밭에 오르는 밥 짓는 연기
在河村後 松林內(율원에 오르는 밥짓는 연기)

⑦ 秀峯霜楓(수봉상풍) : 수봉의 서리 내린 단풍
亦在村南江外 峯下帶崖 崖上有口口 婁絡之 每新霜始降 輒滿壁爛紅
(강 건너 남산 벼랑에 있는 담쟁이 등이 얽힌 채 서리가 내리면서 붉게 단풍든 모양)

⑧ 道棧行人(도잔행인) : 잔도로 지나는 나그네
棧在村西 江外 紆數里(서쪽 강 건너 비탈에 몇 마장 길이로 놓인 잔도)

⑨ 南浦虹橋(남포홍교) : 남쪽 나루의 무지개 다리
浦在河村南 隔江相望之處 村人每於秋冬之交 跨江作橋以通往來
(남쪽나루에 강 건너와 마을사람들의 왕래를 위하여 가을과 겨울철에 놓이는 다리)

⑩ 遠峯靈雨(원봉영우) : 원지봉에 내리는 신령한 비
卽遠志峯 山出遠志 春雨時至 蔥可愛 年年放火燒之 不燒則不茂
(원지봉은 원지가 나서, 봄비가 올 때면 파를 키우려고, 해마다 불을 놓아 태우며 태우지 않으면 무성하지 않는다.)

⑪ 盤磯垂釣(반기수조) : 물가 반석에 있는 낚시꾼
卽立巖足 湧出水面 依江岸盤 口爲磯者是(형제바위 아래쪽 물위에 솟아있는 바위 위에서 하는 낚시질)

⑫ 赤壁浩歌(적벽호가) : 부용대에서 부르는 노래 소리
卽江北石壁 有赤色甚古(강 북쪽의 석벽이 붉은 색이 있어 매우 오래되었다.)

⑬ 江村漁火(강촌어화) : 강촌의 고기잡이 불빛

⑭ 道頭橫舟(도두행주) : 나룻터에 가로 놓인 나룻배

⑮ 水林落霞(수림낙하) : 수림봉에 떨어지는 낙조
水林山名 在謙庵西 每日暮 霞起半邊 皆明 (겸암정사 서쪽 수림산에 저녁마다 으스름 끼이는 노을)

⑯ 平沙下雁(평사하안) : 모래사장에 내리는 기러기

위에 기록된 하회마을의 전체적인 모습과 <하회16경>에 대한 기록을 참고하여 <하외도>에 나오는 하회마을의 <하회16경>을 찾아보고자 한다.

<하외도>에 그려진 <하회 16경>의 위치 비정

하회마을은 대개 세 곳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는 것이 이해하기에 용이할 것 같다. 우선 하회마을 서쪽 강 건너 암벽으로 이루어진 부용대를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는 겸암정사謙庵精舍와 옥연정사玉淵精舍, 화천서원花川書院 그리고 부용대 앞 강가에 있는 경물을 하나로 보고, 두 번째는 하회마을 자체에 속한 건축물과 강가의 경치를 하나로 묶어서 살펴보고, 세 번째는 마을 뒤 동쪽에 있는 주산인 화산 일대와 마을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산봉우리를 하나의 경물군으로 <하외도>에 표현된 <하회16경>의 위치를 찾아보면서 그림을 이해하고자 한다.
실제 지형과 <하외도>에 그려진 하회마을의 방향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림은 화산으로부터 하회마을을 직선에 가깝도록 그렸고, 실지형은 하회마을의 방향이 부용대를 향하는 서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 이를 감안하여 분석하도록 해야 한다.

Ⅰ. 부용대 일대의 전경과 건축물 (도2)

하회마을의 북쪽 강 건너에 있는 병풍처럼 서 있는 깎아지른 절벽을 부용대芙蓉臺라고 한다. 부용대는 태백산맥의 맨 끝부분에 해당하는데 부용의 의미는 중국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연꽃이라고 한다. 하회마을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부용대인데 이 곳에서 마을을 바라볼 때 마을의 형태가 연꽃을 닮았다고 한다. ‘화천’은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이르는 말로 풍수지리상 물 위에 떠 있는 연꽃 형에서 연유한다.
겸암정사는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이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명종 22년(1576년) 세웠다. 위치는 부용대 서쪽의 절벽 위에 세워진 정사로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선비들의 은일한 삶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류운룡은 15살 때 퇴계의 문하에서 퇴계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에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독서와 사색에 정진하고자 화천花川건너 부용대 기슭에 서재를 만들었던 것이다. 퇴계는 제자가 서재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겸암정이라 이름짓고 편액을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퇴계가 제자의 서재에 겸謙자를 쓴 것은 류운룡의 성품이 곧고 분명하며 겸손하였기 때문에 붙인 것이라고 한다.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이 노후에 학문을 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겸암정사와 절벽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지어졌다. 당시 정사를 세우려 했던 서애가 경제력이 없어 승려 탄홍誕弘이 스스로 10년이나 시주를 모아 선조19년(1586)에 완성한 우정의 산물로 선생의 덕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알려준다. 처음에는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 했는데, 옥연玉淵은 정사 바로 앞에 흐르는 깊은 못의 색조가 마치 옥과 같이 맑고도 맑아서 서애 선생이 붙인 이름이다. 선생은 이 집에서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을 구상하고 저술했다.
부용대 부근에는 하회 16경중 7개의 경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서 9경과 14경은 하회마을과 외부를 연결해 주는 매개물의 의미를 가지는데 이는 도가적 경치로 이해된다. 먼저 겸암정사 아래 화천 가운데 있는 바위를 ‘입암’이라고 하고, 혹은 ‘형제바위’라고도 한다. 이 입암을 ‘입암청장’이라하여 1경으로 삼았고, 2경 ‘마암노도’의 마암은 옥연정사 앞 강가에 있는 바위이다. 입암과 겸암이 연결되는 경물이라면 노도는 서애와 합을 이루는 경물이다. 그래서 1경과 2경의 표현은 겸암의 은자적 삶과 임진왜란을 겪은 서애의 질곡의 삶을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8경 ‘도잔행인’은 옥연정사에서 겸암정사를 이어주는 절벽길이자 형제간의 우애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길로 층길 또는 친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은 500여미터로 한 사람이 겨우 발을 디딜 정도의 길인데 서애는 조석으로 이 길을 걸어서 형인 겸암이 거주하는 겸암정사로 문안을 했다고 한다. 11경 ‘반기수조’는 형제바위[입암] 아래 물가의 펑퍼짐한 바위에서 하는 낚시질로 은자의 안분지족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에 반해서 12경의 ‘적벽호가’는 적벽은 부용대 절벽을 이르는 말이고 ‘호가’는 사나이의 호연지기를 노래하는 의미를 경치이다. 이것은 아마도 서애가 살았던 삶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따라서 11경과 12경도 겸암과 서애의 성품과 삶을 대비한 표현으로 판단된다.
<하외도> 하회마을과 부용대, 그리고 외부를 연결하는 통로로 나룻배와 섶다리가 그려져 있는데 ‘하회 16경’에서는 섶다리를 9경 ‘남포홍교’라 했다. ‘남쪽 포구의 무지개 다리’라는 뜻으로 다리는 하회마을과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란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홍교는 대개 양끝은 처지고 가운데는 둥글게 높이 솟아 무지개처럼 보이는 다리로 원래는 소나무를 베어 가설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붉고 푸르고 갈색이 섞여서 무지개 같은 모습이 된다고 한다. 그림에서 다리의 위치로 보아 예천, 상주, 의성 등지로 연결되는 포구인 것 같다. 14경 ‘도두행주’는 ‘나룻터에 매어 있는 나룻배’라는 의미이나 《포헌선생문집》 권1 <시>에 “저기 옥연정으로 둥둥 떠서 건너던 배[汎彼玉淵舟]”라는 시구가 있어 아마 나룻배는 옥연정사를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룻배와 홍교의 위치는 기록의 위치와 <하외도>와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나 이는 아마도 그림을 균형있게 실경으로 그리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Ⅱ. 하회마을에 속한 건축물과 강가의 전경 (도3)

하회 마을에는 마을을 이루는 중요한 건물들이 있는데 대개 겸암과 서애와 관계되는 건물들이 많다. 대표적인 고택으로 양진당養眞堂, 충효당忠孝堂, 화경당和敬堂, 작천고택이 있고 겸암정사와 옥연정사와 대비되는 정사로 빈연정사賓淵精舍와 원지정사遠志精舍가 있다. 그리고 강가에는 만송정萬松亭 소나무숲이 있다. 이러한 마을의 구성을 참고삼아 하회 16경의 위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5경 ‘송림제설’은 ‘만송정 솔숲에 개인 눈’의 경치라는 뜻인데 그 위치가 “마을앞 모래언덕에 서있는 소나무”라고 졸재집에 기록되어 있어 아마 부용대와 마을 사이에 있는 강가의 소나무 숲을 이르는 것으로 판단된다.
6경 ‘율원취연’은 밤나무 숲에서 오르는 밥짓는 연기로 해석되는데 그 위치가 졸재집에 “강건너 마을 뒤 소나무 숲 안쪽”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부용대에서 마을을 바라본 시점으로 판단하면 <하외도>의 화산의 우측하단 마을과 숲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13경 ‘강촌어화’는 ‘강촌의 고기잡이 불빛’으로 하회마을을 둘러싼 화천에서 고기잡는 풍경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림에서 어느 부분인지 특정지을 수는 없으나 하회마을과 부용대 사이의 강에서 고기를 잡기 위해서 횟불을 켠 장면으로 상상된다.
15경 ‘수림낙하’는 수림산에서 떨어지는 저녁노을의 경치를 읊은 것으로 겸암정사 서쪽에 있는 산이라고 하였는데 그 위치는 아마 겸암정사와 부용대 사이라고 생각된다.
16경 ‘평사하안’은 만송정 앞 모래사장에 내리는 기러기를 보고 명명한 것으로 이는 소상팔경의 ‘평사낙안’과 유사한 의미의 경치라고 보이는데 이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직접 가보지 않은 중국의 호남성湖南省의 소수瀟水와 상강湘江 일대의 경치를 그린 <소상팔경도>를 많이 그리고 감상하였던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하외도> ‘6곡 하회’와 하회 16경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회마을의 중요한 건축물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자.
양진당은 풍산 류씨 가문의 대종가로 사랑채에 걸려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 현판은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573)선생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 1515~1573) 선생을 지칭한다. 당호인 <양진당養眞堂>은 겸암 선생의 6대 자손인 류영(柳泳, 1687-1761)공의 아호에서 유래하였다. 입암 류중영 선생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이라 부르며, 양진당養眞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랑채는 고려 건축양식이며, 안채는 조선 건축양식으로서 고려양식과 공존하는 고택이다.
충효당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가 생존했을 때 살던 집은 아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내다 64세 때인 1605년 9월 하회마을의 수해로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선생이 30여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으며 그곳에서 기거하다 1607년 5월 6일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했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가 타계 후 그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 졸재拙齋 원지 元之공을 도와 집을 지었고, 증손자 의하宜河공이 확장한 조선중엽의 전형적인 사대부 집이다.
빈연정사는 화천을 사이에 두고 부용대와 겸암정사가 바로 건너다 보인다. 겸암 선생은 선조16년(1583년)에 진보현감을 지냈는데, 모친의 병환으로 사퇴한 후 이곳을 서재로 사용했다. ‘빈연賓淵’은 정사 정면에 위치한 부용대 아래의 깊고 맑게 흐르고 있는 못을 말한다. 원지정사는 서애 선생이 선조 9년 (1576년)에 잠시 조정에서 물러나 있을 때 만송정이 한 눈에 들어오는 마을 북쪽에 짓고 학문을 했던 곳으로 은퇴한 후에는 정양하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원지遠志는 한약재로 심기를 다스려 정신의 혼탁과 번민을 풀어주는 소초小草를 말하는데, 하회마을의 안산이기도 한 원지산遠志山에서 자생하는 풀이다. 따라서 원지라는 당호와 북향하고 있는 두 건물을 생각하면 북녘에 있는 임금님을 사모하는 선비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만송정 소나무 숲은 하회마을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있는 소나무숲이다. 겸암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한다.

Ⅲ. 하회마을 둘러싼 산들에 의한 경치 (도4)

하회마을의 주산은 마을 동쪽의 화산으로 높이는 327미터로 태백산에서 뻗어온 줄기이다. 마을의 남쪽은 마늘봉이 마주하고 있고 남서쪽에는 봉화산이 안산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회 16경중 하회마을을 둘러싼 주변의 산봉우리 경치를 명칭한 것으로 3경 ‘화수용월’, 4경 ‘산봉숙운’, 7경 ‘수봉상풍’, 10경 ‘원봉영우’가 있다.
3경 ‘화수용월’은 하회마을의 주산인 화산에 달이 솟아오르는 경치에 감흥한 것으로 화산을 바라보았던 곳은 옥연정사인 듯하다. 그 이유는 《졸재집》에 화산의 위치를 “정사의 동남쪽, 하회마을의 바록 동쪽에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화산에 떠오르는 달의 이미지는 진산鎭山에서 어둠을 밝히는 빛이 솟아오르는 형상으로 마을을 밝게 해주는 빛의 의미가 있다.
4경 ‘산봉숙운’은 “마늘봉에 걸린 구름”의 모습이다. 4경의 주봉우리는 산봉蒜峯으로 마늘 모양의 산봉우리이고 숙운宿雲은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이 산봉우리에 걸린 구름의 모습을 소재로 시작에 많이 사용한 용어로써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장면이다. 마늘봉은 마을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림에서는 명확히 나와 있지 않으나 지도상에는 남쪽에 존재하고 있다.
7경 ‘수봉상풍’은 “서리내린 수봉의 단풍”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위의 졸재집에 설명에 따르면 강 건너 남산 벼랑에 있는 담쟁이 등이 얽힌 채 서리가 내리면서 붉게 단풍든 모양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수봉은 하회마을 남쪽의 강가에 있는 절벽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겸암정사와 연해서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7경을 바라보는 장소는 충효당에서 수봉을 바라본 가을철의 모습일 것이다.
10경 ‘원봉영우’는 원지봉에 내리는 영험한 비의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아마도 계절은 봄일 것이다. 《졸재집》에 원지봉에 원지가 날 때 봄비가 내리면 파를 심기 위해 원지를 태워야 한다고 되어 있다. 원지는 보라색 꽃이 피는 여러해살이풀로 한국에서는 경북 안동, 영주에 자라는 향토색이 강한 식물이다. 이로 미뤄보아 졸재도 원지에 대한 애착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건조한 봄철에는 비가 와야 농토에 불을 질러 태울 수 있기 때문에 봄비를 영험하다고 여긴 것 같다. 원지봉은 정확히 어느 곳인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마을의 서쪽에 있는 농토가 많은 곳이라 생각된다. 서애가 은거한 원지정사에서 바라본 경치일 것이기 때문이다.

실경 너머 도학적 정신이 담긴 그림

<하외도>‘6곡 하회’ 마을 그림과 졸재집의 하회 16경을 비교해본 바에 따르면 <하외도>의 ‘제6곡 하회’는 ‘하회16경’을 시각적으로 형상화시킨 것이 분명하다. 졸재가 선정한 ‘하회16경’의 경치는 하회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서애와 겸암이 살아온 삶의 터를 후손인 졸재가 시적인 감상으로 표현하였고, <하외도> 제6곡 ‘하회’는 하회마을의 번성이 겸암과 서애 두 선조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하외도> 제6곡 ‘하회’는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유행하였던 실경산수화, 더 나아가 진경산수화의 표현방식이 남아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졸재가 기록한 ‘하회16경’의 바탕은 풍산 류씨 가문에서 성리학적 대성을 이룬 겸암과 서애가 고향의 아름다운 산천을 단지 경치로 보지 않고 자연의 이치와 도가 본질적으로 내재된 산수로 인식하였던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과 그림이 일치하는 도학적道學的 와유정신臥遊精神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노재현·이현우, <하회십육경>과 <하외낙강상하일대도>를 통해 본 하회 16경의 경관상, 《한국전통조경학회지》 권31 (2013.3)


글 이상국 ((사)한국민화센터 이사장)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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