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 교수의 소재로 살핀 우리 옛 그림 ㉒ 금계錦鷄

도1 낭세영(郞世寧, 1688-1766), <금춘도>, 비단에 채색, 163×96㎝,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라고 불리는 ‘금계錦鷄’는 눈부신 금색 빛깔과 수려한 외모가 돋보인다.
동아시아의 옛 그림에 등장하는 금계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살펴본다.

글 이원복(미술사가)


상상의 동물인 봉황을 제외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새는 무엇일까? 우는 소리나 외모 등 새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 차이로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에서 주작과 봉황은 같은 새로 간주되기도 한다. 사령四靈이나 사신四神 같은 네 가지 서상적瑞祥的인 동물에서 조류는 이들 새뿐이다. 이에 공작孔雀이나 금계錦鷄가 떠오른다. 영국인들이 인도에서 공작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탄과 찬사 못지않게 금계 또한 이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로 청淸 궁정에서 활약한 낭세영(郞世寧, 1688-1766)이 남긴 금계 그림 <금춘도錦春圖>가 이를 증명한다(도1). 라일락과 양귀비 등 봄꽃에 구멍 있는 태호석太湖石 바위에 눈부시고 화려한 외모를 지닌 수컷을 측면으로 크게, 암컷은 부분만 등장시켰다.
닭목 꿩과에 속한 금계는 크기나 형태에서 꿩과 비슷하다. 원산지가 중국 서부로 알려져 있다. 중국 남서부에서 야생으로 분포하며, 완상을 위해 기르기도 한다. 이 새 그림에 대해선 조선 전기 문헌에서 살필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사육했다. 16세기 이후 수묵담채나 채색으로 그린 금계가 영모화에 어엿한 주인공으로 등장한 그림들이 전한다. 원래 명칭인 홍복금계紅腹錦鷄가 의미하듯 배는 붉고 머리와 허리의 광택 있는 황금색, 목 뒤의 녹색 등이 눈부신 화려한 조화를 보인다. 간혹 금계를 원앙으로 속이기도 했다.
‘황금색 닭’이란 의미의 <금계도錦鷄圖>는 ‘조선의 그림신선[화선畫仙]’으로 불린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도 그렸다(도2). 이마 위 붉은 벼슬이 없고 황금색 깃과 꿩처럼 긴 꼬리인 금계錦雞와는 구별된다(도3). 금계는 ‘금꿩’이라고도 불리며, 준의鷷鸃나 ‘붉은 꿩’이란 의미로 별치鷩雉 등 여러 이름이 있다. 이들 명칭은 이 새의 성질과 외모 등에 기인하며 닭이나 봉황처럼 5덕을 지닌 새로, 봉황만은 못하나 생명력이 긴 소재로 그려졌다.


(좌) 도2 미상(19세기), <금계도金鷄圖> 8첩병 부분, 종이에 채색, 112×327㎝,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우) 도3 미상(19세기), <화조도> 8첩병 부분, 비단에 채색, 71×238㎝,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동아시아 화조화의 두 축 – 두 유파流派, 황전과 서희

현존하는 그림만으로 살필 때 중국회화는 2천 년 넘는 긴 역사를 지닌다. 1949년 중국 호남성 장사에 있는 전국시대 초楚 고분(기원전 3세기)에서 <용봉사녀도>가 출토되었다. 중국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비단에 그린 것 중 가장 오랜 그림이다. 근처에서 1973년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인물어룡도>도 발굴되었다. 이들은 손수건 정도의 크기로 관 위에 놓였으니 죽은 사람의 저 세상으로의 승천을 용과 봉황이 인도하는 장면이다. 장례의식에 소용된 깃발이나 명정銘旌으로 보이며, 화면 바탕이 비단이기에 백화帛畫로도 불린다.
중국의 화조화는 당나라 말기 오대五代에 이어 송에 이르러 크게 발전한다. 이에는 서희(徐熙, 10세기 중후반)와 황전(黃筌, 903?-965) 등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두 화가의 역할이 지대하다. 10세기에 활동한 이들을 두 축으로 각기 유파流派를 이루며 후대로 이어졌다. 오대 남당南唐 명문가에서 태어난 서희는 사생에 능해 꽃, 대나무, 새, 풀벌레에 능했다. 서희화파의 화조화는 먹물로 형체를 대충 그린 뒤 간략하게 붉은색이나 호분으로 색을 입혀 낙묵화落墨畫라 불린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선비를 칭하는 포의적布衣的이며 야일野逸로 지칭되며, 화사한 채색에 섬세한 필치의 황전화파와 구별된다.
송 초 화원은 황전파가 주도했고 창조자인 황전에 이어 사생으로 유명한 조창(趙昌, 10-11세기)과 송宋 8대 황제 휘종 조길(趙佶, 1082-1135)의 부흥을 바탕으로 왕조를 달리해 줄기차게 근대까지 이어지며 그 영향은 국경을 넘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감지된다. 이 화파의 특징은 채색이 맑고 아름다운 공필, 소재별 부귀한 심미 취향, 궁정 취향의 온화한 풍격風格으로 정리된다.
일본에는 셋손 수케이(雪村周繼, 16세기 후반)의 <죽금계도>와 <부용압도>(도4), <원앙도>와 <오리도>가 2폭씩 나뉘어 전래되나 유사한 필치로 크기가 엇비슷하며 같은 두 도장이 매 폭에 있고 이들은 병풍에서 나뉜 것으로 사료된다. 등장 소재와 더불어 중국 그림의 소재와 천연성이 크다.


도4 셋손 수케이(16세기 후반), <죽금계도>와 <부용압도>, 종이에 채색, 각 109×50.9㎝, 도쿄예술대학 소장



도5 조길(趙佶, 155-16세기 초), <부용금계도>, 비단에 채색, 163×96㎝,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당唐부터 그려진 금계 – 오대 황전黃筌에서 비롯돼

“가을 서리에 맞서 화려함을 뽐내며,
높은 벼슬에 비단처럼 화려한 깃
오덕을 두루 갖춤을 이미 아니,
오리와 갈매기보다 편하고 여유롭네,
[秋勁拒霜盛 峨冠錦羽鷄 已知全五德 安逸勝鳧鷇]”
-조길, <부용금계도> 내 제시

중국에서 금계는 언제부터 그렸을까? 현존하는 그림 중엔 공필화조화의 소재와 기법 등 형식 요소를 구비한 당 변란(邊蘭, 8세기 후반-9세기 초)의 <화조도>에서 살필 수 있다. 그는 절지화 구도, 사생에 의한 사실적인 표현, 차이를 보이는 채색 등 황전화파의 선구를 점한다. 휘종 때 이루어진 송 황궁 소장 그림목록인 《선화화보宣和畫譜》는 전래가 드문 10세기 이전 회화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를 통해 무려 13점의 금계도를 남긴 황전과 그의 둘 째 아들 황거보黃居寶와 9점을 안긴 막내 황거채(黃居寀, 936-993 이후), 5점을 남긴 조창 등이 금계와 설죽·죽순·죽석·모란·접시꽃·배꽃·철쭉·복숭아 등을 함께 그렸음을 작품명을 통해 알 수 있다. 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금계가 그려졌음이 확인되었으며 이들 식물과의 배합은 반복해서 나타난다.


(좌) 도6 화암(華嵒, 1682-1756), <금계죽국도>, 종이에 채색, 106.8×47.2㎝, 상해박물관 소장
(우) 도7 전 이암(1507-1566경), <군금도>, 종이에 채색, 150.6×71.3㎝, 오쿠라슈코칸 소장



송宋 8대 황제 휘종 조길(趙佶, 1082-1135)의 <부용금계도>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도5). 그려진 지 1100년 가까우며 명화이기 때문이다. 조길은 황전파에 속한다. 휘종은 서화가로도 큰 명성을 얻었으니, 화조화에 능해 그림을 즐긴 황제로는 빼어난 솜씨를 알려주는 유작들이 여럿 전한다. 그의 25년 재위 기간은 그야말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 그 자체였다. 군사적으로 나약하여 북송멸망을 초래했으니 정치적으론 실패한 군주로 여진족이 세워 백 년 남짓 지속한 금(金, 1115-1234)나라에 잡혀가 최후를 맞이한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중국 역사상 첫손에 꼽히는 풍류천자風流天子였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남다른 타고난, 뛰어난 미적 감수성과 높은 안목의 소유자로 예단의 후원자로서 문화예술계에 끼친 영향은 컸다.
그가 즐겨 그린 여러 새들이 주인공인 화조화엔 나름의 독특한 서풍書風의 제시를 남기곤 했다. 화면 중앙에 대각선 방향으로 옅은 핑크색 부용화 줄기에 깃든 주인공인 금계가 비중 있게 등장시킨 <부용금계도>는 머리를 뒤로 해 측면으로 황금색 머리 깃·붉은 배·긴 꼬리의 점박이 무늬까지 섬세하게 묘사했다. 하단에 국화와 우측 상단 화가 자신이 쓴 제시 위에 금계의 시선이 닿는 곳엔 한 쌍의 나비도 보인다. 조선과 일본에서 그의 영향이 감지되는 금계를 살필 수 있다. 특히 조창의 5점 <금계도> 중에는 <부용금계도>에 실린 제사에 보이는 <거상금계도拒霜錦鷄圖>가 3점이나 있어 이 그림의 소종래에 대해 짐작하게 한다.
청대 개성주의 화가로 양주에서 활동한 화암(華嵒, 1682-1756)은 특히 화조영모에 명성이 컸다. 그는 매화에 무리를 이룬 참새와 한 쌍의 금계를 그린 <산작애매도山雀愛梅圖>와 대나무와 국화를 배경으로 금계 수컷만 그린 <금계죽국도錦鷄竹菊圖>가 전한다(도6).


(왼쪽부터) 도8 전 이영윤(1561-1611), <금계도> 사계화조도 8첩병 부분, 비단에 채색, 151.3×54.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9 이징(1571-1653 이후), <금계도> 산수영모첩 내, 비단에 수묵담채, 31×21㎝,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도11 미상(1849년), <준화樽花> 진찬의궤 부분, 종이, 35.2×2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10 전 이징, <사계영모도> 8첩병, 종이에 수묵담채, 각 144×56㎝, 울산박물관 소장


우리나라 금계도 – 중기의 정형과 화단의 민화

금계도는 중국에 비할 때 우리 옛 영모화의 조류 소재 중에선 수적으로 열세이다. 도자기 등 여타의 공예 문양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16세기 문헌과 적은 수이나 같은 시대에 그려진 그림이 전한다.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우리들에게 임진왜란에 순국한 의병장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제봉집霽峰集》과 《서석록瑞石錄》 등 문집을 남긴 문관文官이다. 《제봉집》에는 무려 62종의 새 그림들을 읊은 제시가 있다. 금치金雉라 표기했으니 금계이다. 월계화가 바람에 살랑이는 봄날, 벌레 무늬 같은 화려한 꼬리 깃을 지닌 금계 한 쌍이 바위에 등장함을 작품제목과 제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암 전칭의 <군금도群禽圖>는 화면 내 화가를 확인할 어떤 근거도 찾기 어렵다(도7). 다만 전술한 같은 시대 셋손 수케이의 <죽금도>와 같은 구성인 점과, 일본과 미국 등 국외에서 확인된 짙은 채색의 매 그림들과 세로 긴 화면 우측에 상하로 길게 대나무와 매화가 등장하고 상단의 매화 가지에 꾀꼬리를 비롯한 쌍을 이룬 4종의 조류가 깃들고, 하단에는 바위에 앉은 금계를 비롯한 까치 등 비교적 큰 새들이 짝 없이 등장하는데, 그 중 금계가 단연 돋보인다. <산자극작도山鷓棘雀圖>와 특히 명 변문진(邊文進, 15세기 전반)의 송·죽·매 삼청三淸으 배경으로 각종 다양한 새를 그린 <삼우백금도三友百禽圖>와 연결을 보이는 구성이다.


(왼쪽부터) 도12-1 미상(19세기), <금계도> 화조도 6첩병 내, 종이에 채색, 142×42㎝, 개인 소장
도12-2 미상(19세기), <금계도> 화조도 10첩병 내, 종이에 채색, 86.5×42.5㎝, 개인 소장
도12-3 미상(20세기), <금계도> 화조도 8첩병 내, 종이에 채색, 78.3×39㎝, 개인 소장



조선 중기화단(1550경-1700경)을 연 종친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의 동생 이영윤(李英胤, 1561-1611)의 몇 종류의 계절 감각이 선명한 수목樹木과 조류를 그린 <사계화조도 8첩병>에도 괴석에 한 쌍의 금계가 등장한다(도8). 여기(呂紀, 15-16세기) 등 명 절파浙派 화조화 영향이 감지되며 화려한 채색으로 궁정 취향이 짙어 궁중장식화를 비롯한 앞선 시기 채색화의 전통을 시사한다. 이경윤의 서자로 17세기 화단에서 활동이 두드러진 이징(李澄, 1581-1653 이후)의 수묵담채 위주로 산수와 사계절 영모들로 구성된 화첩과(도9), 같은 구성과 필치를 보이는 수묵 중심에 담황淡黃이 옅게 입힌 금계가 등장한 <사계영모도 8첩병>도 전한다(도10).
진경산수와 풍속화 등 조선 미감의 극대화를 보이는 기라성같은 화가들이 출현한 조선 후기 화단(1700경-1850경)에선 아쉽게도 이렇다 할 금계도를 찾기 힘들다. 봉황이나 공작 등과 달리, 독립된 소재로 발전해 즐겨 그려졌는지 여부조차 아직은 확인이 힘들다. 진찬의궤進饌儀軌 등 궁중잔치에 등장하는 <준화樽花>를 봉황과 공작, 꿩과 금계가 쌍으로 등장해 시사하는 바 있다(도11). 19세기 이래 궁중장식화에서 민화民畫로 옮겨지는 과정에 화조화 병풍에서 새로운 감각과 미감을 살필 수 있다. 이 중에는 비교적 전통에 충실하며 사실적인 묘사로 제작된 것 외에(도12-1), (도12-2) 자유로운 형태로 변모시킨 금계도 만나게 된다. 오늘날 화단에서 다양하고 다채로운 새롭고 신선한 작품들이 적지 않게 제작됨은 지극히 긍정적이며 고무적이고 바람직한 양상이 아닐 수 없다(12-3).

이번 호를 끝으로 2020년 1월부터 2년 간 연재한 <이원복 교수의 소재로 살핀 우리 옛 그림> 연재를 마칩니다. 동아시아 미술 전반을 아우르며 우리 옛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를 친절히 알려주신 이원복 미술사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편집자주)



이원복 | 미술사가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과 학예연구실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경기도박물관장 등을 역임하며 42년간 박물관 현장에 몸담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객원교수, (사)역사여성미래 공동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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