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 교수의 소재로 살핀 우리 옛 그림 ⑰ 순결 순수하며 변함없는 사랑, 백합 百合

도13 신명연(1808-1886), <백합과 패랭이꽃>, 1864년, 비단에 채색, 30.2×1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진한 향기와 다소곳한 외모로 동서양 모두의 사랑을 받아온 백합, 서구에선 불교의 연꽃에 비견되는 꽃이다.
조형미술의 꽃 소재로 다른 꽃들과 함께, 또는 독립된 소재로 천 수백 년 이어 화폭에서 피어났다.

글 이원복(미술사가)


백합은 우리나라 화단에선 6월부터 피기 시작하니 접시꽃, 무궁화, 배롱나무, 능소화 등과 함께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다. 백합은 흔히 서양 꽃으로 여기며 주로 흰 꽃을 연상한다. 꽃은 흰색이 주류이나 인동처럼 흰색에서 노래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들면서 다소 변색되며, 노란색과 연한 분홍색도 있다. 한자 이름이 암시하듯 흰색에서가 아닌, 마늘처럼 생긴 둥근 뿌리가 여러 쪽 모인 형태에서 연유한다. 요즈음 육종학 발전으로 선홍이나 짙은 자색 등으로 흰색이 오히려 무색하다.
우리 이름은 나리이며, 흰 꽃은 당나리로 불렀다. 당이 붙은 것은 중국에서 전래된 때문으로 생각된다. 백합과에는 우리 야산에서 자생하는 주황색 위주의 참나리, 땅나리, 솔나리, 하늘나리, 털중나리 등이 이에 속한다. 우리나라 백합은 타국에서 유입되어 재배한 것이기에 야산에서 보긴 힘들다.

유향乳香처럼 감미로운 향기를 뿜고
백합百合처럼 꽃 피어 향내를 풍기어라
– 구약 집회서 39장 14절


(왼쪽) 도1 시모네 마르티니(1284경-1344), <수태고지> 부분, 1333년, 목판 템페라 265×305㎝,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오른쪽) 도2 헨리카 베이예르(1782-1855), <꽃> 1827경, 캔버스 유채, 82×67.5㎝, 바르사바국립박물관


지구촌 도처에서 사랑받는 꽃 – 짙은 향과 끼끗한 외모

진한 향기와 다소곳한 외모로 동서양 모두의 사랑을 받아온 백합은 서구에선 불교의 연꽃에 비견되는 꽃이다. 조형미술의 꽃 소재로 다른 꽃들과, 또는 독립된 소재로 천 수백 년 이어 화폭에서 피어났다. 성경에는 장미가 8회, 백합이 6회 나온다. 일찍이 크레타 지역에선 아름다움과 풍요豐饒, 기독교에선 순결純潔과 부활의 상징이었다. 특히 흰 백합은 팔레스티나, 갈릴리와 갈멜산에 자생한다. 백합은 점차 순결의 의미로 고통의 상징인 붓꽃과 함께 성모 마리아의 표상이 되었다. 지구의 반대편인 동양에서도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 온 꽃 중의 하나로 현존 그림은 당唐 고분벽화에 등장한다.
독립된 소재의 감상화에 앞서 이탈리아의 시모네 마르티니(Martini Simone, 1284-1344)가 1333년 목판에 그린 <수태고지受胎告知> 등 기독교 성화聖畫에서 살필 수 있다(도1). 가브리엘 천사가 성령에 의해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할 것을 알리는 장면을 담은 내용으로 인물 사이에 화병에 꽂힌 백합이 보인다. 그로부터 1세기 이상 지난 1486년 한스 멤링(Hans Memling, 1434경-1494)이 그린 <성모 마리아의 꽃>은 현존하는 최초의 독립적인 꽃 그림으로 보나, 성모 마리아 초상 뒷면 장식화로 마리아의 순결과 고통의 상징성을 지닌 것으로 본다. 점차 화병에 여러 종류의 꽃이 꽂힌 정물화에서 백합을 살필 수 있으니 전문화가로 최초의 꽃 그림으로 유명한 폴란드 여성화가 헨리카 베이예르(Henryka Beyer, 1782-1855)의 <꽃>에서도 흰 백합이 보인다(도2).
현존하는 백합 그림은 오히려 서구보다도 중국이 앞선다. 중국 섬서성陝西省 부평현에 위치한 헌릉獻陵의 배장묘 이용묘李龍墓 용도甬道에 그려진 <시녀侍女>에 등장한다(도3). 1973년 발굴한 당唐 상원2년上元二年 연기가 있는 벽화고분이다. 두 시녀 사이에 백합 한 그루가 선명하다. 1972년 발굴된 신강新彊 자치구 투르판 217호에도 등장한다. 풀꽃 아래 원앙과 오리 등 조류를 포치한 동일 구도와 구성을 갖춘 6폭 병풍 형태의 벽화 오른쪽 첫째 폭은 꽃은 마멸되었으나 잎과 줄기를 살피면 이용묘 벽화와 동일한 식물이다.

“봄이 깊어질 때 패랭이꽃을 보자 노을이 비단을 이룸을 깨닫고
[春深看覺霞成錦]
밤이 길어질 때 백합 향을 맡자 옥에서 나는 것인가 의심했네
[夜永聞疑玉有香]”
– 당 조광윤의 <패랭이와 백합[春羅夜合]>에 부친 왕안절의 제


(왼쪽) 도3 당 섬서성 헌릉 배장묘 이용묘 동벽(唐上元二年 명문), <시녀侍女> 부분, 147×125㎝
(오른쪽) 도4 심주沈周(1427-1509), <백합>, 종이에 담채, 30.3×52.4㎝, 소주박물관 소장


중국과 일본의 백합 그림 – 화훼 소재 중 하나

백합은 시詩와 화면에 있는 작품 제목을 통해 중국에선 야합夜合으로 불렀음을 《개자원화전芥子園畫傳》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책에는 꽃을 그리는 기법 외에 등창우滕昌祐(9세기)의 <야합夜合>과 조광윤刁光胤(10세기)의 <춘라야합春羅夜合> 등이 있고, 각기 양梁 선제宣帝와 송 왕안절王安節(?-1275)의 제시로 그림의 격조를 더한다. 늦어도 10세기 이전에 백합이 감상화의 주인공인 독립된 소재로 그려짐을 짐작하게 한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도5 육치陸治(1496-1576), <유화소경>, 종이에 채색, 65.3×33.3㎝, 타이베이고궁박물원 소장
도6 운수평惲壽平(1633-1690), <백합>, 종이에 담채, 27×24.1㎝, 소주박물관 소장
도8 마사야마 쉐쯔엔(1785-1842), <나팔꽃과 백합>, 1840년, 비단에 채색, 29.2×29.7㎝, 도쿄국립박물관



명明(1368-1644) 문인화가로 소주蘇州 출신 심주沈周(1427-1509)는 후배 문징명文徵明(1470-1559)과 더불어 오파吳派를 창시했고 화조첩에 <백합>이 현존한다(도4). 화조화의 대가 진순陳淳(1483-1544)은 선배 화가들의 장점을 두루 섭렵해 독자적인 화풍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중화민국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대작 <설색화훼> 족자는 바위를 중심으로 패랭이꽃, 백합, 월계수, 치자 꽃들이 어우러져 한여름 꽃들의 생동감을 엿볼 수 있다. 진순보다 유명세는 덜하나 만년에는 산에 은거하여 화초를 심고 벌을 치면서 조촐한 삶을 영위한 육치陸治(1496-1576)도 창포, 백합, 석류꽃을 배경 없이 간략하게 그린 <유화소경榴花小景>을 남기고 있다(도5). 빠른 필치로 완숙한 솜씨임을 드러내는 이 그림은 절개, 효성, 우애 등 그린 이 됨됨이를 그대로 전한다. 이 둘은 문징명의 영향이 짙다.
중국 마지막 왕조인 청淸(1636-1912) 초 전통화풍을 이은 왕시민王時敏(1592-1680)과 그의 문하에 들어가 산수화로 명성을 얻었으며 중년 이후 화훼를 몰골기법으로 즐겨 후대 영향이 컸던 운수평惲壽平(1633-1690)의 《산수화훼첩》 내 사실적인 <백합>도 들어있다(도6). 왕원기王原祁(1642-1715) 등과 구별되며 조선 말 화단의 전기 및 김수철 등에 영향을 준 개성주의 화풍의 김농金農(1687-1764), 청말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해상파海上派 화가로 약관에 명성을 얻은 임이任頤(1840-1895) 등도 백합 그림을 남기고 있다.


(왼쪽) 도7 오다노 나오타케(1749-1780), <백합>, 종이에 채색, 38.4×27.2㎝, 아키타 센샤미술관 소장
(오른쪽) 도9 사카이 호이츠(1761-1828), <하추초충도> 병풍 부분, 1821년, 종이에 채색, 164×182㎝, 도국립박물관 소장



일본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소품 감상화로 화첩과 두루마리 등이 전한다. 18세기 이후 오다노 나오타케(小田野直武, 1749-1780)의 <백합>(도7), 《사계화조화첩》에 속한 다른 꽃과 함께 그린 마사야마 쉐쯔엔(增山雪園, 1785-1842)의 <나팔꽃과 백합>(도8), 이외에 16세기 일본 전통 의상에 백합이 자수로도 등장하며, <사계화조화>와 사카이 호이츠(酒井抱一, 1761-1828)가 1821년 그린 <하추초충도夏秋草蟲圖> 병풍 등 어렵지 않게 백합을 찾아볼 수 있다(도9).

백합은 꽃의 수장, 벼루 파도에서 향 내음 스며 묵화
곱게 솟아 무궁화 다시 빛나네. 신해년 가을 심저 안중식.
[花首百合 硯派汕香 墨花翠潑 槿兮再光 辛亥孟秋日 心田 安中植]
-안중식이 1911년 축하 그림 <기명절지>에 부친 제시


(왼쪽) 도10-1 <청자 상감 화조·죽·백합 무늬 병>, 고려(14세기), 31.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른쪽) 도10-2 <금제 장신구>, 고려(10-14세기), 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시대 백합 그림 – 조선 후기를 거쳐 말기화단 큰 유행

불화를 제외하고 전하는 그림이 몹시 드문 고려왕조 때 흔하진 않으나 다기茶器로 쓰인 완碗과 <청자 상감 화조·죽·백합·무늬 매병>(도10-1) 등 고려청자 문양에 백합이 보인다. 또한 <금제 장신구>(도10-2) 중 거북·학·무궁화·백합 등 쌍을 이룬 4cm 내외 소품 장신구는 주목된다. 같은 시대 이들의 동식물 소재는 그림으로도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 화훼초충화의 대명사가 된 신사임당 계열은 집에서 기르는 맨드라미, 꽈리, 가지, 양귀비 등 재배식물과 야생화에 풀벌레를 함께 그렸으나 백합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18세기 이후 그림에서 백합을 만날 수 있다.
현존 그림 중 가장 오랜 백합은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 남긴 <절지호접>과 <백합>(도11) 소폭이다. 그의 영향이 큰 이방운李昉運(1761-1815 이후)의 8폭 화훼·화조·영모 병풍에 속한 <백합과 수국>(도12) 등이다. 바위 곁에 다른 식물과 함께 그린 것으로 나비도 등장하고 있어 초충도 범주에 든다. 《개자원화전》의 영향을 받았으나 괴석을 포함해 화훼초충화로 변형은 우리 화가들의 몫으로 보인다. 18세기에 이어 조선 말기화단엔 여러 폭으로 된 병풍에서 백합을 찾을 수 있다.
19세기 초기 것으론 1811년 일본을 다녀온 조선 통신사 일행의 그림, 글씨가 담긴 병풍에서 일본에 수출 그림으로 알려진 괴원槐園 변지한卞持漢(18-19세기)이 남긴 <백합>이 있다. 사실적인 표현에 색채가 유난히 아름다운 1864년 제작한 신명연申命衍(1808-1886) 《화훼첩》에는 <백합과 패랭이꽃>이 포함된다(도13). 전술한 조광윤의 <춘라야합>처럼 패랭이꽃과 백합을 그렸다. 그의 부친은 묵죽으로 유명한 신위申緯(1769-1847)로 그의 아들들도 그림으로 이름을 남겼다.


(왼쪽부터) 도11 심사정(1707-1769), <백합>, 종이에 담채, 31.2×23.5㎝,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도12 이방운(1761-1815 이후), <백합과 수국>, 종이에 수묵담채, 234.2×59.2㎝,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도14 김수철(19세기), <백합>, 종이에 담채, 140.8×58.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손창근 기증)



이에 대해 색을 사용치 않고 먹만의 빠른 붓놀림으로 그린 김정희 애제자이자 30세에 요절한 전기田琦(1825-1854)의 그림은 더욱 개성이 돋보인다. 청나라 개성주의파 화가들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기량과 높은 격조를 보여준다. 그가 남긴 격조 높은 문인화들로서 산수 외에 매화, 연꽃 등 작은 그림 8폭으로 된 화첩에 산뜻한 <백합>이, 추사파에 속한 생략과 과장 그리고 수채화에 방불한 새로운 감각으로 주목되는 김수철金秀哲(19세기)의 <백합> 또한 현존한다(도14).
장승업張承業(1843-1897)의 고동기·도자기·여러 꽃을 함께 그린 기명절지[器皿折枝圖]에서 백합 뿌리, 10폭 병풍에서도 전기와 닮은 수묵 위주의 활달한 필치로 오동나무와 백합을 그렸다. 나비로 이름을 얻은 근대화단 이경승李絅承(1862-1927)의 <화훼호접> 병풍에서도 살필 수 있다. 화원이나 중인 출신의 그림도 그 이전과 달리 격조 높은 화풍들임을 알 수 있다.
오세창吳世昌(1864-1953)이 우리 서예를 묶은 《근역서휘槿域書彙》 편집을 축하해 1911년 안중식安中植(1861-1919)이 그린 <기명절지>에도 백합이 등장한다(도15). 20세기에 이르러 백합은 캔버스에도 등장한다. 중국에서 유입된 화본의 영향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백합은 우리 그림의 국제성과 보편성의 측면, 근대성을 알려주는 식물 소재 중 하나이다.


도15 안중식(1861-1919), <기명절지>, 1911년, 종이에 채색, 29.1×45.4㎝,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이원복 | 미술사가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과 학예연구실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경기도박물관장 등을 역임하며 42년간 박물관 현장에 몸담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객원교수, (사)역사여성미래 공동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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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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