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 교수의 소재로 살핀 우리 옛 그림 ⑯
접시꽃[蜀葵] – 향기는 없으나 화사한, 풍요와 평안의 꽃

큰 키에 짙은 붉은 색, 분홍색, 흰색, 자주색 등 화사한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시선을 끈다. 접시꽃, 동아시아에서 천년 넘게 줄기차게 그려진 소재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 민화에서는 흔치 않은 소재이기도 하다.
글 이원복(미술사가)


접시꽃은 둥글고 납작한 형태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얼핏 무궁화와 비슷하나 꽃이 크며 잎 모양이 다르다. 무궁화, 강렬한 색깔로 큰 꽃인 하와이 무궁화(hawaiian hibiscus), 부용芙蓉, 푸성귀인 아욱 등이 모두 아욱과에 속한다. 조선시대에 무궁화 그림은 찾아보기 힘드나 광복 후 1946년 애국가의 일부를 제사로 쓴 노수현(盧壽鉉, 1899-1978)(도1), 천경자(千鏡子, 1924-2015) 등 몇 화가들이 그렸다.
경기도 이남은 접시꽃, 황해도와 평안도는 독두화禿頭花로 부르는 한편 경기도에선 임금이 과거 급제자에게 내린 종이로 만든 어사화御賜花에서 비롯한 어승화나 어승어로도 불린다. 연이어 꽃이 피기에 층층화層層花란 이름도 있다. 동아시아에서 천년 넘게 줄기차게 그렸으나 의외로 우리 민화民畫에서는 흔치 않은 소재이다.
접시꽃의 원산지는 중국으로 알려져 있다. 씨를 뿌린 그 이듬해야 꽃을 볼 수 있다. 줄기와 잎 등이 겨울에 지상에 남지 않는다. 매년 싹이 돋아 크게 자라고 붉어 일장홍一丈紅이라고도 한다. 6월부터 8월까지 큰 키에 짙은 붉은 색, 분홍색, 흰색, 자주색 등 화사한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시선을 끌며 걸음을 멈추게 한다. 홑꽃만이 아닌 겹꽃들도 있다.

(왼쪽) 도2 두근(杜菫, 16세기), <완고도玩古圖> 부분, 명明, 비단에 채색, 126.1×187㎝, 타이베이고궁박물원 소장
(오른쪽) 도3 왕시민(王時敏, <단양묵화端陽墨花>, 1592-1680), 청淸, 115×51.3㎝, 소주박물관 소장

접시꽃 – 부용芙蓉 · 촉규蜀葵 · 추규秋葵

한자의 규葵는 해바라기와 접시꽃(촉규蜀葵), 아욱(동규冬葵) 등 모두를 지칭한다. 해바라기를 제외하고 규화葵花를 세분하여 우리가 접시꽃으로 부르는 잎이 넓은 촉규蜀葵, 잎이 단풍나무나 손가락처럼 다섯으로 가늘게 갈라져 늦게 꽃이 피는 추규秋葵, 그리고 주로 물가 주변 습한 곳에 분포하는 부용芙蓉 등 셋으로 구분된다. 일본에선 이들 모두를 함께 부용으로 칭하니 넓은 의미로는 접시꽃에 이들 모두가 포함된다.
한자문화권에서 독립된 소재로 접시꽃의 출현은 당唐 8세기로 사료된다. 송宋 제8대 휘종(徽宗, 1082-1135) 황제 회화소장목록인 《선화화보宣和畫譜》엔 신라에서 보내온 공작을 그린 변란(邊鸞, 8-9세기)의 <추규>, 조광윤(刁光胤, 10세기)의 <목부용>, 주황周滉의 <부용>, 오대五代 매행사賣行社의 <촉규>, 송宋 하존사何尊師의 <금규錦葵> 등 그림 제목이 실려있다.
조선 후기 미술 교과서 역할로 화단에 큰 영향을 준 《개자원화전芥子園畫傳》에는 세 가지 꽃과 잎의 세부를 그리는 방식뿐 아니라 실제 작품인 변란의 추규, 주황의 나비가 깃든 부용, 매행사의 베짱이와 촉규, 하존사의 촉규 등 4점이 옮겨 그려져 이들이 어떻게 다른가를 확연히 보여준다. 한편 중국에서 부용은 연꽃과 양귀비꽃을 칭하기도 하니, 이와 구별해 촉규는 목부용, 양귀비는 아부용阿芙蓉이라 한다.

(왼쪽부터) 도4 작가 미상, <추저수금秋渚水禽> 부분, 19세기, 비단에 채색, 177.3×107.3㎝, 타이베이고궁박물원 소장
도5-1 전 여기(16세기 중엽), 화조도>, 비단에 채색 175×83.4㎝, 야마토분가간 소장
도5-2 전 이영윤(李英胤, 1561-1611), <백한과 꾀꼬리>, 비단에 채색, 152.7×5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접시꽃 그림 몇 유형 – 주연과 ë°°ê²½

접시꽃은 산수인물화의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귀엽고 천진한 어린이들의 놀이 장면을 화폭에 옮긴 송宋 소한신(蘇漢臣, 12세기)의 그림 배경에 바위 곁에 핀 접시꽃들이 등장한다. 옛 문인들의 청아한 삶의 장면은 차를 마시거나(품다品茶), 선비들의 만남(문회文會), 빗소리 듣기(청우聽雨), 흰 눈 감상[賞雪], 서화 임모[摹帖], 벼루 씻기(세연洗硯), 서화골동감상(완고玩古) 등이다. 이들은 그림 주제로 빈번하게 화폭에 옮겨졌다. 명明 두근(杜菫, 15세기)의 <완고도玩古圖>는 두 문인이 도자기와 고동기를 완상하는 장면이다. 정원 한 모퉁이 괴석 곁 촉규와 추규는 마침 꽃이 피어 한 쌍의 나비가 날아든다. 부채를 든 소년에겐 골동보다 나비에 시선이 끌린다(도2).
꽃만을 그린 그림 중 <사계청향四季淸香>이란 작품 제목이 말해주듯 계절별 피는 각종 꽃을 그린 두루마리나, 중국에선 잡화책雜畫冊으로 불리는 화첩에서도 접시꽃은 빠지지 않는다. 화조화나 화훼초충에서 그리고 서구의 정물화와 같은 꽃병에 담긴 꽃 그림 중에는 청사왕四王 및 6대 화가(청육가淸六家)에 드는 왕시민(王時敏, 1592-1680)이 1642년 그린 <단양묵화端陽墨花>가 보여주듯 줄기가 곧은 접시꽃은 중앙을 점한다(도3).

도6 <분채화조문대반粉彩花鳥文大盤>, 청淸 18세기, 지름 55.5㎝, 높이 8㎝, 화정박물관 소장

화조화와 화훼초충의 접시꽃 – 국제적 양상, 물가에 수금水禽과 부용

화조화 범주로는 잘 알려진 명明 여기(呂紀, ?-1497)의 <추로부용秋鷺芙蓉>과 <추저수금秋渚水禽>을 먼저 들게 된다(도4). 둥근 보름달 가을 부용과 갈대숲에 깃든 기러기 한 쌍이다. 일본에서 공개된 여기의 전칭작인 <화조도>는 화면 좌측을 비운 구성으로 물가에 백한白鷳과 소나무와 모래톱에 있는 것 등 조류 3쌍의 중앙에 만개한 분홍색 부용이 화사한 분위기를 더한다(도5-1). 이와 더불어 조선 중기 화단의 종친 이영윤(李英胤, 1561-1611)의 화조도 8첩 병풍 중 한 폭인 <백한과 꾀꼬리>는 조금 단순한 구성이나 친연성이 커 중국과의 교류를 짐작케 한다(도5-2).
《고씨화보顧氏畫譜》에도 부용과 함께 그려진 갈대에 깃든 새가 등장하며 명明 주지면(周之冕, 16세기)이 1585년 그린 <부용부압도鳧鴨圖>는 조선 말 장승업에서 살필 수 있는 일반화된 보편적인 양식이기도 하다. 18세기 <분채 화조문 대반粉彩花鳥文大盤> 같은 도자기 문양에도 등장한다(도6). 너른 접시에 화사한 부용에 한 쌍인 물총새가 등장한다.
접시꽃 대작들로 명초 절파浙派의 창시자로 강한 흑백대조에 분방한 동적인 필치가 특징인 대진(戴進, 1388경-1462)의 <규석협접도葵石蛺蝶圖>(도7)와 이선(李鱓, 1686-1757)의 <화조도>를 매우 사실적인 묘사로 들게 된다. 전자엔 나비, 후자는 석류나무에 깃든 새, 그리고 원추리와 화면 내 자색, 백색, 분홍 3색의 접시꽃들이 점한 비중이 크다(도8). 이선은 상업중심지인 강남 양주에서 파격적 구도, 활발하고 거침없는 필묵법으로 강한 개성을 이룩한 양주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이다.
왕무(王武, 1632-1690)는 몰골 위주인 운수평(惲壽平, 1633-1690)과 달리 구륵으로 사의화 화조에 능했으며
시대를 같이한 두 사람은 서로를 공경했다. 왕무의 <화조도>와 <화접도>는 화면 내 접시꽃이 점하는 비중이 크며, 괴석과 원추리와 백합 등이 공통 소재로 버드나무에 깃든 새가 나비인 것만 다를 뿐 화면 구성과 구도가 같다(도9).

(왼쪽부터) 도7 대진(戴進, 1388경-1462), <규석협적도葵石蛺蝶圖>, 종이에 채색 115.7×39.8㎝, 타이베이고궁박물원 소장
도8 이선(李鱓, 1686-1757), <화조조>, 종이에 채색, 171.5×92.8㎝, 상해인민미술출판사 소장
도9 왕무(王武, 1632-1690), <화접도>, 1686년, 비단에 채색, 122×34㎝, 요령성박물관 소장

일본의 접시꽃 그림 – <사계화조병풍> 등 대작

접시꽃은 일본에서도 즐겨 그려졌다. 사카이 호이츠(酒井抱一, 1761-1828)가 1815년 그린 <화병도花甁圖>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화병에 꽂은 꽃 중 곧고 키 큰 접시꽃이 중심을 점한다. 다양한 조류와 화사한 꽃들을 그린 화조화나 일련의 꽃 그림 중 여러 꽃을 함께 등장시킨 대작 다수가 전한다. 건축 구조상 내부 칸막이 용도인 후스마(오襖)와 병풍 등 화사한 장벽화障壁畫에서 명품을 만날 수 있다.
셋슈 토요(雪中等楊, 1420-1506)의 후계자인 셋손 슈케이(雪村周繼, 1504경-1589 이후)를 꼽게 된다. 그는 일본 무로마치 시대 무인가문의 후손인 선승화가로 수묵화로 최초의 자화상도 남겼다. 산수 외 인물에 능했으며 화조화에서 접시꽃을 즐겨 그려 도치기현립박물관 내 <화조도> 6첩 병풍을 비롯해 전칭작 중에 <부용도>가 전한다.
<홍백매병풍>으로 유명한 오가타 코린(尾形光琳, 1658-1716)의 <부용도> 6첩 병풍은 타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화풍이다(도10). 전술한 사카이가 1816년 그린 <사계화조병풍> 6첩 한 쌍에 백로 1쌍과 수국, 희고 남색인 붓꽃 등과 함께 희고 붉은 두 접시꽃이 등장한다(도11). 1854년 스츠키 기츄((鈴木其一, 1796-1858)도 같은 양상이다. 같은 제목의 2첩 1쌍에도 자색과 분홍, 흰색 등 3종이 등장한다. 하나같이 금지착색金地着色으로 화려한 장식적인 그림들이다.

도10 오가타 코린(尾形光琳, 1658-1716), <부용도> 6첩 부분, 종이에 채색, 120.5×378.5㎝, 이데미쯔미술관 소장



(왼쪽) 도11 사카이(酒井抱一, 1761-1828), <사계화조도> 6첩 부분, 1816년, 종이에 채색, 162×342㎝, 요메이분고 소장
(오른쪽) 도12 조속(趙涑, 1595-1668), <제비와 부용>, 비단에 수묵, 39×26.7㎝, 동산방 소장

조선시대 접시꽃 그림 – 5ë°± 년 이상 지속된 소재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과 이영윤 외, 조속(趙涑, 1595-1668)의 《사계영모도첩》 내 <제비와 부용>(도12), 화조화로 명성이 큰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가지와 홍당무 등 채소와 나비와 꽃을 그린 <화채호접花菜胡蝶>과(도13-1), 신명연(申命衍, 1808-1886), 남계우(南啓宇, 1811-1890)의 <화접도>(도13-2)에 부용을 살필 수 있다. 이들은 특별전에서 작품 제목과 도판 해설에 모란으로 잘못 명기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도13-1 심사정(沈師正, 1707-1769), <화채호접花菜胡蝶>, 종이에 채색, 26.7×19.1㎝,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도14 남계우, <꽃과 나비> 부분, 종이에 채색, 127.9×28.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13-2 남계우(南啓宇, 1811-1890), <화접도>, 비단에 수묵, 27×27㎝,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조선에서 나비 그림의 일인자로 ‘남 나비’란 별명을 얻은 남계우의 유작 중엔 나비 그림 대련에 촉규와 추규를 함께 그린 예도 있다(도14). 조선 초부터 말까지 접시꽃은 줄기차게 그려졌다.

이원복 | 미술사가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과 학예연구실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경기도박물관장 등을
역임하며 42년간 박물관 현장에 몸담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객원교수, (사)역사여성미래 공동대표이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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